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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칼 - 여성의 관점으로 본 인류의 역사, 인류의 미래
리안 아이슬러 지음, 김경식 옮김 / 비채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오레스테이아’는 가장 자주 공연되는 그리스 비극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아폴로 신은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오레스테스를 변호한다. ‘어머니란 자기 아이라고 불리는 자의 부모가 아니다. 단지 새로 심어져 자라나는 씨앗의 보육자일 뿐이다.’ 오직 아버지만이 자녀들과 관계 있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여신 아테네는 ‘나를 낳은 어머니는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결혼을 제외하고 나는 항상 진심을 다해 남성과 내 아버지를 따른다’라고 덧붙인다. 그때 코러스-옛 질서를 대표하는 에우메니테스 혹은 분노의 신-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젊은 신들아, 너희 가 옛법을 짓밝고 내 손안에 있던 법을 찢어발기다니’라고 외치고 아테네 여신은 결정적인 표를 던진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안 죄를 모두 용서받는다.”
이 비극의 발단은 선단을 움지이기 위해 순풍을 얻기 위해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친 것에서 시작된다. 돌아온 아가멤논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단죄한다. “그녀는 아가멤논을 죽인 명분에 대해 물론 개인적인 슬픔과 증오도 있었지만 희생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이 있는 씨족의 우두머리로서 내린 결단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간단히 말해 그녀는 모계 사회에서 정한 규범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여왕으로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저자는 ‘오레스테이아’란 고전극에서 모계 문화가 부정당하고 부계 문화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시점을 읽어낸다. “클리타임네스라 사선이 정의로운 결단이었다느느데 수긍하게 한 다음 그녀의 딸이 잊혀지고 그녀의 유령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건이 완전히 잊혀지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때 여성은 이미 주장할 권리도 자질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클리다임네스트라 같은 막강한 존재가 딸이 살해당하는 도발적인 상황에서 복수할 권리가 없다면 과연 어떤 여성에게 그런 권리가 있겠는가?”
이 고전극에서 저자가 읽는 것은 “공동체 사회 혹은 가계가 여성을 중심으로 이어졌던 씨족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체제에서 남성이 재산과 여성을 사적으로 소유하게 된 변화”이다. “아테네 인들은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과거 분노의 여신 퓨리와 운명의 여신들이 굴복당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후 남성 지배 질서와 새로운 규범이 확립되었다.” 그 굴복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절대적인 폭력에 압도당한 결과였다. 패배한 신들은 “아크로폴리스 아래 동굴로 피신했다. 그때 아테네 여신은 그들에게 아테네에 머물라며 설득했다. 그 와중에도 아테네 여신은 변함없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친족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되풀이했다. 비굴해진 그들은 아테네 여신을 도와 ‘최고 권력자인 제우스와 아레스가 통치하는 이 도시를 지키는’ 일에 봉사하헸다고 약속한다.”
아버지가 딸을 죽여도 방관해야 하고 어머니와 자식은 가족이 아니라 말해도 인정해야 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이것이 이책의 질문이다.
“고고학자 김부타스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 남동 유럽에 존재했던 다양한 문화집단들의 집단적 동질성과 성취를 인정하면서 고대 유럽 문영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7000년전 남동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는 윈시 정착민이 아니었다. 기원전 7000년경에서 3500년경 사이에 초기 유럽인들은 복합적인 종교 기구와 정부 기구들을 만들었고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문자로 보이는 기호를 개발했다.”
당시 근동의 문명들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고대 유럽 문명은 근동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웠고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였으며 가부장제가 아닌 모계 사회로 남녀차별이 없었다.
