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에서 생트 콜롱브가 간직한 보쟁의 정물 한 점.


내게는 바니타스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 정물을 물끄러미.




 살짝 머금었다 삼키는 와인 향이 가을이었다. 더워도 물기를 가득 품어도 멈추어도.


 시간을 잊은 듯, 멈춘 먼지 속 고즈넉함.


 째깍, 하는 짧은 공간 넓게 가라앉은 글씨.


 이제 곧 시계가 빨리빨리를 외치면 불어올 차가운 입김.


 가을이 또 하나 쌓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숨결을 듣는 시간. 

 화가의 붓질 소리. 수프 한 그릇 위에 아른거리는 뜨거운 공기. 

 들뜬 높음이 서서히 몸을 숙이고 가을을 맞는 몸짓.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듯한 체온을 새로이 느긴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풀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긑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맞춘다-나의 시와 함께




김현승, 절대고독




 

 아쉬운 일, 안타까운 일, 작은 성취를 느꼈던 일, 아름다움에 눈을 감았던 무엇.

 어린아이가 누는 오줌 소리, 깊은 밤, 바람에 흩날리던 물소리. 

 여기와 저기의 구분이 없는 목소리, 나룻배를 타고 가서 닿는 세계.





 

아내가 그 옆에 온 것을 아홉번째 느낀 때는 봄이었다. 1679년 6월 대 박해가 있었던 해였다. 그는 탁자 위에 포도주와 고프레를 담은 접시를 꺼내놓았다. 그는 오두막에서 연주했다. 그는 순간 연주를 멈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 올 수 있는 거요? 내 나룻배는 어디 있소? 내가 당신을 볼 때 흐르는 내 눈물은 어디 있소? 이게 정녕 꿈이란 말이오? 아니면 내가 미친 거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당신 나룻배는 강가에서 오래 전에 썩었어요. 저곳 세상은 당신 배처럼 그렇게 견고하지 않아요."

 "당신을 만질 수 없어 고통스럽소."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어요."

 





 파스칼 키냐르는 1948년 노르망디 지방의 외르에서 태어나 1969년 '말더듬는존재'로 문단에 데뷔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의 책 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를 훑어보면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의 영향, 5개 국어 습득,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센터의 임원, 혈관 파열, 이런 낱말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 말없이 생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담대함, 맑고 조용하지만 정확한 눈빛을 보여주는 그의 글은 소리와 냄새, 촉각과 모양의 감각을 일깨운다. 시간을 '옛날'과 '지난날'로 떠올리곤 하는 그의 글은 산문이면서 운문이기도 하며, 문학인 동시에 음악이기도 하다. 




 언어가 이루는 성취, 인간이 몸속에 품은 태초의 기억을 일깨우는 그의 글은 순서대로 말 더듬는 존재, 뷔르템베르크의 살롱, 샹보르의 계단, 세상의 모든 아침,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등이 있다. 1996년 갑작스러운 혈관 출혈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글쓰기는 크게 변하고, 중국과 일본 여행 이후 그 변모된 글쓰기의 첫 결과물인 '은밀한 생', 그리고 그 이후 '로마의 테라스', '마지막 왕국', '빌라 아말리아' 등을 살펴보면, 그의 문학은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 시, 수필, 우화, 민화, 잠언, 단편, 이론, 인용, 사색, 몽상이 모두 뒤섞인 글. 글씨가 스치는 소리조차 만지지 않으려는 개인의 흘려보내는 성취.





 혈관 출혈 이후 '내 안에서 모든 장르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파스칼 키냐르. 엄청난 독서의 흔적.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경계를 없애는 글쓰기. 아는 것을 가장 많이 모르는 것으로 바꾸고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듯 하지만 조용히 그 층층 쌓인 구조를 말푀유처럼 조밀하게, 그러나 뭉텅이 채로 내놓는 손길. 자신의 글을 보아 내면서 '덧없는 글들'이라는 제목으로 내고, 자신의 지식을 '박학적 무지'로 말하는 글에는 일관되게 근원에 관한 탐구, 방향성 없는 시간, 부드럽게 연속되어 하나가 되었으나 파편화된 세계를 노래하는 작가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그럼 귀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그럼 황금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 황금은 들을 수 없지."

  "영광입니까?"

  "아니네. 그건 명성에 불과하네."

  "그럼 침묵입니까?"

  "그건 언어의 반대말에 불과하네. "

  "경쟁하는 음악가입니까?"

  "아냐!"

  "사랑입니까?"

  "아니네."

