-성적이 올라가는 것은 좋다. 그러나 꿈이 무르익는 것은 더 좋다. -수학 공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방 청소를 꾸준히 하는 것도 괜찮다.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는 아이가 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신뢰를 받는 아이가 되는 것은 더 좋다. -영어 단어를 많이 외우는 것은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많이 웃는 것이다.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충분히 자고 시험을 보는 것도 괜찮다.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행복한 직업을 갖는 것도 괜찮다. -자기주장을 잘 펼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좋다.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경쟁 속에서 상생을 이끌어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좋다. -학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를 잃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
(십대 공감에서 발췌)
중학생이 된 아들은 뾰족뾰족 가시를 세운지 3년째. 아니 가시도 아닌 것이 힘들게 한다. 아이들이 세우는 가시는 곧 아이들의 상처라 했다. 그리고 칼 융은 '부모가 느끼는 아이의 못난 점들은 대개 부모가 무의식 속에 꽁꽁 숨겨둔 열등한 성격일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오늘도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내 열등의식이나 무의식을 더듬더듬 찾아본다. 사춘기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소통하기 위해 열심히 성장소설이니 청소년 소설이니 하는 책을 읽지만 정작 아이와 나의 관계는 제자리도 아니고 점점 더 멀어지고 있어 좌절이다. 그럼에도 손을 놓을 수 없는 관계이므로 아프지만 내가 변하고자 오늘도 내 자신을 보듬어 안는다. 딸 아이의 말처럼, 부모가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는 집 아이들은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말을 믿어 본다. 그런 기특한 말을 하지만 실제는 지 동생을 한심해하고 미워한다는-.- 교사들이 부모들이 가르치는 역할의 티처(teacher)가 아닌 헬퍼(helper) 즉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가르치는 것에만 치중해 아이들에게 약이 되라고 하는 말이 오로지 잔소리로만 들렸던 것은 아닌지... 저자는 '들어가는 이야기'에서 우리 아이들의 놀이에서 사라진 깍두기에 대한 얘기를 한다. 어느 편이든 배척하지 않고 끼워주었던 존재. 그동안 잊고 있었다. 깍두기란 존재에 대해. 경쟁 구도에서 깍두는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리고 대신 왕따니 찌질이니 하는 존재가 들어와 아이들은 자신이 그러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이 얼마나 무섭고 삭막한가. 누군가 "너 깍두기 할래?"하고 말 걸어 준다면 좋을텐데.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제목에 끌릴 때가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넌 한 번이라도 뜨거웠냐고 물어오면 난 열정적인 삶을 산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기 때문에 입을 꼭 다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라는 그 말이 아프고 한심하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반기를 들지도 못한다. 케냐를 포함한 아프리카의 역사는 미국사나 중국사 등에 비해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케냐의 마우마우 핏빛 투쟁을 알게 되면 분명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베벌리 나이두는 다른 책에서 나이지리아의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쓴 적이 있다. 작가가 이와 같은 소재의 책을 쓰는데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치하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고 자랐던 까닭이다. 어떻게든 저항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작가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표지엔 흑인과 백인 소년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흑인 소년의 강한 눈빛에서 분노가 읽힌다. 케냐의 마우마우 투쟁을 배경으로 한 이 책을 통해 불평등, 우정, 자유를 향한 뜨거움 등을 생각하게 한다. 수많은 역사를 되돌아보면 힘이나 정치적인 이유에 의하여 가려져있거나 잊혀진 수많은 역사들이 속속 면 위로 드러남을 마주하게 된다.이제껏 알지 못했던 것들, 지금도 여러 이유로 인해 은폐되거나 왜곡되는 역사가 얼마나 많을까 가슴이 시려온다. 진실 앞에 당당하지 못한 우리도 폭력의 가해자의 자리에 함께 심판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방 토토인 흑인 소년 무고와 백인 농장주의 아들 매슈가 번갈아 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둘은 상하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쌓아간다. 하지만 당시 1950년대의 상황은 키쿠유족이 백인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결성된 반백인 테러집단인 마우마우의 습격에 불안에 떨던 백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이 팽배하던 때였다. 사건은 매슈와 그의 친구 랜스에 의해 농장에 불이 나자 브와나는 무고와 바바에게 총구를 겨누며 이들을 의심하게 된다. 매슈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불을 냈다고 고백하지만 마우마우 색출에 혈안이 된 경관은 무고의 형이 관련되었다며 아버지를 강제수용소로 잡아 들인다. 이로써 무고와 매슈의 갈등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상처만 남는다. '그들도 사람이고, 우리도 사람이다'라는 말이 처음부터 통 할리없다는 것을 책을 읽는 독자는 알 것이다. 어떻게 백인과 흑인이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있겠냔 말이다. '지타우 형이 옳았어! 우리가 고통 받아도 와준구(다수의 백인을 지칭하는 스와힐리어)는 신경쓰지 않아. 그들에게 우리는 벌레야.' 후기를 보면 1960년 1월 비상사태가 해제되기까지 이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케냐 공화국이 탄생하고 초대 대통령이 선출된 것등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 있다. 마우마우가 40년간 공식 석상에서 언급할 수 없는 단체로 남아있었다는 사실 등이 매우 흥미로운 가운데 과거의 유령들을 부활시킬 수 있기까지의 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럼에도 요시야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 불이 네 심장을 집어삼키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알겠니?" 온몸으로 뜨거움에 타오르는 불길을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케냐타 대통령 또한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과거의 증오를 잊어야만 합니다. 복수가 아니라 다 함께 힘을 합쳐 화합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라고. 이성적으로야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 그게 과연 가능할까....