“신석기 시대 예술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예술에서는 무장한 군대, 잔임함, 폭력에 기초한 권력을 이상화한 주제가 없다. 이 시대에는 ‘고매한 전사들’ 혹은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 없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사슬에 묶어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영웅 정복자나 노예제를 묘사한 증거도 없다. 또한 초창기와 가장 원시적인 남성 지배 사회의 정복자들이 만든 유물과 달리 유독 여신을 숭배한 신석기 사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사치스럽게 꾸민 ‘족장’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곳에서-사원과 집에서, 벽화에서, 항아리에 새겨진 장식 문양들에서, 입체 조각상에서, 진흙 입상에서 얕게 양각한 세공품에서- 자연에서 모방한 상징적인 배열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다시 여신 숭배와 연관되어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증명해주었다. 여신의 몸은 탄생과 기적과 윤회, 재생같이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신성한 성배로 표현된다. 신석기 예술에는 여신으로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상징하는 화합의 주제가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양분을 공급하며 심지어 죽은 뒤에도 아이들을 자신의 우주적 자궁으로 다시 데려간다고 믿는 신성한 어머니다.”
신석기 예술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정복하거나 약탈하고 노략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를 가꾸고 물질적, 영적 자원을 공급함으로써 만족스런 삶을 추구한다. 전체적으로 신석기 예술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힘의 주된 기능이 복종을 강요하고 처벌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축배를 들고 접대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선사시대는 마치 절반 이상이 찢어지거나 없어진 거대한 퍼즐같다. 완전하게 재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 조각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우리가 갖고 잇는 조각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을 막고 조각이 들어맞는 진정한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장벽은 인간관계의 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선사시대 문화에서 인간관계의 전형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이다. “더 크고 강한 어른인 어머니는 분명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ㄷ더 작고 약한 어린아이보다 우월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열등하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힘은 억압과 특권, 두려움이 아닌 책임고하 사랑으로 승화되어 사회를 안정시켰다.” 여신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조직돠는 매우 다른 사회조직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마찬가지로 파악되엇다. “싢롸적이고 고고학적 증거들은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 팽배했던 정신 중 가장 특기할만한 특징은 인간과 자연이 하라나는 일체감을 자각한 것이라는 시실을 알려준다. 이것이 신석기 시대와 크레타 인들이 여신을 숭배한 본질적인 이유였다. 고대사회에서는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 만큼 남성신들이 추구하는 인과응보의 관념보다 심리적 사회저긍로 안정감을 주엇다. 수천년동안 서구역사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성모 마리아가 상징하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어머니에게 매달려 끈질기게 숭배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햇다. 다른 역사적 수수께끼처럼 이 끈질긴 숭배 역시 선사 시대에 수천년동안 여신을 숭배환 오랜 전통의 문맥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신석기 문명은 크레타에서 절정에 이른다. 크레타 사회에는 “’삶의 모든 영역이 창조와 조화를 가져다주는 자연의 여신을 향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크레타는 역사 기록상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대등한 동반자로서 조화를 이루어 줄겁게 지낸 마지막 세상같다. 크레타 문명의 예술적 전통에 유유히 빛나는 것도 바로 조화의 정신이아. 플라톤은 크레타 문명이 ‘미적 가치와 우아함, 역동성’에서 또한 ‘삶의 유희와 자연과의 거리’에서 매우 독특했다고 강조한다. 어떤 학자들은 미노아 인들의 생활상을 설명하면서 ‘호모 루덴스의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잇다’고 지적한다. 다른 학자들은 크레타 문명을 ‘감수성’ ‘우아한 삶’ ‘아름다움과 자연의 사랑’같이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크레타 섬을 연구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랍다는 말로 감탄과 충격을 나타낸다. 그들은 ‘동화 같은 세상에 대한 동경’이나 ‘이 세상에서 우아한 삶을 가장 완벽하게 누린 곳’같은 표현으로 이 문명을 찬양했다.”
