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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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해
연애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좋아하고 기다린 박민규 작가라도 연애소설은 영 아니다.


연애소설의 어쩔 수 없는 점일까나?
뭔가 너무나 작위적인 결말. 아쉬운 결말.
마치 티비 드라마나 만화의 끝맺음 같은, 기대보다는 조금 유치한 결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당당히 별 다섯개를 주고 싶다.



이 소설이 내가 좋아한 그의 소설에 비해
조금은 덜 치밀하고 
조금은 덜 야생적이라도 나는 이 소설이 좋다.



나는 원래 그의 겉잡을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그런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도입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얌전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게다가 왜 이리 ...이 많은거지? 로맨스 소설이라서? 인터넷 연재작이라서? 아니면 원래 이 작가의 문체에 ...이 많았던가?



혼자 "역시 삼미슈퍼스타가 이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 히트작이었나" 궁시렁거리면서도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야기가 겉잡을 수 없이 이리뛰고 저리뛰더라.
그 말도 안되는 문체, 말도 안되는 서술이 너무 좋다.
너무 신났다.



이 책에서 ’헛소리(정말 사랑하는 헛소리)’를 일삼는 건 요한이다.
요한이 없었다면 이 소설이 이렇게 매력적이었을까.
하지만 요한이 모든 걸 지탱하는 느낌이 조금은 든다는게 아쉬운 점이랄까.



이건 로맨스 소설인데 
요한은 이 세상을 비꼬고 나를 위로했다.


이 책의 그녀처럼 심각한 외모 컴플렉스를 가진 것은 아닌데도
이상하게 자신이 없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안도하고 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좀 더 세상에 찌든 마음으로 책을 읽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다.
박민규의 책을 읽으면 꼭 부작용이 있다.
그가 세상을 조소하는데 너무 쉽게 휩쓸려 버린다.
물론 내가 너무 물렁해서 그렇다. 물렁하고, 책으로 읽은 여러가지 이야기에 푹 잠겨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반복한다.


  뭐하는 짓일까? 말하자면 늘 그런 기분이었다. 따라 뛰는 느낌... 끝없이 따라, 뛰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래서 점점 멍한 표정으로 군만두를 바라보게 되었다.
 
페이지 : 325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포스트 잇으로 표시해 놓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내가 뭐하는 건가, 나도 그냥 따라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또 며칠을 미약한 우울 속에서 보내 버렸다.


내가 뭐가 되겠다고 이렇게 다른 사람의 뒤꽁무늬를 보며 따라 뛰는가.
세상은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냉소적인 요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바이블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살아야지. 
사랑하는 사람과 영영 못 볼 상황이 되어도, 죽다 살아나도,
애를 낳고 일을 하고 가끔은 웃고, 살다보니 평균은 되고 그렇게 사는게 인생인가 보다.



따라 뛰고, 휩쓸려 뛰고, 인파에 밀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움직이지만
그래도 나는 빛을 내고 있다.


이 소설의 말 처럼
사랑받는 인간이란 필라멘트에 불이 켜진 전구와 같다면
내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받는 사랑은 이미 나를 밝히고 있으리라.


자신감 없는 나는 따라 뛰면서 사람들의 뒤통수를 부러워하며
나보다 한 발짝 앞선 사람에게 내 불을 밝혀주고 있었나 봐.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은 여전히 이상하고 또 이해할 수 없을텐데
그래도 빛을 발하면서 살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따라 뛰더라도 (딴 방향으로 뛸 용기도 없고 수도 없다)
불 밝히고 뛰자. 누군가를 오해하며 사랑해주고 또 사랑받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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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 캐논박스 1차행사
월터 랭 감독, 율 브리너 외 출연 / 영상프라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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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왕과 나,
당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부른 'Shall we dance'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동명의 뮤지컬에서 이 영화의 왕 '율 브리너'가 34년간 왕 역을 했다고 한다.
영화도 뮤지컬 영화다.
조금은 과장되게 화려하고 깔끔한 영화속 배경, 등장인물들의 노래가 뮤지컬 영화임을 분명하게 한다.


