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유없이 아픈 걸까 - 몸이 숨기지 못했던 마음의 깊은 상처에 관하여
기 코르노 지음, 강현주 옮김 / 예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어느 누구도 질병을 반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질병에 대해 색다른 접근을 보여주는 책이 있다. 『나는 왜 이유 없이 아픈 걸까』라는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을 하나의 신호(sign)로 접근한다.

 

육체적 질병은 우리 몸의 깊은 불균형을 나타내는 경고 신호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바로 질병이라는 접근이다. 그렇기에 질병은 우리의 몸을 깎아먹는 것이 아닌 오히려 생명력을 더욱 유지하려는 몸의 노력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몸의 균형이 깨어졌으니, 그 원인을 찾아 우리 몸을 불편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는 시도가 질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병은 도리어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한다고까지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떤 갈등으로 인해 위험한 상태가 되면, 병은 최고의 생존 수단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한다.

 

모든 종류의 질병, 고통은 우리 몸의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이기에, 우리는 고통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귀를 기울임으로 우리는 우리의 몸,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인생까지도 치유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참 개연성이 있는 접근이다. 언젠가 어느 의사선생님의 특강을 듣는데, 그분은 나이가 들수록 몸 이곳저곳이 아파오는 것은 축복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몸이 아픈 게 축복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분의 설명은 이렇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이빨이 흔들리기도 하고, 아파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신호란다. ‘당신은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니 오징어와 같은 질긴 것들은 씹지 말라’는 신호. 왜냐하면 이렇게 나이가 드는데도 이빨이 아프지 않게 된다면, 자신의 몸 상태에 과신하다가 마른 오징어가 맛있다고, 그리고 이빨도 튼튼하다고 마구 씹다가 턱관절이 완전히 나가게 된단다. 그러면 그건 인공관절도 넣을 수 없으니 엄청난 재앙이 된단다. 이 설명을 듣고 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책, 『나는 왜 이유 없이 아픈 걸까』 역시 그런 입장으로 질병을 접근한다. 물론, 저자는 몸의 균형을 위협하는 거북한 상태, 불편한 상태를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가 계속 될 때, 실제 몸은 질병을 가져오게 되고, 이런 질병은 곧 그런 스트레스가 지속되지 않도록 하라는 신호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약물을 통해 몸에 힘을 불어넣게 되는데, 이것이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내부에는 생명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의사다’라는 견해에 저자는 동의한다. 한 마디로 우리의 마음이 균형 잡힐 때,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 반대로 심리적인 갈등은 모든 육체적인 병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 몸의 치유에 있어 저자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애정(사랑)이나 우정(친밀감)을 이야기한다. 이런 사랑과 친밀감이 몸의 치유에 도움을 주고, 반대로 고독감과 단절감은 몸을 병들게 하고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엔 사랑이 우리의 몸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기쁨, 그 행복이 우리에게 건강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행복한 웃음을 짓자! 행복을 상상하자! 그럼으로 내 삶 속에 행복이 실제 이루어지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 아파트
엘렌 그레미용 지음, 장소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정신과 의사인 비토리오는 아내 리산드라를 죽인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런 비토리오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화산 연구원이자 비토리오의 상담 환자인 에바 마리아만이 비토리오의 무죄를 확신하며 그를 돕기 위해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첫 번째 작업은 비토리오가 환자들을 상담할 때, 몰래 녹음한 테이프들을 듣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찾는 작업이다. 이런 가운데,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자꾸 바뀌게 된다. 젊은 여자들을 모두 증오하는 여인 알리시아를 의심하였다가고, 그 다음에는 군부 독재 정권 아래에서 고문을 자행하던 장교 펠리페가 범인으로 의심되기도 한다. 에바 마리아는 계속하여 범인을 추적한다. 그런 가운데, 비토리오의 아내가 정부를 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또한 비토리오 역시 정부를 두고 있음도 알게 됨으로 비토리오가 범인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이 소설은 반전에 반전이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에바 마리아와 함께 범인을 추적해 가는 가운데, 함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낙심하기도 하며, 함께 올가미에 걸려 버둥거리기도 한다.

