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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눈동자에 건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1월
평점 :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대 눈동자에 건배』는 9편의 단편추리소설이 실려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본격추리소설, SF단편, 판타지, 사회파 소설, 의학소설, 휴먼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추리소설이 모여 있어 마치 어린 시절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느낌을 갖게 한다.
각 단편이 어찌 이리 색깔이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단편소설들을 읽어가며, 몇몇 작품은 ‘이게 뭐야’ 하는 실망도 있었다. 아마도 내가 기대하던 바와 달라서 일게다. 그런데, 소설집을 다 읽고 덮은 후엔 오히려 기대하지 못했던 다양한 느낌을 갖게 해주기에 배부른 느낌이다. 기대하지 못했던 색깔들이 모여 있기에 오히려 무지개처럼 예쁠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풍성함을 전해주는 소설집이 바로 『그대 눈동자에 건배』이다.
주인공이 범인인 경우도 세 편이나 있다. 「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 「고장 난 시계」, 「크리스마스 미스터리」가 그것이다. 이 세편 역시 서로 다른 느낌들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주인공들이 범인으로서 겪게 되는 당혹감이다. 흔히 범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 범인이지만 그 범행에 나름 정당성을 부여하여 독자들이 공감하고 도리어 그 행위를 감싸게 되며, 더 나아가 독자는 주인공의 범행을 함께 응원하도록 스토리를 진행시키곤 한다. 그런데, 이들 세편은 그렇지 않다. 「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의 경우, 주인공은 아주 못된 놈으로 드러난다. 물론 처음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소설을 읽다가 ‘저런 못된 놈은 당장 잡아들여야 해.’라고 생각될 정도로 못된 놈이라는 게 드러남으로 겪게 되는 독자의 당혹감은 아마도 소설 속 범인이 겪게 될 당혹감과 별 차이가 없지 모른다. 오히려 이런 당혹감이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에서는 ‘미아타리 수사원’이란 게 등장한다. 이들은 평소 수많은 지명 수배자들 사진을 수시로 보며 그 얼굴을 숙지한다. 그리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장소, 많이 모이는 장소 등에 섞여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고, 수배자가 있진 않은지 골라내는 수사원들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실사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실사에 질렸기에.
“우치무라 씨는 왜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글쎄, 어째서일까, 아무튼 실제 인간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그만, 이라는 기분이 들어. 사람 얼굴은 현실 세계에서도 지겨울 만큼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134쪽)
시간이 날 때마다 수배범들의 사진만을 들여다봐야 하고,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 봐야만 하는 ‘미아타리 수사원’의 애환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런 우치무라가 처음으로 마음에 맞는 상대를 만났다.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만화 캐릭터 같은 여자. 그런데, 연애를 할 때에도 ‘미아타리 수사원’의 눈동자는 열일을 한다. 마음에 둔 상대가 수배자임을 알아본 것. 수배자를 알아보고 범인을 검거할 수 있게 된 그 눈동자에 건배를 해야 할까? 아님, 간만에 사랑할 상대를 만나게 된 사랑을 끝장낸 눈동자를 저주해야 할까?
이 외에도 유사 육아체험을 다룬 SF물 「렌털 베이비」. 고양이의 뇌 이식 수술을 성공시킨 다소 판타지적 느낌이 가미된 의학소설 「사파이어의 기적」. 앞에서도 언급했던 범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범인의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고장 난 시계」, 「크리스마스 미스터리」. 결혼을 앞둔 딸, 부잣집에 시집을 가 과연 깐깐한 시어머니 아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루고 있는 「오늘밤은 나 홀로 히나마쓰리」. 무뚝뚝하지만 아들을 염려하는 판타지가 가미된 「수정 염주」 등이 각자의 분위기를 뽐내며 독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특히,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첫 번째 단편 「새해 첫날의 결심」과 마지막 단편 「수정 염주」다.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수정 염주」는 가문에 내려오는 비기 ‘수정 염주’에 얽힌 이야기다. 이 수정 염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은 가장이 죽은 후 아들에게 전해진다. 가장이 죽기 전까지는 그 신비한 수정 염주의 구체적인 힘은 아무도 모른다. 이 염주는 단 한 차례 단 하루 동안의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결정적 순간, 결정적 사안에 단 한 차례 사용할 수 있는 염주. 주인공의 가문은 이 염주를 통해, 가문을 일으켜 세워 왔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 뒤 이 신비한 ‘수정 염주’를 물려받게 되는데. 아버지가 이 염주를 언제 사용했을지 주인공은 추리하게 된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인공은 커다란 감동에 전율한다.