내용은 이러하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들과 함께 시암(태국)으로 온 여주인공.
시암 왕의 후궁들과 왕자공주의 선생자격으로 온다. 
권위적이고 제멋대로 하지만 실은 장난스럽고 부드러운 면이 있는 왕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사랑하게 된다.
그렇지만 왕의 후궁 중 한명이 애인과 도망갔다가 잡혀서 비극적 결말을 맺는 것을 보고 시암을 떠난다.



왕과 영국출신 교사의 사랑얘기인데
둘의 감정은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로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고, 연인같은 스킨쉽도 없다.
그런 알듯말듯한 마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쉘위댄스를 부르며 왕과 춤을 추는 장면이다.
보는 나도 긴장감에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최고의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영국대사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장면이다.
태국의 아름다움이 가장 멋지게 드러나는 장면.
정말 감동스럽게 보았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좋게만 볼 수 없었다.

내가 삐딱하기 때문일까, 영화는 너무도 서방국가중심적이었다.



태국의 왕궁을 화려하게 꾸미고 부유하고 강건한 태국을 묘사하긴 했지만
그 나라의 왕은 서양의 과학적사고를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태국인데 다들 영어를 쓰는거지?
영화 제작국가 국민들이 보는데 편하라고 그런것도 있지만서도
왠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고 미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영특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또 왕은 고집불통이고,
그가 그의 나라식으로 도움을 주려고 할때 (노예해방운동을 벌이는 링컨을 위해 코끼리를 보내주려고 한다. 코끼리를 보내야 전쟁에 이긴다며) 그 모습이 희화화된다.

태국인들에게도 그들만의 생활방식이 있고
그 나라에서는 그게 가장 좋은 것일텐데도
모든 사람들이 영국 가정교사가 하는 행동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영화막바지에 영국에서 대사가 온다.
시암왕이 야만인이어서 섭정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보러 오는 것이다.
그 때 왕은 후궁들에게 영국식 드레스를 입히고 영국식식사를 준비한다. 그게 과연 제대로 맞아주는 것일까? 

그리고 영국대사가 시암 왕실이 문화적으로 우수한가 아닌가를 시찰하러 온다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우수하다는 것의 잣대는 서양이고, 서양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동양을 터놓고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또 문화적으로 우수하더라도 지리경제적 이점이 있다면 지배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영국대사는 시암에서 문화적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며 돌아간다.
제국주의논리를 교묘하게 옹호한다. 정말 문화적으로 우수하다면 지배하지 않았을 것 처럼, 외침을 받은 나라들이 다 열등하였기에 지배당했다고 볼 수 밖에 없도록 그려놓았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 제작당시, 근대화론으로 무장하여 동양국가를 깔보던 서방의 시각이 너무나 강해서
편하게 볼 수 없었다.


물론 제작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그런 시각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음을 감안해야하지만
현대의 감상자에겐 불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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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오씨 안녕 베씨
위르겐 뵘 외 / 푸른나무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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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렸을 적엔 러시아와 그 옆 몇몇 국가들은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나는 소련이 '소비에트 연합'의 줄임말이었다는 건 전혀 몰랐으며
그냥 소련은 소련인 줄 알았다.



어린 나는 잘 이해 못했지만, 
어느 날 부터 아빠가 소련을 러시아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소련은 없다고, 러시아라고 불러야 한다고.


어쨌건간 소련이 러시아와 몇몇 국가가 되었다.


그 후 한참이 흘러
우리나라 처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나뉘어 살던 독일이 통일이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서독이 동독을 흡수했다.