“크레타 사회는 다른 고대 고등 문명 세계와는 달리 부를 공평하게 나누었다. 플라톤은 이 점을 지적하며 ‘심지어 농부조차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같다. 지금가지 발견된 어떤 집에서도 아주 가난했다는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기본경제는 농업이 중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축 사육과 산업, 그리고 무엇보다 무역-거대한 상업 선단을 타고 전 지중해를 항해하며 무역을 장악했다-이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하면서 가치를 더했다. 사회조직은 처음에는 모계 씨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중앙집권화되엇다. 크레타에도 부유한 지배계층이 있었지만 그들이 거대무장세력을 소유하며 권력을 유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남자와 여자 모두 운동과 스포츠에 참가했고 유희로 즐겼다. 음악, 노래, 춤을 향유하면서 삶을 더욱 즐겼다. 행진, 잔치 등 공식 행사가 잦았고 극장이나 원형 경기장에서는 종교의식을 마치면 곡예가 공연되엇다. 또한 유흥과 종교가 뒤섞이곤 했는데 크레타인에게 종교의식은 즐거운 행사였다. 종교는 여가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크레타 문명에서는 삶이 창조와 조화의 근원인 자연의 여신에 대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독재를 싫어하며 법을 존중했다. 지배층조차 개인적인 야망을 품는 일은 드물엇던 같다. 어디서도 작자의 이름이 새겨진 예술품을 보지 못했고 지배자의 행적을 기리는 기록 한 줄 본적이 없다. 크레타 예술은 권력이 지배, 파괴, 억압 등과 동의어가 아닌 사회를 반영한다. 크레타 사회에서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휘두르거나 위협을 가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남성 지배자인 엘리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모성의 책임감과 동일시되는 점이 많다. 바로 이것이 공동 협력 사회를 특징짓는 권력의 정의다.” 그리고 이 시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력한 남성 지배자를 표현한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왕좌를 차지했던 사람이 여성이었으리라 가정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는 여성이 예술품과 공예품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중심 주제였으며 특히 공적인 영역에 주로 나타났다. 기원전 3500년경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회계층 구분이 엄격해지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추락했다. 미노아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되고 ㅅ하회계층이 존재했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성의 지위도 변함없엇다.”
다른 모계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가 높다는 것은 성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웠다는 말이다. “성을 폭력보다 더 죄악시하는 현대 종교적 교리의 지배적 패러다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스포츠와 춤에 대한 열정, 창조성,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개방된 성 문화가 삶에 깊숙이 스며 크레타인들이 자유와 평화와 조화를 지향햘 수 있었던 듯하다. 아놀드 하우저가 말했듯이 ‘미노아 문화는 그 정신이 동시대 다른 문화의 정식과 근본적으로 달랏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크레타 문명은 고대 유럽 문명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문명은 아리아인들에 의해 ‘잃어버린’ 문명이 되었다.
“약 7000년전 근동에서 고대 신석기 문화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압박이 거셌던 듯하다. 침략이나 자연재해 혹은 때때로 두 재앙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증거도 보이는데 엄청난 파괴와 대대적인 피난이 따랐을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오래된 도자기 그림 양식이 사라지는 등 신석기 문화는 서서히 붕괴하더니 마침내 후퇴와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혼란이 격심해지는 동안 꾸준히 발전하던 문명은 완전히 멈췄다. 이후 2000년이 훨씬 더 지나고 나서야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문명이 등장한다.”
김부타스는 그 단절의 이유를 쿠르칸족의 대이동이라 말한다. 인도-유럽어족의 조상인 이들의 “침략과 뒤따르는 문화적 충격 그리고 인구 이동은” 3차례 일어났다. “제1차 대이동은 기원전 43000년에서 4200년 사이, 2차대이동은 기원전 3400년부터 3200년에, 제3차 대이동은 기원전 3000년부터 2800년에. 그들은 강력한 남성 사체와 전사들의 인솔하에 전쟁의 남성신과 함께 이동했다. 그리고 인도의 아리안족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한 히타이트와 미타니족, 아나톨리아의 루위족, 동부 유럽의 쿠르칸 족, 그리스의 아케이아 족 그리고 나중에 동참한 도이스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정복지에 자신들의 이념과 생활방식을 강요했다.” 셈족도 그 대이동의 하나였다.
