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나라 미술교육의 문제점을 페이퍼로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상하 두 편으로 나눠 페이퍼를 쓰기로 했습니다. 미학책들 보고, 한국미술사 책들을 주섬주섬 읽고, 미대 출신 현업 작가들의 전언을 여러 통로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술대전에 계속 참여하다가 보니 한국미술의 저열한 상황과 미천한 경쟁력은 바로 미술교육의 부실이라는 걸로 귀결되었습니다. 감안하시고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참으로 특이하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그림을 잘 그리면 미대를 가라고 권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동 역시 어렸을 때부터 대회 나가 상을 휩쓸면서 자신이 미대를 가야 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한다.

 

초등학교에서 출중한 그림 실력을 보여주면 예중-예고-한예종 이나 서울대 테크를 타게 된다. 그림 실력은 나날이 발전하여 그 어려운 입시미술을 통과하고 미술대학 학생이 된다. 대학 강좌를 들으며 실기 작업을 이어나가면서 여러 전시회에 참여한다.

 

이 과정,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또는 대학원생)까지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들은 모두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대상의 철저한 재현이다. 대상에서 조금만 변형되면 가차 없는 지적질을 당하며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나게 된다.

 

중학교 및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미술학원에서도 동일한 과정이 반복된다. 학부나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수가 그리라는 대로 그린다. 조금만 교수의 의도대로 그리지 않으면 바로 제재가 들어온다. 철저한 재현이고 이것이 잘 그린 그림이며 좋은 학점의 척도가 된다.

 

이렇게 미술인이 배출된다.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능통한 졸업생은 그 이력으로 작가생활을 시작하려고 한다. 재료가 무엇이 됐건 이 신진작가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물론 누가 봐도 잘 그린 그림을 그린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다른 과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미술교육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 수 있다. 당신이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기초가 되는 수학을 배우고 실물 경제가 어떻게 이론으로 정립되는지 배우게 된다.

 

실물 경제를 수학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응축된 그래프와 방정식을 경제 개념으로 다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대학에서 경제학도로 만들어지는 학습 과정이다. 즉 경제학 전공자는 경제학이라는 룰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술대학은 이런 게 전혀 없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만 그리다 졸업장을 받게 된다. 물론 각 대학 커리큘럼을 보면 서양미술사나 각 사조는 맛배기로 배우긴 한다. 작가론도 배운다. 하지만 한국의 미술대학에서는 다른 학과처럼 그 학문의 룰(언어)을 가르치지 않는다.

 

정말 이상하다. 테니스를 배워도 룰을 배운다. 경기 방식은 어떻고, 몇 세트를 하고 어떻게 해야 승리자가 되는지 그 규칙과 룰이 있다. 테니스 기술 습득은 그 규칙과 룰에 따라 자연히 습득되게 된다. 모든 스포츠를 배우는 건 대동소이 하다. 음악도 그렇다.

 

하지만 미술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서양화, 동양화, 조각, 설치 등으로만 분야가 나눠져 있을 뿐이다. 교육은 그 분야에 맞는 재료 사용법과 구도를 잡아 그리는 게 전부다. 색과 형상이 그림의 전부인 냥(우리나라 미술 평론가들의 평론을 보면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교수의 의도대로 고치고 또 고쳐 그린다.

 

이런 현상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매우 이상한데, 대개의 사람들은 미술대학의 특성이니 하고 조금도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학부를 졸업할 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라. 인문사회계나 경상계나 모두 학부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졸업논문이란 걸 쓴다.

 

그 졸업논문은 논문의 가치가 없긴 하지만 학부에서 배웠던 걸 심화하여 최소한의 전문성을 탑재하려고 애쓴 흔적이다. 경제학이 됐던, 철학이 됐던 대부분의 논문은 그 학문의 선배 학자들의 이론을 점검하고 내가 그 이론에 동의하는지 아니면 비판하는 입장 인지를 밝히는 정도다.

 

석사나 박사 정도 되면 누구를 전공 했냐로 나눠진다. 그런데 미술은? 이런 게 전혀 없다. 미술대학 졸업전시회를 가보면 그냥 자신이 그리고 싶은 바를 캔버스에 담거나 입체를 만들거나 설치를 한 게 전부다. 그나마 설치는 낫다. 평면 작품들은 근본이 없다. 계보가 없단 말이다.

 

작가의 철학은 말할 것도 없다. 기성 작가들도 철학이 없는데 무슨 학부 졸업생이 작가적 의식이 투철하겠는가. 학점을 받고 졸업을 하려면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그려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 의식 운운하는 건 모순이겠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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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9-12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공지능 시대에 자신만의 관점과 철학없는 재현이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하신 미술교육 뿐 아니라 요즘 우리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이 새롭게 도전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yamoo 2023-09-14 09:10   좋아요 1 | URL
현재까지는 갤러리 등이 형상 좋은 작가들만 선발해서 지원하니, 아니 대체로 그런 류의 작가가 대부분이니 문제점을 안고 당분간은 계속 지속될 듯합니다. 올해 프리즌 전기가 끝나고 나면 약간의 변화는 있겠지요. 좀 발전되고 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페크pek0501 2023-09-15 15: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군요. 미술대학에서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 건가요?
철학과 지식과 지혜가 없는 예술가를 상상할 수 없네요...

yamoo 2023-09-16 11:23   좋아요 2 | URL
근데 우리나라는 미술대학 교육은 압도적으로 실기수업만 해요. 요새 잘나가는 추상미술 작가들도 철학이 없어요. 그냥 형상만 좋은 화가들이 넘쳐나요~~ 계보는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는 책을 읽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히는 작가들도 있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