  "사랑에 대한 회한입니까?"

  "아니네."

  "단념을 위한 겁니까?"

  "아니야, 아니야."

  "보이지 않는 자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가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누군가가 먼저 어루만졌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스미는 차고 따스함 속에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이 이렇게 내 손에 있고, 이 영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손끝에 잡힌 치맛자락 주름이 다시 펼쳐지지 않듯 한 번 지나간 소리는 다시 오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문장, 아내가 죽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혈관 파열 이전 그가 쓴 '세상의 모든 아침'은 상실로 시작하여 음악, 예술, 사랑, 괴로움, 죽음을 펼쳐나간다. 그 속에 살랑이며 보이는 것은 말 속에 숨은 시, 소리 뒤에 감춘 삶이다. 




  알면서도 흘리는 것. 감췄다는 것을 알고도 굳이 잡지 않는 것. 심연과 망각, 흐르는 무엇. '세상의 모든 아침' 속에는 길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음악이 잡힌다. 들리지 않는 움직임은 유리 상자 속 나비일 뿐,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차가운 유리 벽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글씨를 햇빛 아래, 안갯속에, 작은 오두막 속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보는 것 이면에 흐르는, 우리의 귓바퀴를 울리는 친숙한 소리. 그리고 가끔 반짝반짝 들리는 언어의 숨결. 






 영화 속 나이 든 마랭 마레는 '모든 음은 죽어가며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은 자연의 일이고, 어쩔 수 없이 무심한데 인간만이 그것을 붙들고 묻는다. 사랑인가? 경쟁인가? 회한인가? 무슨 의미인가? 하고. 말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마침내 귓바퀴에 닿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덧붙이고 고치고 바로잡는다. 이미 끝나버린 무언가를 다시 잡으려는 노력은, 흐르는 물줄기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안은 태생적 한계이다.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무엇. 파스칼 키냐르가 걷는 그 길의 무엇인가는 굳이 그 무엇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 제자는 구태여 묻고 스승은 답한다. 방향과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자와 그저 흐를 뿐이라고 바라보는 자의 대화. 손에서 모든 것을 스르륵,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나서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난함. 답은 질문을 전제한다. 마랭 마레의 질문을 따라가노라면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니라는 대답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음악은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음악 뒤에 숨은 문학과 예술의 그림자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랍니다. 




 

"왜 연주하시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습니까?"

 "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작곡을 하지 않아. 난 절대 악보를 쓰지 않아. 내가 가끔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있는 작은 송충이 같은 헌물일세."

 "선생님의 물풀, 송충이 안에 음악이 어디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영화에서는 소설 속의 낱말을 담금질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구도를 더 명확히 한다. 배우는 이의 세계를 부순 다음 다시 하나하나 채워가는 생트 콜롱브의 음악을 조용히 따라가 보노라면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파스칼 키냐르는 일부러 만들어진 아름다움, 작고 유쾌한 재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도 '세상의 모든 아침'앞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거란 생각도. 그러나 더 분명해지는 느낌 한자락. 파스칼 키냐르는 '말을 하고 음악을 듣는 살아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없었을 그 최초의 기억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있는 사람일거라는 작은 생각 조각.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나룻배마저 썩은 경계가 없는 공간. 끊어지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는 시간 속의 사람.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의 근원에 가 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것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 보고, 듣고, 사는 내게 파스칼 키냐르가 남긴 단 하나의 숙제일 것이다. 



지금 여기, 더 넓고 깊게. 




그리고 바로크 고음악이 귀 끝에 닿으면, 이제 가을. 







비올은 비올라 다 감바와 비올라 다 브리치오, 즉 다리에 끼우고 연주하는 방식과 팔로 들고 연주하는 방식에 따라 나뉘었는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비올라 다 감바가 유행이었다고 전한다. 르네상스, 로크 시대 악기를 재현, 연주하는 스페인 출신 고음악 연주자 Jordi Savall이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아 작업하였다. 그는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인 르 콩세르 드 나시옹을 만들기도하였는데, '세상의 모든 아침'에 흐르는 음악은 자신이 르 콩세르 드 나시옹과 함께한 것. 






*김현승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인용문은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발췌.


*칼뱅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의인화된 알레고리, 트롱프뢰유와 바니타스, 혹은 포르루아얄파와 자유 사상파, 그럼에도 똑같은 사랑, 똑같은 단념, 똑같은 밤, 똑같은 추위. 파스칼 키냐르가 스치듯 배경으로 준비한 이 많은 무엇과 무엇들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으면 더 생생하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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