 

이 소설은 과연 비토리오의 미모의 아내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심리 스릴러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사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 안에 또 하나의 음성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의 망령이 채 사라지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다. 1976년부터 7년여 지속되었던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복원된 지 4년 뒤의 시대적 상황. 무엇보다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가득하던 때, 말도 안 되는 법령이 제정된다. 바로 군부독재 치하에서 자행된 모든 범죄에 대한 형사처분금지법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죄 없는 자들을 잡아 고문하고 살인한 자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뿐더러 이제는 피해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 그들이 모두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내 곁의 마음씨 좋은 웃음 짓는 이웃이 어쩌면 내 아들 딸을 고문하고, 살인한 살인광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소설의 바탕으로 깔려 있다. 정신과 의사인 비토리오의 무죄를 위해 애쓰는 에바 마리아 역시 딸 스텔라를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잃은 어머니다. 그 뒤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인. 그 상처를 잊기 위해 술에 의지하고, 정신과 의사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하는 여인이다. 그런 여인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정신과 의사 비토리오 역시 어쩌면 바로 그런 살인정권, 고문정권, 독재정권에 동조하였던 자일 수 있다(소설 속에서 고문의 또 다른 희생자인 미겔이 고문의 현장에서 들었던 정신과 의사의 음성, 그리고 뒤에 모임에서 다시 듣게 된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소설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성은 열려 있다).

 

뿐 인가! 비토리오에게 정신상담 치료를 받는 펠리페는 가장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고문기술자다. 이처럼 같은 공간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번갈아 한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도 하며, 어쩌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구원하는(치료하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아이러니를 작가는 소설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어찌 아르헨티나만의 것이겠나? 우리의 근현대사 역시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한 역사 아닌가. 여전히 친일의 입장에서 동족의 고혈을 빨았던 자들이 떵떵거리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 군사독재의 주류들이 여전히 사회의 주류에서 힘을 발휘하는 아이러니 가득한 민족 아닌가.

 

또한 소설은 살인정권으로 인해 자행된 수많은 소년소녀들의 실종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하는 질문 역시 우리에게 던진다. 작가는 잉카문명의 희생제의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희생되어진 소년소녀들. 이는 지금 아르헨티나가 누리고 있는 안녕이 무엇을 담보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안녕은 무엇을 담보하고 있나? 이제 곧 세월호 1주기가 된다. 그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담보하여 우리는 어떤 안녕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수많은 생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녕은 소원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소설을 읽고 잠시 돌아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구(남친)와 담(여친)은 사랑하는 사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하며, 시간을 공유한 사이다.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한 사이 말이다. 그런 구가 죽었다. 부모가 물려준 달갑잖은 유산 빚더미 때문에 결국 사채업자, 깡패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런 구의 시신을 담은 장례 치른다.

 

그런데, 담이 치르는 장례는 특별하다. 구의 시신을 먹어치우는 거다. 그렇기에 대단히 엽기적이라는 생각, 섬뜩한 느낌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가는 가운데, 그 섬뜩함은 먹먹함으로 변한다. 여전히 엽기적이긴 하지만, 그 엽기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구와 담의 회상으로 전개된다. 구의 회상에는 ●표가, 그리고 담의 회상에는 ○표가 있다. 그래서 누구의 회상인지 알 수 있는 장치를 작가는 해 놨다. 그리고 구의 회상은 현재형이다. 즉, 이미 죽어 시신의 일부를 담이 먹어치우고 있는 상황에서의 회상이다. 작가는 죽은 구의 영혼이 담 곁에 머무는 것으로 설정해놓았다.

 

구와 담은 여덟 살에 처음 만났다. 물론 학교에서, 구는 담을 괴롭히던 남학생이었다. 그런 그 둘은 10살이 되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그 후로 둘은 언제나 함께 다닌다. 주변의 조롱과 비방에도 둘은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중학생이 되고, 청년이 된다. 물론, 그 사이 둘간에도 비어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 성장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둘의 기억은 하나다. 그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삶을 살아낸 청춘이다.

