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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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작품은 400년 전부터 100여 년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들이 어떻게 일본 사회를

관찰했고, 일본의 식자층과 어떤 교류를 했는지 또 그들의 사회상을 통해 무엇을 감지했는지를

조선 사절단(?)의 시각으로 탐구 정리한 내용으로

첫째는 일본의 어느 부분에 대해 위화감을 느꼈고, 그 위화감이 어디에서 유래를 했는지

둘째는 일본의 어떤 점에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는지

셋째는 일본에서 배우고 실용화할 만한 것과 조선 후기에 사회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의 담론을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탐구하는

넷째는 양국 문인들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 있었는지

다섯째 문자를 통한 인간적 교류가 조선 문인들의 정신세계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위의 시각은 저자의 시각으로 그대로 옮겨 보았다....작품을 읽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찰한 내용으로 많은 일본 관찰기를 짧은 작품으로 축약하다 보니 부분적으로 미진한 부분도

있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개인적으로는 일본인의 특질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한 작품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도 서로 마주 앉아 뭔가를 논하기가 껄끄러운 이웃인 일본, 일본인에

대하여 선조들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껄끄러움이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당시 일본이 시행하고 있던 관직의 구임제세습제를 비롯한 장인 우대정책이 심도깊게

논의되던 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주자학파당 싸움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부끄러움은 둘째치고 그들의 정책적 혜안에 부러운 생각만 들었다.

특히, ’장인 우대정책의 경우 오늘날 기술 일본의 토대를 마련해 준 단초를 보는듯하였다.

오늘의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면을 보이고있는 전형적인

이류국가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작품을 읽다보니 그런 특징이 어제오늘 갑자기 생긴 특질이

아니라 수백년 전부터 그들 민족성에 내재되어 있던 DNA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문풍(文風)‘에 언급된 내용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사행원들은 가는 곳마다 글과 시문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일본인들을 연일 대하다보니 피로가 누적되어 사절단 고유의 업무를 추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다른 업무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 추후 이런 일만 전문으로 대응하는 제술관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졌을 정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행원들은 어렵게 자신들을 찾아와 시문을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헛걸음을

시키고 싶지 않아 전심을 다해 대응하지만 짧은기간에 많은 양의 시문을 전하다 보니 일본인

그들에게 전해주는 일부 내용이 부실했다고 한다.

당시 사행원으로 갔었던 홍세태라는 분은

필답집이 금세 간행되는 일본을 보면서 자신이 남긴 글이 누군가에게 비평받을 가능성을 생각

한다면 진땀이 난다

고 토로했지만 물리적으로 이를 막지 못했다고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부 질이 떨어지는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사행원들의 이런 고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던 일본의 식자층들은 관대하지 않았고 자신들

위상을 높이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식자층 중 대표격인 오규우 소라이와 제자들은

사행원들과 주고받은 시문집을 한데 엮어 문사기상’(問槎畸賞)을 간행하는데, 그의 제자 중

타나카 토오꼬오라는 인물이 서문에 조선 사절단을 이렇게 언급하였다.

지리소(支離疎)의 턱은 배꼽에 묻히고 상투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애타타(哀駝它)

추한 얼굴로 천하를 놀라게 한다

지리소란 불구를 애타타는 추남을, 문사(問槎)는 조선통신사를 기상(畸賞)은 기이한 글을

감상한다“(P 249)“

 

전체적인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다.

나는 위의 구절을 몇 번씩 읽으면서 일본인의 특질이라는 것이 어제오늘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래로부터 민족적 DNA에 내재되어 있는 부류들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그런 잡스런 인간들의 수준 낮은 혈기방장함에 일희

일비하지 말고 과거 일본을 다녀와 따스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려 했던 선조들의 마음으로

일본의 오늘을 알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기록하신 본 작품을 읽으며 따스한 눈길과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려 한다.

어쨌든 여기에 부분별로 정리해 보았다.

