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할 이 마지막 관문에는 죽음의 문턱,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과해야 하는 잔인하고 무서운 시간들이 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사회 구조와 제도권 내에서의 중산층의 삶에 대한 불공평함을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잭슨, 그리고 중피종이라는 암에 걸린 여자 글리니스의 죽음이다. 그러니까 충격적인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스스로 사라진 한 사람과, 서서히 저항하며 사라진 한 사람, 그 두 사람의 대조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가 언젠가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기 직전의 문제, 그 아무도 이야기하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책을 가득 메운 죽음의 그림자는 도도하고 심술궂고 이기적이고 예술적이고 우아한 글리니스의 것이다. 그리고 'So Much For That'이라는 원제의 이 책은 그 죽음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 한 사람의 죽음에게는 기막힐만큼 부수적이지만, 남겨질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될 만큼 중요한, 하지만 여전히 '부수적인' 것들을 다룬다.

 

글리니스가 중피종이라는 희귀암을 통해 죽음으로 다가가는 방식은 현대인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표준에 가깝다. 아프고, 여러가지 검사를 하고, 위험한 병이라는 소식을 듣고, 살기 위해 살아있는 많은 것들을 버리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지조차 모른 채, 인내하고, 견디고, 참고, 싸우면 한 줌 희망이 보일 것이라는 헛된 기대에 모든 것을 건 채, 한발 한발 주위의 사람들과 멀어지고, 남겨질 사람들의 생을 위한 담보들을 곶감 빼먹듯 빼먹으면서, 죽음에 다가간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지막 치료만 끝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그렇게 우리 시대에게 죽음에 다가가는 방식은 그 어느 시대의 죽음에 이르는 방식보다 잔인하다. 다른 시대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천천히 600쪽 페이지 전체에 걸쳐서 얘기한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보다 더 무섭고 이보다 더 파괴적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끝갈 데까지 가버려 이제는 브레이크를 걸어 세울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이 계속해서 최고 속도로 달려도, 자멸로 치닫는 설국열차, 그 자본주의와 닮아 있다. 우리는 어느새 의학이 거의 포기한 불치병마저도 긍정의 힘으로 누를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타도 대상이자, 누가 이기나 악물고 싸워야 할 경쟁 대상으로 여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병마와 싸운다는 은유가 그렇다. 누가 무얼 휘두르고 찌르고 부러뜨리고 파괴하나. 병이 와서 몸이 아픈 것 뿐인데.. 그 아픔을 겪는 것, 경험한다는 것, 그것일 뿐인데,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를 우리는 싸운다 여긴다. 사실 죽음은, 병은, 암세포는 그렇게 내가 고통을 참고 견디고 언젠가는 살아낼 수 있다고 소망하는 것으로 '이길' 수 있는 적군이 아니다. 의지와 분투와 노력으로 오르고 정복할 수 있는 어떤 숭고한 지상 목표도 적군의 진지도 아니다.

그녀는 물 없는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저편에는 '그 후 이후의 글리니스'라는 오아시스가 놓여 있었다. 과거의 글리니스와 똑같지만 그보다 더 나아진 미래의 글리니스, 그녀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마지막 항암 치료 광경이었다. 닥터 골드먼이 의기양양하게 이제 다 끝났다고 선언하는 광경. 셰퍼드가 일 년에 한 번씩 뒤뜰에 있는 그 바보같은 분수들을 씻어낼 때 부스러기와 침전물이 빠져나가듯 그녀의 피에 남아 있는 사악한 물질도 곧 빠져나갈 거라고 선언하는 광경. 그녀의 소변에서 나던 젖은 콘크리트의 칙칙한 냄새도 하루하루 조금씩 빠져나갈 것이다.

