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과 사라진 글벗 -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던 조선의 문장가 허균 이야기 위대한 책벌레 8
김해등 지음, 문월 그림 / 개암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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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란 이름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홍길동은 우리 국민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든 공공기관에서 공문서를 쓰는 예를 보여줄 때, 어김없이 홍길동이란 이름으로 예를 들고 있다. 이것은 홍길동이란 이름이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는 의미도 있겠지만, 홍길동이야말로 우리의 모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홍길동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내라는 것 아닐까.

 

그럼 왜 홍길동이 우리 모두의 모델이 되는 걸까? 그건 홍길동은 서자라는 신분의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그 한계를 뛰어 넘을뿐더러, 약자에 대한 돌아봄이 있으며, 아울러 모두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실제로 율도국을 만든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못하였건, 우리가 인식하고 있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우리 안에는 이러한 평등한 세상, 신분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바로 이러한 우리 모두의 모델이 되는 홍길동을 탄생시킨 이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허균이다. 이 책, 『허균과 사라진 글벗』은 바로 이런 허균의 어린 시절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사실 그대로를 진술한다기보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픽션이다. 하지만, 이 동화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던 조선의 명문장가 허균의 그 평등을 지향하는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실존하지 않은 인물 이문이란 친구를 통해서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문장에 재능이 있던 허균에게는 마을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절친 이문이 있다. 이문 역시 허균만큼 책을 사랑하며, 재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이문에게는 비밀이 있다. 알고 보니 이문은 판서 대감의 아들인데, 서자 출신이었던 것. 그래서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은 실수로 인해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 때, 이문이 친구 허균에게 남긴 시와 이에 대한 균의 답시가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감꽃 향 따라

십 리 먼 길 날아온 벌은

꽃술에 앉을 적마다

접붙여 자란 가지인가

본디부터 자란 가지인가

묻지 않고 가리지 않네.

- 책 속 이문의 시

 

눈 먼 벌 하나 날아와

접붙인 가지에 달린 꽃인지

본디 가지에 달린 꽃인지

자꾸 가려 앉으려고 하네.

끝내는 꽃술 다 뭉개져

한 해 감 농사를 다 망쳐 놓았네.

- 책 속 허균의 답시

 

그렇다. 벌이 어찌 접붙인 가지(서자)인지, 본 가지(적자)인지 가려 앉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그 나무가 온전하게 열매 맺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허균 본인에게도 접붙인 가지인지, 본 가지인지 가리는 마음이 있었음을 반성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적어낸 시, 여기에 허균이 꿈꾸는 세상이 담겨 있다.

 

본디 가지와 접붙인 가지를 차별하지 않는 세상, 사람은 누구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는 세상, 이러한 세상이 오늘 이 땅에 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울러 홍길동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약자의 편에 서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바로 허균이 꿈꾼 율도국이며, 또한 기독교에서 지향하는 하나님의 나라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한 책을 읽고,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작가 선생님 역시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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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떼어 걷기
김도연 지음 / 삶과지식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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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제목이 참 독특하다. 『그림자 떼어 걷기』라니, 뗄 수 없는 그림자를 왜 떼어야만 할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뗄 수 없기에, 떼어내려 하는 것이 아닐까? 떼어내고 싶어도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 힘겹게 하는 인생의 무게들을 시인은 그림자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뒤로 돌아, / 의기소침한 어깨로 뒤로 돌아, // (중략)

뒤로 돌아, / 무너진 발걸음으로 뒤로 돌아, //

뒤로 돌아, / 피곤한 뒤통수로 뒤로 돌아, //

뒤로 돌아, / 무거운 그림자를 떼어 뒤로 돌아, //

< 혼자서 > 일부

 

시인에게 그림자는 이제 그만 떼어놓고 싶은 무거운 짐이다. 의기소침한 어깨며, 무너진 발걸음이며, 피곤한 뒤통수다. 그렇기에 그림자는 인생의 무게다. 우리를 힘겹게 하는.

 

인생의 힘겨운 순간들이 모두 떼어놓고 싶은 짐, 그림자다. 이런 그림자는 때론 절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일견 허무주의를 노래하기도 한다.

 

인간이 절망에 다다랐을 때 / 차라리 유리잔이 깨어지듯 퍽 하고 깨져버리면 한다. // 절망에 온몸을 부딪쳐 버린다. 철퍽.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부서진 마음의 조각들도 / 그대로이다. // 존재를 버리지 않는 한 절망도 사라지지 않는다.

