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판게아 1부 : 시발바를 찾아서 판게아 1
하지윤 지음 / 아이웰콘텐츠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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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와 사비, 그리고 마루는 언제나 함께 다니는 단짝 친구, 삼총사다. 물론, 이 아이들에겐 정식 명칙이 있다. 바로 “주먹 쥐고 불끈”이란 이름이. 이들 삼총사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의 아버지가 같은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하는 박사들이라는 점. 그리고 엄마들과 모두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점. 아이들은 아빠들이 다시 함께 살았으면 하는 같은 소망을 품고 있다는 점 등이 같다.

 

또 하나 결정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그건 모두 고고학을 사랑하고, 모험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런 그들 앞에 엄청난 모험이 기다린다. 그런 바로 어느 날 갑자기 세 명의 아빠들이 연구소에서 사라진 것. 그리고 그곳 연구소에는 급히 쓰인 글씨로, ‘시발바’를 향해 떠난다는 메모와 의문의 숫자, 그리고 제로섬이란 명칭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 또 한 장의 종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버뮤다 삼각지에 위치한 제로섬의 지도. 지구상엔 제로섬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을 가리키는 경도와 위도 역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수치. 과연 박사들이 사라진 곳은 어디일까?

 

이에 삼총사는 자료를 찾아 결국 ‘시발바’는 고대 마야인들이 지하 세계로 가는 입구라고 여겼던 죽음의 신이 사는 동굴임을 알게 된다. 고대 마야인들은 ‘시발바’를 통해 영원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과연 삼총사는 ‘시발바’를 통해, 그곳 영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곳에서 사라진 아빠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아빠들의 행적을 쫓던 삼총사는 아빠들이 멕시코 지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입했음을 알게 되고, 마침 박사들의 조수였던 슐레이만 삼촌이 멕시코 지역에서 고고학 연구를 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도움을 청하는데. 삼총사를 도와주던 슐레이만 삼촌이 알고 보니, 아빠들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 삼총사를 통해 더 큰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제로섬으로 들어가 황금을 가져오려는 것. 과연 삼총사는 슐레이만 삼촌의 음모에 피해, 아빠들을 구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곳 제로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책, 『판게아』 1권인 <시발바를 찾아서>는 바로 이러한 삼총사의 모험을 다룬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는 흔히 재미를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작가는 재미 안에 메시지를 담으려 애쓰는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인간의 탐욕이 지구를 멸망의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하지만, 희망이 지구를 구원하게 된다는 메시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탐욕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슐레이만 삼촌이다.

 

제로섬에서 삼총사는 고대 마야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 고대 마야인들에겐 아이들이 없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마법사 치크에 의해 아이들은 모두 제거되기 때문이다. 마법사 치크는 세상을 향한 광기를 보인다. 치크의 광기의 근원은 두 가지, 첫째, 인간은 탐욕스럽다는 것. 둘째, 인간은 결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

 

이러한 마법사 치크의 논리는 일면 맞다. 왜냐하면 실제 인간들은 탐욕스럽고, 그로 인해 결코 더불어 살 수 없는 이기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탐욕을 이겨내는 이들, 그리고 타인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이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또 하나의 메시지는 아이들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마법사 치크는 아이들을 제거한다. 이 땅의 희망인 아이들이 줄어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이 책은 무엇보다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재미있지 않다.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들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판타지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는 수많은 환상의 동물들도 등장하며, 판타지적인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부드럽지 않다. 거칠다. 그리고 너무 많은 판타지적 요소가 스토리 전개에 도리어 방해가 된다. 그래서 산만하다. 이러한 산만함이 이 소설의 결정적 단점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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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
김성재 지음, 백대승 그림 / 현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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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토끼전>이지만, 실상 그 온전한 내용을 다 읽어본 적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다. 이번에 현암사에서 출간된 『토끼전』에 관심을 갖게 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해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끼전>은 판소리계 소설이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그만큼 구전된 전승이 각양각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판소리계 소설들이 대체로 그러한대, 그 중에서도 <토끼전>이 가장 다양한 이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명칭 역시, <토끼전>, <별주부전>, <토선생전>, <토생전>, <토처사전>, <토공전>... 등등 수많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고 하니, 그만큼 다양한 전승과 이본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 『토끼전』은 이런 다양한 이본 가운데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대본을 거의 그대로 활자화한 완판본 『토별가』를 대본으로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커다란 줄거리를 그대로 하면서, 판소리가 계속되면서 여러 가지 살이 붙어 있다고 여기면 될 성싶다.