어릴적엔 그저 마냥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기에
우리도 그렇게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우리도 돈 많이 벌어 흡수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이후 독일이 어떻게 살아갈까, 
대체 어떠한 자잘한 문제들이 생길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커 가면서 다른 체제에서 살던 사람들이 더불어 살게 되면 
많은 부분에서 부딛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경제적으로 잘나가던 독일(서독)이 통일 후 쩔쩔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때는 통일이 안 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왠지 통일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잘은 몰라도, 가족을 저 쪽에 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남과 북에 혈연적 관계가 옅어지더라도 왠지 통일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더 크면서,
어마어마하게 들 통일비용은 투자의 개념이고
미래를 바라본다면 통일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비전이 있다는 걸 알았지.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독일이 분단되어 있던 시간보다 배는 더 오래 갈라져 있다.

생각의 차이는 더 클 수 밖에 없다.



독일의 학생들이 통일 후 쓴 이 글들을 읽으니
내가 예상할 수 있었던 문제점들, 또 미처 예상할 수 없었던 문제들이 명확하게 눈에 띄였다.
동독(공산주의)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직업을 잃고(그전에는 실업자라는 개념이 없었지) 능력을 저평가 받고 있었고 서독사람들은 동독 사람들 때문에 세금을 많이 낸다고 투덜댔다.


그리고 나는 동독에서 외국인을 폭행하는 극우주의가 들끓었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학생들의 글을 읽고 알게 되었다. 
서독 사람들은 동독사람을 탓하고, 동독사람들은 자신보다 약자인 외국인들을 탓했다.


어떤 학생은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하며 욕을 퍼부었지만
어떤 학생들은 상황을 이해하고 희생하려고 하였고
심지어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통일 직후 독일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한 듯 보였지만
아이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미래는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아이들이었던 사람들이
지금 독일을 이끄는 청장년이 되어있을것이다.
잘 이끌어 나가고 있겠지.



청소년이 바라본 통일독일의 모습을 통해
왠지 우리가 어떻게 통일에 접근해야할지 알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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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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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들 입문용으로 추천한 책 '정치와 진리'는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다.
내가 어렴풋이 정치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많은 생각들이 
맞거나 틀렸다는 것, 본질적으로는 같더라도 가는 길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정치란 다양성을 기반으로, 서로 대화를 통하여 각자의 다름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진리와는 다르며 지금 정치에서 최고로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경제'와도 무관하다.
또한 (조금 충격적이게도) 도덕과도 무관하다.

정치는 공적인 것, 사회적인 것(경제)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살짜쿵 태클, 
이 책에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고, 그 당시 사회적이란 말로 잘못 번역이 되었고 실은 "정치적 동물이다"가 맞다고 한다. 
물론, 이 책이 '사회적인 것'을 아주 좁은 의미로 보기 때문에 어떤면으로는 이 책의 서술이 맞다. 사회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 먹고사는 문제에 치중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본질이 그것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것에는 광의의 의미도 있다. 
정치경제를 모두 아우르는 것을 현대에서 '사회'라고 하거든.
사회학과로서 괜히 울컥했다.



진리란 설득의 영역이 아니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법칙이다. 경제 또한 설득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진리의 영역으로 보는 오류는 아주 옛날부터 있어왔다.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철인이 해야한다고 믿었던 플라톤부터, 정치를 단 하나의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로 정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렇지만 정치는 다양성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활동이다. 효율성으로 다가가면 안 된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조금 쓸데없고 짐스럽다.

정치가들이 비싼 세금 받아먹으며 한 안건을 가지고 몇날 며칠 싸우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
그렇지만 비효율적이라고 정치를 없애고 누군가가 효율적인 하나의 관례로 처리할 때, 우리들의 본질적 자유는 어디로 가는가. 짐스럽고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참아줘야 한다. 




정치는 다양성을 극대화시키는 행동이다. 그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의 의견이 모여진다. 우리는 그 의견이 '진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설득과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타당한 의견'이다. 