아이가 넘어지면 얼른 달려가 일으켜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일겝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툭툭 털고 일어나길 기다리는 일이 부모로서도 아이로서도 득이 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다릴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자 제목의 기다리는 엄마에 부합하는 일이겠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생각하는 아이, 즉 자기주도형이 되어 스스로 생각발전소를 가동시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 스스로 사고하는 생각하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말은 쉬워도 내 아이에게 적용하는 일은 늘 어렵고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한두번 하다가 그만두는 일이 부지기수며 나와 내 아이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 또한 많지요. 아무리 좋은 최고의 교육방법이라도 해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도 않고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책의 광고에 현혹되지 말아야지, 그래봤자 별거있겠어? 다 아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인걸~ 하고 외면하였을 책들이 다시금 눈을 잡아끄는 것은 아이가 사.춘.기라는 성장통 앞에서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주도형 인재로 이끄는 원동력'이나 '현명한 자녀교육을 위한 부모 교과서', '평범한 아이를 인재로 키우는 보통엄마의 놀라운 지혜'라는 문구 자체에는 크게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아이는 똑똑하거나 소위 말하는 영재를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부모와 소통할 수 있는 친밀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고 단지 성적만 최고면 모든 것을 눈감아 줄 만큼 제가 아량이 넓지도 않거니와 그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자 역시 엄마가 해결사가 되어 주기보다는 옆에서 지켜봐주거나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했던 자신의 경험을 풀어냈습니다. 학원으로 돌리기 보다는 거실 가득 책을 비치해둔다거나 교실에서나 사용됨직한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걸어 두는 식의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이야 '거실을 서재로'라는 캠페인으로 많은 가정이 텔레비전을 퇴출시키고 그 자리를 책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만 실천을 못하고 있는 저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지요. 그중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거실에 두고 상상의 놀이터를 만들어 주었던 저자의 경험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무지 크게 남았더랬습니다. 또 금동대향로를 태몽과 연결 시킨 것은 정말 번득이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이렇듯 시간관리나 용돈관리 등 자신이 아이를 키우면서 좋은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기 쉬운 사례중심이라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고자 하는 부모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역시 초짜가 아닌 부모에겐 특별할 것 없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코칭스태프는 바로 부모라는 말에 공감하는 바이지만 자녀를 키우는 일에는 결코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후회늘 되겠지만 그리고 지름길이 아니라 둘러 가는 일이야 있겠지만 그것을 경험 삼아 다른 방법을 찾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보면 부모건 아이건 성장은 늘 동반되는 것 같습니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라는 것을 아이도 어른도 함께 배워갈 것입니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몰아치는 플롯이 작가의 이전 작품들보다 극대화된 상상력과 치밀함이 돋보였다. SF로 분류되는 판타지물들은 과학이 정복하지 못할 영역은 과연 있기는 할까 싶지만 궁극적으로는 보편적인 인간성 회복이라 할 사랑이나 용기와 같은 인간의 내면에 깊숙히 존재하는 감정은 과학이 건드리지 못하는 신성함의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거슬러 이동하는 굉장히 흥미로울 소재로 책을 읽는 내내 숨숨막히게 했던 타임 가디언. 나 아닌 타인을 완벽히 이해 한다는 것은 이렇게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하는 좌절 아닌 좌절도 느끼게 했다. 더구나 혈연이라 할 가족 내에서 조차 이해의 과정이 너무나 험난했으니까. 아라가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힘들지 않았던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느 때보다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은 현재 나와 아이의 관계의 틈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아무런 대책없이 그냥 기다려 주는 것인데 부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막막하다. 