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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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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년 전 어느 아침, 부엌 식탁에서 사과를 깎는데 곁에서 커피를 내리던 헌수가 <러브 허츠>를 틀었다.

-어? 나 이거 어디서 들어봤는데.


219p


방금 전 로버트가 내게 "그런데 한국어로 '안녕'은 뭐라 그래?" 물었을 때 저날 헌수와의 대화가 떠오른 건 그 때문이었다.


222p


김애란 소설가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소설에는 '과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설 전체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과거'는 소설 속 인물에게 '현재'를 만든 근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재에만 발 딛고 걷는 인물이라 해도

어디에서는 반드시 과거가 디뎌지게 마련이다.


모르긴 몰라도, 소설가에게 '과거'는 생명줄과 같다.

과거 없이 인물의 현재를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요는, 그런 과거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내가 보기에 소설가가 과거를 다루는 방식은 이런 정도다.


1) 작심하고 과거 속으로 뛰어든다.


-그때는 1973년 이른 봄이었다.

-5년 전, 여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2)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린다


-오렌지를 먹다 보니 오렌지를 좋아하던 친구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조용해졌다. 아버지가 아예 말을 잃던 날이 떠오른다.


이 둘에서 아마도 그닥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방식들의 공통점은 '현재'가 먼저란 것이다.


인물은 현재에 먼저 살고 있고, 현재에서 어떤 계기가 있어

현재와 연결된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뛰어들건, 그 지점을 떠올린다.


그런데 김애란 소설가의 방식을 보자.


확연하게, 과거가 먼저다.

칠년 전, 화자가 부엌에서 사과를 깎는데 헌수가 음악을 틀던 그때.

그때의 과거.


현재는 그 다음이다.


방금 전 로버트가 한국어로 '안녕'이 뭐라 묻고 화자는 과거의 그 지점을 떠올린다.


위에서 말한 2)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린다, 에 속한다.


그런데 다르다.


아니, 같은 지도 모른다.

엄연히 '떠오른다'란 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르다.

아니, 다르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과거가 먼저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가 그 다음에 불려온다.

과거로부터 현재가 불려오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과거가 먼저 나왔기에 과거가 현재를 불러오는 것 같은.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렸는데도 말이다.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그래도 소설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이 방식을 쓰는 과정의 김애란 소설가가 그려진다.


고민했을 것이다.

베테랑 소설가라고 해서 모든 게 'easy'하지 않다.


굳이 'easy'란 영어를 쓰는 이유가 있다.

'로버트'가 등장하다 보니 이 소설에 영어문장이 좀 나온다.


그리고

쉽다...는 한글 단어 한 마디로 'easy'를 단언할 수는 없어서다.


'easy'의 어원은 'aisier'.

여기에는 '쉽다'만 품어있지 않다.

'쉽다'가 되기 위해 


활용하다/가능하게 하다


란 의미가 기반이 되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김애란 같은 베테랑 소설가라고 해서 모든 게 'easy'하지 않다.

소설의 많은 요소(요인)를 '활용'하는 게 무조건 편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요소가 품은 가능태를 백퍼센트 현실태로 펼쳐놓지는 못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활용을 더 어려워하고 고민하는 소설가야말로 베테랑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김애란 소설가는 

이 단편소설의 서두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과거를 먼저 배치하고,

과거가 현재를 불러오는 식으로,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기존의 방식을 쓰되

과거에서 현재가 당겨지는 식으로.


이게 철저한 전략 하에 이루어졌는지, 

워낙 몸에 익어 자연스럽게(easy 하게)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로서 나는 완전히 설득되었다.


'easy'는 14세기 후반부터 '쉽게 양보되는, 설득하기 어렵지 않은'이란 뜻이 포함된다.


Meaning "readily yielding, not difficult of persuasion" is from 1610s. 


https://www.etymonline.com/word/easy


이렇게 한글소설의 후기를 쓰다가 맥락없이 영어 단어의 어원을 들먹이는 데는

이유가 더 있다.


-우리말의 '안녕'에는 '반갑다'는 뜻과 '잘 가'라는 뜻 말고도 또다른 의미가 있어.

-어떤?

-'평안하시냐'는 혹은 '평안하시라'는 뜻.


254p


이 소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해서다.

아,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우리말의 '안녕'과 영어의 'ease'는 통한다.

'평안하다'는 의미에서.


로버트는 캐나다 퀘벡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자기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223p


그 뒤로 소설가는 '더없이 편안하게' 과거로 걸어들어간다. 

