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서문 중에서.

 

<침묵의 봄>이 맞이한 당시의 문화적 기상도를 기억하기란, 또 의지 확고한 지은이에게 퍼부은 분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환경오염을 초래한 화학 살충제의 오용으로 우리 자신이 서서히 독극물에 중독되고 있다는 카슨의 주장은 오늘날에는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1962년 <침묵의 봄>이 출간될 당시에는 혁명적이었다. 카슨은 새로운 부가 등장하고 사회적 순종이 강조되던 시기에 이 글을 썼다. 냉전으로 인해 의심과 불관용이 극도에 이른 시대였다. 화학 산업은 전후 기술 발전의 최대 수혜자였고 국가의 부를 이끈 중요한 견인차 중 하나였다. DDT는 농업에서 각종 해충을 박멸했고 해충으로 인한 전염병을 막아 주었다. 핵폭탄이 미국의 군사적 주적을 완전히 격멸했듯이 살충제는 인간과 자연 사이 힘의 균형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빳빳하게 풀 먹인 흰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서 일하는 화학자들은 신에 필적하는 지혜를 가졌으리라 대중은 기대했으며 또 확신했다. 화학자들의 연구는 대단한 혜택을 가져다줄 것으로 여겨졌다. 전후 미국 사회에서 과학은 신이었고 또 그 과학은 남성 위주의 영역이었다. (13~14쪽)

 

나는 언제나 과학이 싫었다. 실은, 너무나 무지하여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에는 필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해야할 암기만 했고,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졸업 후에도 과학 서적은 통 읽어본 기억이 없다. 몇 해 전에 이르러서야 '좀 알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관심을 가져보려 하였으나, 지금껏 읽은 책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정도일까.

<침묵의 봄>을 수식하는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는 말은 나와 같은 과학울렁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선뜻 집어들기 힘들게 만든다. 그러나 레이첼 카슨이 얼마나 친절하고 조곤조곤 글을 썼는지 알게 되면, 두려움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전문가들과 논쟁하자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널리 경고하고자 한 것이고, 그 목적에 부합하게 글을 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수질오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것은 지하수의 광범위한 오염이다. 어디에서든 물에 살충제를 살포하는 것은 결국 모든 수자원을 위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연의 구성 요소들이 각기 폐쇄적으로 분리되어 작동한다면 이렇게 지구상의 수자원 전체에 문제가 생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땅에 떨어진 비는 토양과 암석에 난 구멍과 틈을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모든 틈을 물로 채운다. 그러다 언덕 밑에 이르러서는 다시 솟아오르고 골짜기 밑으로 더 깊게 가라앉아 지표 밑을 따라 어두운 바다로 흐른다. 지하수는 느리게는 1년에 50피트(약 15미터), 빠르게는 하루에 0.1마일(약 161미터) 정도의 속도로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로를 따라 흐르다가 지표 위 샘으로 분출하거나 우물에 고여 들어 솟아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냇물이나 강으로 유입된다. 비가 강으로 직접 내리거나 지면을 따라 바로 시냇물로 흘러드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흐르는 물은 대부분 지하수 단계를 거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수 오염은 모든 물의 오염을 의미하는 것이다. (66~67쪽)

 

어떤 물이든, 물에 살충제를 살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관하여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위와 같은 글을 읽어보면,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마음이 들 것이다.

 

300쪽 가량의 이 책에서 카슨은 풍부한 사례를 들어 화학물질 살포의 위험성을 알린다. 추상적이고 난해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사례 위주라는 것이 이 책의 가독성을 더욱 높이고, 경각심을 갖게 한다. 읽다 보면, 아 너무나 내가 환경에 관심이 없었구나... 그 무관심은 독이 되어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가? 아마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왜곡된 균형감각에 놀랄 것이다. 지성을 갖춘 인간이 원치 않는 몇 종류의 곤충을 없애기 위해 자연환경 전부를 오염시키고 그 자신까지 질병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길을 선택한 이유를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저지른 일이다. 더구나 우리가 그 이유를 살피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일은 계속되고 있다. 농산물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살충제 사용이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 과다'가 아닌가? 미국에서는 경작지를 줄이고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농부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정도다. (33쪽)

 

 

DDT의 무해성에 관한 신화는 전쟁 중 수천만 명의 군인, 피난민, 포로들의 몸에서 이를 박멸하는 데 처음 사용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44~45쪽)

 