더구나 책에서처럼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것이 불가능 하거니와 이제는 아이의 사춘기가 아니라 내 믿음의 두께가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한계에 다다랐다고나 할까... 타임 슬립이란 장치와 필연과 우연의 법칙 사이에서 펼쳐지는 모험은 꽤나 복잡하다. 완전 할리우드급 영화인데 내 머릿속은 국내 상영관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따라가기가 조금은 버거웠다. 주인공 아라와 함께 한 조가 된 아이들은 타임오버된 어떤 물건을 찾아오라는 임무를 맡은 아라와 한 조가 된 아이들이 사실은 더 먼 미래에서 왔다는 반전 등은 역시 작가이 이전 작품에서처럼 시.공간을 넓게 사용하고 있었다. 의외의 소재와 재미와 독특함,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스토리를 끌어가는 힘이 대단하다. 판타지물이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인데 백은영 작가의 작품을 한 번 접하면 장르에 대한 편견이 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기대되는 작가다.^^ 결국 내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다소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그거였다...내 속에도 괴물과 천사가 자리하고 있고 내 아이에게도 그 두얼굴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쪽이 더 큰 영역을 차지하게 하느냐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용기에 달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제대로 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정하는 용기를 가진다면 나도 내 아이와 벌어진 틈을 좁혀 나갈 수 있겠지. 그리고 모든 말과 행동을 이해 할 수 있겠지. 또하나 과학의 발전에 따른 경고를 무시 하거나 지나치지 말 것! 가령 인간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안 된 GMO문제나(최소한 한 세대를 거쳐야 비로소 문제가 될 것이므로) 종묘종자, 캡슐과 같은 보존 장치를 통한 생명연장이나 유전자를 통한 번식 등은 생명윤리와도 직결되지만 환경이나 식량 등 그 범위가 다양하고 과연 과학의 발전이 만능도 아니고 가속화하는 것 만큼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야기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발등을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체르노빌이나 일본 원전 사고는 어쩌면 예고된 재앙일지도 모른다. 에너지 부족을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려는 것이었으니까. 지구상에 존재하지 세슘과 같은 방사능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은 결론적으로 정치적인 것과 더불어 인간의 이기심과 자만 때문이었으리라. 이 책이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묻혔을지도 모르는데 다시금 주목하는데는 일본 원전 사고가 사람들을 방사능 공포로 떨게 했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꾸준히 원전을 반대 해 왔어도 우리는 편리에 의해 그것을 무시해 왔다. 아니면 정치와 언론 플레이에 놀아나 대다수 국민들의 귀와 눈을 막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전에 읽은 대다수의 책들은 원전의 유해성보다는 청정에너지이며 에너지 고갈에 대비한 최선의 방법이 바로 원전이라고 떠들어 대기 일쑤였다. 체르노빌 원전의 폭파가 있고 (구)소련은 폭발한 원자로 사태 수습이 원활히 잘 진행되고 있다거나 키예프에 죽음의 재인 방사능 낙진의 양이 엄청났음에도 '풍향이 바뀌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뒤늦게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는 식이었으니까. 이런 거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 정부는 저렇게 하지 않을거라고 과연 장담 할 수 있을까. 가까운 예로 일본 역시 그러했지 않은가. 소설 속 안드레이를 비롯한 100여명이 폭발한 원자로 뒷처리 결사대로 차출되어 가는 설정은 가슴이 뜨거웠다. 후쿠시마 원전에 최정예 특수부대가 투입된 뉴스가 떠올라 실제 사건과 겹쳐져 더 그랬다. 폭발한 원자로에서 새어나온 방사능 가스에 오염된 이온화 공기 입자가 인간이나 동물, 기타 자연에 피해를 어떻게 주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끔찍함이 너무나 잘 전달된다. 다만 이반과 이네사가 느꼈을 공포가 덜 표현되었고 어린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냉철하고 어른스러웠다. 그렇지만 히로세 다카시가 의도했던 원전에 대한 경고 확실히 될 만한 반핵평화소설로 추천할 만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사망이나 피해는 알려진 바 보다 훨씬 크고 희생자는 지금도 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이반과 이네사처럼 사고의 중심에 있었던 아이들이 어디로 데려갔는지 베일에 싸여 있고 이 아이들의 행방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막히다.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그러나 앞으로도 제2, 제3의 원전 사고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원전은 안전하다고 말한다. 과연 안전하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일본에서 있었던 사고로 대지와 바다에 뿌리를 내릴 '죽음의 재'는 전 세계를 떠다니며 천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