심지어 헌수와 커피를 마시던 그날 아침으로도 다시 간다.


그리고 드디어 현재다.


수업에 들어오며 로버트는 오늘도 밝은 얼굴로 인사했었다.


232p


그리고 결말에서 소설은 다시 소설 서두의 '러브 허츠' 지점으로 돌아간다.


헌수는 내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 

엉뚱하게도 우리가 <러브 허츠>를 들은 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252p


앞서 화자가 오가던 현재와 과거의 기로들이

절묘하게 결말에서 조우한다.


서로가 서로를 'easy'하게 불러들인다.


이 소설의 엔딩은 

로버트가 '안녕'이란 단어의 뜻을 묻던 과거로 잠시 돌아갔다가

화자가 '안녕'이란 말을 현재에서 쓰는 것으로 완성된다.


과거와 현재는 구분된다.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나뉘어진다.


김애란 소설가의 손끝에 과거와 현재는 어우러진다.

늘 앞서던 소설 속 현재가 사이좋게 과거에 자리를 내어준다.


어떤 게 과거고, 현재인지 헛갈리지 않는다.

무책임하게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이쪽에서 현재의 저쪽에서 

과거의 현재가 어깨를 기대고

휘파람 한 줄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정겨움이 있다. 


그 정겨움 속에서 독자는 소설에 완전히 설득되어

어느새 '안녕'해지고 만다.


적어도, '나'란 독자는 그랬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사족이다.


띠지에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란 평론가의 말이 있다.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다들 알 것이다.

좋은 뜻이다.


김애란이 그만큼 소설 속에서 우리 사회를 잘 그려낸다는,

사회를 잘 이해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사회학자가 쓰는 소설은....쩝.


나는 김애란이 어떤 '학자'도 되지 말고,

더구나 사회학자는 되지 말고,

오로지 '소설가로만'

더더더더 '소설가로만' 남아주길 간절히 기도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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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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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소설가. 초반의 뜬금없는 흰점박이 개똥지빠귀의 긴 서사. 이야기는 언제 시작되나...하다가 31쪽에서 드디어 새의 이야기가 끝날 때, 저절로 울어졌다. 되돌아가 5번 읽었다. 70년 소설을 써오신 내공. 위대하다. 한국의 욘 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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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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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 왔다. 처음엔 편지였고, 그 다음엔 시와 연설, 나중엔 이야기와 기사, 그리고 책이었으며 이젠 짧은 글을 쓴다.

(7p)


존 버거는 1926년 생을 얻고 2017년에 죽음을 얻었다.

팔십 년간 글을 썼다면 91세까지 살았으니, 11세부터 글을 썼다고 셈한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많이 쓰는 것보다 '오래' 쓰는 게 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어른이 돼서, 할 일 다 하고, 

시간이 좀 남기 시작하고, 머리에 생각할 여유가 좀 생기고...


그럴 때 쓰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상을 받은 말든, 잘 쓰든 못 쓰든...

어렸을 때부터, 그냥 써 온 사람이 조금은 글쓰기에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주변에서 보면 그렇다.


글 잘 쓰는 사람 치고, '오래'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썼다.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나이들어 글 쓸 필요가 없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써서 나중에 80년 간 글을 써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글쓰기에 관해서만큼은 뭔가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존 버거가 그렇듯이.


번역은 두 언어들 사이의 양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세번째 꼭짓점은 원래의 텍스트가 씌어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이다.

진정한 번역은 이 말해지기 전의 무언가로 돌아가야 한다.


(8p)


좋은 문장은 결이 많다.

그 많은 결은 동일성과 상이성을 모두 품고 있다.

이 떄의 '상이성'이나 '이질감' 또한 전체로 보면 

'맥이 통한다'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좋은 문장이고-존 버거가 썼으니까-

그런 만큼 결이 다층적이다.


여기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대입해도 말이 된다.


소설,을 한 번 넣어보자.


소설은 현실과 언어 사이의 단순한 대응이 아니다

소설을 현실의 모사나 재현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친다


소설은 현실과 언어의 이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인용글처럼). 

삼각형의 번째 꼭짓점에는 사건이 일어나기

인물이 말을 하기 , 세계가 아직 이야기로 굳어지기 전의 어떤 상태가 놓여 있다


감정이 아직 감정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상태

의미가 의미로 확정되기 전의 불안정한 떨림이 거기 있다.

