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답을 얻는가는 어떤 질문을 했는가에 달려있다.

-토머스 쿤





 실크햇에서 비둘기가 나타나는 순간.

 소리가 보이고 이미지가 드러나고 조형이 그려지는 순간.

 타인의 재능을 누린다는 속설에도 끊임없이 창작하는 사람.

 나는 앞서 말한 순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이 바로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야 개봉일에 설국열차를 관람한 후 탄 지하철에서는 묘한 덜컹거림이 느껴졌다. 꼬리 칸과 앞칸, 무임승차를 한 가난한 이들과 철도 덕후, 존엄을 보여주는 지도자와 힘없이 바스러지는 사람들.

 봉테일이라고 불릴만큼 디테일에 능하다는 감독, 콘티를 짜는 데 거침이 없는 감독. 한 작품에 컨셉 아티스트를 셋이나 둔 영화, 헐리우드의 자본과 시스템이 더해진 유명 배우들의 연기. 틸다 스윈튼,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를 함께 보는 즐거움.

 


 









 숨이 가쁜 질주와 정교한 액션. 크리스 에반스의 액션은 잘 짜여진 가운데 고속촬영과 망원렌즈의 사용으로 인해 우아하고 고전적으로까지 보인다. 정확한 동선의 슬로 모션을 보노라면 '저 속도로 대체 언제 엔진까지 간단 말인가?' 하는 한탄이 들다가도 칸칸이 나타나는 역사 진행 방향을 보노라면 이 모든 봉기와 저지는 필연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엔진 칸까지 쉼 없이 달려가다가 그 직전 호흡을 멈추고 쉼표를 찍은 다음에, 그리고 마침내 그다음 칸에 가서는 180도 돌려세운 방향과 앵글을 볼 때, 그 필연의 리듬에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의문 끝에서 맺어지는, 앞으로 앞으로 가는 커티스의 방향과 옆을 틈틈이 바라보는 남궁민수의 시선이 빚어내는 생태학의 고리. 






 그 고리와 순환 속에서 연민은 제 스스로 몸집을 작게 했다. 안녕, 하고 작게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감독의 차가운 시선을 보노라면, 그의 연민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각도를 튼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살짝 든다. 맡은 역을 하면 정확히 다음 칸에서는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는 죽은 이 처럼, 배우들은 캐릭터에 철저히 종속되어 소비되고 열차의 칸은 사람의 역할을 단칼에 나누는 듯하다. 돌격과 저지 이외의 상호작용이 배제된 듯하지만, 열차의 모든 칸을 훑고 나면 기차의 앞과 끝은 결국 한 사회 속에서 움직이는 유기체로 호흡하며, 그 속 각자의 자리가 유지되거나 허물어진 작은 세계가 보인다. 그 세계 안의 힘은 서로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가거나 옆으로 새어나간다. 


 


 



 




















 


 

잠시 스크린에서 눈을 돌려 종이로 내 손에 만져지는 활자를 들여다본다. 매체가 다르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르지만 결국 이 두 작품-설국열차,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은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창작자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다루고 배열하는지를 전작에 비해 냉엄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이전 봉준호 감독의 작품과 달리 약간 우둘투둘한 결을 보인다. 작가와 작품은 종종 인과성에서 어긋나 이렇게 다르게, 팔딱팔딱. 그래서 설국열차의 원작도,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도 아닌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당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그로 인해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본 것이 맞는가? 하는 일련의 질문에 관한 물음 이전에 가십이 설국열차에서 먼저 새어 나왔다면,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에서는 창작자의 두려움, 예술에 관한 두려움, 이해와 인정, 지지라는 문제, 예술 안팎의 세계에 적응해야 하는 창작자의 어려움, 아이디어와 기교, 예술과 공예, 은유와 자기참조 등의 문제를 폭넓고 쉽게 다룬다. 창작자와 그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 답지가 아닌 지침서로 이 책을 참조하면, 종종 나는 지나치게 내 주관을 앞세워 몇몇 작품을 감상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뒤돌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헨리 제임스가 남긴 이러한 구절을 만난 순간.


 

 



 


 작가 헨리 제임스는 예술가의 작품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생산적인 질문 세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첫 두 질문은 천진할 정도로 정직하다. 즉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공했는가?"이다. 그리고 재기 넘치는 세번째는 이것이다. "창작할 가치가 있었는가?"

