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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른 중반, 매일 아침 절망과 함께 눈을 뜨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1967년 어느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우연히 조우한 후 그에게 세상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한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1979년까지 결핍과 냉소를 겉옷처럼 걸치고 다니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우정과 그를 향한 숭배, 그리고 그의 열정과 천재성과 순수함과 도발적 광기에 대해, 온전히 그를 위해, 그만을 위해, 그만에 대해서 한 권의 책이 될 글을 썼다. 소설이라는 장르로 출판되었으나, 소설적 구성은 완전 파괴되어 서사라는 것을 건져내기 어렵고, 사건과 인물이 어느만큼 허구가 가미된 것인지도 힌트조차 없다. 

 

줄바꾸기 없이 한 문단으로 구성된 하나의 책. 하나의 소설. 이것이 오스트리아의 천재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특징짓는 요소라고 하니, 작가의 이 어이없는 행간없음에 우선 집중해보고 싶다. 왜 문단을 바꾸지 않았을까. 작가는 1931년 생이고, 67년이라면 36살의 나이에 그를 만나 48세의 중년의 나이에 그가 그토록 숭배하던 친구, 그의 삶에서 많은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준 영혼의 친구 파울을 떠나보냈다. 처음 파울을 만나기 몇년 전부터 작가는 병적인 침울 상태에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둘러싼 무의미함에 저항하며 발버둥쳤지만 도리어 그 무의미함 속으로 깊이 침몰하고 있었고, 그런 무의미함 속에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혐오하며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던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작가 연보를 찾아보니, 작가의 이런 고백과는 달리 이 기간동안 작가는 문학가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56년부터 산문, 시집, 희곡 등을 출판하고 희곡이 초연되었으며 63년 첫 소설이 신문지상에서 중요 문학적 사건으로 평가받은 이후 파울을 만나기 직전인 64년 65년에 율리우스 캄페 상, 브레멘 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기 시작하며 전성기에 입성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는 오랜 교육과정과 습작 등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인정받고 전성기를 보내기 시작했을 때 반대로 절망하고 있었다.

 

1982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친구 파울이 죽은 직후 2~3년 안에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 행간없음이 뜻하는 건 파울만을 위한, 파울에 대한, 파울과 함께한 것들만 다룬다는 작가의 의지일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친구를 12년동안 응시하며 그 속에 자신을 투영하였다. 그와 함께 하며 보낸 음울과 조소와 광기로 가득찬 그 날들 속에서 축복받은 순간들을 기억했고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았다. 한행 한행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파울의 침울한 기록들로 채워가며, 파울의 죽음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과 그것을 다시 이어주는 끝도 없는 문장들의 변주를 통해 파울을 알게된 12년 그 긴 시간의 기록을 단 한 문단 속에 채워 넣고, 가두었으며, 그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고집스럽게 획일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설명하였다.  


파울이 열정과 광기로 죽음에 가까와지는 동안, 작가는 열정과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오르내렸다. 이렇게 열정과 광기와 질병이 두 사람 사이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파울의 인생에서 고귀한 가치를 찾는다. 그는 파울이 자신의 존재를 성향과 능력 그리고 욕구에 맞게 유용한 방식으로 향상시켜 주고 그의 삶 자체가 가능하도록 그를 지탱시켜 준 사람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자유롭게 대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동성 친구라고 고백하고 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이러한 고백들은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치열하게 심취해있던 음악이라는 것의 테마처럼 변주곡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흩어지며 길고 긴 한 문단의 전체를 관통하며 흐른다.

 

지금 일월의 냉기와 일월의 공허를 함께 이겨내기 위하여 내 곁에 있어 줄 산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과 함께 하면서 혹독한 시기를 극복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모든 죽은 자 가운데서 최근에,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인물은 내 친구 파울이다. 115

 

파울은 현실 감각이라고는 눈꼽만큼도 갖지 않은 6살짜리 어린애와 같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작가가 파울을 그토록 좋아했던 것은 그의 지적, 철학적, 문화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언변, 유머 등의 능력 말고도 그가 가진 어리숙함, 전체를 관통하지 않고 표면만을 보는 선량한 마음과도 관계가 있을 듯하다. 대개 인간은 부분만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능력이 있다. 내가 지금 이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모두 나누어준다고 해서 비참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질 리도 없을 것이고, 내가 지금 가진 모든 돈을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다 써버리고 나면 훗날 자신이 대신 비참하고 가난해진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파울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가난한 사람의 피상적 모습에 눈물 흘리며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 같던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인간의 불행과 비참함의 표면만을 위해 던져버리고는, 정작 인생의 후반부엔 모두에게 심지어 그토록 숭배하던 작가에게까지 외면당한채, 불행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게 죽어갔다.

 

생의 초반에는 소위 영화가 끝이 없다고 하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유함을 향유하며 훌륭한 보호 아래서 자랐고, 중략. 그 이후에는 자의식이 이끄는 대로 가족들의 의사와 어긋나는 길을 스스로 닦아 나갔고,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표면적 가치였던 것들, 즉 부유함과 풍족함, 그리고 안락한 삶을 버렸다. 정신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서 자기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중략. 루트비히는 파렴치한 철학자의 길로 나섰고, 파울은 파렴치한 미치광이의 길로 나섰다. 89