아리안과 셈족 “두 종족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사회적, 이념적 체제 구조다. 두 종족은 모두 지배 중심 체제에 기초한 사회였다. 남성 지배와 남성적 폭력, 그리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권위적 사회였다. 또한 그들은 처음 서구 문명에 기반을 놓았던 사회와는 달리 생산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가 아니라 훨씬 더 효과적인 파괴력을 바탕으로 물질적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이렇다할 기술도 문화도, 문명이라 부를 것도 없는 야만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야금술도 주변의 농경인들게 배웠다. 그 농경인들에게 구리 도끼는 나무를 자르는 도구였지만 이들에겐 사람의 목을 자르는 무기가 되고 힘의 상징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럽의 농부들에게 파괴기술은 사회적 특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쪽 사람에서 올라온 무리뿐 아니라 북쪽 메마른 땅에서 내려온 전쟁을 좋아한 무리에게 파괴력은 중요하고 유용한 권력이엇다. 철기가 인간의 역사에서 치명적인 역할을 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이제 철기는 일반적인 기술 발전의 도구가 아닌 죽이고 약탈하고 노예를 만드는 도구가 되엇다. 김부타스는 ‘가늘고 날카로운 청동 도끼, 준보석으로 만든 철퇴, 전투용 도끼, 부싯돌 화살촉 등과 함께 청동무기가 등장한 것은 우연히도 쿠르칸 족이 이동한 경로와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파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던 고대 유럽의 고고학적 풍경은 이제 몰라볼 정도로 변햇다. 김부타스는 ‘수천년동안 이어지던 전통이 단절되고 도시와 마을은 붕괴되고 훌륭한 그림이 새겨졌던 도가기는 사라지고 사원도 프레스코화도 조각도 가징도 문자도 모두 사라졌다.’고 지적햇다.
“야만적인 침략자긍릉 그들에게별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집, 사원, 뛰어난 공예품과 예술품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햇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노예로 사로잡혔고 운이 좋으면 달아났다. 이후 역사에서 인구 이동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살아있는 전쟁무기가 새로 도입되었는데 바로 무장한 기마병이다. 당시에 그들은 오늘날 탱크나 비행기보다 더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쿠르칸족이 파괴를 서슴지 않으며 이동한 흔적을 좇으면서 전사-족장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안에서 무덤 주인을 둘러싸고 있는 희생당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유해, 동물 뻐 르리고 무기들을 출토햇다.”
“전쟁이 잦아지면서” 사회의원리는 평등에서 지배로 바뀌었다. “남성이 공동체를 지배했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나아가 이전 시대에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던 여성 입상이 이후에는 더 출토되지 않았다. 과거의 이념은 바뀌었다.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으로 사회구조가 바뀌엇다. 이제부터 ‘잡종문화’가 김부타스가 부르는 현상이 등장한다. 이 문화는 남아있는 고대 유럽 문화를 복종시키고 쿠르칸 족의 유목 경제와 부계 혈통의 계층화된 사회에 빠르게 동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잡종문화는 이전 문화보다 기술적 문화적으로 훨씬 뒤떨어졌다. 이제 경제는 주고 가축 사육에 의존했고 고대 유럽의 기술이 잔류하고 있어 도가지는 놀랍도록 모양이 비슷했지만 질이 나빴다.”
쿠르칸 족의 말발굽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곳에서도 문화충격이 나타낫다. “점차 날카로운 칼로 지배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생명을 지키고 부양하는 능력을 대신했다. 무장한 정복자들은 초기 공통 협력 문화를 단절시켰고 겨우 파멸을 면한 사회들도 변화의 흐름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크레타 섬은 대륙과 바다로 떨어진 덕에 참화를 비켜갔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증언하듯 지진과 해일로 크레타는 멸망햇고 그 잔해에 아케이아인들이 들어선다. “크레타의 종말은 본토에서와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아케이아인이 지배했던 미케네 기간 동안 크레타 예술은 소극적이고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걱정하며 강조했다. 아케이아인에게 영향을 받기 전까지 크레타인들은 죽음과 장례 제의를 중요시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아케이아인 엘리트들은 달랐다. 아케이아인들은 문명화된 미노아 양식에서 많은 부분을 취하기도 햇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삶보다 죽음에 ㅇ릭숙했다.”
과거의 잔해에서 재조립된 미케네 마저 또다른 쿠르칸인인 도리아인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후 그리스 본토와 주변 섬들 그리고 크레타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문명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 시대를 그리스사에선 암흑시대라 부른다.