 

그런 구가 죽었다. 그래서 담은 구의 시신을 먹는다. 담에게 이런 행위는 엽기도, 비윤리적 행위도 아니다. 그저 사랑의 행위일 뿐. 왜냐하면 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

 

담은 구 없이도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구와 하나된 삶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 구를 먹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은 죽음마저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이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은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처절하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에. 구와 담은 좋아질 미래가 없는 청춘들이다. 그렇기에 구는 이번 생은 빨리 감기로 돌려졌으면 바란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인가.

 

구의 꿈은 ‘울트라 캡숑 아빠’가 되는 것이었다(이 꿈은 죽은 아이 노마의 꿈이기도 했다). 흔히 네 꿈이 뭐냐 물을 때, 실없는 남자 아이들 가운데는 ‘아빠 되는 거요’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대답은 꿈이 없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며, 싱거운 마음의 표출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에게 있어 이 꿈은 절실하기만 하다. 자신에게는 그런 아빠가 없었기에, 그래서 벗어던질 수 없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기에, 자신만은 자신의 아이에게는 울트라 캡숑 아빠가 되길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는 왜 제목을 『구의 증명』이라 했을까? 죽은 구가 무엇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마도 어떤 이에게는 어떤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열심히 땀 흘리며 산다 할지라도, 좋아질 미래가 없는 청춘들이 왜 없겠는가? “열심히 사는 게 정답이 아닌 세상”도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그런 세상일지도 모른다. 구의 죽음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구의 증명은 담을 향한 사랑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담은 구의 시신을 먹음으로 확증하고 있고 말이다.

 

죽은 구의 독백이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166-7쪽)

 

어찌 사랑이 이토록 처절할 수 있을까? 구와 담의 사랑에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처절하리만치 먹먹한 사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지 않는 청춘
이케다 다이사쿠 지음 / 조선뉴스프레스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청춘’이란 단어에는 왠지 힘이 있다. 생명력이 느껴진다. 청년에겐 그들만의 특권이 있다. 그렇다면 그 특권은 무엇일까? 저자는 젊음 자체가 특권이라 말한다. 젊음 안에는 무한한 창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배움 역시 청년의 권리라 말한다. 그러한 배움을 위해 청년의 시기 독서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한다. 그럼으로 ‘일류’가 되는 청년이 되길 바라며.

 

저자는 청년들에게 ‘일류’가 되라 말한다. 여기에서 저자가 지향하는 ‘일류’청년이 어떤 청년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 남보다 더 앞서가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게 되는 인생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일류’는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을 소유한 자,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자신’만을 위해 젊음을 태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공헌’할 목적을 가지고 젊음을 태우는 사람을 ‘일류’라고 부른다.

 

저자가 청년들에게 당부하는 바는 명확하다. 시선을 내 ‘안’으로 집중시키지 말고, 내 ‘밖’으로 돌릴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젊음의 우정을 말하기도 한다. ‘사회에 공헌하자’와 같은 공통된 목적이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우정이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정은 도리어 야합이 된다고 말한다.

 

아울러 용기 역시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그러기 위한 ‘보배와 같은 힘’이 용기라고 말한다. 그래서 ‘용기’는 ‘정의’와 하나임을 말한다.

 

이러한 시각이 오늘 우리 청춘들에게 심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우리의 젊은이들은 참 불쌍하다. 불투명한 미래와 척박한 현실 사이에서 신음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척박함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남이 소원하기 때문이다. 참 안타깝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청년들이 진정으로 불쌍한 이유는 그 몸부림이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위해서’ 스펙을 쌓고, ‘자신만을 위해서’ 몸부림친다. 그래서 불쌍하다. 같은 몸부림이라도 목적이 분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목적이 분명하긴 하다. 자신의 부귀영화, 자신의 안위, 자신의 명예 등등. 삶의 목적이 아름다운 젊음이야말로 지지 않는 청춘이 아닐까?

