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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도이 노부히로 감독, 이토 아츠시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17년 2월
평점 :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이 치러졌다. 불수능이라고 아우성이지만 등급컷은 작년보다 더 오른단다. 언론에서도 고교 과정에 배우지 않은 이론들이 국어영역 비문학에 대거 출제됐다고 호들갑이다. 경제학에서 ‘오버슈팅 이론’이 출제되어 7년차 한국은행원도 6문제 중 2문제를 틀렸다고.
사실 수능에서 고교 과정을 벗어나는 수준의 지문들이 출제되어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평이나 평가원에서 연중 몇 차례 실시하는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 역시 대개가 대학 학부 교양서나 교과서에서 출제되고 있다고 한다.
학원을 운영하는 한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역대 수능에서 수험생들을 소위 멘붕에 빠뜨리게 했던 지문들은 모두가 대학 학부 수준에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론들이라고. 그레고리력을 다룬 지문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출제된 지문 그리고 채권과 이자율의 관계를 다룬 지문들이 소위 역대급 난도를 자랑했다나 뭐라나.
어느 정도 어렵길래 ‘역대급’운운 하나해서 살펴보니,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이걸 정말 시간 내에 풀라는 문제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도 고교생 대부분은 고교 수업 과정 중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론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대학수학 능력을 측정하는 적성시험일지라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수능 만점자들이 복수로 나온다는 사실에 이르면 저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올해도 여전히 만점자가 여럿 나오겠지. 신문에 보니, 가채점 결과 만점자가 9명에 이른다니, 열심히 공부한 일반 고교생들이 자괴감이 들만도 하겠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올해 수능에서도 어김없이 수험 무용담의 신화는 반복되겠지. ‘만년 꼴지가 1년 만에 명문대에 입성하다’, ‘학원과 과외 수업도 듣지 않고 만점을 받은 아무개’, ‘지체부자유로 당당히 일류대에 합격한 아무개’ 등등. 수능 성적표가 배부되는 날 이런 기사는 우리 모두가 심심찮게 보아온 언론의 헤드라인 뉴스다.
일본에서도 이런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나 보다. 포항 지진 여파로 수능이 일주일로 연기된 바로 그 시점에서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수능 시즌을 맞아 수험생을 응원한다는 취지로 케이블 TV 영화 채널에서 방영해 준 영화였다. 타이틀은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전교 꼴찌의 문제 소녀가 약 1년 반 만에 명문 게이오대 정책학부에 합격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이게 실화라는 게 꽤 놀랍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보다 더한 무용담을 접해 봤기에 내겐 좀 약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상평을 찾아보면 본 사람들의 인생영화라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수험생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학교 담임 선생에게 ‘쓰레기’라고 불려지고, 저 쓰레기가 게이오대에 붙으면 내가 발가벗고 물구나무 서 있겠다는 약속을 반 학생들에게 공공연하게 할 정도면 소위 ‘구제불능’의 문제아란 소리다.
하지만 그거 아시는가? 문제아 중 일부는 천재라는 사실을. 문제아 중에 과학자나 불세출의 배우 또는 스포츠 스타가 탄생하는 걸 우리가 숱하게 목도했었다. 태도가 불량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쓰레기는 아닌 거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정도 95%의 확률로 확신할 수 있다. 반 꼴등의 저 아이가 연대에 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이건 우리가 체험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다. 왜? 중학교 수준의 영어나 수학도 안 되는 저 아이가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간다는 건 있을 수도 없으니까.
다시 영화 얘길 해 보자. <불량소녀>의 주인공 사야카(아리무라 카스미 역)는 놀기 좋아하는 4차원 고교 2년생. 초등학교 때 친구를 못 사귀어 왕따를 당한 경험으로 인해 중학교 이후 친구가 인생의 제1의 목표가 됐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친구로 대해 준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게 인생의 낙. 성적은 꼴찌라도 매일이 행복한 소녀.
고교 2학년 여름방학. 이제 슬슬 대학을 정해야 하는 시기. 사야카는 어머니의 권유로 문제아들을 대학에 보내주는 학원에 등록한다. 거기서 사야카의 실력이 드러난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테스트를 모두 0점으로 돌파한다. 놀라운 건 모든 문제의 답을 채웠다는 거. 물론 오답으로.
근데 그 오답을 쓴 이유가 기발하다. strong의 뜻을 ‘이야기가 길다’로 알고, story가 long하다고 설명한다. 성덕태자를 불쌍하다고 하면서 뚱뚱한 여자라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는 게 불쌍하다고(‘쇼토쿠’를 '세이토쿠타코'로 읽음. 일본어 한자 태(太)는 의미가 뚱뚱하다).
학원 선생 츠보타(이토 아츠시 역)는 이런 기상천외한 답을 말하는 사야카에게 ‘발상이 천재급’이라고 칭찬한다. 일본이 4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4방위 표시 기호도 모르는 이 ‘비리갸루’ 사야카에게 학원 선생은 가능성을 본다.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는 것으로 그 가능성을 가늠하고 사야카에게 장난반 진심반으로 게이오대를 추천한다.
