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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매일 읽고 있다.

이제 고지가 보인다.


오늘은 <깊은 오한>을 읽었다. 

Enduring Chill


감내해야 하는 오한/추위


플래너리 오코너의 <깊은 오한>을 읽는 일은 인물과 함께 오한을 느끼는 경험이었다.

스물 다섯 살의 애스버리는 '아파 보이는' 청년이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 얼굴에서 죽음을 본 것이 기뻤다.

어머니는 예순의 나이에 비로소 현실 세계를 볼 것이고,

그 일로 어머니가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479)


그는 적 달 전부터 병세를 느꼈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서점에 자꾸 결근을 하면서 해고된다. 무일푼이 된 애스버리는 어머니의 집이 있는 텀버보로로 온다.


애스버리의 경우는 똑똑한 데다 예술가 기질까지 있어서 문제였다. (중략)

부인이 볼 때 사람은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능력이 줄어 들었다.

483)


애스버리의 어머니는 말하자면 '속물'인 것이다.

정신적 역량에는 추호도 관심 없고 그저 아들이 '땅에 발을 굳건히 디딘 사람'이 되어주길 원한다. 그 집에는 어머니와 그리 다르지 않으며 지역 학교 교장인 누나 메리가 있다.


애스버리가 느끼는 ‘깊은 오한’은 단순한 의학적 증상이나 일시적 몸살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홀로 계몽된 자가 맞닥뜨리는 숙명의 추위이며,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자에게 끝내 내려앉는 정화의 공포다.


애스버리는 집안에 고용된 흑인 하인들인 랜들과 모건에게 담배 불을 직접 붙여주고 함께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그 짧은 시간은 "흑인과 백인의 차이가 사라지는 드문 친교의 시간"이었고, 그는 그 경계가 사라진 지점에서 새 세상의 징후를 본다. 


애스버리는 착유장에서 막 짠 우유를 흑인들에게 건네준다.

그러나 검둥이들은 '사모님'이 마시지 못하게 한다며 우유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홀로 계몽된 자의 눈으로 본 세계는 죽음처럼 차갑다. 무지한 다수는 바뀌지 않고, 바뀔 의지도 없다. 애스버러는 '위대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신부에게서 결정적 좌절을 체험한다. 


자신이 홀로 떠안은 지식과 예술의 무게는 병이 되어 그에게 오한을 내린다.

그의 병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내적 고통이자, 

차라리 자살로 완수해야 할 책무처럼 여겨진다.


어머니가 부른 의사는 그의 병이 별것 아니라고 단정한다. 소도 흔히 치르는 증상일 뿐이라고 안도하며 흥분한다. 그 옆에서 애스버리는 홀로 절망한다. 자살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계몽된 자로서 죽음을 통해 완수할 의지마저 박탈 당한 그는, 이제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숙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오한은 깊어진다.


그때 오한이 시작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특이한 오한이었다.

너무 가벼워서 깊고 차가운 바다를 건너가는 따뜻한 잔물결 같았다.

숨이 짧아졌다.

(중략)


애스버리는 얼굴이 하얘졌고, 마지막 환상이 부서졌다.

(중략)


그는 남은 평생동안 자신이 허약해졌지만 질긴 몸으로

정화의 공포와 마주하고 살게 될 것을 알았다.

마지막 소용없는 항변이 가녀린 비명으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성령은 불 대신 얼음을 입고 잔혹하게 내려오고 또 내려왔다.


(513)


은총은 어떤 구원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계몽된 자가 살아남아야만 하는 잔혹한 정화의 힘으로 내려온다.


이 정도면 '저주'인 셈이다.

은총의 저주.


오코너의 소설은 결코 '은총'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제껏 20편 정도 되는 오코너의 단편을 읽는 동안, 실로 다양한 종류의 은총을 목격했다.


작게는 다르나 크게는 같은 은총.


오코너의 은총은 한결같이 낯설고 불편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부적응자에게서 죽음을 맞으며 맞이하는 은총,

물살 센 강으로 기약없이 뛰어들며 아이가 맞이하는 은총,

그렇게도 성가셔 하던 소에게 부딪혀 죽어가며 부인이 맞이하는 은총.


이번에는 몹시도 차가운 은총이다. 

오한으로, 깊은 오한으로 내려온 은총이다.


