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어떻게 변했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하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게 심술이 났다. 여전히 몸은 슬림하고, 날렵하며,머리는 백발이 심하지도 않고 멋스럽다고 할 만큼, 딱 그만큼만, 세었다.

아마도 여전히 피트니스클럽에 다니면서 자주 테니스를 칠 것이며, 가끔 자전거도 타겠지.

남자들은 서서히 늙어가는 것일까?

어떤 책에서 사람은 30대에 빨리 늙고, 40대 이후부터는 천천히 늙는다고 하던데, 남자들은 유독 40대엔 덜 늙는것 같다.

아닐 수도 있고. 

부르주아 남자들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제법 풍족하게 사는 사람이니, 돈은 늙음에도 차등을 두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쓸쓸해지고, 또 분하다.


우리의 기억이 멈춘 해로부터, 수년이 흘렀다. 이제 함께 한 날보다는 헤어진 날들이 더 많다. 애인 있어요란 드라마의 설정을, 생각해 본다.

깨어진 도자기가 다시 깔끔하게 붙을 수 있던가?

타다 꺼진 장작개비에 다시 불을 붙인다? 어쩌고 하는 프랑스 속담이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끝이 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던가.

그런데, 기억잃은 아내를, 배신했던 남편이 다시 보고 사랑한다는 설정은, 너무 억지같아 헛웃음을 유발하기까지 한데, 이 드라마는 제법 흡인력이 있다.

설레기도 하고, 로맨스 드라마에 설렘을 느낀다면, 성공한 거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쓸쓸하다. 어쩌면 서글픈 건지도,..아니아니 언제나 인간의 몸짓에 미치지 못하는 언어이듯,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세분해서 각각에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단어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단어가 모자라니까..턱도 없이...너무 모자라서 있는 단어에 감정을 끼어맞춰야 하는 식이랄까? 그러니까 정확하게 쓸쓸하다도 아니고, 딱떨어지게 서글프다도 아닌데 그 어느 중간쯤인데,,그걸 표현할 단어가 없으니..그저 쓸쓸하다 또는 서글프다라고 할 밖에..

몸짓의 역사보다 언어의 역사가 짧기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 뭐래니?


암튼 드라마....재밌게 보고 있다..이 와중에 그레이트 하우스는 참, 안 넘어간다.

계속 붙잡고 조금씩 읽고 있긴 한데...왜 몰입이 안되는 건지...


그 와중에 죽어가는 짐승을 읽었다.

예이츠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그러니 이 책은, 다시 한번 이 구절을 반복하는 내용인 셈인가?

늙는다는 것은, 에로틱한 몸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글쎄, 필립 로스의 책은 처음인데, 이 짧은 분량의 소설은 강렬하다.

그리고 시종일관 물적이다.

에로틱하고 그야말로 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싶을 정도다.하지만, 결국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다...읽고나면, 죽음과 몸에 대해, 젊음과 늙음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 지니까.

그것은, 젊은 육체는 아름답다고 칭송받을 수 있지만, 늙은 육체에 대한 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과 닿아 있다.


이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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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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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직전 두권의 책을 샀다.

읽을 요량으로.

내게 긴연휴란...불안과 게으름의 나날일 뿐,달리 의미가 없다. 도시에서 생활한지 수십년 동안, 내가 어린 시절 얼핏 얼핏 들었던 갖가지 명절이며 절기며, 세시풍습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도시의 삶이란, 그런 거다.

잊히고 묻히고, 내어주고,사라지는 것.

인간이 오랜 기간 동안, 몸에,마음에 새겼던 관습이나 습속들을 조용히 혹은 격렬하게 내어주고 잊어버리고 버리는 것이란 걸.


때로는 그것이 서운하다.

혹은, 슬프다.

엄마의 기억속에만 존재할 그 어떤 시절들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간혹 서글프다.

그립다.

경험해 보지도 못한 것이 그립다니...말이 되나? 하지만, 그런 법이다. 인간이란 그런 족속이다.


커포티의 단편집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장편은 손대기가 겁났다. 일가족 살인사건이라니..새가슴인 내가 감당하기엔 벅차다. 두려웠다.

그렇다고 풀잎소리인가도...버겁기는 마찬가지..해서 그나마 단편으로 낙찰봤는데...이건 뭐.

연대순으로 대표작을 엮은 모양인데,,처음 몇 편은, 어..이건 뭐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그건 괴기하다고 할 순 없는데, 그렇다고 편하게 읽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 뭐랄까..으스스한 기분..아마도 고딕소설의 범주에 드는 모양이다.

고딕소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말하긴, 나로서는 어렵지만, 아마도 그런 범주라고 짐작할 법한...그런 어떤 느낌(?)..그러다가 40년대 후반부터 쓰여진 작품들부터는 조금씩 경계심을 놓을 수 있었다. 따뜻하고 ...정다운 작품도 몇 있고...역시 나이가 든 건가? 이런 목가적이고 따스하고, 서정적인 작품이 마음 편한거 보면...


뭐 이제 커포티의 소설에 발을 한발짝 들여놓았으니..이제 ..그의 출세작을 읽어볼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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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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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나날들,


벌써 두달전에 읽었다.


사실 읽고 나서도 ...감이 안잡혔다.


이건 무언가?..하는 마음이 도처에 남았다.

영화로 먼저 보았다. 엠마 톰슨과 앤소니 홉킨스가 주연이었다.

느낌은 좋았다. 딱 이런 정도의 감정만 남아있다.