멋진 남자가 많을 것 같다는 단순한 인상으로 게이오를 선택한 사야카는 이후 누구나 예상가능한 시나리오로 명문 게이오에 합격한다. 중간 중간 가족사에 대한 짠한 얘기가 나오긴 하는데, 이는 모두 아는 것처럼 성공 신화에 곧잘 등장하는 약방의 감초같은 야그다.
어쨌거나 비루갸루 사야카는 명문대생이 된다. 이 뻔한 무용담이 재밌냐고? 물론 난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고 우연히 봤다. 근데, 감독이 진짜 영화를 기막히게 연출했다. 뻔하디 뻔한 야그를 아주 재미있게 본 것이다. 그것도 2번씩이나 봤다. 이런 영화를 흡입력 있게 만들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데,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매우 수완이 좋은 감독인 듯하다.
소재는 B급이지만 영화 자체는 무척 몰입해서 볼 수 있다. 근데, 이런 무용담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난 영화를 보고 낄낄거린 후에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거다. 왜 우린 이런 무용담을 미덕으로 삼아 노오력을 강요받아야 하는 걸까? 과연 노력한다고 사야카 같은 학생이 탄생하기는 하는 걸까?
물론 앞에서 살짝 얘기했다시피 난 이 실화가 별루였다. 왜냐하면 고3시절 <아! 서울대학>이라는 대학합격 수기 책에 안호상이라는 인물의 무용담을 이미 봤기에 그렇다. 이 사람은 내가 여태껏 본 수험 무용담에 있어서 최고봉에 있는 두 명 중 한명이다. (다른 한 사람은 사법시험을 최단기간에 합격한 김선수; 300명 미만 뽑을 당시 김선수 씨는 18개월만에 합격했다)
이 사람은 학창 시절 내내 불량배였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성적은 전교 뒤에서 3등. 학력 수준은 초등수준. 고교 중퇴자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학력고사에 이르기까지 안호상 씨가 보여준 무용담은 인간승리 그 자체였다.
갸루 사야카보다 안호상이 훨씬 대단한 것은 그가 모든 걸 혼자 해냈다는 데 있다. 어느 누구도 조언해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야카의 성공은 그녀의 성공을 응원해주는 가족과 츠보타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누구보다 사야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츠보타 선생이 없었다면 단연코 사야카의 성공은 있을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런 도움 없이 스스로 모든 역경을 이긴 게 무용담으로써는 훨씬 가치가 높지 않을까. 그래서 사야카의 입시 성공을 담은 영화가 약간 별루였다. 츠보타가 없었다면 게이오 합격은 없었기에.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이렇다.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알고 응원해주면, 낙오자가 되는 학생들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거. 이 영화의 방점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가능성만을 가지고서도 그 학생을 믿고 응원을 보내줄 수 있는 학교 문화가 절실하다는 말이다. 이게 공교육이 목표로 해야 하는 제1의 원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무용담이 회자되고 권할만한 덕목으로 통용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난 적어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회 구조 하에서는 끊임없이 경쟁을 이어 나가야 하는 삶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는 채용 시험(공무원 공채 시험 포함)으로 승진 시험으로 그리고 자격증 시험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시험들의 본질은 선발 인원 안에 내가 들어가야 성공이다. 남을 제칠 수 없다면 내가 실패하는 구조다. 모든 수험생을 단일한 시험으로 선발하는 방식은 응시자들을 등수로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능과 고시로 대변되는 지필시험이 공정할 수 있는 시험이긴 하지만 사회의 건전성 면에서 보면 권할만한 선발 제도는 아니다.
수험 무용담 뒤에 숨어 있는 주입식 교육의 획일화는 현대 사회가 탈피해야 하는 근대의 마지막 부산물이기에. 수많은 시간을 암기와 문제 풀이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살릴 수 있는 시험이 진정한 교육제도일 거다. 배우는 게 재미있고 내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시험, 개인에게 특화된 시험이 건전한 사회로 가는 교육의 시발점이자 목표일 것이다.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지만, 가능성만을 보고 학생을 응원하는 사회는 이보다 나은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불량소녀>가 현 입시 시스템 자체에서 그나마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츠보타와 같은 선생이 불량한 사야카와 같은 학생에게서도 가능성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는 획일화 된 시험 점수로 서열화하는 입시 제도의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우리 누구도 현행 수능 제도가 우리 개인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교육과 입시는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단 번에 바꿀 수도 또 바뀌어 질 수도 없을 거다. 그 과도기적 모델이 필요한데, 이 영화가 그 지점을 충분히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획일화된 교육제도에서는 누구나 경쟁에 밀려 실패자로 전락할 수 있으니까. 실패자로 낙인찍지 말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 학생을 응원해 주는 문화가 정착하면 좋을 듯하다.
수능이 끝났다. 시험을 잘 본 학생보다 망친 학생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들 수험생과 부모님들에게 이 영화를 함께 보길 추천드린다. 좋지 않은 교육 제도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일선 학교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츠보타 선생이 될지 니시무라 선생(사야카의 학교 담임)이 될지 자신은 알 테니까~^^
수험 성공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열열히 응원해 주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