 

토끼전을 읽으며,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점은 당시 판소리를 통해, 응어리를 해소하던 민중들의 마음을 느껴보게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토끼의 승리가 두드러진다. 토끼는 가장 약한 동물 아닌가! 그런 동물이 용궁 전체를 조롱하듯 골려먹고, 자신의 목숨을 건져낼뿐더러 엄청난 영웅담을 만들어감이야말로 민중들이 열광할 소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용왕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는데, 그 이유 역시 참 풍자적이다. 용왕이 병에 걸린 이유는 너무 놀아서다. 민중의 삶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과로하여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민중의 삶이야 어떻던 상관치 않고 자신들만의 향락에 젖어, 그 쉼과 놂이 지나쳐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는 지도자. 『토끼전』은 시작부터 통쾌하다.

 

마지막은 또 어떠한가. 용왕이 어떻게 병에서 낫게 되느냐하면, 다름 아닌 지혜로운 모습으로 육지로 돌아간 토끼가 마치 바다 세상 전부를 조롱하듯 싸놓은 토끼 똥을 먹고 낫게 된다. 민중의 똥을 드시고 힘을 얻게 된 나랏님! 게다가 토끼 똥이야말로 얼마나 그럴듯한 모양인가. 환약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양새야말로 해학의 극치가 아닐까?

 

토끼의 간을 필요로 하는 설정은 또 어떤가? 어째서 권력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민중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간을 구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진행시켜나가는 걸까? 그 발상이야말로 권력의 무서움을 보여준다.

 

또한 용궁의 내각 신료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너도나도 입만 살아 있는 신하들, 말로만 충신이고, 자신들은 수많은 권리를 누리면서도 책임은 떠넘기기에 바쁜 모습, 서로 편을 나눠(문과 무) 헐뜯고 잡아먹으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과연 설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판소리소설이 보여주는 풍자와 해학이 아닐까?

 

물론, 이런 풍자의 극치는 토끼의 혓바닥에 놀아나는 용왕과 신하들의 모습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임에도 용왕과 신하들은 혹해서 오히려 충신인 주부 자라를 압박하지 않나? 어쩌면, 충성을 다했음에도 용왕과 신하들의 타박을 들어야만 했던 주부 자라가 토끼의 똥을 고이 간직하여 용왕에게 가져감이야말로, 자라 역시 소심한 복수를 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어쩌면 자라는 토끼 똥이란 말을 하지 않고 용왕에게 진상했을 것이다. 비록 토끼의 간은 놓쳤지만, 결코 구할 수 없는 영약을 구했노라며...

 

『토끼전』, 어쩌면 여전히 풍자와 해학에 갈증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청량한 영약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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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은 하루 (윈터에디션)
구작가 글.그림 / 예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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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마음 뭉클하며 따스해지는 글을 읽었네요. 『그래도 괜찮은 하루』의 작가는 두 살 때 열병으로 청각을 잃었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좋아하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죠.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답니다.

 

그런 그녀를 운명이 시샘한 걸까요? 이젠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인해 시각을 잃어가는 중이랍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더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죠. 청각에 더하여 시각마저 상실하게 된다면 이제는 무엇보다 작가가 좋아하며 잘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쉽지 않겠네요. 이런 절망의 끝에서 작가는 도리어 희망을 그려내고 있답니다. 자신 홀로 차가운 세상 한 복판에 내던져진 것과 같아 세상을 향해 원망의 사자후를 터트릴법한데, 도리어 세상을 향해 따스한 위로의 메시지를 잔잔하게 전해주고 있답니다.

 

그리곤 아직 시력이 남아 세상을 볼 수 있을 때에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답니다. 그 안에는 어쩌면 너무나도 소박한 꿈들도 있네요.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 헤어진 친구 찾기, 소개팅 해보기, 운전면허증 따기, 살빼기, 봉숭아 물 들이기, 가족여행 가기 등 일견 너무나도 소박한 꿈들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하찮고, 소박한 꿈일지 모르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이루어갈 생각에 설레며 행복해 한답니다.