이 타당한 의견은 다수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의견이 타당하려면 자기 자신의 이익에서 벗어나 '비판적 거리'를 두고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눈 앞의, 나만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타당한 의견이 될 수 없다.
의견을 타당하게 만드는 데는 '원리'가 작용한다. 동정이나 감정이 우리를 하나로 모으기 쉽지만 동정은 어떤 행위를 구체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원리'에 따른 결속이 행위를 이끌어낸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많은 혼란에 빠졌다가 다시 나왔다가 다시 빠졌다가 했다.
내가 내심 존경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언제나 주장했던 것이 '도덕성, 원칙'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가 옳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 정치에선 옳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니.


책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인기에는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정치가의 말이 얼마나 황망한 것인지. 정치란 것이 합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기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기, 즉 합의를 얻지 못한 정치가가 어떻게 정치가일까.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책은, 
그 인기라는 것이 꼭 현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인기가 아니라, 훗날 얻어질 인기를 의식하고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만약 어떤 정치가가 현재에는 반대가 심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도움이 될 정책을 무리해서 펼치고자 한다면 그는 미래의 인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 도덕성에 대한 해명도 나온다. 정치는 도덕의 법칙과 무관하다. 도덕 또한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성이 부족한 정치가는 사람들의 합의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도덕성과 정치의 관계는 생각보다 가깝다. 


그리고 원칙 중시. 상황에 맞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보다 원칙을 따른 그 사람. 나도 언제나 원칙을 중시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원칙을 하나의 진리처럼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적어도 정치에서는 말야). 내가 말하는 원칙을 이 책에 나온 '원리'와 거의 동의어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어떤 일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감정과 지역성을 넘어 원리 원칙으로 평가해야 한다. 원리, 원칙은 정치에서도 삶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의견을 '원리가 이런 거니까 대들지마!'하는 태도로 밀어부칠 때 문제가 된다.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다.


정치는 설득과 동의를 통해 얻어진 합의와 연대가 힘이기 때문에 
권력은 다수의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정치는 수단일 뿐 변치않는 잣대가 아니다. 정치를 통해 만들어진 법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법을 어기는 사람이 많다면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법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지 못하므로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은 법과 정치를 절대적이라 생각하면서 비판없이 따르지만
그 법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고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법을 준수하고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이유는 그 법이 자신들의 동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며,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법을 동의했고 국가 명령을 그 동의의 연장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페이지 : 119  


하지만 가끔, 바보같은 정치인들이 있다. 
우리가 합의와 동의를 주어 뽑아 주었는데, 즉 권력은 우리가 빌려줬는데 
원래부터 지껀 줄 알고 날뛰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일임한 권력이라면 지들이 맘껏 써도 되는 줄 아는 정치가가 있다.
그래서 권력을 준 국민들을 강제력으로 주무르고 억압시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정치적 현상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명문화된 법이 더 이상 공동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법과 시민의 의지사이에는 긴장감이 형성된다. 이 긴장감의 순간은 법의 정당성을 검증하게 하는 긴장감이고, 진정한 권력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긴장감이다. 법이 더 이상 시민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을 때 법은 시민에게 폭력적 행위를 가해서만 자신의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설득적 힘을 잃어버린 법이 단순한 법조문에 의거해 시민의 행위를 제약하려 할 때, 시민의 입장에서 그 법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근본적으로 제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혁명의 순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정치적 권력과 폭력의 배타적 관계를 볼 수 있다. 양자의 배타적 관계란, 권력이 극대화된 경우 폭력은 최소화되며, 반대로 권력이 최소화된 경우 폭력이 최대화되는 현상이다. 국가가 어떤 명령을 내릴 때 시민이 자발적으로 따른다면 폭력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국가의 명령을 시민이 따르지 않는다면 국가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
 
페이지 : 120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그렇게 억압하는 당신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현 정부가 국민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은 
최소화된 권력으로(국민들이 더 이상 동의하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현 정부가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려 한다면, 그리고 국민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일면적 잣대를 저리로 치우고 유연한 자세를 가진다면 
국민들은 동의와 지지를 줄 것이다.