잘 죽는 것도 하나의 소망이다. 나는 나의 마지막을 글리니스처럼 가정의 재정을 파탄에 빠뜨리고,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의 삶을 벼랑끝까지 몰아 함께 파멸하는 길을 택하고 싶진 않다. 또한 글리니스처럼 희박한 생존가능성이라는 팩트를 외면한 채 허무하고 덧없는 희망을 품고 독성 화학요법에  몸이 부스러기 재처럼 조금씩 타 없어지듯 고통스런 방식으로 서서히 죽음과 마주하기도 싫다.  죽어 시체가 되기 전 숨쉬고 있을 동안엔 최소한의 인간된 존엄성을 지키는 것. 남겨진 사람들의 몫을 죽음을 가지러 가는 길목에 다 소비해 버리지 않는 것. 그렇다. 그것은 누구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리니스랑 나는 늘 빠듯하게 살았어. '두 번째 삶'을 위해 종잣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샴푸는 두 개 사면 하나 끼워주는 행사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샀어. 화장지는 값싼 홑겹으로 열두개들이를 사다 쓰고,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도 칠면조 버거를 할인하면 그걸 사다 먹었지. 그런데 이젠 한 번에 5백 달러, 5천달러씩 나가. 게다가 얼마인지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맘먹고 돈 쓰러 나온 것처럼 가격표도 없는 물건을 카운터에 잔뜩 쌓아놓은 것 같아. 본인 부담 비율은 20퍼센트 밖에 안되지만 가입자 우선 부담금 5천달러를 낸 후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검사 비용 하나만 해도 화장지를 엄청나게 살 수 있는 돈이라고

 

결국 글리니스는 자신의 중피암의 암세포 증식을 3개월 더 연장하기 위해 백만장자라고 불리웠던 돈, 우리돈 10억을 모조리 써버렸다. 이것은 물론,  기업의 이윤을 목표로 한 불합리한 사설 의료보험 서비스의 제도적 헛점과 우리나라의 의사들이 그렇게나 목청높여 주장하는 초현실적 '미국적으로 현실적'인 의료수가가 교묘하게 모의한 미국의 현실적 항암 치료비이다. 게다가 우리의 미국적 긍정 철학을 가진 담당 의사는 3주 겨우 남아 있는 글리니스에게 보험 적용이 안되는 새로운 항암제 1억짜리 항암제를 시도해 보자고 설득하고 있다. 제정신인가. 3주 남은 시간, 그 한 줌 남은 숨결을 또다시 항암제 투여로 때우라는 것이다. 게다가 잭슨에 의하면 이렇게 막대한 개인 의료비를 지불하는 미국이 의료 서비스 면에서는 내가보기에 OECD 국가 중 꼴찌다.

다른 부유국들과 비교해보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의(내가 보기에 OECD 국가 중) 유아생존률이나 암 생존율 뭐 그런 주요 통계를 보면 맨 꼴찌야 게다가 돈도 두배로 내고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이러닉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셰퍼드와 잭슨의 파산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소시민적 삶이 파산과 함께 파멸되는 것을 느꼈고 그것과 더불어 탐욕의 끝, 자본주의의 끝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하나씩 둘씩 작은 귀퉁이가 마모되다 보면 둑은 무너지고 시스템 전체는 붕괴된다.


남편은 대학을 포기하고 그가 숭고하고 정직하다고 믿는 육체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만물수리상을 차려 집안을 일구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백만 파운드에 사업체를 넘기고 잠시, 그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한다. 그가 꿈을 위해 타협되지 않은 많은 것을 과감히 내던진 채, 드디어 일생을 통해 꿈꾸어왔던 그 소박한 미래, 건강한 꿈을 위해 성큼 한 발짝 내딛었을 때, 매력적인 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복수하 듯, 도도하게 말했다. 당신의 의료보험이 필요해.

 

미국의 사회와 제도는 잭슨의 입을 통해 통렬하고 시니컬하게 해부된다. 어찌 보면 그는 미국 내 보수 성향에 가깝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의료 보험의 헛점은 잘 통제된 의료수가와 사회안전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정직한 서민의 월급을 온갖 종류의 세금이라는 이름하에 갈취해가는 정부와, 무임 승차를 권리로 아는 게으른 하층민들에게 자신들의 원래 몫을 떼어주지 않아야 했다. 그는 메디케이드와 메디케어의 혜택을 위해 49퍼센트의 '찐드기'들을 위해 51퍼센트의 '찐따'들이 죽도록 일하고 있다고 보았다. 잭슨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65세 이상의 환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는 메디케어는 응급 관리만을 제공해준다. 장기 환자는 정부로부터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호구 주인공 셰퍼드의 아버지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자 수술비만 덩그러니 지원받고, 그 이후의 서비스는 온전히 그의 몫으로 돌아가 버렸다.