그 차가운 은총 앞에 홀로 선 에스버리는 마지막 방어선을 허물고, 

삶의 전면에서 무기력하게 두 팔을 벌리고 그것을 맞아 들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남은 생애 동안 이 오한을 견디는 일 뿐이다.


<깊은 오한>은 홀로 계몽된 자의 '저주같은' 숙명을 다룬 비극이다.


도래할 기미가 전혀 없는 '새 것'을 기다리는 지식인/예술가의 참담한 고독이다. 

무지한 다수 속에서 홀로 눈뜬 자가 맞닥뜨리는 고립과 절망이다. 


에스버리가 ‘공적 세계’ 속에서 계몽된 자로 존속될 수 없고, 

오히려 고립 속에서 자신을 소진한다는 차원에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얼핏 이어진다.















에스버리에겐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의 곁에 끝내 남는 것은 자신을 끝까지 따라다니는 오한이다. 


'깊은 오한'이란, 어쩌면 '계몽'이 끝내 도달하는 자리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빛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냉기와 함께하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에스버리는 이제 그 진실을 안다.

그래서 남은 생애는 바로 그 깨달음을, 혹은 그 계몽을, 

매 순간 추위처럼 견디는 일임을 예견한다. 


애스버리가 'Enduring Chil'을 감내하기로 하는지 어떤지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불 대신 얼음을 입고

잔혹하게 내려오고 또 내려온' 성령에 옅은 숨결이나마 의지할 수밖에. 


숨결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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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하루 한편 읽고 있다.

오늘은 읽었다.

소설을 읽고 급기야 눈물 짓고 말았다.

소설 속의 아이에 자신을 겹쳐보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리.

우린 모두, <>에서 이런 아이가 된다.

농담으로 가득 찬 집에서 어른들의 진담을 기다리는 아이.

아이의 집에는 아이가 응당 받아야 돌봄이 없다

부모는 무심하다. 어머니는 병약하면서 병약을 부인까지 한다

아버지는 력하다

아이의 오른팔이 소매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단추를 채우고 

아이를 반쯤 열린 안으로 들어온 얼룩얼룩한 손을 향해 밀고 갔다.

(214p)

아이에게 닿는 손길은 언제나 결핍되거나 부재한다

아이에겐 그래서 집에서의 모든 말은 농담이 된다

자신의 집에서는 모든 농담이었다.

229p

집안의 어른들이 하는 말은 무게를 잃고, 약속이 되지 못한다

농담은 언제나 가볍다. 지켜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허무하니까. 허무해서 가볍다.

아이는 보모인 코닌 부인에게서 농담하지 않을 같은 어른의 기미를 본다.


집 안의 어른들에게서 배운 농담을 했을 때였다.

'해리'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두고 '베벌리'라고 말했을 때.

"이런 우연이! 아까 내가 말했지? 그게 설교자 선생님 이름이라고!"

아이는 보모의 반응이 신기해  요상한 이름을 말한다.

어째, 농담 같지 않다, 어른은.


코닌 부인은 아이를 강가로 데려간다.

강가에서는 설교자가 세례를 베푼다.

아이는 코닌 부인에게 했던 식으로 자기 이름을 베벌리라고 우렁차게 말한다

설교자는 웃지 않았다. 역시. 농담하지 않을 같은 어른이다.

설교자는 웃지 않았다. 그의 앙상한 얼굴은 굳어 있었고 

가느다란 회색 눈에는 색깔 없는 하늘이 비쳤다. 자동차 범퍼의 노인이 요란하게 웃었고, 베벌은 설교자의 옷깃 뒤쪽을 잡았다. 아이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229p

아이는 놀란다

처음으로 자기 말이 농담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자신의 언어가 약속처럼 느껴진 순간

설교자가 내린 세례는 아이에게 약속이 되었다


너는 이제 영원히 달라질 거야. 너는 명단에 들었어.


이에, 아이는 결심한다.

농담으로만 가득한 집을 선택하지 않기로.

좋아, 나는 집에 돌아가고 속으로 거야.

(229p)

약속으로 가득 강으로 가기로.

아이에게 약속된 명단은 아이에겐 이제껏 없던 세상,

구원이요, 희망이 되었다.


아이는 세례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여전히 무심하고 허무한 농담으로 가득 찼다

코닌 부인의 집에서 가져온 책은, 어른들에겐 희귀본이라 가치 있을 뿐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 무슨 거짓말을 했니

순간, 아이는 강에서의 신성한 세례의 약속마저 농담으로 오염됨을 느낀다.