 

어쩌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나아질 시간보다는 더 나빠질 시간뿐일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함으로 보내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뭉클하네요. 비록 청각에 이어, 시각을 잃게 된다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촉각이 남아 있다 말하는 그 모습에는 왠지 내 가슴에 향기로운 바람이 한 가득 들어간 느낌이네요.

 

저 역시 허리디스크가 심해 몇 년 전부터 걸을 때 자연스럽지 않답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지나다니는 분들의 발걸음이 그날따라 자꾸 보이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걷는 그 걸음이 저분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 텐데, 참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그리곤 저분들처럼 걷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적이 있답니다. 두발로 걸을 수 있음이 행복이라는 고백을 하며 말이죠. 물론 지금도 여전히 허리는 좋지 않고, 걸음은 부자연스럽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발로 걸어,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음이 행복이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답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보기보다는 나에게 있는 것을 보며, 그 안에서 더 큰 행복을 찾고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가의 말처럼, 아무리 힘겨워도 오늘 나에게 허락되는 또 하루의 시간은 “그래도 괜찮은 하루”이니 말이죠.

 

바라기는 작가에게 허락되는 빛의 시간이 오래 계속되길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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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 신경림 - 다니카와 슌타로 대시집(對詩集)
신경림.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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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왠지 꿈같은 일이며, 실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장면이기도 하다. 물론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 누군가 그런 능력을 갖춘 이들의 ‘시의 대화’에 살며시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여기 그러한 시의 대화를 담고 있는 책이 있다. 책 제목도 너무 아름답다.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왠지 이 책을 펼쳐들면, 시인들의 그 아름다운 시상이 내 안에 별이 되어 반짝일 것 같지 않은가.

 

이 책은 한일 간의 시의 거장 신경림 시인과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 두 분이 시를 통해 서로 대화한 결과물이다. 이를 ‘대시(對詩)’라고 부른다 한다(둘이 아닌 여러 사람 간의 시를 주고받는 것은 ‘연시(連詩 )’라 부른다). 그러니 말 그대로 ‘시의 대화’인 셈이다.

 

도합 24편의 시가 우리를 찾아온다. 항아리란 공통분모로 시작한 시의 대화는 여러 가지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대화가 오가던 즈음 우리민족을 공황상태로 몰아갔던 ‘세월호’사건도 일어난다. 그렇기에 신경림 시인은 시대적 아픔을 노래하기도 한다. 당시 시인의 시의 대화를 들여다보자.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소식

몇 백 명 아이들이 깊은 물 속

배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는

온 나라가 눈물과 분노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나는

고작 떨어져 깔린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여기 시인으로서 아무것도 못하는 절망감이 담겨 있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시인만의 무능이겠는가? 온 국민이 처절하게 무능을 깨달았으며, 지금도 그 무능의 여운에 힘겨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시인의 고백처럼 이러한 시를 통해 어떤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기도 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각성이 되기도 하리라.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귀찮은 소음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이렇게 서로가 ‘시의 대화’를 나눈 24편의 시 뿐 아니라, 두 시인이 서로의 시 가운데서 좋아하는 시를 뽑아 수록하기도 하며, 두 시인의 대담을 싣기도 한다. 마지막엔 두 시인의 에세이 몇 편을 함께 싣고 있다.

 

각자 자신의 시 가운데 좋아하는 시가 아닌, 상대의 시 가운데 좋아하는 시, 즉 상대 시의 독자 입장에서 선별한 시들 역시 참 좋다. 시인들의 시가 공허한 울림이 아니어서 좋다. 삶을 노래하기에 좋다. 때론 인생의 무게를 노래하기도 하며, 때론 시인의 삶을 노래하기도 하여 좋다. 두 시인의 시를 감상하며 왠지 배가 부른 느낌이다.

 