 

몰염치하고 뻔뻔한 찐드기 여동생 베릴의 등장은 공평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에 다채로운 색상을 보탠다.  베릴은 40이 넘도록 자신의 집세를 감당하지 않으면서 골절 때문에 요양중인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는 뻔뻔녀이다. 부모의 집을 차지한 대가로 병든 부모를 돌보기는 커녕, 함께 살기 싫어, 돌보기 싫어, 근처의 사설 요양원에 보내 놓고는 집을 차지하고  방문조차  하지 않는다. 1년에 1억씩하는 사설 요양비를 부담해야 하는, 지리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죽어가는 아내의 병수발을 하고 있는 오빠에게 요양원 방문조차 미루는 인간 쓰레기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난방비까지 부담해야 공평한 게 되어버리는 찐드기. 왜 미국의 중산층이 그토록 오바마의 사회안전망 확충 제안에 대해 그토록 치를 떨고 반대하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는 캐랙터이다. 베릴은 잭슨이 혐오하는 찐드기, 즉 성실하게 일을 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면서 자신의 몫을 정부라는 탐욕스런 괴물에게 갈취당하는 찐따들의 피를 빠는 흡혈귀에 등골 브레이커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예를 들어 가족 내 찐따와 찐드기를 구분하자고 치면,  설사 그녀가 항암에 치르는 막대한 비용을 예외로 치더라도,  사실 가장 큰 찐드기는 바로 셰퍼드의 아내 글리니스이다. 그녀는 결혼생활 27년동안 오로지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 그녀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켜 왔으면서, 막상 남편이 원했고 처음부터 두 사람의 함께 설계했던 미래, 그토록 남편이 갈망하는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결국은 이런 저런 핑계로 배반해 왔다. 여기서 나는 그의 제 3국 이민과 육체적 노동을 통한 소박한 삶이라는 숭고한 계획에 동의하려는 게 아니다. 셰퍼드의 주위 사람들이 누누히 말해 오고 있듯 제 3자들에게 제3국은 도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핑계는 구구절절 옳다. 내가 주목한 것은 저자가 주인공들을 통해 말하는 것, 두 사람의 공생관계,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의 제도적 공생관계가 찐따와 찐드기들의 일방적 퍼주기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시각이다. 우리 여자도 여자에게 불리한 수많은 편견과 핍박과 관습의 역사에서 살아남다 보니 영악해져서 21세기쯤에는 본인의 능력으로 살아남는 것보다 찐따와 가족을 이루고 찐드기가 되어 사는 편이 훨씬 유리한 경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건 찐따의 2세를 출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요건이 우월한 신체적 정신적 매력과 결합해 찐따에게 만족스런 찐드기상을 소유했다는 착각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경우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술을 핑계로 집안일도, 아이키우기도 잘 하지 않았으면서, 가정 경제를 위해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집을 구성하는 물건들의 색깔과 위치와 가격과 브랜드를 선택할 수 있는 실제적 소유주였다.

파이와 아이들, 부엌 바닥 이외에 '그 전의 글리니스'가 정확히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전의 글리니스'가 평소에 금속 공예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것이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그녀의 착한 남편이 그의 친동생에게 퍼주는 돈에 대해 베릴을 험담할 권리를 똑같이 행사했다.