그래서 소설은 일어난 일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소설은 언제나 이미 일어난 뒤로 물러나

그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필연을 더듬는다

사건은 결과로 제시되지만

소설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건이 불가피해지기까지의 시간이다.

말해지지 않은 선택들

침묵 속에서 축적된 압력 같은 것들... 


소설의 문장은 현실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현실이 언어가 되기 전의 상태를 다시 통과하려는 시도.


나는 그래서, 진정한 소설은 언제나 시작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다

소설은 어디서 시작하더라도 언제나 이미 시작되어 있었던 지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문장은 출발선이 아니라 도착점에 가깝다고 있다.

말해질 없었던 , 말해질 필요조차 인식되지 않았던 것에 

마침내 언어가 닿는 순간

나는 그런 소설이 아닐까 한다


많은 경우, 소설은 이야기를 만드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아니, 소설은 이야기가 되기 이전의 세계를 다시 불러오는 문학이다.

그렇게 소설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그러나 바로 늦음 덕분에 소설은 비로소 명확해진다.


소설을 읽고 ",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라고 느끼는 것보다

", 어떤 상태를 통과했다."라고 느낄 ,

읽은 소설이 좋은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가 베스트셀러 소설, 혹은 인기 소설, 혹은 좋은 소설이라고 하는

과연 소설다움에 정말 근접해 있는지 묻고 싶다.

난해하고 복잡하고 말인지 없다고 해서, 인기 없다고 해서,

좋은 소설이 아니라고 단정할 없는 이유가 바로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어떤 '사건'이나 '감정'이나 '상태가

워낙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리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난해한 소설은 역시 반기지 않는다.

다만, 소설을 덮고 어딘가를 통과한 느낌인데, 몸이 고단하고 피곤하긴 해도,

달콤한 잠에 빠져들 있을 같다고 막연히 느끼는 순간...

그게 소설 읽기의 마력같다


일부러 오지만 찾아 다니는 여행가가 있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을 만한 곳에 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긴 의미가 무수하고...


닿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수는 없는 아닌가.  


읽었는데 이리 길게 거리가 있다.

언제 이렇게 썼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것만 해도 버거는 역시 대단하다.


쓰는 사람은, 생각할 거리, 거리를 아낌없이 제공하는 법이다.

80 사람답다.


진짜로 이제 겨우  페이지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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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27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 좋아하는 작가예요.
이 책은 제게 없네요.
전자책으로 찾아봐야겠어요.
,,,,
정말 몇문장만 읽어봤는데, 너무 좋네요!

젤소민아 2026-01-27 12:41   좋아요 1 | URL
네, 저, 이제 10쪽 읽었는데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그래서 밑줄긋기 포기! 이런 책을 다 밑줄긋고 아예 한 권 더 사는 게 낫다는요~. ㅎㅎ 같이 읽어요 그레이스님~
 














책과 관련해서 좀 이상한 마음이 있다, 내게는.

남들이 다 좋다 하면 읽기 주저되는.

읽으려고 하다가도 말고,

읽고 있다가도 중단하는.


거 참, 묘한 심리로다.


예를 들어, '혼모노'가 그렇다.

나오자마자 샀는데, 요즘 핫한 배우님이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소설 읽으면 되는데'하면서,

뭐, 안 그래도 좋은 작품이니 그렇겠지만,

엄청나게 화제가 되면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제치고 막막 치고나가면서,


읽기가 싫어졌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도 그랬다.


글쓰는 사람들 만나면 이 책 이야기를 미리 짠 것처럼 했다.

사놓고 모셔두고 있을 때였다.

더 빨리 읽어야 숙제같은 책들이 많아서.


그런데 시간이 나도 자꾸 뒷순위로 밀리는 거다.


주변에서 하도 좋다 하니까.


무슨 가방도 아니고, '책'이라면 좋다고 하면 좋은 건데...


아무튼 드디어 펼쳤다.

30페이지까지 읽었는데...


아 짜증...


이 좋은 걸 이제야 읽다니. 

이제부터는 남들이 좋다하면 무조건 그것부터 읽기로 결심했다.


남들이 좋다고 할 땐 다 이유가 있는 거다~~~.


30페이지밖에 안 읽었는데 큰 걸 배웠다.


거리두기-.


저자는 글 쓸 때, 압도적으로 유용한 자세에 대해 설파한다.

그게 '거리두기'이다.


누구와 거리두기? 쓰는 자와.