 

이 책, 『지지 않는 청춘』은 사실 문장이 그리 매끄럽지는 않다. 또한 때론 문맥의 비약이 눈에 띤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관점이 아름답기에 청년의 시기에 귀 기울여 보면 좋을 그런 조언들이다. 마지막 단락인 저자가 보낸 청년 시절에 대한 글들 역시 오늘의 청년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행복은 삶의 보람이 있느냐 없느냐, 충실한 인생이냐 아니냐로 결정된다.”(7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 42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분들이 사는 게 재미없다 말하곤 한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들을 예사롭게 하기도 한다. 반면 또 어떤 이들은 매일 매일의 삶이 행복하다 말하기도 한다.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의 시간이 왜 어떤 이에게는 죽지 못해 사는 시간이지만, 또 누구에게는 행복한 시간이 되는 걸까? 물론,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행복의 조건이 많은 이들과 불행의 조건이 많은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 사람을 둘러싼 상황, 외부적 환경이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요인일까? 그 영향이 없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꼭 그러한 조건들이 절대적인 것만도 아닐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기뻐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분들임에도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우린 종종 보게 된다.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분들을 말이다.

 

여기 그처럼 매일의 삶 속에서 행복을 일구어내며 살아가는 분이 있다. 마흔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파킨스병 진단을 받게 되고, 지난 15년 동안 하루하루 몸이 더 나빠지는 상황 가운데 있지만, 그 삶을 온전히 누리며, 행복해 하는 여인. 그녀는 자신의 행복한 삶에 대해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란 제목의 에세이집을 펴냈다.

 

사랑하던 언니의 죽음, 힘겨웠던 시집살이, 예기치 않았던 발병과 투병생활, 그리고 유산과 출산 등 결코 만만찮은 세월을 잔잔하게 펼쳐놓는다. 그러면서도 독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가득 전하고 있다. 그런 저자의 담담한 위로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본인이 실제 아픔을 겪었으며, 그리고 현재도 겪어나가는 사람의 위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아픔, 눈물과 한숨에 대한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위로의 말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가운데 많은 경우는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다 할지라도 글쓴이는 실제 눈물어린 삶을 공감하지 못할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저자에겐 아픔의 경험, 눈물의 경험이 현존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전하는 위로와 격려는 공허하지 않고 힘이 있다. 수많은 위로와 조언이 있겠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하는 애정 가득한 조언 하나 적어본다.

 

“아들아, 앞으로 너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며 상처주고 또 상처 받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렴.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것이 바로 성장이고, 이미 그 힘은 네 안에 있다는 걸.”(182쪽)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며, 어찌 상처 없이 살 수 있겠는가? 상처는 어쩌면 우리 삶의 기본 옵션 같은 것이기도 하다. 상처를 두려워하면 성장할 수 없다. 넘어질 것이 두려워 걸음마를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겠나? 넘어지며 걸음마를 배우며 자신도 모르게 성장하는 거다. 상처는 삶의 기본 옵션이다. 하지만, 그 상처를 어떻게 어루만져주고, 치유하느냐에 따라 우린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반면 그 상처에 함몰되기도 한다. 저자는 삶의 수많은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렇게 삶을 기대한다.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성숙해 나갈 나의 미래가 기대된다.”(255쪽)

 

이 한 문구가 왠지 내 안에도 기대감을 키워준다. 중년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삶은 나에게 상처를 허락한다. 하지만, 그 상처 역시 언젠가는 아물 것이고, 삶은 더욱 단단해질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의 눈물과 한숨에도 불구하여 앞으로의 삶은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게 될 것도. 그럼으로 종국에는 멋지게 펼쳐질 내 삶, 내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늘 하루의 시간, 여기에서의 삶이 행복하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광적선 개도적선 2015-04-1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은 감사와 연결

중동이 2015-04-13 22:4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방문 및 댓글에 감사합니다~~

보광적선 개도적선 2015-04-14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해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