"오히려 정 반대지. 자기가 수혜자는 커녕 피해자라고 생각한다고, 항상 불만이 가득하잖아". 셰퍼드는 그건 글리니스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꼼짝없이 집 안 혹은 병실이라는 공간에 유폐되어 회복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붙잡고 고통과 마주하고 있는 불치의 암 환자에게 병문안은 유일한 사회적 접속 포인트이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에게 면회를 요청하는 암이라는 충격 요법은 대개 한 두번이면 끝난다. 게다가 대화 주제는 갈수록 빈곤해진다. 환자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는 모두 몸에 일어나는 것들 뿐이고, 병문안자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아픈 환자에게 염장지르는 자랑질 혹은 불평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소박한 집 밖에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점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불치병 환자의 마지막에 고립은 덤이다.

사람들은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맹렬하게 목숨을 유지하려고 버틴단다(p426)

한 때 그녀가 동행을 원하지 않는다면 혼자 두고 떠났을 하지만, 이제, 고통을 저당잡아 헛된 희망에 유배된 채 나날이 죽어가고 있는 그녀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보아야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차라리 의식을 잃는 편이 행복이 되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바랄 수 없어 그저 경감되기만을 바라는 세상. 그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정말 이곳을 떠나게 된 것 같았다. 저 관들이 쇠사슬처럼 지하 감옥에 그녀를 묶어 놓은 것 같았다. 강력한 칼로 그것들을 끊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품에 안고 가운을 질질 끌면서, 택시와 핫도그와 코카인 중독자와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전당업자 등이 가득한, 댕댕거리는 밝고 부산스러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의 여인을 내려주어 그 분홍빛 맨발이 차가운 콘트리트에 닿으면 그녀는 다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무섭다. 누구나 거쳐야하는 죽음을 이렇게 실존적으로 묘사해 놓은 책을 본 적이 없다. 소설과 드라마 영화 속의 죽음은 극적 효과를 일으키는 감상적인 것들이었다.  슬프거나,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그런 종류의 형용사이거나 부사였지 동사나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었다. 

생각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힘겹게 해낸 생각 가운데 투자한 에너지만큼의 가치가 있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이 생각, 즉 '생각 없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그게 모든 것의 표준이 되었다. 그냥 사는 것, 살아 있는 것.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주로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경우, 살아 있는 것이 그토록 소중한 일이 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서히 소멸해가는 것, 생각하는 에너지를 잃고, 생각하는  생각 마저 잃고, 그래서, 살아있는 의미와 집착을 잃고, 기억을 잃어가는 것. 죽음에 이미 그만큼 성큼 다가가 있는데도, 그녀는 기계적으로 항암제를 투여받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생각할 힘과, 집착을 잃은 채로..상상할 수 없어 그리워할 수도 없는 채로 숨쉬고 있는 시간들 말이다.

더 이상은 집착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그리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착이 사라진 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녀가 아는 것은 그 뿐이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글리니스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딸과 마지막 포옹을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끝까지, 아픈 엄마의 면회를 주저했던 딸 아멜리아도,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인생의 패배로 규정하고 맞서 싸우려 했던 글리니스도, 숙연하게 끝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이 될 그 순간에 서로를 포옹하던 그 순간에, 울지 않고 편히 보내주던 그 순간에...

 

마지막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작가의 유토피아적 환상이라 결론짓는다. 비극적 결말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데 전혀 무리없는 설정이었고 완벽한 소설적 구성을 이루는 결정적 몫을 했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고,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은 섹스하고. 헐리우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듯 완성된 결말이 많은 사람의 비극적 죽음을 결국은 해피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 것은 그 험난했던, 600 페이지에 걸친 글리니스의 죽음에 이르는 긴 여정을 헉헉거리며 따라오다 녹초가 된 독자의 감정 상태를 복구시키는 힐링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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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5-1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의학은... 브래이크도없고, 안전밸트도, 에어백도 없는 시속 200킬로달리는 스포츠 카 입니다. 오로지 장렬한 충돌만이 멈출 수있죠.. 천천히 우아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내려올 수있어야 합니다. 의사가 잘 돌봐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마시길.. 온전히 스스로의 깨달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랍니다.

CREBBP 2014-05-19 18:18   좋아요 0 | URL
뒤늦게 댓글을 보았네요. 방문 감사합니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스포츠카라는 말이 공감되네요.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혼란스럽기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