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언어는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해주고 격려해주기 위해 사람의 입에서 소리 언어로 나오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매일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말들로 인해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하기도 한다.  

정치인의 막말은 하나의 사건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확대되기 까지 한다. 친구사이에 그냥 아는 사이에 오가는 말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잘 못 사용하면 관계를 소원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골을 남겨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필요해서, 의사소통의 행위를 하기위해서 만들어진 언어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기보다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무기가 되어 가고 있다. 의미 있고 소중하고 감사한 말이 아닌 소음으로 가득찬 언어,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언어, 헛소리가 참된 진리인 마냥 포장되어 울려퍼지는 언어는 공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사람의 마음을 질식시키는 이런 공해는 단언컨데, 침묵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열매이지 뿌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뿌리는 무엇일까. 뿌리는 바로 침묵이다. 침묵이라는 뿌리에 토대를 두지 않는 말은 의미가 없고 무력하다. 잡초와 같이 무성하기만 하다. 깊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막스 피카르트도 <침묵에 대하여>에서 "침묵은 말없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침묵 없이 있을 수 없다. 말은 침묵의 배경이 없으면 깊이가 없다"라고 썼다.

 리처드 포스터의 말처럼 신은 똑똑하고 재능있는 사람보다 깊이가 있는 사람을 찾는다. 삶의 철학이 분명하고 지조가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침묵에 뿌리를 둔 깊은 명상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닐까. 피카르트는 "언어가 인간의 본질이라면, 침묵은 신의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피카르트의 말을 따르자면 침묵할때 우리는 비로소 신의 본질을 소유하게 된다. 아니 거창하게 신의 본질까지는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침묵할 수 있다면 최소한 말의 양심은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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