< 절망 > 일부

 

이처럼 존재를 버리지 않는 한 절망이라는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며 시인은 절규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럼 절망의 먹이가 되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다. 삶의 무게는 여전히 힘겹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의 화살은 여전히 쏘아 올려 져야 한다.

 

활시위를 당기지 않고서는 / 화살을 날릴 수는 없어. / 시간을 들여 / 숨을 고르고, / 있는 힘을 모아 당겨 / 모든 것이 부풀어 올라 / 그 최대치에 다다랐을 때, / 화살은 난다. // 방향조차 모르는 화살을 쏠 수는 없어, / 과녁을 찾기 위해 한세월을 서성여. / 드디어 찾아낸 목표에, / 손수 다듬어온 활시위를 꺼내 / ‘삶’이라는 이름의 화살을 꽂아 / 다시 한세월을 얹어 / 날아갈 한 순간!

< 화살 > 전문

 

그렇다. 삶이 힘겹다 할지라도 포기할 순 없다. 존재를 버리지 않는 한 절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가야만 한다. 때론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해 방황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삶의 과녁을 정하고, 다시 “‘삶’이라는 이름의 화살을” 쏘아 올려야만 한다.

 

결코 삶의 무게를 떼어놓을 수 없다면, 그 삶의 무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시 삶의 화살을 쏘아야 한다. 그렇기에 삶의 무게, 인생의 질고는 어쩌면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가 된다. 이제 시인은 노래한다. 그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내가 발걸음으로 떼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 날 따라오는 그림자에게라도 부끄럽지 않게 가야 할 / 방향을 정해야 할 텐데. / 쉽사리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 / 남들은 그렇게도 명확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는데. / 나에겐 왜 이 한걸음도 떼기 힘든지?

< 목적지 > 일부

 

여전히 인생은 힘겹다. 때론 목적지를 정하기도 쉽지 않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라도 불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내 삶의 동반자인 그림자, 그림자에게라도 부끄럽지 않게 가야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림자 떼어 걷기』는 결국엔 그림자와의 동행이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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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나의 서른 - 조금씩 채워져가는 나를 만날 시간
조선진 글.그림 / 북라이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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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림 에세이가 대세인가보다. 어쩌면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진득하게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게다가 이곳저곳에서 좋은 말들을 끌어 모으고, 그림으로 눈가림을 하는 경우 역시 없지 않은 것 같다. 뿐인가! 너무 비슷비슷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부정적 부분이 없지 않음에도 나 역시 요 근래에만도 벌써 대여섯 권의 그림 에세이를 읽었나보다. 그러니 무작정 비판만 할 수는 없을 듯싶다. 그만큼 우리 독자들에게 공감함으로 다가가는 힘이 있다는 의미니 말이다. 게다가 어찌 해 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나의 순수한 창작이라 말하는 것 역시 알고 보면 누군가의 생각이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일진대, 그저 읽고 그 안에 공감하는 내용들이 있다면 붙잡으면 그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이 책 『반짝반짝 나의 서른』에서는 어떤 내용이 내 마음을 울릴까? 우선, 나의 서른 살을 돌아보며, 그래, 그 땐 그랬었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 역시 저자처럼 서른 살에 큰 의미를 두었었다. 마치 인생이 서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 같은 느낌. 게다가 나의 경우 실제 서른 살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여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른의 전후는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 저자 역시 말하고 있듯, 서른 이후에도, 아니 마흔 이후에도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나를 정의하는 나이가 될 쉰 그리고 그 이후 역시 별 다를 것 없는 하루요, 별 다를 것 없는 매일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매일 매일이 같은 별 볼 일 없는 시간들은 아닐 것이다. 별 다를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매일 매일의 삶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행복의 순간이요 축복의 나날들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시간은 언제나 나에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저자가 말하듯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과정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양한 경험과 추억, 소중한 순간들이 채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채워짐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끊임없이, 호흡을 멈추게 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자 다짐해 본다. 비록 어쩌면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럴 때, 저자가 말하는 나만의 결을 언제나 눈으로 보게 되고, 혼으로 느끼게 되리라.

 

저자의 글 가운데 <골목길>이란 글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지금 앞이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걷는 중이다.

이 코너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몰라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설렘 가득한 골목길.

 

귀여운 고양이가 튀어나올 수도 있고,

정원이 근사한 작고 예쁜 집이 나올 수도 있다.