고대신화들은 기록되지 않은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에 대해선 ‘자아폭발’ 리뷰에서 다루었다)이 그 예이며 헤시오도스의 타락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 살았던 헤시오도스는 “한 때 황금종족이 있었다고 주장햇다. ‘좋은 것은 모두 그들이 차지햇다. 풍요로운 땅은 맣은 과실을 무한정 쏟아냈다. 평화롭고 평안한 가운데 그들은 땅을 가꾸었고 가축을 사육했다. 그 모습은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다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헤시오도스가 순수한 영혼들, 악을 물리치는 사람들이라 일컬었던 이 종족 이후에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은의 종족이 나타났고 다시 그들은 은의 종족과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든 창에서 튀어나온 무섭고 힘센 청동의 종족으로 대체되었다. 헤시오도스는 이 민족이-청동기시대의 아케이아 인이라 알려진- 전쟁을 들여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모두가 슬퍼하는 아레스의 죄스런 작업이 그들의 주 관심사였다’;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앞선 두 종족과 달리 평화를 추구하는 농경민이 아니엇다. ‘그들은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 마음은 단호하고 정복당하지 안는 돌처럼 냉혹했다.’ 헤시오도슨 ㄴ 아케이아인과 그들이 정목한 미케네 인들의 자손들을 독립된 네번째 종족으로 구분하면서 ‘이들은 먼저 있었던 종족보다 더 정의롭고 고상했다’고 덧붙ㅋ였다. 그들은 본래 타고났던 야만서을 어느 정도 벗고 고대 유럽인들이 누리던 더 문명화된 관습을 많이 채택했다. 이 무렵 다섯 번째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헤시오도스 시대에 이미 그리스를 ㄹ지배하고 있었다. 헤시오도스는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내가 다쇼ㅓㅅ 번째 종족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사람은 다른 도시를 강탈화곤 한다. 옳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이제 경건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다섯번째 철의 종족은 도리아인들이었다.
우리가 문명의 시작이라 알고 잇던 수메르 문명은 야만인들의 정복 이후에 태어났다. 인도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으며 이집트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고 그리스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 문명은 그들이 파괴한 이전 문명의 잔해를 모아 복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들 “문명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사회적 기술”은 “실제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법, 정부, 종교, 문자, 야금술, 건축기술, 도시, 예술, 문학, 제의, 상하수도, 광장, 신전과 같은 도시계획 등 모두 지배와 전쟁과 무관했던 문명에서 태어났다. 신화는 ‘문명의 선물’을 준 것이 남성신이 아닌 이전 문명의 신들인 여신이라 인식한다. 실제 농경, 직조기술, 도자기, 문자 등 물질적 기술의 대부분은 여성이 발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뿐 아니라 이집트나 유럽에서 발견된 증거들을 살펴보면 여성을 정의, 지혜, 지성과 연관 짓는 일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칼을 든 야만인들과 함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오레스테이아’가 공연되던 시절까지도 쿠르칸족에게 정복당한 선주민들의 후예들은 이전 사회가 어떠했다는 기억이 생생했다. 야만인들의 폭력이 낳았던 암흑시대가 끝나고 문명은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문명에서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지배와 그 지배의 수단인 폭력을 부정하는 평등주의와 평화주의였다.
“자손이 어머니를 따라 계보를 잇고 여성이 씨족의 우두머리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존경받는 제사장이었던 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들이 부계 혈통과 함께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아이스클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결코 이해할 수 없ㅇ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도 없고 정말로 신성모독적인 일은 우주를 지배화는 최고권력이 무장한 복수심에 가득찬 신들로 의인화되고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살인과 약탈, 강간을 저지르는데도 그 신들이 묵과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바뀌어야 했다. 신의 이름으로.
