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이 바닥을 친(스페인어로 '살라오'가 되어 버린) 노인과 더는 배를 같이 타지 말고는 부모의 명을 받고 소년은 노인을 떠난다. 그래서 노인은 '더 먼 바다'로 나가
평소 잡기 힘들었던 청새치를 잡고 상어도 만난다.
<마담 보바리>는 마담 보바리가 즐겨 있는 로맨스 소설의 안팎으로 나눌 수 있다.
<어린 왕자>는 B612를 떠나기 전과 후의 세계로 나뉘는 것 같고. 물론 또다른 앵글로 또 다르게 나눌 수도, 얼마든지 있다.
<변신>의 두 세계는 그 어떤 소설보다 선명하고 매력적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방과 방 밖의 세계. 그레고르 잠자는 방 밖으로 나왔다가 죽는다.
영화로 돌아가자.
<HOPE>의 두 세계는 일상 vs 재난상황
재난은 일상을 파괴하기 위해 침입하지만,
이 영화에서 비록 건물은 파괴되어도
일상은 그렇게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이쯤에서 '노인과 바다'의 명문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혹시 이것과 일맥상통하나?)
영화는 외계 괴물을 상대하는 극단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사소하고 시시하며 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생활의 순간들을 계속 끼워 넣는다.
사람들은 재난 중에도 먹고, 수다 떨고, 똥을 눈다.
재난이 벌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갑자기 ‘재난속 인간’으로 급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오래전 <개그콘서트>의 ‘생활의 발견’이 떠올랐다.

연인이 헤어지는 위기의 순간에도
중국집에 음식 주문하면서 단무지를 챙기고, 쿠폰을 찾아 나와 건넨다.
다소 과감하게 단순화하는 듯하지만,
그 코미디 코너의 발상을 거대한 SF 재난의 규모로 확장하면
<HOPE>의 한 단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국은 거대하지만,
파국을 겪는 인간의 몸은 여전히 생활의 단위로 움직인다는 면에서.
같은 맥락에서, <HOPE>는 재난을 거대담론으로 ‘상승’시키기보다
그것을 생활의 차원으로 ‘하강’시키는 게 매력적이다.
'괴물' 중에도 사이즈가 제일 큰 '우주적' 존재를 활용하면서 '하강'이라니.
그 거대한 재난과 비루한 일상 사이의 낙차가
이 영화 고유의 유머와 공포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영화의 공간도 한몫한다.
다닥다닥 붙은 점포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가게에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 가게 안 깊숙한 공간에 있다가 오발로 죽음을 맞기도 하고
괴물에게 이미 당해 처참한 시신이 되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어째,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혹시 가게 간판을 눈 여겨 보았는가.
뭐 하나 겹치는 가게가 없다.
그 작은 마을에서 업종은 어찌 그리도 다양하던지.

그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이 사라졌는데 일상은 지독하게 남는 구도.
이 영화에서 또 눈에 띈 것이 '지연'이다.
영화는 좀처럼 괴물의 모습을 온전히 내놓지 않는다.
초반에 지루해 죽겠다,는 평이 많이 나오게 생겼다.
지루함은 당연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루한 기다림이
영화가 만들어낸 공포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괴물을 보여주지 않는 시간 동안
관객인 나는,
어쩌면 기획 단계의 감독 못지 않게 수많은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냈으니까.
이 '지연'의 방식을 활용할 때, 즉, 공포를 보여주는 데 있어,
특히 범석(황정민)과 목격자들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목격자들은 이미 보았다.
영화는 괴물을 등장시키기 전에 괴물에 대한 ‘말’을 먼저 돌아다니게 한다.
범석은 보지 못했고 그들의 말을 들었을 뿐이다.
상당 시간 카메라는 범석의 시선과 그가 처한 조건에 관객을 묶어둔다.
범석이 모르는 만큼 관객도 모르고,
범석이 보지 못하는 만큼 관객도 보지 못한다.