화학자들이 새로운 살충제를 고안해내는 속도가 유독물질의 영향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를 훨씬 앞지르기 때문에, 디엘드린이 우리 몸속에 어떻게 축적되고 분배되며 배출되는지 그 일반적인 지식에는 허점이 많다. 인간의 몸속에 오랫동안 화학물질이 축적된 것은 확실한데, 휴화산처럼 잠잠히 있다가 비축한 지질을 소모하는 생리학적 스트레스 상황이 닥치면 갑자기 그 작용에 가속이 붙는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펼쳐온 말라리아 박멸 캠페인의 아픈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사실이 있다. 말라리아 박멸을 위해 DDT 대신 디엘드린을 사용하는 순간부터(말라리아모기가 DDT에 면역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역 담당자들이 중독을 일으켰다. 관련된 사람의 절반 이상이(사업에 따라 다르지만) 발작을 일으켰고 그중 몇 명은 사망했다. 디엘드린에 노출된 뒤 4개월 동안 발작이 계속된 사람도 있었다. (49~50쪽)

 

 

인간이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고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순간, 물은 다른 자원과 더불어 무관심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63쪽)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그 주변 역사와 풍토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연 식생은 그 환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이 벌이는 상호작용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관을 갖추게 되었는지, 왜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마치 활짝 펼쳐진 책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펼쳐진 쪽조차 읽지 않는다. (88쪽)

 

 

카슨은 생태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 전체의 작용을 살펴야 함에도, 한두 종류의 해충을 없애겠다고 생태계 전체를 파괴시켜 버리는 무지의 악에 관하여 맹렬히 비난한다.

 

 

화학약품이 토양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면 약품에 중독된 장수풍뎅이의 애벌레들이 대지 표면으로 기어 나와 며칠간 머무른다. 이 애벌레들은 새에게 매력적인 먹이다. 방제가 이루어진 지 2주일 동안 이미 죽엇거나 마구 죽어가는 곤충들이 자주 발견되었다. 이런 곤충이 조류의 개체 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추축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빠귀, 찌르레기, 들종다리, 구관조, 꿩 등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생물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개똥지빠귀는 '거의 절멸'했다고 한다. 비가 내린 다음에는 죽은 지렁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아마도 개똥지빠귀는 이런 지렁이를 먹었을 것이다. 다른 새들 역시 마찬가지로, 한때는 큰 혜택을 주던 비가 독극물을 새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악한 세력, 파멸의 중계자가 되어 버렸다. (119쪽)

 

 

우리를 성가시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생물이라고 생각되면 '박멸하는' 습성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있다. 그러면서 새들은 독극물의 부수적인 목표가 아닌 직접적인 목표가 되어버렸다. 농부들은 달갑지 않은 새를 쫓기 위해 파라티온 같은 치명적인 화학물질을 살포한다. (152쪽)

 

농부들은 그 결과에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독극물에 희생된 동물 목록에 6만 5000마리의 찌르레기류가 새로 포함되었다. 미처 기록되지 않은 동물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파라티온은 찌르레기뿐 아니라 모든 생물을 함께 죽이는 물질이다. 강가 저지대를 돌아다니긴 해도 옥수수밭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토끼, 너구리, 주머니쥐가 그들의 안위는커녕 존재조차 모르는 재판관이자 배심원에 의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53쪽)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잔물결이 일듯이, 유독물질의 연쇄 작용을 일으켜 죽음의 물결을 퍼뜨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쪽 접시에는 딱정벌레들이 갉아먹은 나뭇잎을 올려놓고, 다른 쪽 접시에는 유독성 살충제가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몽둥이에 스러져간 새들의 잔해와 다양한 빛깔의 가련한 깃털들을 올려놓은 채 저울질한 사람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들의 부드러운 날개가 모두 사라져버린 황폐한 세상이 되더라도 벌레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설령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가 결정을 내릴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잠시 권력을 맡긴 관리들이다. 이들은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가 깊고도 엄연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 소홀한 틈을 타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153~154쪽)

 

 

생태 환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농게는 다른 종으로 쉽게 대치될 수 없다. 이 게는 많은 동물의 먹이가 된다. 해안에 사는 너구리도 이 게를 먹고살며 갈색뜸부기처럼 습지에 서식하는 새나 해변에 서식하는 새, 심지어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도 마찬가지다. DDT가 뿌려진 한 뉴저지의 염습지에서는 몇 주 만에 웃음갈매기가 평소보다 85퍼센트나 감소했는데, 그 원인은 살충제가 뿌려지고 난 뒤 충분한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된 때문으로 짐작된다. 습지의 농게는 다른 이유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능한 청소부 역할을 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굴을 파서 습지 진흙에 공기를 통하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또 많은 낚시꾼은 그것을 미끼로 사용한다. (176쪽)

