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거장들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연순.박희석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나에게는 당신 외에 더 유익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당신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하고 레거는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지요,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바로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 장본인이라는 것을 말해버렸습니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143.

 

 

베른하르트는 작중 인물 레거의 입을 빌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처음에 나는 저 대목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저 대목이 계속 기억에 남아 반복해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베른하르트의 의도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뻔뻔스럽다는 느낌은 전적으로 자기 감정이다. 곧 자의식의 감옥에 감정을 가둬두는 것이다. 듣는 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뻔스러움을 무릅쓰고 입 밖에 꺼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비할 데 없이 뻔뻔스러운 일'이 상대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저 대목이 소설 <옛 거장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어제 폭풍 소나타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오늘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오늘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곧 이미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정말 무의미하듯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무의미한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모든 이야기가 조만간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능한 한 최고의 열정으로 확신에 차 말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까지는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침묵하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141.

 

 

 

 

 

"우리는 생각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까지는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침묵하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정말 그러하다. 말을 줄여야겠다고 항상 다짐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말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는 내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정신없는 헛소리이거나 상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기 위한 아첨이거나,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이고 아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스스로와 대화 상대자, 그리고 나아가 세상 전체를 조소하는 말이거나 하기 때문이다.(아니면 세상 전체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자들만을 조소하는 것으로 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안전한(=같잖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줄여야겠다는 다짐을 매 순간 하더라도 결국은 지껄이게 되고 만다. 바로 그 이유를 베른하르트의 저 문장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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