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 출판사에서 아주 야심차게 기획하여 출간한 철학 총서가 있다. 이름하여 [누구나철학총서]. 이 총서 기획이 얼마나 거창했는지는 발간사에 확연히 들어나 있다. 동서양의 주요철학자 100명의 사상을 총 100권으로 담는 실로 엄청난 작업을 2003년에 기획한 것이다!

 

일단 얼마나 가열차게 기획했는지는 발간사가 웅변적으로 대변해 준다. 발간사가 무려 4페이지에 이른다. 어느 정도로 삐까번쩍한지 혼자 보기 아까워 전문을 옮겨 본다.

 

 

누구나 철학 총서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에서는 한때 바니타스라는 정물화가 유행하였다. 허망함과 무상함을 나타내는 바니타스는 사물의 생명감이나 정돈된 배치를 보여주는 여느 정물화와 달리 죽음과 소멸이라는 부정적이고 불쾌하기까지 한 이미지에 치중한다. 해골이나 곰팡이가 낀 치즈,썩은 사과 등이 즐겨 사용된 이미지들이었으니 그 그림의 음산한 분위기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철학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생동감 있는 정물화가 아닌 소멸하고 있는 바니타스의 모습일 것이다. 아니, 철학뿐 아니라 인문학 자체가 바로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실 바니타스의 화가들이 사물의 어둡고 무상한 측면을 부각시킨 것은 생명에 대한 또 다른 직관에 기초한 것이었다. 부패와 죽음은 감추고 싶지만 결국은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의 또 다른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마치 학문의 제왕인 듯 행세하던 철학과 인문학의 죽음이 오늘날 당연시되고 희화화되기도 한다. 클릭한 지 3초만 지나도 자신이 원하는 사이트에 링크가 되지 않으면 바로 중지시키고 다른 사이트로 이동하는 초감각적인 새대들에게 철학이나 인문학은 결코 매력 있는 학문이 아닐 것이다. 시간을 두고 끈기 있게 달라붙어야만 겨우 개략적인 의미만을 파악할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터득한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학문으로 비춰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바로 이런 상황이 철학의 가치를 더 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디(ID)로만 통용되는 가상의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주체들의 혼란과 자아 정체성의 문제, 매트릭스에 의한 가상현실과 지식의 한계, 혹은 그 기초의 문제 들에 봉착하면서 우리는 다시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의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이 무용화되는 시기에 오히려 철학적인 담론들이 가장 번성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오늘날 철학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철학총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 총서의 이름에 그다지 학술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누구나'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청소년을 포함하여 성숙한 사고를 시작하거나 이미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한번은 접해보아야 하는 철학총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또한 고등학생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난해하지 않은 철학책을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도 반영하고 있다. 엄청난 속도와 순발력이 필요한 이 시대에 그와 정반대되는 느림의 미학만을 고집하는 딱딱한 총서를 고집하는 것은 이 총서의 의도와 어긋난다.

 

 본 청소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본 총서는 동서양의 주요 철학자들을 거의 총망라하는 대규모의 총서이다. 동서양의 주요 철학자 100명의 사상을 총 100권으로 담는 그 규모에서 볼 때 지금껏 유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산술적 수치에서 갖는 규모의 의미보다 본 총서는 동서양의 주요 사상가들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데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시도가 될 것이다. '누구나철학총서'는 서양의 사상가 60명과 한국, 중국, 인도의 사상가 40명에 대한 소개로 이루어질 것이다. 역사적 범위로 볼 때 소크라테스나 공자로부터 로티와 들뢰즈 혹은 풍후란에 이르기까지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거나 주도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상가까지 포함된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드시 소개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상가들 역시 대거 포함된 것도 본 총서만이 가지 강력한 장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본 총서의 모든 필자가 국내 학자라는 사실이다. 본 총서는 국외 저자의 원저에 대한 번역물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필자들은 모두 해당 사상가들을 전공하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어설픈 번역에서 오는 의사소통의 단절이라든가 비전공자의 무지로 인해 독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일이 한껏 줄어들 것이다. 특히 몇 사람을 제외한 필자 대부분이 30대 혹은 40대 소장 학자들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겪을 수도 있을 어려움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큰 장점이 될 것이다.

 셋째,  본 총서는 '누구나철학총서'라는 총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청소년들과 일반 독자들로부터 철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이 있는 전문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철학 총서이다. 주요 개념이나 사상에 대한 설명은 청소년 독자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지만 각각의 책이 담는 내용의 범위는 해당 사상가의 핵심적인 사상과 범위 전체를 덮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엄청난 기획은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본 총서에 참가한 많은 집필자들이 기획 과정에서부터 출판에 이르기까지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본 기획이 첫 결실을 맺기까지 3년이 넘는 준비 기간과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청소년들을 포함한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누구나철학총서'를 통하여 철학의 참 맛과 유쾌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위원 박영욱

 

 

이 발간사는 참으로 거창하기만하다. 왜냐면, 지금까지 달랑 5권만 출간됐기 때문이다. 동서양 100명의 사상을 100권에 담는다는 총 3년 간의 준비기간과 이후 10년의 세월이 더 흘렀건만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헤겔에 대한 책들은 깜깜 무소식이다.