언어와 의미 간의 끊임없는 미끄러짐-.

데리다의 '차연(差延)'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슬프고 아린 차연...



 







  













집안의 어른들에게서 지속적으로 미끄러짐을 경험한 아이는

급기야 결심한 대로, 강으로 향하기로 한다.

농담 아닌 진지한 약속을 찾기 위한 아이의 순례가 시작된다.


그러나 강은 처음에 그를 거부한다. 물살이 너무 급하다.

아이는 절망해서 속울음을 운다.

이것도 농담이구나. 이것도 농담이야!

(237p)

세상에 진담은 없는 걸까, 약속은 없는 걸까

모든 것이 또다시 오도(誤導) 걸까


그때 아이의 눈에 빨강, 하양 몽둥이를 흔들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거인 돼지 같은 게 보인.


죽음의 전령


그것은 사실, 주유소 노인이었다

아이를 붙잡아 구하려 아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약속의 손길.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농담에 지친 아이 눈에 그것은 공포의 형상으로 닥친다.

오도된 시선 속에서는, 구원의 손길조차 자신을 방해하는 농담의 세력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이의 마지막 선택은 강으로 다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때 강은 달라졌다. 이번에는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를 붙잡았다

강은 아이에게 돌봄의 손이 되었고, 약속의 실체가 되었다

아이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잠시 아이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몸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자신이 어딘가로 간다는 알았기에

분노와 공포를 버렸다.

237p

아이는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오도' 아닌 '인도' 받는다.

바로,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서.

(이런 종말은 까뮈의 '이방인'과 닮았다)


오코너의 미학은 바로 아이러니에 있다


아이를 살리고 싶었던 손길은 실패했고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강은 은총의 손길이 되었다

오도는 구원의 손길마저 오해하게 만들고

은총은 가장 몰락적인 형태로 도착한다


이토록이나 불편한 우리 생의 아이러니라니.


오코너의 문학이 주는 불편함-,

그를 추앙하게 되는 가장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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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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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일주일 전부터 한편씩 일고 있다.

같이 읽기로 했다. 글쓰는 사람들과.


매일 한편씩 읽고 단톡방에서 5줄의 후기를 나눈다.


오늘치 숙제는 <이녹과 고릴라>




어제 읽은 <행운>도 기가 막혔는데, 이건 또 다르게 기막히고 코막히고.

놀라움의 연속, 경이의 연쇄.


플래너리 오코너를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정도에서 

묵혀 뒀다는 사실에 땅 치고 후회했다.


오코너의 모든 단편마다, 그 어떤 소설 관련 수업이나 작법서에서 접하지 못했던,

혹은 살짝만 접했던, 혹은 내가 이해 못하고 넘어갔던 무언가를 배운다.


기회 되면 뭘 배웠나, 하나하나 풀어가 볼 참이다.

알라딘 서재란 것을, 말 그대로 '서재'의 기능으로 활용해 볼까 한다.


누구한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나중에 내가 다시 보기 위해 써놓기.


<이녹과 고릴라>


다른 사람에게 돋보이고 싶은 인물, 이녹은 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그 욕망을 이미 이룬 인물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인물에 자신의 욕망을 위임하고자 한다. 바로 서커스단의 고릴라. 사람들이 고릴라, '공가'를 보고 환호하는 걸 목격한 이녹은 그 고릴라가 되고자 한다.


자신의 욕망을 직접 수행하지 못하고, ‘대리자’를 찾은 것이다. 


말하자면, 욕망의 외주화(outsourcing of desire)-.


이녹은 스스로 욕망을 실현할 능력이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존재에게 자신의 욕망을 위임한다. 


서커스의 고릴라가 바로 그런 '욕망의 대리자'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여기까지는 아주 낯설지는 않다.

욕망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소설 속 인물은 숱하게 많았으니까.


욕망의 위임자 설정은 물론, 라캉과 지라르와 닿아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함에 매개를 거친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의 주체인 이녹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 혹은 매개인 고릴라에게 있다.

(물론, 이녹의 입장에서)


그 고릴라가 실재의 위엄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탈을 쓴 인간이란 사실!


신비로운 우상으로 보였던 고릴라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욕망은 허무로 드러나고 만다.


그러나 이녹은 허무할 새가 없었다. 더 나아가기로 한다.