 

문제는 우리가 천적 구실을 하는 동물을 모두 죽인 후에야 비로소 그 동물이 맡고 있던 조절 기능을 깨닫는다는 사실이다. (277쪽)

 동식물 집단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열쇠는 영국의 생태학자 찰스 엘턴(Charles Elton)이 말한 '종 다양성 유지'에 있다. (143쪽)

 

 

특히 카슨이 강하게 비난한 1957년 불개미 방제 계획을 보면,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쉽게 환경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에 들어온 뒤 40여 년 동안 불개미는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개미가 가장 많이 퍼진 주에서도 그저 1피트(약 30센티미터)가 넘는 큰 집이나 흙무더기를 만드는 성가신 존재로 여겨졌을 뿐이다. 이런 흙무더기는 농기구를 사용할 때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불개미가 20개 주요 해충 목록에 포함된 것은 겨우 2개 주뿐이었고, 그나마 목록의 거의 마지막에 등장할 정도였다. 관리들이나 일반인 모두 불개미가 농작물이나 가축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치명적인 위력을 지닌 화학약품의 개발과 함께 불개미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갑작스럽게 변했다. 1957년 미국 농무부는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캠페인에 착수했다. 정부간행물과 영화 등에서 불개미가 갑자기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어 남부 농업의 파괴자이자 조류, 가축, 인간들을 죽이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 후 엄청난 규모의 방제 계획이 발표되었다. 피해를 입었다는 주 정부들의 협조를 받아 연방 정부가 9개 주에서 2000만 에이커에 살충제를 뿌리는 것이었다.

 (...)

 '노다지'의 수혜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은 맹렬히 그리고 당연히 불개미 퇴치 계획을 비난했다. 이 계획은 충분치 못한 준비와 서투른 시행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며 해충 방제에 관한 극히 해로운 실험인 동시에 막대한 비용과 다른 동물들의 죽음, 농무부에 대한 신뢰 추락이라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한 실험이었다. 이런 일에 엄청난 정부 예산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188~189쪽)

 

 

그러므로 카슨은 소비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화학물질이 너무나 쉽게 유통되고 사용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잡초를 없애는 화학물질은 그 주요 성분이나 특징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표를 달고 팔린다. 여기에 클로르데인이나 디엘드린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려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성분 분석표를 읽어야 한다. 공구상이나 원예용품점에서 볼 수 있는 살충제 설명서에는 이런 물질을 다루거나 뿌릴 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 아무런 말도 없다. 대신 아버지와 아들이 잔디밭에 살충제 뿌릴 준비를 하고, 어린아이들은 개와 함께 잔디밭에서 뒹굴고 있는 행복한 가족이 등장할 뿐이다. (206쪽)

 

 

또한 정부에서 절충안과 같이 내놓는 '화학 잔류물 안전 기준', 즉 잔류 허용량을 정하여 이를 초과하지 않으면 안전하다고 보아 유통을 허가하여 주는 제도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잔류 허용량 기준' 제정은 결국 농부와 가공업자들에게 생산 비용 절감이라는 혜택을 주기 위해 많은 사람이 먹는 음식에 독성 화학물질 사용을 허가하는 일과 다름없다. 동시에 시민들이 섭취하는 화학물질이 위험 수준이 아님을 확신시켜주는 정책기관을 만들어 그 유지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하려는 수단이기도 하다. 최근 사용되는 농약의 양과 독성 정도를 고려할 때, 이런 임무를 수행하자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데 국회의원 중 그런 비용 지출을 승인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없다. 결국 지독히도 운이 없는 시민들은 화학물질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본인인데도 잘못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세금으로 부담하고 있다. (211~212쪽)

 

미국의 수질오염 전문가들은 세제야말로 상수원의 심각한 오염원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방법은 없다. 또 모든 세제를 발암물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세제가 소화기 내벽에 작용하거나 화학물질에 좀더 민감하도록 조직을 변화시켜 유독물질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상황을 만들 수는 있다.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암을 유발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런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조절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발암물질의 '안전 허용량'을 인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발암물질은 전혀 검출되지 않아야 정상이 아닐까? (268쪽)

 

 

금주령이 내려졌던 미국에서 술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화학물질로 만든 가짜 술이 유통된 결과 발생한 끔찍한 피해 - 이것이 현재에도 발생하기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서는 계란도 가짜로 만든다는데...