뭔 말이람? 쓰는 사람이 엄연히 '나'인데 쓰는 자와 거리를 두라니.


여기에 '내포작가'를 개입해 보면 어떨까 한다.

지금 소설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에세이 이야기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소설과 달리, 무조건 '화자'가 된다.

에세이의 화자는 무조건 '나'니까.


그런데 비비언 고닉은 바로 그 '나'와 거리두기를 하라는 거다.

이건 또 뭔 말이람?


그렇게 계속 질문하며 이어 읽었다.


애컬리(에세이 작가)가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목소리를 명료히 하는 데는 

30년이 걸렸다. 거리 두기를 성취하고, 자신에게 정직해지고, 신뢰할 만한 서술자가 되는데 30년이 걸린 것이다. 


그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였는가? 왜 우리는 서로 엇갈리기만 했을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그는 깨달았다. 난 언제나 아버지가 나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러고는 또 깨달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서술자는 분노를 기록하지만, 글은 분노로 미쳐 날뛰지 않는다. 서술자는 제국 통치를 증오하지만, 이 증오를 통제하고 있다. 

저자는 에세이에서-나는 여기에 소설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할 것을 권한다.


애컬리는 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왜 30년이나 걸렸을까? 

3년이 아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들려준 것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이기 때문이다. 꺼내놓는 데 30년이 걸린 것은 이야기였다.


읽는데 진심, 소름이 돋았다.

상황과 이야기.

어려운 것 같지만 몇 개 되지 않는 문장으로 그 '느낌'까지 소상히 전해준다.

기가 막힌 작가다, 비비언 고닉은.


소설에서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필시 대단히 유용할 것이다.


에세이와 소설에서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해 보려 하는 작은 노력만으로

그 독서의 질은 대단히 달라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P.S. 


나는 책 갖고 장난을 잘 친다. 책하고 친하고 싶어서다. 책을 자꾸 들쳐보게 되는 방법을 생각해 내려 애쓴다. 예를 들어, 이런 장난이다. 이 책 속에서 인용하는 영국인 에세이스트 애컬리(J.R. Ackerley)의 책 <My Father and Myself>. '아버지와 나'라는 제목인데 국내엔 번역서가 없다. 

아마존에서 원서 표지를 찾아 프린트해서 그 책이 소개된 면에 갖다 붙였다.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이런 하이퍼텍스트성 텍스트를 나는 사랑해마지 않는다. 더 읽고 또 리뷰 써야지.






(알라딘 서재에 왜 요즘 사진이 안 올라는지 ㅠㅠ. 책에다 표지 갖다 붙인 사진을 올렸는데 안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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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12-08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죠?^^
저도 비비언 고닉 작가 참 좋아합니다.
이 책도 참 좋다. 그러면서 읽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억이 또 희미하네요.
재독해야 할 책인 것 같아요.^^

젤소민아 2025-12-08 10:58   좋아요 1 | URL
책읽는나무님, 오늘 제가 ‘리리딩‘ 리뷰 올렸어요~~‘재독‘이란 단어가 보여서 반갑네요~. 좋은 책은 재독, 삼독해야 할듯요. ‘리리딩‘ 꼭 읽어보세요~. 들러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매일 읽고 있다.

이제 고지가 보인다.


오늘은 <깊은 오한>을 읽었다. 

Enduring Chill


감내해야 하는 오한/추위


플래너리 오코너의 <깊은 오한>을 읽는 일은 인물과 함께 오한을 느끼는 경험이었다.

스물 다섯 살의 애스버리는 '아파 보이는' 청년이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 얼굴에서 죽음을 본 것이 기뻤다.

어머니는 예순의 나이에 비로소 현실 세계를 볼 것이고,

그 일로 어머니가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479)


그는 적 달 전부터 병세를 느꼈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서점에 자꾸 결근을 하면서 해고된다. 무일푼이 된 애스버리는 어머니의 집이 있는 텀버보로로 온다.


애스버리의 경우는 똑똑한 데다 예술가 기질까지 있어서 문제였다. (중략)

부인이 볼 때 사람은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능력이 줄어 들었다.

483)


애스버리의 어머니는 말하자면 '속물'인 것이다.

정신적 역량에는 추호도 관심 없고 그저 아들이 '땅에 발을 굳건히 디딘 사람'이 되어주길 원한다. 그 집에는 어머니와 그리 다르지 않으며 지역 학교 교장인 누나 메리가 있다.


