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에 별 관심이 없어 명성 높은 코니 윌리스 소설 읽기를 미뤄오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김하나 작가 덕이다. 그가 삼천포책방에서 <화재감시원>을 맛깔나게 소개했고, <둠즈데이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화재감시원을 즐겁게 읽은 내 앞에 운명처럼 <20주년 PACK 3900>에 포함된 둠즈데이북이 나타났다. 김하나작가는 이책을 읽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엉엉 울었던 기억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이 책을 절반 이상 읽어가면서도 누군가 죽더라도 울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울고 말았지... 밤중 수유하면서 틈틈이 읽은 게 아니라 푹 빠져서 한번에 읽었다면 더 많이 울었을지도.

때는 2054년. 역사학을 공부하는 역사학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실습의 과정이 있으니, 바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이 실습과정을 거친 역사학도에게 역사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현재”가 된다. 중세를 공부하는 역사학도 키브린은 너무 위험한 시대라며 만류하는 던워디교수의 진심어린 걱정에도 불구하고 1320년으로 가기로 한다. 그러나 시간여행 설비인 네트를 조작하는 기술자인 바드리는 키브린이 떠난 후 급하게 던워디교수를 찾아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의해 쓰러지고 마는데...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실제로 그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역사학도라니! 얼마나 흥미로운 설정인가.
수다쟁이 작가인 코니윌리스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현재의 질병과 과거의 질병을 각각 극복해나가는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1권을 읽으면서는 메인스토리와 관계 없어 보이는 너무 많은 수다를 보며, 아니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빨리 말하라고! 하며 작가든 바드리든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2권을 읽다보니 어쩐지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서술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이 할머니 작가가 좋아졌다.

종교도 신도 전혀 믿어본 적 없는 나에게, 종교적 감동이랄까, 를 선사한 작품으로 소설 <천국의 열쇠>와 영화 <레미제라블>이 있는데, 이 소설이 세번째가 되었다. 이 책에서 중세시대 신부로 등장하는 로슈신부는 <천국의 열쇠>의 프랜시스 치점 신부처럼 이런 신부들만 있다면 기꺼이 종교를, 신을 믿을 수 있겠다는 마음을 품게 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남아 어쩐지 자꾸만 생각나는 소설에 별 다섯 개를 준다. 이 책을 끝내고 나서 쉽게 다음 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만 20주년PACK 의 줌파라히리나 존버거로 넘어가야지...

#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가 엉망인지도 몰라요, 던워디 교수님. 메이즈리와 블로에 경 같은 인물이 살아남아 우리가 사는 시대를 세웠을 테니까요. 도망가지 않고 로슈 신부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결국 페스트에 걸려 죽었거든요.

# 심술궂은 늙은이와 잔소리 많은 시누이보다 더 나쁜 경우는 허다했다. 가니에르 남작은 20년 동안 아내를 사슬에 묶어 놓았다. 앙주 공작은 아내를 산 채로 불태웠다. 그리고 로즈먼드는 자신을 보호해 주고 아플 때 간호해 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다.

-알라딘 eBook <둠즈데이북 2 (20주년 PACK 3900)> (코니 윌리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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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7-1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독서괭님께 땡투하고 이 책을 샀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지금 저에게 오고 있어요. ㅎㅎ

독서괭 2019-07-15 10:41   좋아요 0 | URL
어므나~~ 기분 좋네요^^ 다락방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되어야 할텐데.. 이 코니윌리스가 마거릿애트우드와 함께 유명한 페미니스트 sf 작가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