 

금주령이 내려졌던 193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앞으로 닥쳐올 세상에 대한 불길한 징조인 듯했다. 살충제는 아니지만 유기인산계에 속한 물질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법적으로 주류 제조가 금지되자 사람들은 비슷한 효과를 내는 다른 화학물질을 찾아 나섰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자메이카산 생강이었다. 하지만 <미국약전>에 따른 구입비가 너무 비싸자, 주류밀매업자들은 이것을 대신할 유사물을 만들어냈다. 이 계획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필요한 화학 검사를 통과했고, 정부의 검사자들조차 속을 정도였다. 여기에 제대로 맛을 내기 위해 트라이오르토클레실 인산염이라는 물질을 첨가했다. 이 화학물질은 파라티온이나 그 계열의 물질들처럼 콜린에스테라제를 파괴한다. 주류밀매업자들이 만든 가짜 술을 마신 1만 5000여 명이 '생강성 신경마비'라는 다리 근육 경련으로 고생했고, 결국 영구불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신경마비에 이어서 신경초가 파괴되고 마침내는 척수전각세포가 변질된 것이다. (224~245쪽)

 

 

더 큰 문제는 화학물질의 부정적 효과는 몇 십 년이 지나서야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습기 피해나 산업재해 문제도 이런 이유로 더 해결이 어려운 것 아닌가.. 과학자들의 꾸준하고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악성질환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징후가 나타나려면 그 희생자의 생애 상당 부분을 관찰해야 한다. 1920년대 초반 도로표지판에 형광 도료를 칠하던 여성근로자들은 페인트 붓을 입에 댈 때마다 도료에 포함되어 있던 라듐을 조금씩 흡수하게 되었다. 그중 몇 명에게서 15년 이상 지난 뒤 골육종이 발견되었다. 작업장에서 발암물질에 노출될 경우 그 잠복기는 15~30년, 또는 그 이상이다. (255쪽)

 

 

카슨은 화학물질을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은 결국 내성을 지닌 해충을 번식시켜 더 강한 화학물질을 사용하게 하는 결과가 될 뿐이라면서, 그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곤충 방제 사업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첫 번째는 정말 효과적인 곤충 방제는 인간이 아닌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자연계에는 고유한 '환경 저항'이 존재해서 특정 종마다 개체수가 일정하게 조절되는데, 이는 지상에 첫 생명체가 등장한 이후 게속 그래왔다. 먹이, 기상과 기후 조건, 경쟁 상대나 포식종 등이 모두 '환경 저항'의 중요한 요소이다. 곤충학적자인 로버트 메트컬프(Robert Metcalf)는 "이 세상이 곤충으로 뒤덮이지 않게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곤충들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학약품은 인간의 친구든 적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든 곤충을 없애버린다.

 두 번째는 환경 저항이 약해지면 종족을 재생산하려는 폭발적인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이다. (275쪽)

 

곤충의 저항에 대한 이해가 서서히 진보하고 있지만 곤충의 저항은 그렇지 않다. DDT가 등장하기 전인 1945년 기존 살충제에 내성을 지닌 것으로 보고된 곤충은 12종 정도였다. 그런데 새로운 유기화학물질이 등장해 널리 사용된 1960년대에 이르자 화학물질에 내성을 지닌 곤충이 137종으로 급증했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은 없다. (293쪽)

 

 

마지막으로 카슨은 화학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적(그러면서도 오히려 화학물질보다 비용도 더 저렴하다) 곤충 방제 방법도 밝히고 있다.