지연이 길다 보니 이런 질문을 할 짬이 생겼다.
괴물을 직접 본 사람과,
못 보고 이야기만 들은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무서울까.
아마 둘 다.
다른 건 공포의 종류일 뿐.
본 사람은 구체적인 공포를 소유한다.
괴물의 형태와 크기와 움직임을 안다.
보지 못한 사람은 무정형의 공포를 소유한다.
어디까지 상상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하나는 이미지에 붙잡힌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가 없어 무한히 팽창할 수 있는 공포이다.
그래서 <HOPE>의 초반부에서 중요한 것은
괴물을 얼마나 늦게 보여주느냐만이 아니라,
‘이미 본 자’와 ‘들은 자’ 사이에 공포를 어떻게 나누느냐가 아닐까.
후반부로 갈수록 외계 존재가 구체화되면서 영화의 성격이 좀 달라진다.
여기서 내 개인적 호불호가 작동했다.
한 우주선을 타고 도착한 존재들이 왜 그리 이질적인 형상을 하고 있는지,
곱씹어보고 싶은 부분.
그것이 종의 다양성인지, 변이인지, 역할의 차이인지,
혹은 이후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한 장치인지
이 한 편만으로는 잘 모르겠다.
인간을 닮은(얼굴/팔다리/여자의 가슴 등) 외모적 특성,
언어를 부여하는 방식에서는 <아바타>를 비롯한
기존 SF의 기억이 강하게 소환되었다.
나는 사실, 여기가 제일 아쉬웠다.
<HOPE>가 초반에 만들어낸 낯섦을 다소 익숙한 SF의 문법으로 되돌려놓는 것 같아서다.
미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미지가 오히려 작아지는 것 같은 역설이랄까.
보이지 않았을 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존재가
형상과 언어를 얻는 순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영화들의 공식과 이미지들과 비교질이 시작되었다.
결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더 크다.
후속편을 염두에 둔 설정 및 스토리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한 편의 영화는 한 편 안에서 최소한 하나의 '운동'을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관객/시청자/독자의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미스터리를 남기고, 세계를 열어두어도 된다.
그러나 서사는 열려 있을 수 있으나
작품의 '운동'까지 미완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HOPE>의 결말은 다음 이야기를 위한 문을 여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면서,
지금 막 본 이 한 편이 무엇을 닫았는지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듯했다.
물론, 감독 나름의 중요한 '의도'가 있겠지 싶다.
그러나 의도되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한 편의 영화로서 만족스럽다는 평가는
별개의 문제일 테니.
<HOPE>의 리뷰 결말은 'HOPE'로 닫고 싶다.
제목 그대로 ‘희망(hope)’이 재난 아래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말이다.
이 영화의 '희망'은 거창하고 거룩한 영웅적 행위나 위업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재난이 삶을 압도하는 순간에도
떠들고, 실수하고, 먹고, 싸우고, 용변을 보고,
서로를 걱정하는 그 사소한 일상의 지속 속에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어쩌면 재난의 진정한 반대말은 ‘구원’이 아니라 ‘일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긴, 우리 삶에 예기지 못한 '재난'이 병이나 시련의 형태로 도래했을 때,
우린 얼마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되는가 말이다.
이 영화는
재난이 일상을 중단시키려 기를 써도 인간은 끊임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일상의 관성이랄까.
<HOPE>에서 말하는 '희망'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재난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도 갈구하는 일상은
사실, 재난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는 것.
물론, 나는 재난 앞에서 일상을 그대로 영위할 자신은 없다.
재난을 맞은 사람답게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상황인지 모르고. (아마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다)
그래도 <HOPE>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봤으니
앞으로 맞는 재난 속에서 그나마 일상의 조각을 줍게 되진 않을까.
해술 노인이 괴물 앞에서도 똥을 누듯이,
성기가 괴물 앞에서도 고구마(감자였나?)를 먹듯이,
도망 중에 숨이 차올라도 할 말은 할 수 있듯이.
그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