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기억상실증 - 버려진 것들로 읽는 문학과 기억의 문화사 ㅣ 인사이트 문화총서 5
임태훈 지음 / 역사공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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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나 목차만 봐도 엄청 좋은 책이란 걸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는데, 이렇게 리뷰가 없을까. 나라도 써야겠다, 싶어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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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레슨이 끝나지 않기를 - 피아니스트 제러미 덴크의 음악 노트
제러미 덴크 지음, 장호연 옮김 / 에포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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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이 책을 읽기로 했다.

며칠 걸릴 지는 모르지만.


나의 독서법은 이러하다.


일단 징검다리 건너듯 눈에 띄는 텍스트 위주로 읽는다.

읽으며 밑줄, 하이라이트 총동원.

(이런 움직임을 양산하지 못하는 책은 일단 덮고 모셔둔다.

이런 책은 시간이 지나 내 자리나 위치나 입장이나 하다못해 나이라도 좀 바뀐 다음에

다시 본다. 그럼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때도 안 달라지면 과감히 중고판매하거나 폐기한다.

더 좋은 책을 데려오기 위해)


재독 시에는 그 텍스트 근처를 탐색한다.

재독 때, 초독시 놏친 보석같은 텍스트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그걸 위해서다.


삼독을 부르는 책은 '양서'다.


내게 그렇단 말이다.

내가 양서 발굴 전문가는 아니니까.


이 책을 사서 읽기로 한 이유는...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잘 안 빌린다.

밑줄을 못 그으니까.


밑줄이 그어지지 않는 텍스트를 읽어나갈 용기가 내겐 없으니까.


나는 피아노를 엥간히 친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18번인데.

눈감고도 치는데.


악보가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피아노 잘 친다는 소리를 늘 듣게 해주는 곡이다.


그런데 랑랑이 치는 이 곡을 듣고, 그동안 내가 쳐온 '엘리제를 위하여'에 미안해서 혼났다.

내가 얼마나 빨리 치는지 깨달았고,

이 곡은 굉장히 슬픈 곡이고,

안에서 부서지는 슬픔을 모아모아 덩어리로 만들어 

좁은 목구멍으로 끌어올리듯 쳐야한다는 것을,


그래서 아주 천천히 쳐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렇게 천천히 쳤더니,

우리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 이런다.


피아노 실력이 퇴보했냐고.


천천히 친다고 랑랑처럼 칠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지.


책으로 돌아가자.

이 책은 피아니스트가 쓴 책이다.


미국의 피아니스트로 오벌린 대학에서 '당연히'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화학도 같이 공부했다. 


박사는 줄리아드 스쿨에서 마쳤다.

우리집에서 딱 35분 걸리는데.


가본 적도 있는데.


각종 악기를 떠매고 끌어안고 다니는 음악학도들의 눈빛을 구경했다.

대개는 날 쳐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구경하기 좋았다.

물론, 나도 옆눈이나 흘끔거림이라 내가 보는 줄 몰랐을 테지만.


비록, 눈으로 마주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탁월할 영감이 가득한 건물 안에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느끼는 것 같아 좋았다.

순전히 기분 탓이겠지만.


제러미 덴크는 카네기 홀에서 자주 공연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음반이 알아준다.


'리게티/베토벤' 음반은 '뉴요커'에서 올해 최고 음반으로 선정되었다고.

당장 사야겠다.


2018년, 19년에 한국에 와서 리처드 용재 오닐과 듀오 콘서트를 했다고.


그의 눈에 띄는 특징은 

글을 잘.쓴.다.


이 정보에 눈이 번쩍 띄었다.


글 잘 쓰는 피아니스트.

자기 음반에 대한 해석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


머리말부터 읽어야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단순합니다. 직접 대면하여 말로 가르치는 음악 교습의 전통을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식으로 음악을 배웠고요.


나도 내가 배운 소설쓰기 방식으로 소설을 가르친다.

나한텐 학위도 뭣도 없지만 내가 배운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이 좋은지 성공적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있게 된 방식임은 안다.

지금의 내가 좋은지 성공적인지, 당연히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을 가르칠 수 있는 건,

내가 배운 걸 존중해서일 것이다.


스승을 존중하고, 그 스승의 가르침을 존중한 나를 존중하고.


그래서 '가르침'은 '존중'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얼마간의 돈과 보람이 따라오는 건

피로와 노력이 앞서야 하니 뿌라스, 마이너스 하면 그 값은 '0'일 것이고.


남는 건 '존중'이란 뜻이다.


이 책의 '가르침'이 존중 같아서 맘이 일단 열린다. 


한 인터뷰에서 저는 이 책을 

'음악 교사들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라고 했습니다.


러브레터.

좋다!


회고록 중간에 저만의 독특한 레슨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끼워 넣었습니다. 음악의 가장 기초적인 면들을 엉뚱한 방식으로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엉뚱한 방식

좋다!


토론토에서 수줍음 많은 한 피아니스트가 말하기를 제 책이 자신의 불안정함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음악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자기만 힘든 삶을 사는 게 아님을 깨닫고 힘을 냈다고 했습니다. 

