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____.
정초의 중얼거림이 연말의 복선이 될 줄은 나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 꼬리뼈까지 의자 깊숙이 붙이고 책상에는 진하고 검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병 아래까지 숨어있던 인스턴트 커피 알갱이들은 굳이 스틱으로 젓지 않아도, 뜨거운 물을 붓고 머그컵을 좌우로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스르륵 녹았다. 잔을 꼭 잡으면 뜨거운 기운에 손 전체가 싸르르해지는데, 종종 그걸 어떻게 잡느냐고 신기하게 보던 이가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 날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 하얀 백지는 떠오르는 태양같이 눈 부신데 떠오르는 태양은 도리어 커피처럼 캄캄했다.
-일월
저렇게 정월, 혼잣말하였는데 동짓달, 꼬리뼈를 다치고서야 그 존재를 다시 알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다쳐서, 아파서, 신경이 쓰인 까닭입니다. 신경은 내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 길 없이 열심 걷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을 아껴두었다고 착각하는 자의 오만함과 무지함, 그 합의 가장 총명한 상태였습니다.
일월, 당신은 내게 늘 불친절했습니다. 남들보다 특히 더. 나는 방망이 다듬는 노인처럼 몸을 옹송그린 채 앉아 고집을 부렸습니다. 갑각류가 된 모양 앉았지만 진주 하나 품지 못한 조개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이것저것 내다 버렸습니다. 사전과 개론서 몇 권만 남기고 책은 모조리 처분하고서야 머릿속 남은 것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자고로 사람은 제 것이 아닌 것을 가까이하기만 하여도 제 것인 양 착각하는 버릇이 있나 봅니다. 원근감에 잠시 속았던 봄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다 하여 고통스러웠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덜 아픈 것이라고 거스러미 하나에, 그렇게 깜박.
스웨이드를 들었고 실버라이닝플레이북을 읽고 보고, 하릴없이 거리를 걷기도 하고 감정의 뒤를 넓은 보폭으로 착각하여 한숨이 덜거덕거렸지요. 열심 궁리하였으나 들어가는 것은 들숨, 나오는 것은 날숨, 그것들의 총합을 한숨이라 불렀습니다. 봄의 결론은 위에서 중언부언 말하였듯 피곤과 한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불안한 마음의 답답한 상태, 덧없음의 도취. 내가 당신을 그리 맞이하였기에 당신이 나를 그리 찾았다는 것을.
여름 ; 마음의 상태
나처럼 당신도 남아있었구나, 하고 아스라이 바라보던 순간.
당신이 내게 건넨 티끌 하나, 마음의 상태.
<state of mind, those who stay>
Umberto Boccioni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재료 사용, 다이나믹한 형태와 기계에의 찬양, 장식의 배제, 폭력의 미화. 움베르토 보초니가 속한 미래주의에 관한 위키피디아의 정의입니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움직임은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더 아름답다는 미래주의 선언문의 구절을 '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영속성이라는, 속도감 넘치는 조각으로 표현해낸 보초니의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떠나는 존재가 보여주는 속도를 찬양했던 보초니가 바라본 남아있는 자의 도사림은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감성적인 것에 반대하는 보초니의 작품, 마음의 상태를 뜯어보면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보입니다. 그 그림자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청록의 우울함과 자각을 통해 올바른 근거를 찾아낸 후회의 울림이 들립니다. 녹색의 울렁임과 흐물거리는 헤어진 휴짓조각같은 사람들. 떠나지 못한 자들의 흐느낌은 저런 색조일 것입니다.
가을 ; 추억할 수 없음
내 청춘이 지나가네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다는 글귀에 설레던 가을이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 천사가 지나간 흔적. 존재의 독성에 뉘우치던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늘 조금 매캐한 공기처럼, 근거를 제대로 찾은 후회처럼 찾아오곤 했습니다. 설렘의 뒷면에 남은 뉘우침. 코끝에 살짝 떨어지는 벚꽃잎 같달까요. 그것이 설렘의 마음이라면 코끝의 벚꽃잎이 시드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쓸쓸함일 테지만, 나는 단 하나, 아직도 당신을 추억하는 법은 잘 모릅니다. 내일의 기억이 없고 추억할 어제가 없다는 나를 벚꽃처럼 낙엽 흩날리는 당신은, 나를 머릿속 뇌수를 뜯어보듯 쳐다보았지요. 쳐다보고, 살펴보고, 뜯어보는 것 중 하나의 목적어라도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쩌면 추억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관조할 만한 거리가 없기 때문일 거예요. 늘 배를 곯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적당한 물러섬 끝, 최고로 멀고 최고로 가까운 그 거리, 예상하였다는 듯,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거리가 내게는 없습니다. 욕망의 가장 솔직한 순간이자 한숨의 가장 위태로운 조각. 굳이 나무라자면 내 허기와 영양분 없음을 나무랄 뿐. 내게는 아직 추억할 수 있게끔 알맞게 확보된 거리가 없습니다. 바짝 맞닿으려는 내게 당신은 언제나 들쥐처럼 찾아오고 고양이처럼 옷자락을 들고 일어섭니다. 마음이 사라지는 거리를 영화 그래비티를 보며 느꼈습니다. 가을은 공기였고 잡을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서야 내가 이제 가을에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겨울 ; farewell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간증, 티끌만치도 아름답지 않은 물체의 위치, 덜그럭거리며 운반한 시체는 묘지가 아닌 구덩이 속에 툭 던져넣은 까닭에 비석조차 제대로 없는 당신. 이렇게 당신을 푸대접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아차, 하는 마음이 꼭 빈 탁자위에 잘못 남겨둔 장식처럼 빈집에서 그림자만 녹아내립니다.
내가 살아있는 시간의 속옷은 이렇게 누추하게 펄럭거리는데 당신은 늘 가장 순진하게 연필 끝의 각을 세워 종이에 사각댑니다. 그 소리가 천천히 자라고 잦아들어 문이 철컹 소리로 먼저 닫히려는 순간. 혹은 거리로 나가 비둘기가 양지를 찾아 무언가 콕콕 쪼아대며 꾸룩거리는 보던 때. 포만감에 가득 찬 사람들의 입술. 겨우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창백하게 책상 위에 정물처럼 굳어졌을 때. 사람들 사이 외따로 서 있던 때. 많은 사람이 본 유령이 공기 중을 떠돌고 나는 욕망과 능력, 욕심과 욕망이 짝 없이 돌아다니는 빈집에 딴에는 할 일도 없으면서 들어앉았습니다.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바라보는 창밖의 무심함. 당신은 일말의 호기심조차 남겨두지 않고 이제 나를 치우겠지요. 그러고서는 다시 불친절한 다른 숫자를 내게 보낼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존중하려는 마음,
무언가의 시작이 이제는 태어나기 전 죽은 상태.
나와 당신, 2013이라는 다정하고 매몰찬 숫자가 힘겹게 맞잡았던 손바닥 사이
그 어떤 공기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맞닿은 그림자 뒤 아무도 뒤따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당신과 나를 그 어떤 이도 다시 잡지 않기를.
그래서 이제 안녕이라고 하지 않고 farewell 이라고 말합니다.
늘 이 목소리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휘청일 뿐입니다.
그 위를 아무도 걷지 말기를.
그리고 2014, 새로운 당신.
내게 멀미와 꿈, 몰입과 첫사랑을 보내주시기를.
간극과 격차에서 오는 아찔함, 무엇이든 잊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
조금으로라도 포만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을.
나는 이제 이 벽을 천천히 훑으며 손자국 하나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13,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