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어 보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

오츠는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20세기 후반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작가로, 이 책 <그들>은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사치스러운 사람들>, <원더랜드>와 함께 '원더랜드 4부작'의 하나라고 한다(다른 책들은 검색해보니 번역되지 않은 듯).

이 책 역시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해서 읽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한데,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든 매력이 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쓰레기장 같은 건물로 오는 길에 그는 열다섯 살쯤 된 검둥이 소녀가 검둥이 소년 둘과 수다를 떨면서 발끝으로 가볍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커다란 눈의 소년들은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유쾌한 표정의 검은 피부 소녀는 임신 7개월쯤 된 것 같았다. 그들은 그냥 거리에서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주립 병원에서 여자들이 임신한다는 엄마의 말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주립 병원과 여러 감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 아동보호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모종의 무서운 일을 겪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남자인데도, 남자. 그런 곳에서 과연 여자아이가 어떤 일을 당할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307쪽

 

 열여섯의 로레타가 연인의 죽음을 겪고, 강간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사건에 의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남편의 죽음을 겪고, 또 다른 남자와 아이를 가지고, 살아나가고, 로레타의 아이들- 특히 줄스와 모린 두 아이가 가난과 폭력과 혼란 속에서 살아남아가는 이야기가 숨막히게 전개되는 와중에, 중간중간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은 그런 가난과 폭력이 이들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사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임을 일깨워준다.

 

 "내가 왜 가야 하는데?" 그의 말투가 거칠었다. "날 억지로 보내지 마!"

 모린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여자와 똑같았다. 가장 흔한 꿈에 등장하는 여자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날 아프게 할 거야!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날 아프게 할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견뎌?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데!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런데 지금은 당신 때문에 무서워. 당신도 다른 남자들이랑 똑같아.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어. 당신이 날 아프게 하면 어쩌나, 내가 완전히 망가져서 아침에 출근하지 못하면 어쩌나, 당신이 나한테 그런 짓을 하면 어쩌나..... 정말 어떻게 해? 그러고 나면 나한테 뭐가 남아? (후략)"

 - 605-606쪽

 

 나름대로 똑똑하고 비범한 면을 보였던 줄스가 무너져가는 모습은 안타깝지만, 이 책에서 더 안타까운 것은 여자들의 삶이다. 사랑과 낭만을 꿈꾸었고 짧지만 격정적인 사랑도 해보았던 로레타- 비록 그 끝은 강간범과의 결혼이었고, 그 뒤의 새로운 사랑들도 폭력으로 얼룩졌지만 -와 달리, 그의 딸 모린은 남자와 사랑에 아무 관심이 없다. 그가 남자를 만나는 이유는 돈이거나, 안정된 삶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남자의 폭력으로 인해 후유증을 앓았던 모린이 안정된 삶을 위해 선택한 것은 그 엄청난 공포를 견디며 남자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책은 1937년부터 1967년까지의 미국 사회를 다루고 있다. 베트남 반전시위, 인종차별, 빈곤 등의 여러 문제가 얽혀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1967년의 디트로이트 폭동 사건의 혼란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읽는 도중에는 다 읽고 나면 집에 있는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왠지 <악의 해부>가 읽고 싶어졌다.

 

 

 

 

 

 

 

 

 

1937년 8월의 어느 따뜻한 저녁, 사랑에 빠진 소녀가 거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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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19-03-2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츠의 단편소설도 매력적인 것들이 많아요 역시 오츠죠~^^

독서괭 2019-03-29 06:04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안 그래도 <흉가>를 보관함에 담은 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