그 둘의 우정은 지적 우월함에서 시작된 냉소와 그 지적 우월함의 지나친 열정에서 비롯된 광기의 공유로 이루어졌다. 책을 덮었을 때, 나는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정보다 더 깊은, 두 사람만이 이해하는 어떤 종류의 언어와 문법, 그리고 코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불행하고 슬픈 기록이지만, 그것이 부러웠다. 우리는 친구와 가족과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때때로 어떤 한 가지 이상의 분야에 대해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 더 이상 가족과 친구와는 통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고 홀로되는 섬 하나를 만들고, 틈틈이 그 섬 숲에 숨는다. 그리고 그 섬 속에서 외로움과 우울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운다. 저자는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섬과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섬 사이에 서로 왕래할 수 있는 작은 구름 다리를 놓았다. 두 섬 사이를 잇는 다리는 서로의 섬을 확장시켜 섬세하고 멋진 둘만의 고유한 세계를 완성시켰다. 그 세계에서 두 개의 섬은 때로 하나의 세계가 되고 우주가 되었다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얼마나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했는지, 결핍과 우울이 가득 드리운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의 이미 완성된 문화 예술에 대한 열정적 사랑과 철학적 사고의 공유와 논쟁 속에서 둘이 얼마나 행복하고 따스한 날들을 향유하고 있었을지 상상해 본다. 그래도 슬프다. 그의 고백이 너무 솔직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직전의 몇주, 혹은 몇달, 혹은 몇 년일수도 있는 기간 동안, 그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다가 스스로가 산 사람이라기 보다는 죽음의 그림자에 더 가까운 모습이 되어갈 때, 작가는 그를 외면했다. 둘이 함께 했던 그 멋있었던 유머와 세상을 향해 마음껏 내지르던 냉소와 비난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면서도 그가 이제 너무 병약해져 살점이라고는 붙어있지 않은 채 거리를 스쳐가도 그가 더이상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자 작가는 그를 외면했다. 그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부정했다. 실제로 그랬었는지 소설적 허구가 가미된 것인지 모르겠는 부분은 가령 이 정도이다. 어떻게 외롭고 병들고 친구를 외면했을까. 하지만 그 외면을 작가는 독자에게 납득시킨다. 그래서 슬프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신랄하게 증오하고 비난했다. 그들의 우정은 증오와 저주와 비난과 조롱과 냉소와 같은 것들이 단단한 기둥을 이루었다.  여름이면 그들은 호텔 커피하우스 테라스의 늘 앉는 자리에서 오직 욕하고 비난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가 눈 앞에 나타났다 하면 그 즉시 그것은 혹평의 대상이 되었고, 몇 시간이고 지치는 법도 없이 다른 존재들을 헐뜯고 온 세상을 비난했으며, 말로 속속들이 쑤셔대고 처절하게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가 조롱하고 비난하고 맞서는 것들은 모두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것들이다. 자연을 증오했고, 문인들을 증오했고, 그들의 조국을 증오했고, 그들을 낳은 대지와 그들을 탄생시킨 가족들을 중오했다. 그들의 질병, 광기가 불러올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의사들을 극도로 저주했고,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술 작품들, 자신이 쓴 희곡의 초연과 오폐라 초연을 혹평하고 비난했으며 조롱의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에게 문학상의 주최들을 하나같이 비난했으며, 상금 때문에 똥물을 뒤집어 썼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폐수술 후, 안좋은 도시 공기를 피해 시골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살기 위해 머물러야 하는 시골을 극도로 저주했다. 원하는 예술 잡지 한권을 구할 수 없는 문화 예술의 향유와는 동떨어진 시골은 그에게 혐오스러운 곳이다. 그에게 시골은 원하는 잡지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이 도시 저 도시로 400킬로에 이르는 여행을 하게 하는 저주받은 곳이다.

너도 나도 대도시를 떠나 시골로 몰려가는 것이 유행이다. 대도시에서는 머리를 최대한으로 사용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귀찮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으로 가려는 진짜 이유이다. 중략. 대도시의 엄청난 장점들을 활용하고 누리기보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자연으로 도피하여 아둔한 맹목에 빠진 채 자연을 감상적으로 칭송하면서 그 안에서 퇴화해 가는 것이다. 중략. 나에게 적합한 삶은 대도시에 있는데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 폐를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른다. 108

 

시간과 공간은 한 시점의 기억에서 다른 기억으로 자유롭게 흩어졌다 모아짐을 반복하며 배치되고,  확장하며 변화하다가 다채로운 언어로 변주되며, 클래식 음악처럼 흐른다. 사건은 오로지 사유와 사유가 맞닿는 지점에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작가 임의대로 아주 조금씩 재생된다. 자전적 소설과 에세이의 아무 지점에서라도 서더라도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무질서한 문장은 우울과 결핍을 열정과 광기로 채색하며 행간 없이 잇는다. 한 문단의 무질서한 자유는 작가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을 끌어안은 채 변주를 끝낸다. 냉소적 유머와 위트가 끝나고 책을 덮고 푸욱 한숨을 쉬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울림은 시작된다. 슬픔도 그렇게 계속된다.  아이들이 물 속에 있어서 슬픈 것인지, 인간은 검은 죽음의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친구의 죽음을 외면해도 그것을 납득할 수 있는 존재여서 슬픈 것인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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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6-11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정갈하고 성실한 리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다시 갈무리합니다.

CREBBP 2014-06-13 13: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봄밤님 글도 잘 읽었어요. 늘 잘 읽고 있어요.

rendevous 2014-06-1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토마스와 파울 (이름만 불러보고 싶은 ^^)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특히 작품 창작기간 전후로 토마스의 상태에 대한 정보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드리면 마지막 단락에 '사건은 오로지 사유와 사유가 맞닿는 지점에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작가 임의대로 아주 조금씩 재생된다'는 문장을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연수 소설가가 말하는 것처럼 정해진 현실-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과 눈이 충돌하면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렇게 재구성딘 사건은 작가의 지향성에 따라 부분적으로 재생된다는 의미일까요?

CREBBP 2014-06-16 13:07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시는 의미가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소설론은 잘 모르지만 플롯이라거나 서사라거나 그런 것들이 완성되려면 일반적으로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생각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 소설의 경우, 생각이 우선이라는 거죠. 에세이처럼요. 그런데 그 생각은 오로지 파울에 대한 기억, 파울에 투영된 자신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요. 추상적인 생각들을 먼저 하기 시작하고, 그 사고의 여기저기에 사건들이 개입하는 식이요. 그런데 그것이 급작스럽게 문단바꿈 챕터 바꿈을 통해 주목되지 않고, 딱 클래식 음악으로 치면 변주곡 같아요. 문장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가면서 앞의 문장의 생각과 부분을 끌어오고 그다음 문장도 또 그 다음문장으로 그렇게 끝없이 한권끝까지 계속되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 이거 뭐야 왜 갑자기 얘기가 바꼈어 이런 생각이 들을 새가 없이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문단을 끊을 수 있는 데를 끊어봤어요. 여기 저기서 계속 문단끊기를 시도했는데, 그게 잘 안되는 거에요. 전체적으로 한 문단으로 유기적으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굳혔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작가가 문학상 시상식 때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건이 먼저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과 파울이 세상을 증오하고 냉소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나가다가 시상식이 똥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변주되고 계속 읽다보면 그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고의 일부, 파울에 투영된 자신의 일부(사실 가끔 파울과 자신이 큰 차이가 없기도 해요)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의견 교환 좋군요. ^.^

rendevous 2014-06-16 22:34   좋아요 0 | URL
클래식 음악에 대한 메타포 좋은 것 같습니다 ^^ 실제로 토마스가 음악애호가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몰락하는 자> 글렌 굴드 나오는 거 보면 음악적 소설을 안 했을 지 몰라도 음악에 확실히 애정이 있었던 것 같아 보여요 ㅎㅎ
 