새로운 방식 - 1. 수컷 불임화

                   2. 곤충이 만드는 여러 물질을 모방해서 해충에 대응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것

                   3. 곤충이 소리를 탐지하고 이에 반응하는 능력을 이용하는 것

                   4. 미생물을 이용한 방제법

 

포식동물과 피식동물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생명계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넓은 그물 가운데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한다면 자연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견제와 균형이라는 복잡하고 훌륭한 시스템을 가동해 삼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321쪽)

 

"자연을 통제한다"는 말은 생물학과 철학의 네안데르탈 시대에 태어난 오만한 표현으로, 자연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응용곤충학자들의 사고와 실행 방식을 보면 마치 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그렇게 원시적 수준의 과학이 현대적이고 끔직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 곤충을 향해 겨누었다고 생각하는 무기가 사실은 이 지구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325쪽)

 

 

우리는 대체 무슨 권리로 이 아름다운 지구를 더럽히고 있는가... 의식도 하지 못할 만큼 많은 화학제품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현대에서 당장 환경을 위한 많은 행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의식은 가질 수 있을 정도의 환경 감수성과 약간의 지식을 갖추고, 할 수 있는 한에서 하나씩이라도 실천해 나가보면 어떨까?

 

"인간은 도자기 진열실에 들어간 코끼리처럼 자연을 짓밟고 있다." (103쪽. C.J.브리예르)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126쪽)

 

 

 

이 책을 읽고 수많은 화학물질이 급 찝찝해진 임산부인 나는, 인터넷에서 찾아본 친환경 세제(베이킹소다, 과탄산수소, 구연산)를 사용한 각종 청소방법을 조금씩이라도 이용하고, 천연섬유탈취제도 만들어보려 한다.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하면 되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Now You See Me 2 (나우 유 씨 미) (한글무자막)(Blu-ray+DVD)
LIONSGATE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가 너무 길다. 전편에 비해 지루함. 중반부쯤 호스맨이 칩을 훔치기 위해 서로에게 칩이 부착된 카드를 날려보내며 숨기는 장면은 볼 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분명히 하자. 이 책에서 개연성과 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이야기 구성을 찾고자 한다면, 실망할 것이 틀림 없다. 차라리 세 편의 그림을 감상한다고 마음 먹는 편이 낫겠다. '채식주의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씹어먹는 영혜의 모습을, '몽고반점'에서는 온몸에 강렬한 색채의 꽃을 그린 채 교합하는 남녀의 모습을, '나무 불꽃'에서는 비 내리는 숲 속에 우두커니 한 그루 나무처럼 선 영혜의 모습을.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윤리의 문제는 이 책에서 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어떤 강렬한 이미지로부터 예고 없이 습격 받았을 때, 당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영혜- 인혜의 남편(영혜의 형부) - 인혜로 이어지는 세 편의 연작은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영혜는 그 이미지에 온몸을 던져 대항하면서 그야말로 끝까지 가는 사람이고, 인혜의 남편은 그 이미지에 열정을 바쳐 빠져드는 사람이며, 인혜는 그 이미지를 회피한 채 현실을 붙잡고 간신히 버텨내는 사람이다. 그것은 이미지와 실재의 대립이고,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이다.

 

  다시 개연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로 주되게 거론되는 것은 꿈인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혼자서 숲 속을 헤매다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가 매달린 헛간 속에서 그 고깃덩이들을 씹어먹었고, 어찌어찌 헛간을 빠져나와 찬란하게 밝은 봄의 숲에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소풍 중인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너무나 무서웠고, 온몸에 피가 묻은 채 헛간에서 보았던 날고기를 씹어먹던 자신의 얼굴이 낯선 듯 익숙한 듯 지독히 생생하게 떠올랐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어릴 때 영혜를 물었던 개가 오토바이에 묶여 끌려다닌 끝에 도살당하여 밥상에 오르는데, 그 고기를 아무렇지 않게 씹어먹었던 과거의 기억 역시 하나의 이유인 것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부터 영혜가 죄책감으로 인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라고 해석한다면 뭐야 이게, 하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것- 아니, 고기를 거부하게 된 것이라는 게 더 맞겠다 -은 동물에 대한 연민 같은 윤리적 감정과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그녀가 거부한 것은 그녀 안에 숨어 있는 야수적 폭력성이다. 어린 시절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로부터 학습되고 증폭되어 내면에 조용히 도사리고 있던 폭력성(개가 도살당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 그 고기까지 먹었다는 과거의 일화는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영혜의 폭력성을 추측케한다)은 꿈에 의해 발현된다. 꿈을 꾸기 전날, 영혜는 아침식사를 재촉하는 남편을 위해 언 고기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는데, 날이 부서진 식칼 조각이 불고기에 섞여 들어간 것을 씹을 뻔한 남편이 화를 내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영혜는 남편을 향한 폭력의 욕구, 또는 살의를 느낀 것은 아닐까. 꿈 속에서 피로 범벅 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 후, 영혜는 단호하게 그 욕구를 거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고기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그러니 영혜의 채식은, 인간의 내밀한 폭력성에 대항하는 아름답고도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에 비해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형부이자 인혜의 남편(이름은 안 나오는 것 같다)은 몽고반점이라는 이미지에서 촉발된 예술에 대한 욕구와 영혜에 대한 성욕을 동시에 실현시키고자 뛰어든다. 인혜의 동생으로 처음 소개받았을 때 영혜를 보면 느꼈던 호감(인혜에게서 부족하다고 느꼈던 어떤 부분들을 채워주는 특징들)- 의식적으로는 호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느꼈을 욕구, 다만 도덕성에 의해 숨겨졌던 - 이 몽고반점을 계기로 일깨워지자, 그는 인혜와 딸에 대한 죄책감, 윤리적 방어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그 이미지에 굴복한다. 그 대가로 그는 가정에서 쫓겨나 딸과도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채식을 고집하다가 아예 섭식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가 정신병원에서 피를 토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영혜와 비교할 때, 양 극단의 선택을 한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할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아야만 했던 인혜는, 언뜻 보기에는 완전한 피해자로서 연민의 대상이다. 하지만 정말로 인혜는 두 명의 정신이상자에 의해 삶이 망가진 피해자일 뿐일까?