두 시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해보는 건, 시의 힘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겐 여전히 가깝지만 먼 나라가 일본이 아닐까? 아무리 가까워진들, 여전히 그 안에서는 서로를 향한 분노와 미움을 감출 수밖에 없는 관계가 어쩌면 한일관계가 아닐까? 그렇기에 스포츠에서도 한일전은 무슨 수를 써서도 이겨야만 하고, 만약 지게 되면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허탈감에 몸부림쳐야만 하는 웃픈 관계.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향해 미움이 날을 세우고 살고 있음에도 두 시인의 대화에 귀기울여보면, 우린 놀랍게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같은 아픔에 눈물 흘리며, 같은 고민에 힘겨워하며, 같은 느낌으로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관계임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시의 힘이 아닐까?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들이 이어질 수 있길 기대해본다. 그 작업에 귀 기울임은 독자에겐 행복한 시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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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의 묘
전민식 지음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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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식 작가의 신작 『9일의 묘』는 풍수로 먹고 사는 지관들과 이와 맞물린 군인들의 권력을 향한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때는 1979년 10월 26일을 앞둔 시점이다. 최고의 지관, 아니 전설적 지관인 황창오에게 전수받은 실력을 가진 지관임에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 도굴을 감행하는 중범과 도학, 그리고 해명은 그만 현장에서 발각되고 만다. 중범과 해명은 무사히 도망치게 되었지만, 도학은 붙잡혀, 광에 갇히고, 도학을 붙잡은 자들인 김선각 중령, 김중각 소령 형제는 권력을 도모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묏자리를 잘 씀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에 서길 원하는 자들이다. 마침 10 ․ 26사태가 일어난 혼란의 시기에 선각, 중각 형제가 줄 댄 사령관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이 일에 도학이 지관으로서 참여하게 된다.

 

한편, 도망쳤던 중범과 해명은 또 다른 권력을 쫓는 장대승 참모총장 라인의 호출에 의해 왕을 내는 명당자리에 암장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곳에 도학을 대동한 김선각 중령이 군사들을 이끌고 오는데. 과연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이며, 전설적인 지관인 황창오의 친아들 중범과 양아들 도학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누구나 명당에 대한 관심이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풍수지리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 무시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명당에 무관심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과연 동기감응이 진짜 효력이 있을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동기감응론이란 같은 유전자에서는 같은 에너지 파장이 발출되기에 기(氣)가 같은 동종의 기(氣)끼리는 서로 감응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이런 논리로 부모 자식 간에는 유전자가 같아 그 에너지 파장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기에 죽은 시신이 어떤 장소에 어떤 모습으로 묻히느냐에 따라 후손에게 그 기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론이다.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공명’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소설의 관심은 이런 동기감응을 통한 발복(發福)이 실재 존재하느냐 않느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이 발복(發福)을 쫓으며, 이것을 통해 권력을 붙잡으려는 자들의 더러운 욕망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관들도 믿지 않는 혈에 목숨을 걸며, 사람을 죽여 가며 그 혈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더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건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믿어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과 부조리와 삶의 아이러니를 외면하려는 얄팍한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가지지 못한 걸 가지려는 욕심으로 사람들은 혈을 찾는다고 믿었다.”(54쪽)

 

 

아울러서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붙잡기 위해 애먼 사람들을 빨갱이로 둔갑시키고, 방해되는 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제거하는 몰 인간성에 작가는 관심을 기울이고 고발한다.

 

“그들은 진실을 들을 준비보다 진실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광에서는 진실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광 속엔 주거만 존재할 뿐인데 그 존재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 말하라고 한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곳이다.”(123쪽)

“중범이 빨갱이라면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을 터였다. 군인과 빨갱이.”(155쪽)

 

소설은 9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사건답게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아울러 우리의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리며, 권력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뿐 아니라 이런 모든 일들이 벌어진 후에 또 다시 밝아오는 아침을 맞으며, 도학의 부끄러워함을 통해,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겪어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 침묵의 당사자들을 향한 에두른 질책도 잊지 않는다.

 

“도학은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아무렇지도 않게 새날이 밝은 게, 아무렇지도 않게 눈뜨고 아침을 맞이한 일이 부끄러웠다.”(217쪽)

 

하지만,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새날이 밝았으랴. 새날을 기다리며 흘렸을 그 통곡의 세월, 눈물이 왜 없었겠나. 외치고 싶어도 커다란 격류 앞에 무능함만을 드러내며 움츠러들었을 부끄러움과 그 이면의 아픔은 왜 없겠나. 도학 역시 그랬지 않았나. 모두 역사의 희생자들 아니었을까? 단지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이런 아픈 역사,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잊지 말자.

 

아무튼 이 소설은 최고의 명당, 혈을 찾아 숨 가쁘게 펼쳐지는 전개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마지막 오봉쟁주의 실체는 왠지 온전한 조화와 안녕을 누리는 명당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그 동안의 아픔과 눈물, 충격을 어느 정도는 상쇄해 주는 느낌이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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