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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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할 이 마지막 관문에는 죽음의 문턱,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과해야 하는 잔인하고 무서운 시간들이 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사회 구조와 제도권 내에서의 중산층의 삶에 대한 불공평함을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잭슨, 그리고 중피종이라는 암에 걸린 여자 글리니스의 죽음이다. 그러니까 충격적인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스스로 사라진 한 사람과, 서서히 저항하며 사라진 한 사람, 그 두 사람의 대조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가 언젠가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기 직전의 문제, 그 아무도 이야기하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책을 가득 메운 죽음의 그림자는 도도하고 심술궂고 이기적이고 예술적이고 우아한 글리니스의 것이다. 그리고 'So Much For That'이라는 원제의 이 책은 그 죽음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 한 사람의 죽음에게는 기막힐만큼 부수적이지만, 남겨질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될 만큼 중요한, 하지만 여전히 '부수적인' 것들을 다룬다.

 

글리니스가 중피종이라는 희귀암을 통해 죽음으로 다가가는 방식은 현대인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표준에 가깝다. 아프고, 여러가지 검사를 하고, 위험한 병이라는 소식을 듣고, 살기 위해 살아있는 많은 것들을 버리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지조차 모른 채, 인내하고, 견디고, 참고, 싸우면 한 줌 희망이 보일 것이라는 헛된 기대에 모든 것을 건 채, 한발 한발 주위의 사람들과 멀어지고, 남겨질 사람들의 생을 위한 담보들을 곶감 빼먹듯 빼먹으면서, 죽음에 다가간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지막 치료만 끝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그렇게 우리 시대에게 죽음에 다가가는 방식은 그 어느 시대의 죽음에 이르는 방식보다 잔인하다. 다른 시대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천천히 600쪽 페이지 전체에 걸쳐서 얘기한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보다 더 무섭고 이보다 더 파괴적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끝갈 데까지 가버려 이제는 브레이크를 걸어 세울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이 계속해서 최고 속도로 달려도, 자멸로 치닫는 설국열차, 그 자본주의와 닮아 있다. 우리는 어느새 의학이 거의 포기한 불치병마저도 긍정의 힘으로 누를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타도 대상이자, 누가 이기나 악물고 싸워야 할 경쟁 대상으로 여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병마와 싸운다는 은유가 그렇다. 누가 무얼 휘두르고 찌르고 부러뜨리고 파괴하나. 병이 와서 몸이 아픈 것 뿐인데.. 그 아픔을 겪는 것, 경험한다는 것, 그것일 뿐인데,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를 우리는 싸운다 여긴다. 사실 죽음은, 병은, 암세포는 그렇게 내가 고통을 참고 견디고 언젠가는 살아낼 수 있다고 소망하는 것으로 '이길' 수 있는 적군이 아니다. 의지와 분투와 노력으로 오르고 정복할 수 있는 어떤 숭고한 지상 목표도 적군의 진지도 아니다.

그녀는 물 없는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저편에는 '그 후 이후의 글리니스'라는 오아시스가 놓여 있었다. 과거의 글리니스와 똑같지만 그보다 더 나아진 미래의 글리니스, 그녀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마지막 항암 치료 광경이었다. 닥터 골드먼이 의기양양하게 이제 다 끝났다고 선언하는 광경. 셰퍼드가 일 년에 한 번씩 뒤뜰에 있는 그 바보같은 분수들을 씻어낼 때 부스러기와 침전물이 빠져나가듯 그녀의 피에 남아 있는 사악한 물질도 곧 빠져나갈 거라고 선언하는 광경. 그녀의 소변에서 나던 젖은 콘크리트의 칙칙한 냄새도 하루하루 조금씩 빠져나갈 것이다.

잘 죽는 것도 하나의 소망이다. 나는 나의 마지막을 글리니스처럼 가정의 재정을 파탄에 빠뜨리고,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의 삶을 벼랑끝까지 몰아 함께 파멸하는 길을 택하고 싶진 않다. 또한 글리니스처럼 희박한 생존가능성이라는 팩트를 외면한 채 허무하고 덧없는 희망을 품고 독성 화학요법에  몸이 부스러기 재처럼 조금씩 타 없어지듯 고통스런 방식으로 서서히 죽음과 마주하기도 싫다.  죽어 시체가 되기 전 숨쉬고 있을 동안엔 최소한의 인간된 존엄성을 지키는 것. 남겨진 사람들의 몫을 죽음을 가지러 가는 길목에 다 소비해 버리지 않는 것. 그렇다. 그것은 누구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리니스랑 나는 늘 빠듯하게 살았어. '두 번째 삶'을 위해 종잣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샴푸는 두 개 사면 하나 끼워주는 행사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샀어. 화장지는 값싼 홑겹으로 열두개들이를 사다 쓰고,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도 칠면조 버거를 할인하면 그걸 사다 먹었지. 그런데 이젠 한 번에 5백 달러, 5천달러씩 나가. 게다가 얼마인지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맘먹고 돈 쓰러 나온 것처럼 가격표도 없는 물건을 카운터에 잔뜩 쌓아놓은 것 같아. 본인 부담 비율은 20퍼센트 밖에 안되지만 가입자 우선 부담금 5천달러를 낸 후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검사 비용 하나만 해도 화장지를 엄청나게 살 수 있는 돈이라고

 

결국 글리니스는 자신의 중피암의 암세포 증식을 3개월 더 연장하기 위해 백만장자라고 불리웠던 돈, 우리돈 10억을 모조리 써버렸다. 이것은 물론,  기업의 이윤을 목표로 한 불합리한 사설 의료보험 서비스의 제도적 헛점과 우리나라의 의사들이 그렇게나 목청높여 주장하는 초현실적 '미국적으로 현실적'인 의료수가가 교묘하게 모의한 미국의 현실적 항암 치료비이다. 게다가 우리의 미국적 긍정 철학을 가진 담당 의사는 3주 겨우 남아 있는 글리니스에게 보험 적용이 안되는 새로운 항암제 1억짜리 항암제를 시도해 보자고 설득하고 있다. 제정신인가. 3주 남은 시간, 그 한 줌 남은 숨결을 또다시 항암제 투여로 때우라는 것이다. 게다가 잭슨에 의하면 이렇게 막대한 개인 의료비를 지불하는 미국이 의료 서비스 면에서는 내가보기에 OECD 국가 중 꼴찌다.

