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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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기도한 뒤 청동 창을 번쩍 들어
뒤로 물러서던 그의 목구멍의 아랫부분을 찔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거운 손을 믿고 힘껏 밀어 넣었다.
창끝이 그의 부드러운 목을 곧장 뚫고 나가자
그는 쿵 하고 쓰러졌고 그의 위에서는 무구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카리스 여신들의 머리털과도 같은 그의 머리털이,
금띠와 은띠로 단단히 땋은 그의 머리털이 피에 젖었다.
마치 물이 넉넉히 솟아오르는 탁 트인 장소에
농부가 올리브나무의 튼튼한 묘목을 심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나 온갖 바람의
입김에 흔들려도 흰 꽃을 가득 피우지만
어느 날 갑자기 큰 폭풍이 세차게 불어 닥쳐
그것을 구덩이에서 뽑아 땅에 길게 뉘듯이, 꼭 그처럼
판토오스의 아들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에우포르보스를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쓰러뜨려 무구들을 벗겼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역, 468-9.



*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에서는 개차반 악당 왕으로 나오지만, 호메로스의 묘사를 보면 메넬라오스 역시 아킬레우스 못지 않은 짱짱맨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무구를 벗기는' 등 약탈자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이란 약탈이 주목적인 행위였다고도 하고... 전장에서의 '탁월한' 활약을 묘사함에 있어 호메로스는 인물의 도덕적 면모나 중요도에 따라 차등을 두지 않는다.


* 힘들 때, 특히 (불특정 상대에게)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일리아스>의 하드고어물을 연상케하는(하지만 훨씬 간결 담백한) 잔인하고 리얼한 살상 장면을 읽는 건, 솔직히 큰 위로가 된다. 이런 표면적 맥락에서도 고전 읽기는 힐링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 메넬라오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에우포르보스는 오직 이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메넬라오스의 무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짧게나마 에우포르보스라는 인물의 내력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서정적인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에우포르보스의 내력은 "농부에 의해 심어져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난, 온갖 바람의 입김을 이겨내며 흰 꽃을 가득 피워 낸 올리브 나무"에 비유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란 나무라도 어느 날 큰 폭풍이 한 차례 불어 닥치면 뿌리가 뽑혀 죽고 만다.

* 이런 장면들은 ‘인생은 속절없고, 운명은 무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같은 주연 배우들 역시 동일한 파토스를 전해주지만, 에우포르보스의 죽음은 그가 '엑스트라'이기에 한층 더 절절한 구석이 있다.

* 구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위와 같은 묘사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아름답다. 고도로 이상화된 영웅의 행위가 가장 일상적인 비유와 어우러져 있으며,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가장 드라이한 묘사와 가장 서정적인 묘사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그렇다. 위 대목은 살육의 '순간'을 건조하게 묘사한 것이지만, 호메로스는 그 순간적 사건을 자연의 섭리라는 입지에서 조명한다. 잔인함에 경악한다거나 무상한 죽음에 슬퍼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허용되지 않지만, '올리브나무' 비유를 통해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존재가 영원성을 얻는다. 호메로스의 묘사는 마치 차원 이동을 방불케 한다. 작품의 핵심을 요약한다거나 청소년용 축약본을 만들 때면 빠질 게 분명한 게 이런 ‘엑스트라들이 죽어나가는 장면들’이겠지만, 실은 이게 바로 <일리아스>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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