 이 분류는 첫 두 질문만으로도 인정할 만하다. 이 질문들은 예술을 현실 세계의 가치과 경험에 비추어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수준에 두고 보게 해주며, 감상자가 창작자의 시각을 감상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해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간단히 말해 행동주의, 페미니즘, 후기모더니즘 등 온갖 미학적 여과기를 거치지 않고 작품 그 자체를 대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 세 번째 질문, "창작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는 진정 우주를 여는 질문이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예술 문제들은 그 본질이 다른 것들보다 더 흥미로운가? 더 적절한가? 아니면 더 의미있는가? 더 어려운가? 또는 더 도발적인가? 현시대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맞춰 춤추고 있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에서 

 


  

 


 스크린으로 다시 눈을 돌리면, 봉준호가 하려 했던 것은 계급투쟁의 이야기가 아닌 사회생물학의 구심점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존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도 않다. 생존자의 숫자, 인종은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 더 중요한 핵심이 따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칸칸이 나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내딛는 곳도 전체 궤도에서 그다지 중요한 지점은 아니다. 단지 어떤 생명체는 앞으로 나가고, 또 다른 생명체는 옆을 계속 바라본다는 점이 계속 엇박자로 드러났다. 전진과 관찰의 정점이 바로 엔진 바로 앞 칸, 배우 송강호와 크리스 에반스의 대화로 우리 앞에 드러났을 뿐이다. 이보다 더 명확하고 분명한 메세지를 그가 던진 적은 없었다. 



 


 


 이 가로 세로의 축 위에서 어쩌면 봉준호는 아직 세상에 유일한 하나의 규범을 만들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미학적 관점에 대해서는 자신 나름의 기준을 이 감독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많은 이들의 기차라는 제한된 세트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장면의 박진감, 혹은 액션의 뒷이야기를 하지만 어쩌면 봉준호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를 뒤적여보면, '아이디어' 및 '자기 복제'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어떤 한계는 기술이 오히려 너무 쉽다는 것에서 온 문제였다. 관객이 느끼는 현란하거나 단조롭거나 아름답거나 추한 모든 장면의 이미지와 소리로 드러나는 느낌은 결국 감독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기능 올림픽이 아닌 아이디어의 세계이다.


 



 이러한 또렷한, 감독의 머릿속의 어떤 부분이 형상화된 세계 속에서도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만약, 내게도 그런 미는 힘이나 당기는 힘이 있다면 어떤 존재에 있어 내가 당기는 만큼, 혹은 미는 만큼의 탄성이 다시 내게 전해질 것이다. 그것이 칼이라면 탄성이 느껴지는 순간 멈추어야 할 것이고 펜이라면 계속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라면 어떨까.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윌슨은 한 생물이 성적 활동을 넘어서 상호작용을 해야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정의를 내린 적 있다. 집합체, 군체, 개체, 집단, 이들이 하는 것은 교류와 상호작용이다. 얼음까지 뚫고 달리는 설국열차 안에서 커티스라는 개별의 개체가 열차 전체의 집단을 훑고 지나가며 마침내는 집합체 내에서 충돌하는 이야기. 이 내러티브를 다루는 화술은 어쩌면 천지개벽과 같이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이보다 더 효율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와 그럼에도 창작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분해야 한다면, 이 영화는 당위가 아닌 존재로 설명되어야 옳다. 





 그러므로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닫힌 공간을 바라보는 봉준호의 시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목적과 출발, 혹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노라면, 설국열차가 다다르는 목적지가 실은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실은 내가 설국열차에서 듣고 본 모든 것은 내가 본 것이 아닌 봉준호가 보여준 것이었다. 





 읽고자 하면 보일 것이다. 이때 보는 내 눈에 묻은 읽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내 눈에 맺히는 무언가의 정체를 들여다보려 하는 일은 늘 영화를 바라보는 내게 지워진 단 하나의 의무였다. 내 입술에 묻은 것과 상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혼동하지 않고 바라보는 일. 이번에 바라본 설국열차는 봉준호가 이제 그 자신의 리듬과 반복으로 자신을 인용해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변주를 다시금 꾀한다는 상황에 놓였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까?






에셔 <손을 그리는 손>


 