다른 부유국들과 비교해보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의(내가 보기에 OECD 국가 중) 유아생존률이나 암 생존율 뭐 그런 주요 통계를 보면 맨 꼴찌야 게다가 돈도 두배로 내고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이러닉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셰퍼드와 잭슨의 파산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소시민적 삶이 파산과 함께 파멸되는 것을 느꼈고 그것과 더불어 탐욕의 끝, 자본주의의 끝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하나씩 둘씩 작은 귀퉁이가 마모되다 보면 둑은 무너지고 시스템 전체는 붕괴된다.


남편은 대학을 포기하고 그가 숭고하고 정직하다고 믿는 육체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만물수리상을 차려 집안을 일구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백만 파운드에 사업체를 넘기고 잠시, 그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한다. 그가 꿈을 위해 타협되지 않은 많은 것을 과감히 내던진 채, 드디어 일생을 통해 꿈꾸어왔던 그 소박한 미래, 건강한 꿈을 위해 성큼 한 발짝 내딛었을 때, 매력적인 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복수하 듯, 도도하게 말했다. 당신의 의료보험이 필요해.

 

미국의 사회와 제도는 잭슨의 입을 통해 통렬하고 시니컬하게 해부된다. 어찌 보면 그는 미국 내 보수 성향에 가깝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의료 보험의 헛점은 잘 통제된 의료수가와 사회안전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정직한 서민의 월급을 온갖 종류의 세금이라는 이름하에 갈취해가는 정부와, 무임 승차를 권리로 아는 게으른 하층민들에게 자신들의 원래 몫을 떼어주지 않아야 했다. 그는 메디케이드와 메디케어의 혜택을 위해 49퍼센트의 '찐드기'들을 위해 51퍼센트의 '찐따'들이 죽도록 일하고 있다고 보았다. 잭슨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65세 이상의 환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는 메디케어는 응급 관리만을 제공해준다. 장기 환자는 정부로부터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호구 주인공 셰퍼드의 아버지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자 수술비만 덩그러니 지원받고, 그 이후의 서비스는 온전히 그의 몫으로 돌아가 버렸다.

 

몰염치하고 뻔뻔한 찐드기 여동생 베릴의 등장은 공평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에 다채로운 색상을 보탠다.  베릴은 40이 넘도록 자신의 집세를 감당하지 않으면서 골절 때문에 요양중인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는 뻔뻔녀이다. 부모의 집을 차지한 대가로 병든 부모를 돌보기는 커녕, 함께 살기 싫어, 돌보기 싫어, 근처의 사설 요양원에 보내 놓고는 집을 차지하고  방문조차  하지 않는다. 1년에 1억씩하는 사설 요양비를 부담해야 하는, 지리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죽어가는 아내의 병수발을 하고 있는 오빠에게 요양원 방문조차 미루는 인간 쓰레기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난방비까지 부담해야 공평한 게 되어버리는 찐드기. 왜 미국의 중산층이 그토록 오바마의 사회안전망 확충 제안에 대해 그토록 치를 떨고 반대하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는 캐랙터이다. 베릴은 잭슨이 혐오하는 찐드기, 즉 성실하게 일을 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면서 자신의 몫을 정부라는 탐욕스런 괴물에게 갈취당하는 찐따들의 피를 빠는 흡혈귀에 등골 브레이커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예를 들어 가족 내 찐따와 찐드기를 구분하자고 치면,  설사 그녀가 항암에 치르는 막대한 비용을 예외로 치더라도,  사실 가장 큰 찐드기는 바로 셰퍼드의 아내 글리니스이다. 그녀는 결혼생활 27년동안 오로지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 그녀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켜 왔으면서, 막상 남편이 원했고 처음부터 두 사람의 함께 설계했던 미래, 그토록 남편이 갈망하는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결국은 이런 저런 핑계로 배반해 왔다. 여기서 나는 그의 제 3국 이민과 육체적 노동을 통한 소박한 삶이라는 숭고한 계획에 동의하려는 게 아니다. 셰퍼드의 주위 사람들이 누누히 말해 오고 있듯 제 3자들에게 제3국은 도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핑계는 구구절절 옳다. 내가 주목한 것은 저자가 주인공들을 통해 말하는 것, 두 사람의 공생관계,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의 제도적 공생관계가 찐따와 찐드기들의 일방적 퍼주기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시각이다. 우리 여자도 여자에게 불리한 수많은 편견과 핍박과 관습의 역사에서 살아남다 보니 영악해져서 21세기쯤에는 본인의 능력으로 살아남는 것보다 찐따와 가족을 이루고 찐드기가 되어 사는 편이 훨씬 유리한 경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건 찐따의 2세를 출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요건이 우월한 신체적 정신적 매력과 결합해 찐따에게 만족스런 찐드기상을 소유했다는 착각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경우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술을 핑계로 집안일도, 아이키우기도 잘 하지 않았으면서, 가정 경제를 위해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집을 구성하는 물건들의 색깔과 위치와 가격과 브랜드를 선택할 수 있는 실제적 소유주였다.

파이와 아이들, 부엌 바닥 이외에 '그 전의 글리니스'가 정확히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전의 글리니스'가 평소에 금속 공예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것이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그녀의 착한 남편이 그의 친동생에게 퍼주는 돈에 대해 베릴을 험담할 권리를 똑같이 행사했다.

"오히려 정 반대지. 자기가 수혜자는 커녕 피해자라고 생각한다고, 항상 불만이 가득하잖아". 셰퍼드는 그건 글리니스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꼼짝없이 집 안 혹은 병실이라는 공간에 유폐되어 회복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붙잡고 고통과 마주하고 있는 불치의 암 환자에게 병문안은 유일한 사회적 접속 포인트이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에게 면회를 요청하는 암이라는 충격 요법은 대개 한 두번이면 끝난다. 게다가 대화 주제는 갈수록 빈곤해진다. 환자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는 모두 몸에 일어나는 것들 뿐이고, 병문안자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아픈 환자에게 염장지르는 자랑질 혹은 불평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소박한 집 밖에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점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불치병 환자의 마지막에 고립은 덤이다.

