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요일의 여행 - 낯선 공간을 탐닉하는 카피라이터의 기록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에세이를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행서는 더욱 읽지 않는다. 내가 직접 가야 좋지 남 여행한 얘기 듣는 게 뭐가 좋아? 그러니 이 책이 전자책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띄지 않았다면 좀처럼 읽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여행에세이이긴 하지만 여행정보를 주기 위한 목적은 전혀 없다. 그저 여행을 사랑하는 저자의 절절한 마음으로 가득해서, 그 행복을 타인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흥분으로 발그레 달아오른 뺨이 떠오른다. 여행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편은 아닌 내 마음조차 설레게 하는 열정이다. 귀찮아서 도저히 못 할 것 같긴 하지만, 언젠가는 저자처럼 작은 마을, 정보없는 마을을 찾아 나만의 보물을 만들고 싶게 만드는.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갑자기 문장은 풍성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햇살이 스며든다. 공기의 질감까지 부드러워진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진다. 오후 다섯 시의 그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한낮 차가운 와인을 마신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골목이 노래로 가득 차기도 하고, 낯선 얼굴이 두등실 떠오르기도 한다. 유난히 작았던 숙소가 문득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바람에 고립되었던 그 아찔했던 순간은 인생의 모험으로 포장된다. -11쪽

여행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저 비가 오는 것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지는 느낌이 든다. 그저 몇 개의 가게가 문 닫았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향해 문을 닫는 느낌이다. 한 가게 주인이 나에게 불친절했을 뿐인데, 온 도시가 나에게 불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길을 못 찾았을 뿐인데, 이 여행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마음의 과장법은 순식간에 여행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린다. -82쪽

지금부터 여행에서 가장 실용적인 말 한마디를 공개하겠다. 그건 바로,
"What‘s your favorite?"
겨우 이거냐고? 겨우 이거다. 설마 진짜 저 말이냐고? 그렇다. 이게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뜸을 들였냐고? 중요하다.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써먹은 결과 한 번도 통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마법의 주문처럼 이 질문을 하는 순간 모두가 진심이 되었다. 모두가 내 여행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고심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앞으로 볼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말 그대로 모두. 오로지 저 한마디 때문에.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건요?"라는 이 평범한 한마디 때문에. -108쪽

"난 왜 몰랐지? 알았으면 올라갔을 텐데."
미구엘은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 이건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가 아니야."
미구엘의 그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여행에서의 내 조바심을 정확하게 진단한 말이었다. 못 봤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건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가 아니야. 거길 못 갔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 도시엔 거기만 있는 게 아니야. 그거 못 먹었다고 여행이 끝장나는 게 아니야. 정작 현지인들은 그거 먹지도 않잖아. 그걸 사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거야. 남들 다 본다고 너까지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넌 너만의 여행을 직조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133,134쪽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나는 한 시간짜리 도시 마니아다. 30분짜리 도시면 더 좋다. 그걸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을이라 불러도 좋고, 읍내라 불러도 좋고, 시골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여행을 계획할 때 제일 먼저 골몰하는 것은 가고 싶은 작은 마을을 정하는 것이다. 블로그에 정보 따위는 없는 마을. 있더라도 사진 한 장이 전부인 마을. 그런 마을의 정보 한 줄을 얻는 것은 힘겹고, 그런 마을에 가는 길은 험난하다. 대중교통은 없거나, 있더라도 하루 한두 대의 버스가 전부. 운전면허증도 없는 나와 운전을 싫어하는 남편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야 한다. 언제나 겨우겨우 그곳에 도착하고는, 며칠씩 머물러버린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도착했는데, 라는 심정으로. 그리고 그곳에서의 시간은 여행 상자 안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곤 한다. 가장 희귀하고도 가장 따스한 기억으로만 채워진 보석. 우리들만의 보석. -158쪽

작은 마을들은 어김없이 우리를 환대한다. 큰 도시에서는 우리를 버린 것임에 들림이 없는 행운의 여신이, 유독 작은 마을에서는 우리를 잽싸게 발견한다. 그리고 행복의 진수성찬을 차려버린다. 이 진수성찬은 오롯이 우리들의 것.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한 맛.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다정한 맛. 그 소박한 진수성찬을 맛보고 싶다면 시간을 줘야 한다. 행운의 여신도 우리를 찾아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하루가 아니라, 3일. 유명한 것이 없으므로 오래, 별게 없으므로 천천히.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이므로 음미하며, 낯선 얼굴들과 마주칠 때마다 웃는 낯으로. 그렇게 여행의 보석을 품는 것이다. 나만의 보석을 세공해가는 것이다. 작지만 확실한 보석을. -164쪽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껏 무용해지자 마음을 먹는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며 짐짓 호탕하게 말해본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마음에는 다시 유용함이란 기준이 자리 잡는다. ‘언제 또 올 수 있겠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도 못 보면 아깝잖아.‘ 등등 유용함은 각종 핑계를 달고 여행 한가운데에 번번하게 자리잡아버린다. 그리하여 ‘무용하자‘라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여행자의 스케줄은 봐야 할 것. 가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 등등 유용한 것들로만 빼곡히 들어차게 된다. 무용하고 싶지만 무용한 시간을 견딜 힘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169쪽

남의 여행은 남의 떡이다. 언제나 더 커 보이고, 언제나 윤기가 흐른다. 흠집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고, 부러운 행운만 넘쳐흐른다. 어쩜 그 여행의 풀밭은 그토록 푸르른지. 남의 여행을 직접 이야기로 듣는 시대를 지나, 이제 블로그에서, 각종 SNS에서 남의 여행을 보게 되면서 이 증상은 좀 더 심각해진다. 앞뒤 맥락 따위 존재할 수 없는 그 찰나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우리는 여행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름살을 제거해버린다. 저 여행은 모든 것이 풍족해. 저 여행은 커피 잔에 떨어지는 빛 하나까지 어쩜 저렇게 완벽할까, 저 사람은 내내 행복하기만 할 거야. 같이 간 사람이랑 싸우는 일도 없겠지. 돈이 왜 부족하겠어. 돈이 부족하다면 저런 걸 사지도 못하지. 여행은 왜 또 저렇게 자주 가. 시간도 넘쳐나나 봐. 명백히 세상은 엄친아들의 여행으로 넘쳐난다. -248, 249쪽

그렇게 동네에서 가장 게으른 목련을 알게 되었다.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은행나무를 알게 되었다. 4월에 모든 꽃들이 다 지고 나면 그제야 피어나는 이팝나무들도 알게 되었다. 한 할머니의 베란다 아래 길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다섯을 낳은 소식도 듣게 되었다. 망원시장에서 그때그때 장을 봐서 제철 음식을 내놓는 식당도 알게 되었다. 시시콜콜한 집안 이야
기까지 다 풀어놓는 사장님 부부도 알게 되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 같은 얼굴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매일 더 부지런한 동네 여행자가 되자고 마음을 먹는다.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니까. 멀리 여행을 떠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것은 결국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니까. 그 마음가짐으로 내 고향을 여행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내 고향은 망원동이니까. 내가 내 고향의 가장 충실한 여행자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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