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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아파트
엘렌 그레미용 지음, 장소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정신과 의사인 비토리오는 아내 리산드라를 죽인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런 비토리오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화산 연구원이자 비토리오의 상담 환자인 에바 마리아만이 비토리오의 무죄를 확신하며 그를 돕기 위해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첫 번째 작업은 비토리오가 환자들을 상담할 때, 몰래 녹음한 테이프들을 듣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찾는 작업이다. 이런 가운데,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자꾸 바뀌게 된다. 젊은 여자들을 모두 증오하는 여인 알리시아를 의심하였다가고, 그 다음에는 군부 독재 정권 아래에서 고문을 자행하던 장교 펠리페가 범인으로 의심되기도 한다. 에바 마리아는 계속하여 범인을 추적한다. 그런 가운데, 비토리오의 아내가 정부를 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또한 비토리오 역시 정부를 두고 있음도 알게 됨으로 비토리오가 범인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이 소설은 반전에 반전이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에바 마리아와 함께 범인을 추적해 가는 가운데, 함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낙심하기도 하며, 함께 올가미에 걸려 버둥거리기도 한다.
이 소설은 과연 비토리오의 미모의 아내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심리 스릴러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사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 안에 또 하나의 음성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의 망령이 채 사라지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다. 1976년부터 7년여 지속되었던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복원된 지 4년 뒤의 시대적 상황. 무엇보다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가득하던 때, 말도 안 되는 법령이 제정된다. 바로 군부독재 치하에서 자행된 모든 범죄에 대한 형사처분금지법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죄 없는 자들을 잡아 고문하고 살인한 자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뿐더러 이제는 피해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 그들이 모두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내 곁의 마음씨 좋은 웃음 짓는 이웃이 어쩌면 내 아들 딸을 고문하고, 살인한 살인광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소설의 바탕으로 깔려 있다. 정신과 의사인 비토리오의 무죄를 위해 애쓰는 에바 마리아 역시 딸 스텔라를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잃은 어머니다. 그 뒤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인. 그 상처를 잊기 위해 술에 의지하고, 정신과 의사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하는 여인이다. 그런 여인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정신과 의사 비토리오 역시 어쩌면 바로 그런 살인정권, 고문정권, 독재정권에 동조하였던 자일 수 있다(소설 속에서 고문의 또 다른 희생자인 미겔이 고문의 현장에서 들었던 정신과 의사의 음성, 그리고 뒤에 모임에서 다시 듣게 된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소설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성은 열려 있다).
뿐 인가! 비토리오에게 정신상담 치료를 받는 펠리페는 가장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고문기술자다. 이처럼 같은 공간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번갈아 한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도 하며, 어쩌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구원하는(치료하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아이러니를 작가는 소설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어찌 아르헨티나만의 것이겠나? 우리의 근현대사 역시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한 역사 아닌가. 여전히 친일의 입장에서 동족의 고혈을 빨았던 자들이 떵떵거리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 군사독재의 주류들이 여전히 사회의 주류에서 힘을 발휘하는 아이러니 가득한 민족 아닌가.
또한 소설은 살인정권으로 인해 자행된 수많은 소년소녀들의 실종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하는 질문 역시 우리에게 던진다. 작가는 잉카문명의 희생제의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희생되어진 소년소녀들. 이는 지금 아르헨티나가 누리고 있는 안녕이 무엇을 담보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안녕은 무엇을 담보하고 있나? 이제 곧 세월호 1주기가 된다. 그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담보하여 우리는 어떤 안녕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수많은 생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녕은 소원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소설을 읽고 잠시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