사람들은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맹렬하게 목숨을 유지하려고 버틴단다(p426)

한 때 그녀가 동행을 원하지 않는다면 혼자 두고 떠났을 하지만, 이제, 고통을 저당잡아 헛된 희망에 유배된 채 나날이 죽어가고 있는 그녀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보아야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차라리 의식을 잃는 편이 행복이 되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바랄 수 없어 그저 경감되기만을 바라는 세상. 그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정말 이곳을 떠나게 된 것 같았다. 저 관들이 쇠사슬처럼 지하 감옥에 그녀를 묶어 놓은 것 같았다. 강력한 칼로 그것들을 끊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품에 안고 가운을 질질 끌면서, 택시와 핫도그와 코카인 중독자와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전당업자 등이 가득한, 댕댕거리는 밝고 부산스러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의 여인을 내려주어 그 분홍빛 맨발이 차가운 콘트리트에 닿으면 그녀는 다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무섭다. 누구나 거쳐야하는 죽음을 이렇게 실존적으로 묘사해 놓은 책을 본 적이 없다. 소설과 드라마 영화 속의 죽음은 극적 효과를 일으키는 감상적인 것들이었다.  슬프거나,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그런 종류의 형용사이거나 부사였지 동사나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었다. 

생각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힘겹게 해낸 생각 가운데 투자한 에너지만큼의 가치가 있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이 생각, 즉 '생각 없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그게 모든 것의 표준이 되었다. 그냥 사는 것, 살아 있는 것.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주로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경우, 살아 있는 것이 그토록 소중한 일이 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서히 소멸해가는 것, 생각하는 에너지를 잃고, 생각하는  생각 마저 잃고, 그래서, 살아있는 의미와 집착을 잃고, 기억을 잃어가는 것. 죽음에 이미 그만큼 성큼 다가가 있는데도, 그녀는 기계적으로 항암제를 투여받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생각할 힘과, 집착을 잃은 채로..상상할 수 없어 그리워할 수도 없는 채로 숨쉬고 있는 시간들 말이다.

더 이상은 집착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그리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착이 사라진 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녀가 아는 것은 그 뿐이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글리니스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딸과 마지막 포옹을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끝까지, 아픈 엄마의 면회를 주저했던 딸 아멜리아도,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인생의 패배로 규정하고 맞서 싸우려 했던 글리니스도, 숙연하게 끝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이 될 그 순간에 서로를 포옹하던 그 순간에, 울지 않고 편히 보내주던 그 순간에...

 

마지막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작가의 유토피아적 환상이라 결론짓는다. 비극적 결말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데 전혀 무리없는 설정이었고 완벽한 소설적 구성을 이루는 결정적 몫을 했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고,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은 섹스하고. 헐리우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듯 완성된 결말이 많은 사람의 비극적 죽음을 결국은 해피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 것은 그 험난했던, 600 페이지에 걸친 글리니스의 죽음에 이르는 긴 여정을 헉헉거리며 따라오다 녹초가 된 독자의 감정 상태를 복구시키는 힐링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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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5-1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의학은... 브래이크도없고, 안전밸트도, 에어백도 없는 시속 200킬로달리는 스포츠 카 입니다. 오로지 장렬한 충돌만이 멈출 수있죠.. 천천히 우아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내려올 수있어야 합니다. 의사가 잘 돌봐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마시길.. 온전히 스스로의 깨달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랍니다.

CREBBP 2014-05-19 18:18   좋아요 0 | URL
뒤늦게 댓글을 보았네요. 방문 감사합니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스포츠카라는 말이 공감되네요.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혼란스럽기만 하네요.
 
제3인류 4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액션극의 묘미는 역시 반전이다. 모든 카드를 다 소진한 정의의 편에 이제 장렬한 죽음만이 남았을 때 짠 하고 나타나 반전을 이끄는 것은 경찰이나, 신이나 널부러져있던 애인이나 뭐 그런 제3자다. 이 책도 전투 막판의 편리한 반전은 비껴가지 않았다.  

 

제3인류 4편은 인간과 소형인간 사이의 전투와 독립 국가가 되기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담는다. 그 중에서 전투 내용은 거의 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독립국가의 건국과정, 그리고 소형인간들이 작은 섬에서 독립국으로서 외교 활동을 하며 에마슈들만의 경제 문화 사회 제도를 형성해 나가며 과정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전투 과정에서 이제까지 한 편이 되어 에마슈들을 만들고 신이되어왔던 마이크로랜드 팀은 노선 차이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이 되고, 펜타실레이아는 에마슈들에게, 누시아는 인간 특공대에게 각각 목숨을 잃지만, 결국은 다시 뜻을 합쳐 에마슈들의 건국을 돕는다.

 

전체 줄거리는 이전 편에 비해 간단하다. 에마슈 109가 구해낸 샤오제를 포함한 소형인간들은  우여곡절 끝에 마이크로랜드에 도착하나, 이미 인간을 위협하는 개체로 낙인찍힌 에마슈들은 대량학살의 위기에 몰렸다. 여기까지가 3편. 인류에 위협적인 개체로 낙인 찍힌 에마슈들은 이제 마이크로 랜드에서도 언제 대량학살될지 모르는 국제 정세의 위험속에 노출되어 있다. 에마슈 109의 모험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에마666을 비롯한 마이크로랜드의 에마슈들도,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품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화를 의심하며, 인간들 몰래 땅꿀을 파며, 자유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에마슈109 일행이 자기들의 미션을 완료하고 마이크로랜드로 돌아온 이유는 형제 에마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  에마슈들은 이제 스스로 신 노릇을 하는 인간들의 위선을 깨닫게 되고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마이크로랜드를 벗어나 그들만의 세상을 찾아 떠난다. 소형인간들이 협동하여 운전할 수 있도록 개조된 차량에 모두 탄 에마슈들은 따라붙는 경찰과 군 차량들을 따돌리고 멋지게 자동차 추격신을 한 편 찍고, 다비드와 누시아 커플의 도움을 받아 깊은 숲을 지나 먼 화산 지역 석굴 속에 터전을 마련한다.

