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이 훨씬 좋았다.
아무래도 책을 먼저 읽은데다가, 영화에서 책의 구성(여러 명의 시점이 존재하는 구성)을 그대로 살리기에는 시간적 한계가 있으므로 리카의 이야기로만 압축한 탓인 듯한데, 전체적으로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돈에 휘둘리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고 할까. 리카의 지인들을 아예 빼버린 대신 은행 동료들을 등장시킨 각색이나 리카가 횡령을 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 있는 연출은 좋았지만. 대충 보면 흔한 불륜 이야기 같이 보이기도 하고... 책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리카의 고등학교 시절 일화 - 재난을 당한 국가의 아이들에게 후원금을 보내는 데 리카가 열성적이었다는 이야기 - 에 살을 붙여서 시작과 끝에 배치한 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리카와 고타 사이의 관계가 책과 다르게 느껴지도록 그려져서 더 그런 것 같다. 책에서는 리카가 고타를 단지 연인이 아니라 자신이 갖지 못한 아이를 보듯이 보는 듯한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고타는 엄마에게서 떨어진 아이처럼 언제까지고 리카를 보고 있었다. -165,166쪽
리카는 고타가 고학생이고 할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지만 빌리지 못하고 있으며, 친구들과 아마추어 영화제작을 한다는 등의 여러 사정을 알고 충분히 가까워진 후 육체적 관계를 가진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과정이 너무 짧게 그려져서, 마치 리카가 고객인 고타의 할아버지 집에서 고타를 우연히 한번 본 후 서로 첫눈에 반해 바로 잠자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고타의 이런저런 사정들은 그 후에 우연히 알게 되어 횡령을 시작하게 되니(빚이 있다는 것 자체는 책에서도 잠자리 후에 알게 되긴 하지만)- 흔하디흔한 '사랑에 눈 멀어 공금에 손 댄 여자'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느끼길 바라고 리카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전혀 친밀한 애정을 주지 않는 남편과의 관계, 아이를 갖고 싶었던 마음, 자신이 늘 자신의 일부에 불과한 것 같다는 불안감 등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리카가 사주는 음식을 먹는 고타에 대한 애정으로, 고타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만능감으로 진화하는 과정.. 그리고 띠동갑 연하남을 만나며 느끼는 초조함과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에게 돈을 쓰는 희열, 돈이 단순히 종이로, 허상으로, 가짜로 보이게 되는 이상한 감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걷잡을 수 없는 사치와 횡령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 - 그런 것들이 책에서는 섬세하게 표현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영화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는 것 같다.
고타와의 헤어짐도 그렇다. 영화에서의 고타는 책에서의 고타보다 훨씬 뻔뻔하고, 사기꾼 같다 (책을 읽지 않은 채 영화를 본 남편은 처음 빚 얘기를 할 때부터 고타가 사기꾼이 아니냐며 의심했다). 고타의 양다리를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리카에게 고타가 쥐어짜듯 말하는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라는 절박한 말도 영화에서는 없다. 리카가 구해준 맨션에서 다른 여자랑 나체로 누워 있는 모습을 들킨 욕먹어 마땅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너무 흔한 전개잖아 이거.. 왜 이렇게 각색을 했지. 시간상 섬세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초반에 몇 장면 나오는 베드신을 줄이고 좀더 대화를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