 

 

 

 

 

 

 

 

<로티>와 <비트겐슈타인> 책이 2003년 8월에 제일 번저 출간됐고, 그 다음 해 2월에 <들뢰즈>가 그리고 2004년 8월에 흄이 출간됐다. 이후 출간 소식이 없다가 무려 5년이 지난 2009년 1월에야 지젝이 출간됐다.

 

도대체 지젝은 갑자기 왜 출간한 것이며, 리처드 로티가 왜 1빠였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출간 순서다. 이런 어이없는 순서라니.. 반드시 내야할 사상가는 건너뛰고 로티와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흄이라니...어떤 기준으로 출간 순서를 잡았는지 오리무중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자. 총서의 가장 심각한 부분을 좀 건드려보고자 한다. 내가 본 책은 <들뢰즈>와 <흄>이 전부다. 하지만 일독해보니, 위 발간사의 말 중 "필자들은 모두 해당 사상가들을 전공하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게 뻥이었다.

 

일단 <들뢰즈>를 쓴 박성수는 전공이 칸트다. 그래서 그런지 들뢰즈의 핵심 저작들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 분야인) 들뢰즈의 영화와 회화 이미지 텍스트로만 책을 구성했다. 들뢰즈에 의해 새롭게 평가된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에 대한 그들의 핵심이론들은 다 빠져있다. 그나마 영화와 회화속에서 들뢰즈가 본 베르그송의 논의만 살짝 보일 뿐이다.

 

물론 <로티>, <비트겐슈타인>, <흄>을 쓴 저자들은 모두 해당 철학자의 전공자들이었다. 하지만 <지젝>을 쓴 김현강은 전공이 카프카다. 카프카 전공자가 쓴 지젝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 기획위원 박영욱이 "비전공자의 무지로 인해 독자들의 어려움을 겪는 일이 한껏 줄어들" 것이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발간사의 말은 지켜져야 하는 거 아니가. 아주 강력하고도 확신있게 3년을 준비하여 발간사를 쓴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런 말이 아예 발간사에 없었다면 아무 문제의 소지도 없었겠다. 하지만 이런 걸 발간사에서 밝힌 건 총서 기획의 핵심 컨셉 중 하나라는 건데, 이것을 아주 우습게 버렸다는 데에 실망감이 크다.

 

그리고 똑같은 흄 전공자가 쓴 <흄>은 [누구나철학총서]의 책이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 <흄>보다 더 어렵게 서술되어 있다. 두 권의 책을 같이 비교해 보았는데, 살림의 절대사상 시리즈가 훨씬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난 살림 출판사 책을 소장하고 이룸 출판사 책을 사지 않았다.

 

 

 

 

 

 

 

만일 이룸 출판사가 이 총서 시리즈를 계속 발간할 계획이라면 철저히 해당 철학 전공자를 선별해서 책을 발간하는 길만이 해결책일 것이다.

 

근데,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시리즈는 죽었다고 본다. 이 총서 시리즈보다 훨씬 수준높은 총서가 살림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로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철학총서 기획위원 박영욱이 말한 그대로 말이다. 핵심 동서양 철학자들을 해당 전공자들이 알차게 해설하여 편찬해 낸 총서가.

 

정말 전형적인 용두사미식 기획인듯하여 참으로 씁쓸한 느낌의 총서다. <지젝> 출간 이후 이 시리즈 기획위원들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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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2014-10-2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총서 중 `비트겐슈타인`을 읽고 총서 명을 검색하다 이 글을 접합니다. 지금은 한 오십권 나왔으려나, 했는데 겨우 네 권이군요. 그리고 그마저 기획의도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니 조금은 씁쓸하네요.
글쓴님의 다른 서평이나 감상들도 꽤나 좋습니다. 좋은 곳을 발견한 듯 해 흡족하네요. 이 흡족함도 결국은 `누구나철학총서`가 가져다 준 것이니, 저에게 이 총서는 나름 `만족스러운`총서가 되겠네요.^^

yamoo 2014-10-22 19:57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의도하지 않게 편익을 주는 글을 줘서 정말 글쓴 보람이 있네요.^^

2015-08-09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0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첩 2018-08-1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만 읽고 너무 좋아서 다른 철학자 편도 읽으려고 했는데 고려해 봐야 겠어요 ㅋ 하지만 박병철 교수의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책보다 내용면에서 충실하고 이해하기도 쉬웠어요 개인적으로 이룸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