그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녹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허무'와 '비탄'이 담보된, 타자를 매개로 한 욕망을 자신에게로 되돌릴 기회가.


바로, 고릴라에게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던 순간이다.


이제 그의 앞에는 아이가 두 명밖에 없었다. 첫 번째 아이가 악수를 하고 비켰다.

이녹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이녹 앞의 아이가 악수를 마치고 비켜서자

그는 유인원을 마주했고 유인원은 자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이녹이 그 도시로 와서 처음으로 잡아 본 손이었다.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잠시 손을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뒤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이녹 에머리야. 나는 로드밀 소년 성경 학교에 다녔어.

지금은 시립 동물원에서 일해. 네 사진 두 개를 봤어. 

나는 겨우 열여덟살이지만 벌써 시립 기관에서 일해. 

우리 아빠가 나를 여기로..." 


거기서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156p)


그러나 이녹이 시도한 정체성의 위임은 곧바로 좌절되었다.


작가와 독자, 모두 그걸 정확히 인지했다.

이녹만 빼고. 

이녹의 소외와 배제는 여기서 본격화, 아니, 이전보다 더 강화된다.


고릴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칠고 냉담하기 그지없다.


“저리 꺼져!”


이녹은 욕망을 대신 짊어 줄 타자가 무력하다고 인지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이녹은 욕망의 위임을 급기야 '모방'으로 전환한다.


욕망을 자기화하지 못하고 고릴라 탈을 훔쳐 쓰는 것으로 정체성을 모방하고자 한다.


잘 될 리가 없다.

그는 드디어 고릴라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자신을 본 사람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환호가 아니라 공포.

수용이 아니라 추방.


이녹이 욕망했던 '우상'이 '괴물'이 되는 순간.


어찌 보면, 우린 욕망하는 순간, '소외' 혹은 '배제'를 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별처럼 빛나고 돋보이는 존재 역시 어떤 각도에서 보면 '배제'를 경험하는 것 아닐까?


돋보임은 곧 시선의 집중이고, 시선은 언제나 구경거리와 낙인을 동시에 만든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순간에도 보라.


그 존재는 무대 위에서 고립되어 있다.


여기서 불현듯 끌어들이게 되는 기 드보르의 사유.


수동성은 분리의 본질적인 조건이다. 

“원자화된 군중” 속에 “고립된 개인”은 스펙타클을 필요로 하고, 

스펙타클은 개인의 고립을 강화시킨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어떤 이는 빛나지만, 어떤 이는 괴물이 된다

아니, 괴물로 비친다. 


이녹처럼.


생각해 보면,

욕망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타인의 시선과 환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환상에 모든 것을 위임할 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잃는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독자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욕망을 위임하는 자는 결코 그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며,

결국 자신의 (고릴라) 가면 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자문했다.

내 욕망은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니까.


그 욕망이 내 것인지, 타자의 것인지, 

오늘 하루는 곰곰히, 아주 곰곰히 생각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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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서 글을 쓰다 무심코 밖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지난 가을 어디쯤에서.



내가 그린 적 없는 그림이 캔버스에 들어찼다. 


창문에 달린 벌레 막는 스크린이 오히려 유화 캔버스의 거친 질감을 살렸다.


P. 5


사각형 틀 안에 세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은 창문과 닮았다. 창문 역시 우리를 더 넓은 세상으로 초대한다. 기꺼이 그리고 자연스레 그 초대를 받아들인 우리의 눈길은 창문 밖에 펼쳐지는 풍경으로 향하지만, 마음 한편에 일렁이는 정체 모를 감정들이 창 안의 나를 감싼다.


  • 경계에 서 있지 않고서는 그것이 경계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경계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많은 순간 경계에 서 있거나 심지어 그 경계를 넘나들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에는 잘 알지 못한다. (P. 61 )


책과 대화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저자가 책 속에서 말을 건네는 것 같은.


혹은, 마주 앉아 커피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그 날이 딱 그랬다.


내 마음을, 내 일상을, 내 상황을, 내 처지를

다 관통하는 것 같은 사람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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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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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이 ‘상실‘을 알고 쓴다면 디디온은 ‘상실‘을 알고 싶어 쓴다. 손택은 ‘상실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쓰고 디디온은 ‘상실‘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쓴다. 한 사람은 상실을 아파하고, 한 사람은 상실을 관찰한다. 두 개의 ‘상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상실을 체험하게 마련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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