(중략) 이것이 제가 받은 최고의 찬사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울컥하는지.


내가 쓰는 소설을 읽은 독자가 내게 이렇게 말해준다면...


작품을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들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시간이 좀 지난, 같은 날 밤)-----------------


위 리뷰를 쓰고, 같은 날 밤이 되었다.

이 책을 94쪽까지 읽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올해(아직 절반도 채 안 지났으나) 읽은 최고의 책이 될 것 같다.


수도원에서 10년을 보낸 수도사 출신 아버지와 술을 좋아하는 어머니.

소설의 그것처럼 한 순간도 의미 없이 지나치지 않을 것 같은 가족 이야기가

음악 레슨과 함께 펼쳐진다. 


저자가 피아니스트면서 글을 잘 쓴다고 소개는 되어 있었으나,

이렇게 '소설가'처럼 재미나게 글을 쓸 줄은 몰랐다.

거기에 원어가 외국어임을 잊게 만드는 번역이라니.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는 번역자의 이력 덕에 이런 혜택을 입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음악에 관해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뒤가 궁금해 못살겠다.

이렇게나 재미나고 유익한 음악 레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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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5-29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어쩌면 이렇게 지루할 틈 없이 활력이 넘칠까요? 읽는 내내 기분 좋은 에너지를 가득 받아서, 실은 이 글이 참 좋아 종종 읽고 가곤 했어요. ㅎㅎ

피아노 앞에 앉아 랑랑의 템포를 떠올려보신 젤소민아님의 귀여운 모습부터 줄리아드 앞을 흘끔거리시던 풍경까지,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은 듯 생생하고 즐거웠습니다. 솔직한 자기 감정을 자신만의 색으로 그려내시는 필력이 젤소민아님의 매력이에요.

조용히 읽고만 가다가 오늘은 슬쩍 흔적 남겨봅니다. 남은 페이지도 멋진 영감 가득하게 읽으시길 바랄게요!

젤소민아 2026-06-10 08:38   좋아요 1 | URL
ㅎㅎ 이렇게 멋지게 좋아해주시는 곰돌이님께 허리숙여 인사를!! 더 열심히 리뷰쓸랍니다~아자아자!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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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나이 드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20년 전에 초판으로 샀다. 소설가는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서. 소설하고는 거리가 먼 상태로. 세월을 묵으며 책은 누래지고 어쩌다 물이 묻었나...우그러졌다. 그러는 동안 난 소설가가 되었다. 나의 본향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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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독 생활 - 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타이키 라이토 핌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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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종이책 4천권 있으면 적독가가 맞을까? 4천권을 오가다 보면, 솔직히 머리가 채워지는 느낌, 든다. 몇 장 갈피를 펄럭거리는 것만으로도. 뭐, 그냥 느낌일 뿐이지만. 대신, 그날 눈에 띈 면에 조그맣게 표시해 둔다. 다음에 또 펄럭일 때 같은 곳 눈이 머물고 조그만 표시를 발견할 때 웃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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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4-24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제목만 읽어도 뭔가 알겠는 느낌일까요?
장서가 라는 말을 썼는데,,, 적독가! 약간 찔리는 이름이네요.

젤소민아 2026-04-24 21:25   좋아요 1 | URL
그쵸. 처음 듣는 단어인데, 귀에 확 꽂히고 마음에 콕 찔리네요? ㅎㅎㅎ 그레이스님, 잘 지내시지요~~독서기후는 어떠신가요~~
 
사소하지만 뾰족한 순간들 - 그때 우리가 선택한 태도에 관하여
김예원 외 지음 / 양양하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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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뾰족한 순간들. 내가 아는 한, 이 세상 정말 많은 좋은 (현대) 소설이 여기서 시작한다. 소설 쓰는 나는 그래도 오늘도 이런 순간을 기다린다. 사소하지만 뾰족한 순간. 조금은 따끔할 걸 알지만 사소해서 아주 크게 내 맘을 축내지는 않을 거란 알기에. 그러나 꽤 오래 맘은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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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4-29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뾰족한‘이 의미하는 것과 좀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최근 [서울리뷰오브북스]에서 본 ‘뾰족한 비평‘이 생각났네요.
독설 같아 보여도 문제를 정확히 짚어내는 ‘뾰족한‘ 서평을 지향한 글로 기억되는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엄청 신경쓰이겠죠. 당사자는 유명한 학자 분이신데, 그런 분도 따끔한 순간을 허허롭게 넘기시긴 쉽지 않으셨다죠.
뾰족함과 원만함 사이의 그 어느 지점 쯤... 사람 사이 관계는 역시 쉽지 않네요.

젤소민아 2026-05-01 06:28   좋아요 0 | URL
‘뾰족함‘이란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네요 얄리얄리님. 말씀하신 ‘서울리뷰오브북스‘의 평론이 궁금해집니다. 찾아보고 싶은데요! 소식, 감사해요!

>>찾아봤어요! 최신버전인 21호에서 [뾰족한 서평과 다정한 수다 사이에서 ∥ 김두얼 × 김겨울 × 요조] 이거네요~. 구매해서 읽어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