 인혜의 성격적, 행동적 특징은 '회피'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맞지 않기 위해 자처하여 아버지에게 술국을 끓여 줌으로써 폭력을 회피한다. 그녀는 삶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그다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할 수 없는 남자와 결혼하여 홀로 사는 삶의 어려움을 회피한다. 심지어 동생과 남편 사이에 벌어진 충격적인 일을 목도하고도 식탁에 엎드려 버리고, 정신병원에 신고하여 두 사람을 보내버리는 방법으로 사건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녀는 영혜를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임에도 이해의 노력을 회피하고, 영혜가 숲에 서 있는 꿈, 자신이 눈에서 피를 흘리는 꿈을 반복하여 꾸면서도 그 이미지에 저항하거나 뛰어드는 것을 회피한다. 마지막까지 구급차에 실려가는 영혜의 귀에 대고 '이건 말이야. ...어쩌면 꿈인지 몰라.'라고 속삭이면서 끔찍한 현실을 꿈으로 치부하는 방법으로 회피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이 모든 난장판은,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회피가 마치 징벌처럼 덮쳐 와 벌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럼에도 인혜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인혜의 방식이 우리 대부분이 삶을 지속하기 위해 택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오랜만에 읽어본 유형의 소설이다. 정말 좋아, 하는 작품이 될 수는 없겠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책을 썼었다니(<소년이 온다>), 어떤 글을 썼을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 책들의 미로
발터 뫼어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흠뻑 빠져들어 읽었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후속편! 역시나 눈앞에 그려지는 듯 생생한 묘사가 훌륭하지만, 전작만큼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미텐메츠가 200년만에 다시 찾은 부흐하임의 달라진 모습과 인형중심주의라는 새로운 풍조를 설명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드디어 모험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끝내버리는 발터뫼어스.. 한국드라마 작가에게 배운건가 ㅠㅠ 다음 편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지만 무척 기대된다. 이번 책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건 책와인. 한모금만 마셔봤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가 1가구당 대개 5에이커 정도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여유가 있는 가구는 10에이커 정도를 경작하기도 한다. 적정한 경작지 면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일할 수 있는 가족의 수이다. 대략 한 사람당 1에이커 정도가 그 적정 면적인데 이곳 농부들에게 그 이상의 땅은 소용이 없다. 기본적으로 이곳 사람들은 경작하지 못하는 농지를 소유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 53쪽

이 지역에 있는 모든 마을의 입구에 있는 `초르텐(Chorten)`이라 불리는 이 석탑은 체스판의 `폰`처럼 생겼는데 마치 거대한 산이 땅에서 우뚝 솟아 올라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통 석회석과 진흙을 섞어 만든다는 이 석탑은 20피트 정도의 높이인데 윗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져 끝이 뾰족한 첨탑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 석탁의 모양은 불교 교리의 기본을 상장한다고 하는데 탑 윗부분의 태양을 안고 있는 초승달은 생명의 단일성, 이원성의 종식,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결국 하나라는 의미라고 한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여겨지는 해와 달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듯 세상 모든 것이 바로 그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 61, 62쪽