애스버리가 느끼는 ‘깊은 오한’은 단순한 의학적 증상이나 일시적 몸살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홀로 계몽된 자가 맞닥뜨리는 숙명의 추위이며,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자에게 끝내 내려앉는 정화의 공포다.


애스버리는 집안에 고용된 흑인 하인들인 랜들과 모건에게 담배 불을 직접 붙여주고 함께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그 짧은 시간은 "흑인과 백인의 차이가 사라지는 드문 친교의 시간"이었고, 그는 그 경계가 사라진 지점에서 새 세상의 징후를 본다. 


애스버리는 착유장에서 막 짠 우유를 흑인들에게 건네준다.

그러나 검둥이들은 '사모님'이 마시지 못하게 한다며 우유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홀로 계몽된 자의 눈으로 본 세계는 죽음처럼 차갑다. 무지한 다수는 바뀌지 않고, 바뀔 의지도 없다. 애스버러는 '위대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신부에게서 결정적 좌절을 체험한다. 


자신이 홀로 떠안은 지식과 예술의 무게는 병이 되어 그에게 오한을 내린다.

그의 병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내적 고통이자, 

차라리 자살로 완수해야 할 책무처럼 여겨진다.


어머니가 부른 의사는 그의 병이 별것 아니라고 단정한다. 소도 흔히 치르는 증상일 뿐이라고 안도하며 흥분한다. 그 옆에서 애스버리는 홀로 절망한다. 자살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계몽된 자로서 죽음을 통해 완수할 의지마저 박탈 당한 그는, 이제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숙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오한은 깊어진다.


그때 오한이 시작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특이한 오한이었다.

너무 가벼워서 깊고 차가운 바다를 건너가는 따뜻한 잔물결 같았다.

숨이 짧아졌다.

(중략)


애스버리는 얼굴이 하얘졌고, 마지막 환상이 부서졌다.

(중략)


그는 남은 평생동안 자신이 허약해졌지만 질긴 몸으로

정화의 공포와 마주하고 살게 될 것을 알았다.

마지막 소용없는 항변이 가녀린 비명으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성령은 불 대신 얼음을 입고 잔혹하게 내려오고 또 내려왔다.


(513)


은총은 어떤 구원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계몽된 자가 살아남아야만 하는 잔혹한 정화의 힘으로 내려온다.


이 정도면 '저주'인 셈이다.

은총의 저주.


오코너의 소설은 결코 '은총'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제껏 20편 정도 되는 오코너의 단편을 읽는 동안, 실로 다양한 종류의 은총을 목격했다.


작게는 다르나 크게는 같은 은총.


오코너의 은총은 한결같이 낯설고 불편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부적응자에게서 죽음을 맞으며 맞이하는 은총,

물살 센 강으로 기약없이 뛰어들며 아이가 맞이하는 은총,

그렇게도 성가셔 하던 소에게 부딪혀 죽어가며 부인이 맞이하는 은총.


이번에는 몹시도 차가운 은총이다. 

오한으로, 깊은 오한으로 내려온 은총이다.


그 차가운 은총 앞에 홀로 선 에스버리는 마지막 방어선을 허물고, 

삶의 전면에서 무기력하게 두 팔을 벌리고 그것을 맞아 들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남은 생애 동안 이 오한을 견디는 일 뿐이다.


<깊은 오한>은 홀로 계몽된 자의 '저주같은' 숙명을 다룬 비극이다.


도래할 기미가 전혀 없는 '새 것'을 기다리는 지식인/예술가의 참담한 고독이다. 

무지한 다수 속에서 홀로 눈뜬 자가 맞닥뜨리는 고립과 절망이다. 


에스버리가 ‘공적 세계’ 속에서 계몽된 자로 존속될 수 없고, 

오히려 고립 속에서 자신을 소진한다는 차원에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얼핏 이어진다.















에스버리에겐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의 곁에 끝내 남는 것은 자신을 끝까지 따라다니는 오한이다. 


'깊은 오한'이란, 어쩌면 '계몽'이 끝내 도달하는 자리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빛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냉기와 함께하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에스버리는 이제 그 진실을 안다.

그래서 남은 생애는 바로 그 깨달음을, 혹은 그 계몽을, 

매 순간 추위처럼 견디는 일임을 예견한다. 


애스버리가 'Enduring Chil'을 감내하기로 하는지 어떤지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불 대신 얼음을 입고

잔혹하게 내려오고 또 내려온' 성령에 옅은 숨결이나마 의지할 수밖에. 


숨결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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