 모든 작품은 앞선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차피 모든 주제는 새로울 수가 없다. 이야기는 가득찼고 새로운 것 대신 이상한 것이 더 쉬울 지경인데, 꼭 모두가 '새로움'에 목말라야 할까? 오히려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왜 그 이야기를 펼쳐 보여야 했는지를 살피는 편이 더 작품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 혹은 저것. 둘 중 하나가 아닌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를 주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설국열차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하나의 세계를 다루는 창조자로서의 봉준호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열차가 칸칸으로 이어져 긴 행렬을 만들듯, 아마도 봉준호의 영화도 긴 행렬을 만들듯 싶다. 이 중 어떤 것은 삐걱거릴 수도, 어떤 것은 화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작이 아닌 차기작이 있는 감독의 경우, 종종 자기참조와 반복, 패러디 등이 서로 연관되어 만들어낼 세계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것. 묘한 불협화음과 엇박자의 리듬, 차가운 질감의 설국열차 이후의 창작이 자못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영감으로, 어떤 사람들은 자극으로, 혹자는 절망감으로 예술을 창조한다. 예술 창조는 위험한 세계, 신성한 세계, 금지된 세계, 유혹의 세계, 그 모든 세계를 맛볼 수 있게 하여 예술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연관될 수 없었을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 따라서 사실상 예술 창조란 예술 그 자체가아니라 자신이 찾는 세계와의 연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예술 창조는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도록 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곧 접촉이며 예술 작품은 필연적으로 그 접촉의 본성을 드러낸다. 예술 창조를 통하여 예술가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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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8-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대답을 얻는다'고 말했던 E.E.커밍스의 말이 떠오르네요. 저는 '설국열차'를 아무 생각없이 탔던 탓인지 엔진칸까지 가 볼 욕심도 별로 생기지 않더라구요. 열차칸에서 몹시도 답답하던 차에 그나마 막판에 한방 '뻥' 터트려주는 바람에 시원한 겨울 풍경 속으로 나오고 나니 '숨'을 좀 돌릴 수 있겠더라구요. 집에 돌아와서 다 큰 대학생 아들에게 한 말은 '아들아. 아빠가 네 말을 들을 걸 그랬구나...' 였답니다. '다양한 의견'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 주세요. Jeanne_Hebuterne님의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 *

다양성

다양성이라는 것은 자연이 좇고 있는 가장 전반적인 방식이며, 정신은 더 부드럽고 더 많은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물질로 되어 있다. 이 다양성은 육체보다 정신에 더 많기 때문에 나는 우리 기분과 의도가 합치하는 것을 보는 일이 더 드물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 두 의견이 똑같아 본 일이 결코 없었던 것은 털 두 개와 씨앗 두 낱알이 똑같아 본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의견의 가장 보편적인 소질, 그것은 다양성이다.
-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Jeanne_Hebuterne 2013-08-17 12:09   좋아요 0 | URL
oren님, 설국열차, 보셨군요. 질문과 대답에 관한 경구를 보노라면 제각각의 색채가 또렷해 보이곤 해요. 오렌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엔진칸까지의 행로,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조바심 내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도 있었겠지요. 열차칸에서 답답했던 마음, 이해 가요. 막히고 닫히고 폐쇄된 공간이었지요. '문 여는 데 환장을 했나' 하고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던 송강호의 눈빛이 괜한 것이 아니었어요.
겨울 풍경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요. 코카콜라를 보면 곰이 안떠오르는데 그 포즈의 곰을 보면 코카콜라가 자동연상되는 까닭에 많은 이들이 코카콜라를 떠올리기도 했다는 말도 있더군요. 비범한 화술과 의아한 결말의 영화라고도 하던데, 이만큼 이 여름, 많은 관심을 몰고 다니는 영화가 드물 거란 생각을 해봤답니다. oren님의 멋진 댓글, 잘 읽었습니다. 덧붙여 주신 글은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도 다시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곧 가을이에요. 곧, 곧. 잘 보내고 잘 맞이해야 하는 때가 또다시 왔습니다, oren님.
건강하시기를.

saint236 2013-08-1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티스의 전진을 보면서 처음에는 응원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앞으로 나가서 어쩌자는 거지? 기관을 차지하면, 기차를 수중에 넣으면 그 다음은? 멈추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이 열차의 주인이 누가 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더군요. 그 결말은 마지막에서나 나타나듯이 새로운 윌포드의 강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답답한 마음을 남궁민수가 풀어주지만 이 또한 답답할 따름이지요. 나가서 어쩌자는 것인지? 무엇을 위한 체제의 전복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더라고요. 봉감독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겟지요?

Jeanne_Hebuterne 2013-08-17 12:14   좋아요 0 | URL
saint236님, 안녕하세요. 영화를 보시면서 '다음'을 생각하셨군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윗 댓글에서 오렌 님께서 일러주셨듯) 다양한 의견을 가지게 되는 듯합니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봉준호는 봉준호이니,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생각하기도 했어요. 부럽거나 샘나거나 하는 많은 일들이 생존과 연관되면 얼마나 따가워지는지도.

열차는 인류 역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하는데, 봉준호 감독은 아마 좀 더 다채로운 색채 대신 일관적인 방향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이 영화에서는 종으로 횡오르 가는 방향이 종종 심하게 의식이 되거든요. 성화봉송을 할 때의 직선, 커티스도 앞으로 앞으로 가면서 한 곳을 향한 인간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것이 어쩌면 세상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선과 악을 떠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오. 목적과 목표는 약간 다른 것이어서 그것이 늘 함께 하지는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보면 saint236님께서 봉준호 감독에게 바랐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주말입니다. 뭔가 다른 색상의 하루, 채워나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