어쩌면 막다른 길이 나올 수도 있고

커브를 돌던 자전거와 충돌해 잠시 넘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두려움만큼의 설렘이 있으니

<골목길> 전문 (274쪽)

 

이 글이 마음에 와 닿았던 건, 마침 이 책을 읽기 전 문득 내 삶을 돌아보며, 내 인생이 마치 안개와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뿌옇게 낀 안개처럼, 앞이 확실히 보이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안개 속에서 여전히 일상의 삶은 지속된다. 그리고 그 지속됨이 있을 때, 언젠가 안개는 걷히게 될 것이고, 처음과 다른 모습의 성숙한 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골목길>이란 글과 참 유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 이제 이 책 제목처럼 더욱 반짝반짝 빛날 나의 내일, 나의 삶을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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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적선 개도적선 2015-05-0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레임은 행복
 
달팽이와 나 쌈지떡 문고 6
클레르 르노 지음, 이정주 옮김, 김소라 그림 / 스푼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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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는 반에서 언제나 1등을 한다. 하지만, 친구가 없다. 왜 그럴까? 공부를 잘하서 친구들이 밥맛이라 여기는 걸까? 아니다. 빅토르에게는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 왼손가락이 엄지손을 제외하고는 작다. 작아도 너무 작다. 빅토르는 그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르다. 1학년 때 좋아하던 여자 친구와 함께 박물관에 갔는데, 자신의 손이 그런 것을 처음 알고는 비명을 지르고 달아났다. 이런 자신의 손에 대해 빅토르는 이렇게 말한다.

 

“별건 아니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날 ‘게’라고 불러요.”(12쪽)

 

그렇다. 빅토르의 손이 마치 게의 집게와 같다고 해서 별명이 ‘게’란다. 그래서 언제나 혼자인 빅토르의 반에 새로이 여자 아이가 전학 왔다. 그런데, 이 친구는 소심해도 너무 소심하다. 선생님께서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언제나 부끄럽다고 움츠리고 있어, ‘달팽이’란 별명을 갖게 된다.

 

이 쯤 되면, 책 제목을 통해, 이들이 주인공인지를 알게 됐을 거다. 『달팽이와 나』, 이 책은 게 손을 가진 빅토르와 달팽이처럼 언제나 숨고 움츠러드는 필로멘, 둘 간의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 이야기다.

책 내용이 무거울 수도 있겠는데, 전혀 무겁지 않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따스하다. 그리고 밝다. 어쩌면, 이런 밝은 분위기엔 예쁜 그림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 동화를 읽으며, 너무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아, 숨고 움츠러들기 대장인 필로멘이 왜 이렇게 되었을 지를 생각해본다. 그건 언제나 혼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빠 없이 엄마와 단 둘인 필로멘. 엄마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해야만 한다. 그러니 언제나 혼자에 익숙한 필로멘은 점점 더 움츠러들게 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마치 ‘사회적 은둔자’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빅토르가 손을 내민다. 비록 장애가 있지만, 부끄러운 손이지만, 당당하게 손을 내민다. 게다가 빅토르는 7남매의 형제를 둔, 가족이 9명이나 되는 북적거리는 대가족의 아이다. 빅토르의 다가감을 통해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나중에는 빅토르의 집에 초대될뿐더러,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날마다 이 가정에서 보내게 되는 필로멘은 이 대가족의 북적거림, 어우러짐을 통해 자신만의 달팽이집에서 나올 수 있게된다.

 

이것이 이 책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다. 사회적 은둔자의 치유는 그들을 향한 진실한 관심과 손 내밈에 있다. 아울러 결국엔 함께 어우러짐이 치유의 동력이 된다. 비록 처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또 하나 커다란 메시지는 다름에 대한 편견을 버리길 바라는 것이다. 빅토르의 조막손에 대해 사람들은 과한 반응을 보이며 멀어지거나, 과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며, 재미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마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로멘이 그렇다. 필로멘은 빅토르의 조막손을 애써 모른 척 하지 않는다. 그 손을 하나하나 만져본다. 그리고 “오케이, 난 괜찮은데.” 이것뿐이다. 이제 필로멘에게 빅토르의 손은 조금 다른 형태의 손일뿐이다. 우리 역시 장애를 향해 이런 접근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또 하나 빅토르의 누나 가운데 카퓌신 누나는 가히 환경운동가라 불릴 수 있는 환경실천가다. 로컬 푸드를 먹기 위해 간식으로 바나나를 싸지 말라 요청한다. 버려지는 야채 찌꺼기나 과일 껍질을 가지고 퇴비를 만들기도 하고, 실내에서 옷을 따뜻하게 입고 난방을 줄이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이런 한 아이의 주장에 따라 빅토르의 가정은 이것들을 실천하게 된다. 이것 역시 이 책에서 잔가지로 보여주는 메시지다. 환경을 생각할뿐더러 삶속에서 실천하는 실천적 삶.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빅토르의 담임선생님은 라팽 선생님도 멋스럽다. 남과 어울림을 힘겨워하는 필로멘은 체육활동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체육복을 잊어버렸다느니, 도둑맞았다느니 하는 뻔한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라팽 선생님은 모른 척 믿어준다.