그런데 왜 높은 사람들은 이 쉬운 걸 모르는 거야=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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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버핏과 함께한 점심식사 - 오마하의 현인에게 배우는 가치 있는 성공을 위한 6가지 지혜
고수유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워렌버핏에 대해 잘 모른다. 알고 있는 정보는 정말로 단편적인 것 - 세계 최고의 주식부자라는 것 정도. 


그렇지만 들리는 소문으로 그가 단순히 부자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정말로 거부이면서도 존경할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 때문에 존경받는지는 몰랐지만.



이 책은 나 같이 워렌버핏을 잘 모르는 사람이
워렌버핏에 대해 쉽고 편하게 다가가기에는 참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로 워렌버핏과의 점심식사를 기반으로 쓰여졌다고 기대한다면
정말 비추다.
나도 사실은 실제로 워렌버핏과 만난 일을 기반으로 쓴 책인 줄 알고 기대했거든.
그런데 가상스토리다. 



좀 차갑게 말하자면 여러 워렌버핏 책 짜깁기다.
가상으로 만든 이야기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저자가 알고 있는 것은 책에서 나온 단편적인 워렌버핏이기에 
이 책에서의 워렌버핏의 모습도 단순하다. 


또 이 책에서 워렌버핏을 만나는 (물론 이야기 자체가 허구지만) '박찬우팀장'이라는 사람에게 온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될까?


픽션이나 가상이야기라도 이 책이 매력적이려면
정말로 공감이 되게 스토리가 짜여져야 할텐데
책의 주인공 '박찬우'는 미국 명문대를 나와 좋은 광고회사에서 젊은 나이에 팀장이 된 사람이다. 인생 편하게 잘먹고 잘 살다가 겨우 승진 몇 번 안 된다고 좌절하네 어쩌네 하는 사람이다. 승진이 안 되는 이유는 자기만 잘나서 팀원들과 조화롭게 일하지 못해서.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짜증나는 인물이다 -ㅁ-


물론 워렌버핏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려면 영어가 능통한 사람이 주인공인게 좋겠지만
그 때문에 미국 명문대 출신으로 인물을 설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돈 많은 집에 태어나서 어렵지 않게 미국 유학한, 세상 어려운거 별로 모르는 인간이
워렌버핏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더 큰 박탈감을 가져다 준다.
출발부터 앞서있던 놈이 워렌버핏까지 만나?
세상은 진정 빈익빈 부익부로 돌아가는 거냐?



물론 이건 나의 열폭이지만
세상 왠만한 사람이 박찬우팀장과 같은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책은 결국 저자가 설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책 짜깁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는 급 '시크릿'이 등장하기 까지한다. 어이상실~)



이런 책이지만 내가 별을 두개씩이나 준 이유는
워렌버핏은 워렌버핏이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워렌버핏의 삶의 원칙들은
정말로 존경할 만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요런 책인데도 
나는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특히 주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ㅋㅋ


이 책 자체보다는 워렌버핏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 워렌버핏을 소개해주는 정도
가 이 책의 전부인 듯 하다.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이야기인지 워렌버핏의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희망적인 문구를 적어보려고 한다.

  거듭 말하겠네. 돈이나 지위를 목표로 일하지 말게. 그런 건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전념했을 때 얻어지는 결과야. 실제로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네. 일반인 1,500명이 삶을 20년 동안 추적해서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연구한 거라네. 그중 83퍼센트는 원하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은 돈 버는 직업을 선택했네. 나머지 17퍼센트는 돈은 나중이고, 자신이 최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지. 20년 후 1,500명 중에 101명이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하네. 놀라지 말게. 이들 백만장자 가운데서 단 한 명을 제외한 100명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라네.
 
페이지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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