 

인간 특공대들은 위성을 통해 에마슈들이 숨어 사는 지역을 알아내고 전투는 시작된다. 복잡하고 어두운 굴 속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에마슈들은 일차 전투에서 게릴라 작전으로 대령과 펜타실레이아 및 오로르를  비롯한 에마슈의 창조자들과 군인들을 포로로 잡는 등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만, 누시아는 인간이 에마슈들을 향해 겨눈 총알을 가슴에 맞고 숨진다. 소형 인간들의 기량을 과소평과했음을 깨달은 인간 특공대들은 대대적인 상륙작전으로 모든 에마슈들을 포위하고 승리의 직전까지 갔으나, 한 때, 인간과 거인의 싸움에서 거인의 멸종을 불러왔음을 기억하는 가이아는 인간과 소형인간 사이의 싸움이 인간을 멸망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을 염려하여, 화산을 폭발시킴으로써 싸움을 종식시킨다.  이 과정에서 에마슈들은 포로로 묶여 있던 인간 군인들과 오비츠 대령 팀이 화산폭발의 위험에서 목숨을 구해냄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화산 폭발 덕분에 전투는 에마슈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다비드는 에마슈들의 독립을 위해 199개국이 모인 UN 총회에서 그들을 대변하여 그들을 인간으로 취급할 것을 설득한다. 그들을 말로 설득하는 것은 실패하지면, 동료들의 기지로, 동물보호협회를 비롯한 모든 민간 단체 및 소수를 위한 협회체들의 설득과 지원을 이끌어내 극적인 동의안을 얻어냈다. 이들은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 대서양 한 복판에 자리한 외딴 섬 아소르스 라는 제도 네 꽃의 섬이라는 플로르스 섬에 정착한다. 그 땅은 포루투갈의 영토이나, 고래잡이를 하던 주민들이 생업을 잃고 인구가 줄어가던 중, 거액의 보상금에 합의해 다른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평화적으로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한편 소형인간들과의 전투에서 서로의 짝을 잃은 오로르와 다비드는 전생 여행을 통해, 그들의 첫 생애에 부부이었음이 밝혀지고, 1편에서 오로르에게 반했던 다비드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만, 로맨틱하기보다는 조금은 코믹하게 묘사된다. 이로써, 인간을 만든 거인을 인간이 멸망시킨 경위가 모두 설명되었고, 사랑은 이루어졌고, 연구원들의 미션은 완수되었다. 처음부터 작가는 다비드웰즈를 통해 소형인간이 차세대 인류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데,  그렇다면 5편에서는 거대한 쓰나미나 행성 충돌 같은 엄청난 사건에 인간들이 거의 멸망하고 극소수의 인간이 소형인간들과 살아가다가, 6편 쯤에서는 에마슈들의 까마득한 후손들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될 듯하다.

 

제2부 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아마도 한권짜리 원서를 쪼개서 두 권으로 나누어 출판한 듯하다. 인기 작가의 한권짜리 책을 두 권으로 나누다 보니 얇아지는 게 안스러웠던 모양이다.  책의 크기를 확 줄여서 320페이지를 만들었고 양장 표지도 완전 두껍다. 판본 크기는 미니북 보다 조금 큰 정도이다.  그러니까 베르나르씨는 이제까지 1부, 2부 총 두 권을 썼는데, 번역되면서 각 한 부가 양장판 두권짜리로 바뀐 듯하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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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3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편 줄거리 바로가기

2편 줄거리 바로가기

 

 나에게도 인간을 닮은 예쁜 미니 인간들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다. 어릴 적 나의 에마슈는 베르나르 베르나르가 창조한 것보다 훨씬 작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고, 시험을 볼 때 모르는 답을 알려준다거나, 혼자 있어 심심할 때 수다를 떨만한 천사 같은 수호신이자, 친구였다. 나에게만 필요했으므로, 한 명이면 충분했다. 나의 에마슈는 꽤 오랫동안 내 머리속을 굴러다니다가, 키가 더이상 안클 무렵부터 사라져갔다.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소형 인간 에마슈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1편과, 2편은 전개에 불과하다. 에마슈들이 곳곳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하고 변화해 가고, 하나의 시점을 갖는 인격체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여기부터 읽어도 괜찮을 듯 싶다. 처음 다비드 웰즈와 연구진들이 유전자 합성을 통해 만들어냈을 때, 그 숫자가 천명이었던 에마슈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번식이 가능해졌고 그 숫자도 5천을 넘기 시작하면서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을 마이크로랜드 내에서 학습하게 되고, 세계 곳곳에  인간을 위한 도구로 임대되어 활약한다. 문제는 그들이 인간이냐, 동물이냐, 물건이냐, 그들이 무엇이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도구화되었다는 점이다. 세계 각국으로 임대된 에마슈들은 인간 사회 구석 구석에서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헌신적이고 복종적인 일꾼들이 된다. 그들은 대통령의 서재에서 하루 종일 책상 정리를 하고, 정교한 작업이 요구되는 외과 수술을 하는 등 활약이 눈부시다. 그러나, 어디에든 악인은 존재. 외과 수술의로 임대된 한 에마슈를 의사의 아들이 데려가 고문과 가학행위 후 서서히 몸을 난도질하며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을 계기로 에마슈들에 대한 정체성 문제가 대두된다.

 

상냥하고 인간 친화적으로 인간의 일을 도와주는 에마슈들에게 막상 가혹행위와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인간들은 이제 사건의 법적 적용을 둘러싸고 악마적 본성을 드러낸다. 에마슈의 가혹행위 및 살해에 살인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인간이냐 하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라면 이제까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맞춤형 도구화 되어 있는 그들과 창조주로서 숭배받는 관계를 청산하고 동일한 인격체로 대해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인류 역사를 볼 때 인간이 언제 이기적이지 않았을 때가 있었던가. 인간의 유전자가 흐르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에마슈들이지만 단지 애완용 장난감이자,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구일 때만 인류의 본성적 이기심을 충족시킨다.  따라서, 범죄자에게 살인죄를 물으려면 에마슈들은 인간이 누리는 기본적 권리를 부여받아야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들에게 의지했던 많은 편리함을 포기하고 그들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150년 전 미국에선 목숨을 걸고 같은 종족인 인간 노예의 해방을 반대했던 인간들이 바비인형만한 소형 인간들에게는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까.

 

다비드 월즈는 에마슈의 인권을 지지해줄 단체들을 찾아 나선다. 그가 찾은 단체의 반응은 재미있다. 동물보호협회에서는 인간의 유기체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므로 동물들 대신 에마슈를 생체 실험에 이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지지를 거부한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찾아간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우리 인간과 동일 종이 되기 위해서는 성관계를 통해 혼혈의 자식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며, 거절한다. 대안세계화 운동가들은 착취당하는 제3 세계 민중을 수호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므로 유사인간들을 지원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낭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찾아간 공산당 간부들은 애마슈들이 우리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위험하고 까다로운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에마슈들의 인권을 갖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들 모두 정의와 인류 평화를 위해 설립된 단체들이지만, 협회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제3의 인류는 그들에게 외면의 대상이다.