“지배 중심 체제가 옛 공동 협력 체제 위에 포개어져 두 체제가 함게 지속되는 것은 엣 체제가 다시 힘을 얻을 가능성이 있단 점에서 대단히 위험했다. 모계 씨족 사회의 우두머리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땅을 관리하는 옛 사회 경제 체제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새로운 엘리트 지배층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들에게서 의사결정권을 빼앗고 동시에 여 사제들에게서 영적 권위를 빼앗았다. 심지어 피정복민들은 익숙한 모계 전통을 빼앗기고 부계사회에 적응해야 햇다. 실제로 고대 유럽,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한줌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정복지에서 부를 파괴하거나 빼앗음으로써 지배력을 획득했다. 이제 군사력과 위협으로 경제적 부를 분배하는 통로를 조절할 사람을 정해야 했다. 지위를 정하는 것은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확실한 원칙이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 위에 나머지 절반인 육체적으로 더 강한 남성이 올라선 것에서부터 모든 인간관계가 이 유형을 따르기 시작했다.”
먼저 지배자가 된 야만인들은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고대인들은 미토스와 로고스로 세상을 이해했고 각각은 다른 진실을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미토스를 통해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수용하고 혐오해야 하는지 신이 정한 것은 무엇이며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운다. 또한 사람들은 의식과 제의를 통해 ‘신성한’ 이야기에 참여한다. 그 결과 그 이야기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은 ㅇㅇ인간정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신성한 불면의 진리로 인정받으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사회의 원칙을 평등에서 지배로 바꾸는 것은 천붕지열의 변화이다. 그런 변화를 정당화하려면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나오듯이 헤브루 족과 훗날 기독교도, 회교도들은 사원을 무너뜨렸고 벌목으로 신성한 숲을 파괴했으며 이교도 우상들을 살해했다. 또한 영적 파괴도 함게 감행했다. 책을 불사르고 이단자를 처단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개종했다. 고대 사제들이 신성한 이야기들에 행사했던 중앙집권화된 통제방법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종교나 국가의 검열이나 대중매체의 방해공작을 제외하면 오늘날에는 매우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중이 읽고 듣는 것을 매우 제한했다. 주로 공인된 견해만 읽고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공인된 이념에 위협이 되는 주장은 결코 전파할 수 없었다. 수천년 동안 사회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는 고대 사제들이 이용한 영적교육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제는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필수 요소였다. 그들은 민중을 지배하고 강탈했던 남성 엘리트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남성 엘리트였다. 사람들은 점차 폭력적이고 위계질서에 기초한 남성 지배 사회를 정상적이고 옳은 것으로 믿기 시작했다.”
“수천년 전에 고대 유럽을 유린했던 쿠르간 족과 마찬가지로 남쪽 사막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을 휩쓸었던 헤브루 족은 전쟁의 신, 곧 사납고 질투심 많은 야훼 혹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신앙을 동반했다. 구약성서를 통해 우리는 여호와가 파괴하고 약탈하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실제로 이 명령들이 충실하게 수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헤브루 사회도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들과 마찬가지로 위계질서가 엄격하며 모세의 종족 곧 레위 족이 지배했다. 코나트 혹은 코헨 집안의 몇몇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햇다. 그들은 아론에게서 지위를 물려받은 사제들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을 소유했다. 구약성서를 보면 그들은 여호와에게서 직접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사제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화와 역사를 다시 작성하는 일을 상당 부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구약성서에서 폭력과 권위주의, 남성 지배라는 지배 중심 사회의 외형을 완성하고 지지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대규모 파괴를 자행했던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 침약자들처럼 고대 헤브루 족도 남성 지배 체제가 엄격한 사회를 세웠다.”
그들의 지배를 축성한 신 이외에 다른 신은 우상이 되어야 했고 부정되어야 했다. 특히 지배 원리를 부정하는 옛 체제의 미토스는 더더욱 부정당해야 했고 그 주인공들인 여신은 사라져야 했다. 예를 들어 “상직적으로 공공연히 신성시된 성경에서 여신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여성을 보호화고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부당한 처사를 복수해줄 신성한 힘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유대교 이전 고대 헤브루 종교는 사회에는 폭력의 지배를 선언하고 가정에선 가부장제를 선언한다.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듯이 남성 지배계급은 새로 만든 법률에서 여성을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로 정의한다. 처음에 여성은 아버지에게 속하고 나중에는 그들이 출산하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남편이나 주인에게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구약을 보면 여자의 정절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 가부장의 재산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 “신명기 22장 28절과 29절 사이에는 ‘만일 남자와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만나 동침하여 정을 통하던 중 발각되면 남자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50세켈을 주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처녀가 아니라면 그녀는 더 이상 그녀의 아버지가 보상받을만한 가치 있는 재산이 못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 남자가” 그 값을 물어야 하고 그녀를 가져가야 된다는 말이다.