언제나 자신의 꿈에 반대만 했던 아버지. 언제나 자신의 가슴에 못을 박기만 했던 아버지. 언제나 아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문, 사업에 온통 신경을 쏟는 것 같던 매정한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단 하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수정 염주’를 통해 알게 될 때, 주인공의 가슴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독자 역시 큰 감동에 몸을 떨어야만 하고. 우리네 아버지들이 어떤 가슴으로 자식들을 키웠는지. 그 단단하고, 무뚝뚝한 얼굴 이면에 어떤 진면목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자 역시 이 단편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비교한다. 개인적으론 「수정 염주」가 불량은 훨씬 짧지만 오히려 그 감동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보다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첫 번째에 수록된 「새해 첫날의 결심」이다. 이 단편은 본격추리소설과 사회파 추리소설이 잘 버무려진 소설이다.
성실하게 살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부부는 새해를 맞아 집 근처 신사에서 참배를 올린 후 집에 돌아와 생을 마감하려 한다. 그런 부부가 신사에서 속옷 차림으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지역 군사를 발견하게 되고, 사건을 신고하게 된다. 이렇게 부부는 사건 후속 조치하는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이 단편은 범인이 과연 누구일지 풀어나가는 본격추리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울러 그 안에 사회적 부조리를 향한 풍자가 가득 담긴 사회파 소설이기도 하다.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하는 자들. 거짓된 얼굴의 지역 사회 지도자들(행정, 교육, 사법, 종교)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담겨 있다.
새해 첫날 이른 새벽 살인미수 사건에 대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사건을 접수하고는 도리어 신고한 부부를 귀찮아 한다. 왜 신고했느냐는 느낌이다. 그들의 정월 초 휴가를 망쳐놨기 때문이다. 스키장에 가려던 계획, 온천 여관을 예약해 둔 계획이 다 틀어져버렸기 때문. 말단 형사부터 서장 까지 모두 똑같다.
지역 사회의 행정과 교육을 이끌어 가는 늙은 지도자들, 군수와 교육장은 알고 보면 미모의 과부 식당 사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온갖 추태를 부리는 자들에 불과하다. 신사 책임자인 구지는 신심보다는 돈을 사랑하는 자이고. 이런 모습을 목격한 두 부부의 다음과 같은 대화로 소설이 마쳐진다.
“그렇게 무책임한 인간들도 떵떵거리고 위세 부리며 살고 있잖아. 그런 바보들이 군수를 하고 교육장을 하고 경찰서장을 하고...”
“구지도 하고...”
“그런데 왜 우리처럼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죽어야 해? 이건 정말 이상하잖아. 말도 안 돼. 여보, 열심히 살아보자. 우리도 앞으로 그이들 못지않게 대충대충, 속 편하게, 뻔뻔스럽게 살아보자.”
“응, 나도 동감이야.”(43-4쪽)
소설 속 부부의 다음은 어땠을까? 정말 대충대충, 속 편하게, 뻔뻔스럽게 살았을까? 모르긴 해도, 성실한 부부가 하루아침 성실함을 버릴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을 이유가 가득한 삶이라 할지라도 살아야 할 이유 하나 굳게 붙잡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제 부부는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게다. 그리고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결말이 좋아야만 한다. 무책임하게 떵떵거리고 위세 부리며 사는 바보들이 가득한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들에 맛을 들였었는데, 단편들도 장편 못지않게 좋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 개인적으로는 여타 작품들에 결코 뒤지지 않을 걸작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