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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감추는 날
황선미 지음, 조미자 그림 / 이마주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 일기 쓰기만큼 싫었던 숙제도 드물었습니다. 때론 몇 날치를 몰아 쓰느라 이미 지난날들의 날씨가 어땠는지 부모님께 여쭙기도 하고, 생각해내느라 골머리를 썩이기도 했죠. 또 뭘 했는지,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내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물론, 많은 경우 지어내 쓰기도 했답니다. 또한 방학일기의 경우 미리쓰기 신공도 있었죠. 미리 하고 싶은 걸 써놓고, 일기에 썼으니 해야 한다고 엄마에게 떼를 쓰기도 했죠. 그러다 혼쭐이 나기도 했고 말입니다. 요즘 딸아이를 보니, 일기 때문에 뭔가를 일부러 하고 쓰더라고요. 그러니 아빠보단 훨씬 나은 거죠. 창작은 아니니 말입니다.^^
일기 쓰기가 싫었던 이유는 아마도 매일같이 꾸준히 해야 한다는 점일 겁니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으로 싫었던 건 아닐 겁니다. 일기 쓰기가 꺼려지던 진짜 이유는 내가 쓴 일기를 선생님이 꼭 읽어본다는 점이었죠(물론, 엄마 역시 몰래 읽어보곤 했고요.). 그러니 정말 마음에 있는 얘기들은 일기에 쓸 수 없었죠. 그저 무난한 이야기들, 매일 매일 그저 그런 이야기들만 잔뜩 늘어놓곤 했던 기억입니다.
황선미 작가의 『일기 감추는 날』을 읽으며, 마치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도 들었던 건, 이런 비슷한 기억의 공유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 내 일기를 읽으니, 마음의 소리를 옮길 수 없다는 그런 한계 말입니다.
동민이는 다소 소심한 아이로 경수와의 관계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경수는 활동적인 아이로 형들과 함께 어울리며 담을 뛰어 넘곤 하는 모습이 껄렁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한편으로는 동민의 동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수의 오해로 둘의 관계가 험악해 집니다. 누군가 경수가 담을 넘는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을 일기에 썼고, 이 일로 선생님에게 혼난 경수는 자신이 담을 넘는 모습을 지켜봤던 동민을 의심하거든요.
경수의 괴롭힘으로 동민은 힘듭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일기에 써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야기를 일기에 썼는데, 선생님이 고자질하는 것 아니라고 지적했거든요. 정말 고민되지만, 정작 그 고민은 일기를 검사하는 선생님의 시선이 두려워 쓰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일기장 앞의 동민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소리를 적는 것이 일기라 하지만, 일기에는 쓸 수 없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아버지의 퇴직, 그로 인한 부모님의 다툼, 이러한 동민에게는 실질적으로 힘겨운 마음의 소리마저 일기엔 적을 수 없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사정은 일기를 읽을 선생님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니까요. 게다가 좋지 않은 가정의 사정이 선생님에게 알려지는 걸 엄마가 원치 않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알맹이가 빠져버린 일기쓰기는 동화 속 풍경만은 아니리라 여겨집니다. 어쩜 오늘 우리의 자녀들 역시 매일같이 일기를 쓰면서도 알맹이는 빼놓은 보여주기, 검사받기 숙제로서의 일기쓰기만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이런 부조리는 애초에 일기를 검사하는 이상한 관례 때문일 겁니다. 왜 선생님들은 일기를 검사해야만 하는 걸까요? 동화 『일기 감추는 날』은 일기쓰기, 아니 일기 검사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함을 알려줍니다.
동민이의 고민들 가운데는 이런 부분도 있었습니다. 경수와의 관계에서 힘들어 하는 동민을 보며, 엄마는 당당하게 맞설 것을 주문합니다. 이런 엄마의 요구는 물론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난관이 있어도 당당하게 맞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엄마의 요구는 동민의 고민과 상황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하는 조언은 아님을 생각게 됩니다. 동민 역시 당당히 맞서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안 되는 것 역시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동민의 고민을 고려하지 않고 당당함만을 요구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어쩜 동민 엄마의 모습으로 나 역시 자녀들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일기와 연관된 아이들의 고민들이 잘 버무려져 있는 동화, 『일기 감추는 날』을 읽으며, 역시 황선미 작가라는 이름이 괜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