신명기 22장 13절에서 21절은 더 노골적이다. “남자가 자기 부인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그 녀를 미워하고’ 심지어 그녀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사건을 다룬다. 만약 신부의 순결이 만족스럽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남편은 원하는대로 그녀를 제거할 수 있다. 법률에서는 ‘그 여성을 그녀의 아버지가 사는 집 문 앞으로 데려가라 그러면 도시 남자들이 그녀가 죽을 때까지 돌로 칠 것이다.’가고 명시한다.”
‘죄없는 자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간통에 대한 율법이다. 간통자는 둘 다 죽이도록 되어 잇다. 그 이유는 “도둑(다른 남자의 재산을 훔친 남자)을 처벌하고 훼손된 재산(남편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아내)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중동에서 살아있다. 소위 명예살인이 그것이다.
다른 예를 더 보자. “판관기 19장에서 성경을 기록하는 사제는 처녀인 딸을 만취한 폭도에게 내어준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상류층 레위 족 출신인 남자가 손님으로 왔다. 베냐민족 깡패 한무리가 손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위협했다. 분명 폭행을 가하려는 것이다. 그때 집주인 남자가 나서며 ‘잠깐만 내 말을 들어보시오. 여기 내 딸이 있고 이 아이는 처녀요. 그리고 저 손님의 첩도 여기 있다오, 내가 그들을 글어낼 테니 그들을 욕보이든 어지하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이 사람만큼은 해치지 마시오.’라며 부탁했다.이 이야기는 볗ㄹ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듯 대수롭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그 뒤에 이야기가 좀더 진행되면 ‘손님이 첩을 데리고 깡패들 앞으로 나가고 그들이 그녀를 행음하고 밤새도록 욕보이는’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그녀는 ‘자기 주인’이 잠든 문지방 앞에 엎드린채 쓰러졌고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여자를 주인은 ‘그만 일어나서 가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죽은 뒤엿다.
딸과 첩의 신뢰를 배반하고 심지어는 집단 성폭행과 힘없는 여성을 살해한 잔인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어디에도 동정하는 말 한마디 없으며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격분하는 언급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딸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처녀성과 목숨까지 희생하겠다고 제안한 아버지에게 아무 법적 제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레위 족 남자의 부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고문하고 결국 살해했으리라 추정되는 깡패들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책은 겉으로는 성스런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괴상망측한 도덕성을 전제하고 있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아버지와 남편들에게 이끌려 강간당하거나 폭행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을 합법화할 뿐 아니라 가해자를 처벌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비난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선행으로까지 추겨세워진다. 롯에 과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롯은 당연하다는 듯 처녀인 두 딸을 집을 방문한 두 남자 손님을 위협하는 깡패들에게 내어준다. 이것은 당시 널리 용인되던 관습이었던 듯하다. 여기에서도 위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딸들이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오히려 롯을 찾아온 두 손님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밝혀진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이 살려준 유일한 의인이었다.
다른 사람을 노예로 하는 것도 당연하고 오히려 자랑일 뿐더러 여성을 심지어는 자기 딸까지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보는 그런 사회는 ‘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사회였다. 그 신이 명령한 사회에선 “권위에 불복하고 독자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일을 가장 큰 죄악으로 간주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리지만 동료를 죽이고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일은 묵인한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살상은 성스러운 일로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약탈을 일삼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강간하며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일 역시 성스럽다고 용인한다.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에서 나중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신성국가에서 전쟁과 전제적 지배, 여성의 예속화는 새로운 지배 중심의 도덕성과 사회적 핵심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문화적 진화의 행로를 성공적으로 돌림으로써 이후 현실은 완전히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