 

결국 사건이 일어난 오스트리아 법정에서는  에마슈들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렌터카 와 유사한 임대물품의 훼손과 반환> 에 대한 범죄에 적용한다. 이런 일들. 판타지 속 인간으로 애지중지 아끼며 읽는 도중 잔혹 변태의 피해자로 묘사하니 작가가 밉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 심지어 노예제도 하에서의 인간은, 더 한 취급을 받지 않았던가. 설상가상으로 중국에서 파견한 도둑들은 번식에 필요힐 남자 '씨에마슈' 3명을 훔쳐 임대 에마슈와 합체 자체 번식에 성공하고, 불법 복제를 통해 인위적 방법으로 속성 성장시킨 허약하고 질 낮은 짝퉁 에마슈인 샤오제들을 생산, 헐값에 시장에 내놓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 인구는 30만명. 이제 샤오제들은 100유로 안쪽의 헐값으로 각 분야로 팔려나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노예가 되었고, 에마슈를 만드는 다비드의 피그미 프로덕션은 샤오제들을 만드는 중국의 거대 기업을 상대로 불법복제 소송을 제기하지만 특허권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 틈에 2편에서 도주했던 애마슈 109는 가학의 현장에 있던 동료 애마슈 10여 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소년을 살해하고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이 전세계 네트웍을 타고 인터넷 생방송으로 전파되고 있고 이제 피그미 프로덕션의 예마슈들은 인간친화적인 상냥한 도우미에서 인간을 위협하는 위험한 개체로 낙인찍히기에 이르렀고 주가는 바닥을 친다. 많은 일들을 겪지만 에마슈 109와 동료들이 디스카운트 펫 샵에서 팔려 가기를 기다리는 샤오제들의 구출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에피소드는 또다른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대량 생산, 속성 성장하며 인간의 도구로서만이 자신의 정체성이 완성된다는 신념을 갖도록 세뇌당한 샤오제들은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며 원치도 않는 것이다.

 

- 우리보고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는 샤오제가 된다는 건가요?

- 미안해요 우리는 자유를 얻기 보다 우리의 가치를 높여 줄 좋은 고객에게 팔려 나가고 싶어요.

- 나는 사무실 책상에 올라 가서 필기구를 관리하는 일을 하는게 꿈이에요.

- 나는 텔레비전 위에 올라 앉아 있다가 주인이 신호를 보내면 리모콘을 들고 달려 가는 일을 하고 싶어요.

- 만약 아무도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쓸모가 없게 되 잖아요. 296 297

 

나는 시키는대로 일하면서 살고 싶어요. 만약 내가 자유를 얻게 되면 하루하루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거에요. 그러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죠. 그보다 부르는 일이 또 있을까요 298

 

자유란 누군가에겐 목숨과 맞바꿀 숭고한 가치지만, 세뇌된 다른 이들에겐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내 고유 가치조차 무용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제 에마슈 109는 혁명가이다. 거의 속임수에 가까운 설득 끝에 펫샵을 빠져나온 샤오제들은 고객의 사무실이나 티브이 위에 앉아 장난감이 되는 대신 죽음과 맞서야 하는 많은 위협 앞에 한치의 앞도 알 수 없는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한편, 가이아의 회상은 선인류인 거인들의 멸망을 설명한다. 가이아(지구)는 혜성과의 잦은 충돌로 파괴될 운명에 처하자 자신의 창조물인 거인들에게 10배 작은 크기의 현인류를 만들어 핵폭탄을 실은 우주선에 태워 다가오는 위성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겼었다. 그러나 우주선에 있던 현인류의 내분으로 지구에 다가오던 테이아 7의 파괴가 실패로 끝나고, 거인들의 섬 아틀란티스가 혜성과의 충돌로 사라질 운명에 처하자 가이아는 거인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벽화로 남기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로서 1편의 시작 샤를 웰즈의 아버지 애드몽 웰즈의 죽음이 인류가 가진 태초 문명의 수수께끼들의 실마리들을 제시하며 소설적 상상력을 통해 밝혀지는 순간이다. 세계 각지의 고대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피라미드, 신화의 유사성, 정교한 고대 벽화, 이런 모든 것들을 첨단 과학을 가진 8천년전의 선인류 거인의 존재로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로 맞추듯 하나의 그림으로 수렴시킨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너무 많은 지식의 전시를 즐기는 듯하다. 전체 스토리에 크게 영향을 주지도 않고, 딱히 어떤 장치로 쓰인 것 같지도 않은 채, 본문에 삽입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7은 소설 읽기의 집중을 방해한다. 그는 어느 일정 수준의 과학에 바탕을 두고 사건의 진행을 설명하고 묘사하다가, 막히면 그다음 부터는 상상력에 맡기는 선택을 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에마슈들은 단지 작기만 한게 아니다. 그들은 효과적인 면역체계와 방사선에 대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 난생 포유동물인 오리 너구리에 대한 연구로 알에서 부화하도록 설계된  에마슈들은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 x선을 조사하여 알 속에 들어있는 애마슈들의 방사선 저항성을 생성시킨다. 처음에는  시험관 수정으로 성공한 에마슈들은 우리 너구리처럼 자연적으로 알을 낳고, 인공 부화 과정에서 다양한 처리를 해 저항력을 높인다. 다소 코미디 같은 엉뚱한 발상이다.  또한 한편으로, 치밀해야 할 에마슈들의 저항 장면, 전투 장면 등의 소설적 세부 묘사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허술하고 능청스럽게 넘어감으로써, 작가가 해야 할 고민을 독자가 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 인류가 수 세기를 거쳐 이루어낸 기술과 노력의 성취들을 한 명의 에마슈가 자기 글자 사이즈보다 10배 큰 글씨의 거인의 백과사전을 읽고 혼자서 맥가이버처럼 모든 걸 해결할 때에는 작가가 그럴 듯하게, 독자가 상상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묘사를 해야하는데, 대충대충 독자의 상상에 맡겨버리는 안일함이 이 거대하고 재미있는 플롯에 비해 아쉽다.

