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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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문맹'이라니, 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유년시절부터 읽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한 소녀가, 외로움과 가난을 시와 희곡을 쓰며 견뎌냈던 그 소녀가, 언어를 잃고 문맹이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56년, 스물한 살에 남편과 4개월 된 어린 딸을 데리고 헝가리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간다. 당시 소련의 지배를 받던 헝가리에서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헝가리혁명에 연루되어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이 든 가방 1개와 사전들이 들어 있는 가방 1개를 들고 월경안내인을 따라 국경을 넘는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무사히 오스트리아에 도착한다.

그러나 모두가 월경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열 살 먹은 터키 아이가 부모를 따라 스위스 국경을 은밀히 넘다가 피로와 추위로 인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월경 안내인들'은 그들을 국경 근처에 데려다 주었다. 그들은 스위스의 첫 반째 마을까지 곧장 걷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산과 숲을 가로질러 오랜 시간 동안 걸었다. 날은 추웠다. 여정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버지는 아이를 업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피로와 추위 그리고 탈진으로 죽어 있었다.

 - 67~68쪽

 

 국경을 넘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기 롤랑이 떠올랐다. 그는 스위스 국경을 넘으려 했지만 안내인은 그를 버려두고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보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월경 장면이 나온다. 트랍 대령에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라는 소집 명령이 내려지자, 마리아와 트랍 부부는 7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을 시도한다.

 

현실은 소설과 영화보다 잔혹하다. 추위와 탈진으로 죽은 아이. 지금도 국경을 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탈북민, 난민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는 걸까.

 

 

스위스에 정착한 아고타에게, 언어는 무서운 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그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 52~53쪽

 

 잊혀져가는 모국어, 여전히 낯선 새로운 언어... 어릴 때 망명하여 프랑스어를 익힌 아이와의 의사소통의 벽(이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다).

 그 안에서 그 새로운 언어를 익혀 그것으로 소설을 써내는 일은 끝나지 않는 도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도전을 감행한 아고타의 의지와 용기는 감탄스럽다.

 

 시종일관 담담한 언어로 상실과 도전을 기록한 글. 그 여백에 담긴 무수했을 고통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찬사를 보낼 뿐이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대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 34쪽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중략)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이들은 끝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 89,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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