인간들이 도울 수 없는 곳에서
신들이 우리를 돕게 하소서. - 70쪽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까다로운 환경 속에서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검약`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에서 이 `검약`이라는 말은 대개 자물쇠가 채워진 음식 창고를 지키는 나이 든 아주머니를 연상시키지만, 이곳 라다크에서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다. 그것은 풍요의 기본이 된다. 한정된 자원을 조심스럽게 아껴쓴다는 것은 인색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주 적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검약`의 본래 의미라 할 수 있다. - 74, 75쪽

시간을 재는 경우에도 느슨하고 여유롭게 잰다. 1분 단위로 시간을 측정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내일 낮에 찾아올게" 혹은 "저녁쯤 찾아올게"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라다크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에 대해 넉넉한 여유를 남겨 놓는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의 언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많이 있다. `공그로트(gongrot)`는 `어두워진 다음부터 잠잘 시간까지`라는 뜻이고 `나이체(nyitse)`는 `해가 산꼭대기에 걸려 있는 한낮`을 말한다. 또 `새의 노래`라는 뜻의 `치페치릿(chipe-chirrit)`은 해가 뜨기 전 새들이 지저귀는 이른 아침을 뜻한다. 이 모두가 넉넉하고 친숙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다. - 93쪽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는 사람들이 갈등을 피해갈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른바 `자발적 중재자`라는 것이 있다. 양자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의견 차이가 생기면 제3자가 거기서 조정 역할을 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그리고 어떤 사람이 관련되어 있든 그에 맞는 중재자는 항상 그곳에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 일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중재자라는 것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찾는 대상은 아니다. 상황이 일어나는 곳에 있는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중재자이다. 누나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심지어 다섯 살 정도 된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런 중재자가 나타나 언쟁을 하던 다른 아이들 사이를 조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다투던 두 아이는 기꺼이 중재하는 아이의 말을 들었다. 갈등보다는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제3자의 중재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 113쪽

라다크의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한정의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그런 것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를 `버리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 라다크의 아이들은 다섯 살 정도만 되어도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의식을 배운다. 이들은 어느 정도 힘만 있어도 자기보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보살핀다. 이들은 결코 자기의 또래집단끼리 떨어져서 생활하는 일이 없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갓난아이에서부터 증조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다시 말해 라다크의 아이들은 사람들 사이의 주고받는 관계의 사슬 속에서 자신이 그 한 부분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 145쪽

라다크에 처음 왔을 때 나에게 제일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의 얼굴에 피어 있는 환한 미소였다. 라다크의 여성들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린 소녀들은 때로 수줍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성숙한 여인들에게는 자신감과 개성, 위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보다 먼저 라다크에 와 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이곳 여성들의 강력한 파워와 확고한 지위에 대한 이야기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 근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불교 교리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승려의 말을 인용하자면 한 마리의 새가 날기 위해선 두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지혜와 자비심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지혜의 상징이고 남성은 자비심의 상징이다. 그 둘이 함께함으로써 불교의 근본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 149 내지 151쪽

"(...) 중요한 건 그 사람 내면이 어떤가 하는 거예요. 외모보다 성격이 더 중요하지요. 라다크에는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라는 말이 있어요." - 153쪽

불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것 중 하나는 이른바 `공(空)`의 철학이다. 처음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해를 거듭하며 타스 라브기아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
"(...) 어떤 대상 하나를 예로 들어보지요. 이를테면 마루를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나무를 다른 사물과 구분하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나무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 나무는 독립된 실체가 아닌 것이 됩니다. 대신 그것은 관계의 사슬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이지요.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그것을 흩날리게 만드는 바람 그리고 그것을 지지해 주고 있는 토양 등 그 모든 것이 나무를 구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 우주 만물이 바로 나무라는 존재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인 것입니다. 각각의 존재는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 본질은 결코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변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공`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각각의 사물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 155 내지 157쪽

만일 라다크 사람에게 `레에 가고 싶으세요? 아니면 그냥 마을에 머물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면 그는 분명 `레에 가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런데 안 가더라도 좋을 거예요.`라는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상의 음식보다 잔치를 더 좋아하고,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보여주는 기쁨의 모습과 마음의 평화는 적어도 외부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특성들은 그들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만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삶의 흐름에 있어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그것과 함께 여유롭게 흘러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긴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해도 굳이 참담한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그런 경우 `굳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라는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 178,17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