 

1편 2편을 뒤돌아 보면 태초 인간을 창조한 것은 인간보다 10배큰 거인들이었고 그들은 인간에 의해 멸망했고, 지금 인간은 다시 또 인간보다 10배 작은 소형인간을 발명해 그들의 신 노릇을 한다. 언젠가 소형 인간들은 다시 또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들보다 열 배 적은 정소영 인간들을 만들고 그들에 의해 멸망하고 또 그들은 다시 또 10배 적은 인간들을 만들고 멸망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무한 반복으로 바이러스나 미생물만큼 인간이 작아지다가 사라질까.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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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A-H1N1 독감 바이러스 :

제3인류 2편의 약 1/3 이상은 독감 바이러스가 가져오는 종말적인 인류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파괴와 약탈과 탈출과 구조 자동차씬까지 완전 한 편의 재앙 영화처럼 비주얼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집트에서 발생한 독감이 빠른 속도로 전세계를 강타한다. 급속도로 확산되는 독감 바이러스로 인해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증상이 시작되고 하루만에 죽어간다. A-H1N1 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한 과학자와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미 정보기관에 의해 빠르게 제거된다.  그러나 빠른 전파와 확산 대량의 사상자로 이어지는 독감은 곧 이슈가 되고, 길거리는 약탈과 폭력 화염으로 바뀐다. 오비츠의 비밀 연구소는 대톨령에게 이 소식을 먼저 전해듣고, 식량을 비축하고 연구소를 봉쇄하지만, 각각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고 온 다비드와 오르르는 몰래 빠져나가 그들을 구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다비츠의 어머니에게 바이러스 확산의 속도는 너무 빨랐고, 오로르의 아버지에겐 혈육인 딸마저도 약탈자로 의심하게 만들어 결국 그들은 구조에 실패하고 만다. 방역복을 입은 그들은 약탈자들의 눈에 쉽게 띄고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액션 영화같은, 자동차들의 지붕 위로 마구 주행하는 장면을 연출하며 천신만고끝에 겨우 비밀연구소로 돌아오지만, 비밀 연구소 역시 안전한 지대가 아니었다.  식량이 있는 것을 눈치챈 피난민들의 공격에 총격으로 맞서며, 하루 하루를 힘겹게 버텨가지만 시간이 흘러도 바이러스의 기세는 멈출 생각이 없고 인류는 20억이 죽어간다. 비축한 식량도 떨어지고, 극저칼로리로 연명을 하게 되면서 그들은 연구실 내에서 개발한 작은 동물들을 하나씩 잡아먹고 결국 그들이 키워낸 17cm의 작은 소인 에마슈들까지 먹힐 위기로 몰아가는 둥 연구소 내 분위기는 쌀벌하고 흉흉해진다.  눈이 내리며 추위가 시작되자 그제서야 바이러스는 기세를 꺾고 사라진다.

 

 

호모 메타모르포시스 (에마슈) :

알에서 꺠어난 아기 소인의 성공적 탄생은 다른 많은 에마슈(MA)들을 탄생시켰다. 최초의 에마는 에마슈001, 그 다음부터는 깨어난 순서대로 에마슈 002, 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들의 성비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게 계획되었으나, 자연 번식을 위해 남성의 비율도 은 90:10 정도 된다.  비밀연구소에서는 테라리움에 이들을 위한 마이크로랜드라는 마을을 짓고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한다. 에마슈들은 인간보다 10배 빠른 속도로 자란다.  바이러스 내성을 가지도록 유전공학적인 설계로 탄생된 그들은 인간들이 A-H1N1에 걸려 80억 인구중 20억 인구가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아무 희생없이 생존한다. 이들은 여섯명의 인간들에게서 필요한 교육을 받으며 평화롭게 살아간다. 2년의 시간동안 이들의 신체 연령은 20세가 되어 건강한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비츠는 저마다 자기 일에 몰두해있고, 말수가 적으며, 전혀 성욕도 느끼지 못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만을 주고받는 것을 목격한다.  

- 인간은 공포와 좌절과 불의와 고통을 겪으며 성장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싸우고자 하는 욕구와 사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키죠.

-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 주기도 하죠.

- 에마슈들을 성숙시키려면 공포를 가르치고 결핍이 무엇인지를 꺠닫게 해야 한다는 건가요?

- 이제 시작이에요. 우리는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는 일에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 지 겨우 깨닫기 시작했어요

 이 토론을 지켜보던 대령의 남편이자 거구의 마르탱은 한밤중 테라리움에 침입하여 에마슈들의 물탱크에서 물과 보드카를 바꿔치기 하고, 마이크로랜드의 샘물에선 물대신 보드카가 흐르게 된다.  마이크로랜드는 물인 줄 알고 마신 에마슈들에 의해 보드카 소동으로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황폐해졌다. 건물들이 불에 타고, 분별없는 성행위가 이곳 저곳에서 벌어졌으며, 폭력에 일부 에마슈들은 문을 부수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통제불능의 에마슈들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이제껏 비밀연구원들은 인간의 종교를 그들에게 주입시킨다. 가장 충동적이고,  반항심이 강해 에마슈 001을 살해하기까지한 에마슈 666을 교주로 삼아 연구소 요원들은 각각의 영역에 따라 신의 권위 나누어 갖는다. 예를 들어 오비츠는 전쟁의 신이 된다. 에마슈666은 처음에는 반항하나 인간이 지옥이라 가르친 곳에서 고문과 같은 극한 상황을 만나게 되자 무력해지며 인간을 신으로 따르기로 하고 열렬한 신자가 되어 에마슈들을 종교의 세계로 이끌고 종교 의식을 행한다. 이제 6명의 인간은 에마슈들을 창조한 창조주인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을 조정할 수 있는 신이 되었다.

 

첩보작전

이란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보복으로 행해질 예정이었던 핵공격이 독감 바이러스로 무산된 지 2년이 지난 후 800개의 핵기지에서 핵미사일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오비츠는 이스라엘에서 제작한, 우주선 모양의 소형 무인 항공기에 에마슈 한 명씩을 각각 태워 기지로 보내, 폭파 작전을 실행한다. 리야드를 향해 날아가던 핵미사일은 이 작전으로 인해 중간에 무력화되었지만, 두 명의 에마슈가 탈출 도중 발각되어 마이크로랜드에 귀향하지 못하게 된다. 에마슈 109는 UN에게 인도되자 교육받은 대로 자신이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하나 다른 에마슈가 이란의 군인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자백하게 되고, 프랑스 대통령과 UN은 전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렵사리 하수구로 도망친 109와 동료 에마슈는 쥐들의 습격과 싸우면서 맨하탄의 센츄럴 공원 지하 어딘가에서 생존을 하던 중 많이 다친 동료는 결국 죽고 에마슈 109 혼자 남게 된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UN에서는 프랑스 대통령을 압박하여 에마슈들을 모두 없애기로 하고, 에마슈들은 대량학살될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때마침 발생한 지진으로 후쿠시마에 제2의 원전 사태가 발생하자, 오비츠 대령은 이를 기회로 에마슈 부대 24명을 긴급 파견하기로 함으로써 몰살의 위기에서 구해내지만, 에마슈들은 후쿠시마 원전의 비상용 냉각 시스템 복구 임무 도중 순직한다.

 

1편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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