그 사이 세월이 많이 흘렀고, 무엇보다 감정은 이상하게도 결과만 남지 그 감정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마음의 여운, 번짐,뭐라 이름할 수 없는 무수한 작용반작용은, 사라진다 시간과 함께.


허긴 그 많은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살아갈 수 있겠는가? 폭발하고 말겠지..'루시'를 보았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루시가 우리 뇌의 90%이상을 활용하게 되었을때 해체되고 말았지..

뭐 그런 비슷한 현상까지는 아니더라도...기억이 너무 과대하게 빵빵해지면, 결국 해체되고 말지 않을까 싶은...


알맹이만 좇는 독서의 행태를, 그간 아무 성찰없이 받아들였다.

줄거리에 매몰되는 나의 독서행태.

단어와 문장이 주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복일까? 내가 해체되어 사라진다해도..꼭 그 단어여야만 하는 바로 그 정확성, 꼭 그 문장이어야만 하는 바로 그 정확성..


이 작품의 작가가 일본인이었다니.. 물론 그는 이미 일본인이 아닌 일본인일터인데.


그리고 또..생각난다.


한인섭 교수는, 어릴적부터 레미제라블을 한 500번은 읽은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읽을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읽을때마다 또다른 감동을 받는다고.


나는 그의 독서법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 그와는 정확하게 반대의 독서법을 살고 있구나 싶다.


나에게 남아 있을 나날들이여,

자기방식대로 살아온 나날들이, 어느날...형편없이 느껴질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새로운 각오가 서기보다는, 회한과 슬픔만이 밀려온다면,...내가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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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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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안되었다. 공감이 작동하지 않는다. 끝없이 달아나려고 하고..다시 왔다가는 또다시 달아나려고만 하는 래빗에게, 도대체 왜? 래빗, 왜그러는데? 하고 묻고 싶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몰라서인가?

나는 정말 래빗이 왜 달아나려하는지, 몰라서인가?


그렇게 되묻는 자신을 본다.


단독자라는 용어는 철학적 용어이자 종교적 용어일 것이다.

헌데 유독 최근의 나의 상황에서 자주 이 말을 떠올린다.



이 우주에서 나에게 닥친 그 모든 것에 맞서야 하는 자는,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며, 

그 누구의 손길에 의존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기대어 오로지 나 자신의 사고와 선택에 맡겨야 하는 ...이 길을 헤쳐가야 한다는 막막함.



그렇다면, 나는 래빗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짐짓 고요해지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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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나는 내가 살아남을 만큼만, 용감하고, 살아남을 딱 그만큼만,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 물론, 이전부터 내가, 어리석고, 겁쟁이란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자기고백할, 기회가 없었거나..회피하였거나, 적어도 그럴 정도는 아니라는 자만심에, 이것도 자만이라면,쌓여있었다는 말이다.


문득 떠오르는 이런 단상들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지만, 하나하나 모아보면, 나라는 인간이 어쩐지 비루해 보인다.

뭐 예전에도 그랬지만..그런 자각은, 사실은 슬프다.

인간으로 태어나, 무언가 할 수 있을 거 같은, 그게 희망이라 불려야 할지, 낙관이라 불려야 할지,혹은 본능적인 자만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런 느낌들을 가지고 살아왔던 건 아닐까?

하지만, 실은 인간이라는 종을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이런 모양새를 가진 어떤 존재가 되어 있었고, 마침 의식이라는 특징을 갖추고 있었고, 또 마침...인간 존재는 스스로에 대해서 알고싶어하고 또 알아내고 있고, 알아낸 만큼 내가, 이 우주에서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또또...인생이란 축하할 일도, 또 한탄할 것도 아니라는...우연의 사슬일 뿐이라는, 그런 자각말이다.


그리고 또 문득, 나란 지금 여기 이렇게 걸어다니고, 말하고, 웃고, 밥먹고, 뭔가 일을 하고 하는 존재인 나는, 결국 죽음을 향하여 묵묵히 나가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면, 정말 속수무책인가?

낙관도 절망도, 그리고 진보도 타락도,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일까?

쌍화차를 두봉지 사들고 오면서,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메르스에 안 감염되기 위해 최대한 면역력을 기르려고 하는 나자신을 보면서, 이건 또 뭐라 불러야 하나? 본능인가? 이웃에 대한 예의인가?

두려움인가?

생의 애착인가?


호들갑인가?

그리고,또또..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쓸 필요까지야 없지 않을까? 쓴다고 한들 무슨 이야기를 쓰나?

바틀비,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안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안할 선택의 자유마저도 없는 존재가 아닐까?


나는 사실, 바틀비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다..그냥, 이런 느낌? 

어느날 아침 제일 먼저 일하는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사무실 안쪽으로 문이 잠겨져 있고, 엇? 누구지? 나보다 먼저 누가? 하는데 잠시 뒤 느릿느릿 누군가 안쪽에서 문을 여는데, 문이 열리고 비쩍 마르고 표정없는 어떤 남자와 딱 눈이 마주친 느낌???

뭐 그런 느낌이다..


실은 작품속 한 장면이기도 하다...


죽음을 향해 그저 나아가는 길에, 일을 하여야 하고 왜? 죽을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하니까, 이런 저런 사람도 만나고, 또...뭐 그런게 인생이 아닐까?

쌍화차를 뜨거운 물에 데워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틀비를 떠올린다.


아, 바틀비...바틀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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