 

“선생님은 믿지 않지만 믿는 척해요. 선생님도 나처럼 인생에는 밧줄타기를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59쪽)

 

우리가 살아가며 원칙을 지키는 것, 바른생활맨으로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때론, 그 원칙도 깨뜨릴 수 있는 넓은 가슴이야말로 세상을 더욱 멋스럽게 만든다. 라팽 선생님처럼 말이다.

 

“게와 달팽이” 단짝의 이야기, 슬플 것 같지만 유쾌하고, 무거울 것 같지만 가볍고, 어두울 것 같지만 밝은, 참 아름다운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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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지 마! 때리지 마! 책 읽는 어린이 연두잎 8
노경실 지음, 조윤주 그림 / 해와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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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찬은 덩치는 작지만, 학교 주먹 왕이다. 나쁜 의미에서의 주먹 왕이 아니라, 학교 태권도대회에서 3학년 전체 1등을 했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영찬은 ‘주먹으로 호두까기 대회’에서도 3학년 1등을 했다. 이처럼 영찬은 태권도 왕, 주먹 왕이다. 하지만, 또 하나 영찬은 울보 왕이기도 하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영찬은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아이다. 게다가 순하여 ‘순찬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런 영찬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건의 발단은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 반장 미미가 떠드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하는데도 아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아, 결국 미미가 울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그전에는 나서기 좋아하지 않던 영찬은 미미를 위해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지르게 된 거다. 물론 아무도 순한 영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친구 중 하나가 영찬을 놀린 거다. 영찬의 외모로 인신공격을 하면서 말이다. 이에 영찬은 태권도로 단련된 주먹을 휘둘렀고, 맞은 아이는 코피가 터지게 된 것.

 

이때부터 영찬은 미미를 위해 아이들이 떠들지 못하게 나선다. 처음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영찬은 주먹을 먼저 앞세우는 일에 익숙해진다. 게다가 이런 영찬의 주먹에 편승하여 덕을 보려는 친구들이 생기고, 영찬의 힘을 믿고 친구들에게 못되게 굴기도 하는 것. 하지만, 아무도 영찬과 영찬의 힘을 앞세워 폭주하기 시작하는 녀석들에게 항의하는 친구도 없다. 모두 침묵할 뿐.

과연 영찬과 그 친구들의 폭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될까? 그리고 그 폭주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이 동화는 이처럼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 폭력이 처음엔 악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폭력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폭력의 한 특성을 보여준다. 순하기만 하던 영찬이 이런 폭력을 앞세우는 폭군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러니 누구나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동화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힘 앞에, 편승하는 친구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어쩌면, 이들이 더 나쁠 수 있다. 영찬의 폭력을 부추기는 녀석들이 이들이니까. 그리고 영찬의 힘을 믿고 더 못된 행동을 하는 녀석들이니까. 그러니, 폭력의 또 한 단면을 보여준다. 힘이 있어야만 폭력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님을. 때론 힘이 없는 약자들 역시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어쩌면 더 나쁜 폭력을 양산할 수 있음을.

 

무엇보다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이러한 폭력 앞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책 제목부터 『때리지 마! 때리지 마!』이다. 이 외침은 다름 아닌 영찬을 향한 반 아이들의 외침이다. 영찬의 주먹의 힘 앞에 두려워하며, 침묵하던 그들은 반의 가장 약한 친구인 은태, 언제나 심장이 약해 고생하는 은태가 영찬에게 맞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외치기 시작한다. “때리지 마!”라고. 한 사람의 외침이, 두 사람의 외침이 되고, 나중에는 반 아이들 전체의 외침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영찬의 폭주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비결이다. 폭력 앞에 두렵다고 침묵하는 이들은 실상 폭력을 용인하고, 양산하는 또 하나의 가해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반면, 비록 약자들이라 할지라도, 폭력 앞에 목소리를 합하게 될 때, 그 힘은 강해지고, 폭력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이 되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게 된다. 언젠가부터 눈을 감아버린 모습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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