 

[삶과 죽음]

 

1) 정유재란 당시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강항에 의해 관찰된 일본인은

    낙사오생(樂死惡生)’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하였으며 당시 조선이 주희의 생명관에 영향

   받은 호생오사(好生惡死)’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부류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며 긴 칼은 남을 죽이는데, 중간 것은 방어하는데, 작은

   것은 자살용으로 지니고 다녔다.(P 28)

2) 조선 문인들이 일본인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 경생(輕生)’이다.

   이 말은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인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형용사가 되었다.(P 33)

   전국시대 일본에서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무사의 정체성이었다. 일본의 군기소설인

   태평기에는 무사의 도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이름을 중시하는 것을 의로 삼는다라는 말도

   보인다.(P 31)

3) 야마모또 조오초오의 하가꾸레에서는 무사도란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

   생과 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선택하면 된다 즉,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한다.(P 32)

4) 명나라 문인 제갈원성이 쓴 양조평양록에서 일본인들은 흉악하고 교활하여 신의가 없고

   성질이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라고 했다.(P 34)

5) 어려서부터 권력자의 집에 붙어 밥을 얻어먹기 때문에 부모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정이

   없이 자라서 가족에 대한 유대 의식의 결여가 삶에 대한 집착의 결여로 이어지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P 38)

6) 전국시대에는 과감하게 죽는 것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구적(仇敵)을 죽이고 자결한 사람에 대해 참다운 대장부라고 감탄하면서 애석히 여기지

   않았고 그 자손에게 너는 과감하게 죽은 사람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지위 높은 사람과 혼인

   할 수 있게 하였다.(P 39)

7) 1600년대에 명절인 단오에 수 천 명의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두 조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도

   하고 평소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복수를 행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행사를 보며 일본의 국속

   (國俗)은 사람을 잘 죽이는 자를 대담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한다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부부간,

   부자간, 형제간에도 적용이 되어 가족이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P40)

8) 1617년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눈 한번 흘긴 것도 반드시 보복하고, 말 한마디에도 시기를

    부려 사람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고, 굽히지 않는 것을 장기로 여긴다라고 했다.(P 42)

9) 조선 문사들이 가장 큰 혐오감을 느낀 대상은 타메시기리할복이다.

   타메시기리란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체를 시험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P43)

[원 한]

 

1) 임진왜란 170년 후,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수괴이자 역수 로  

   불리우는 등 당시 나라를 멸망시킨 그에 대한 원망이 일본인의 의식에 남아 있는 한 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으나 일본이 대륙침략의 길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토꾸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메이지 정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이다.(P 55~57)

 

2) 1596코니시키 유끼나가의 신하 요시라의 증언을 보면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얼마나 원망

   을 사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P 59), 조헌의 항의신편을 엮은 안방준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일본의 민간에서는 히데요시는 조선에는 일시의 적이나 일본에서

   는 만세의 적이라는 이야기를 있다고 하였다.(P 61)

3) 1603년 에도막부를 개창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기 위한 국서에

   평적(平賊)’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는 히데요시를 얕잡아서 하는 말이다.(P 62)

4) 에도시대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행동으로 보지 않았다.(P 67)

   코오자이 시게스께라는 병법학자도 히데요시를 전쟁만 일삼는 포악한 군주로 보고 있었다.

   명분없이 조선을 침략하여 전쟁을 반복했기 때문에 결국 토요토미 일가 전체가 멸망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P 69)

   * 토요토미가 죽은 후 쿄오또에 토요꾸니신사가 세워졌고 인근에 조선에서 가져온 조선인의

     귀를 매장한 미미즈까가 있다고 한다.

5) 어지러움이 히데요시 시대에 극에 달하여 사람들은 모두 염고징창(厭苦懲創)‘의 뜻이 있었다.

   ‘염고징창염고는 싫어하고 괴롭게 여긴다는 뜻이고, ‘징창은 뉘우치고 교훈을 삼는다는

   뜻이다.(P79)

 

[제 도]

 

1) 조선 문인들이 남긴 일본 견문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제도 및 사회

   구조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강항의 경우 적중봉소라는 상소문에서는 일본의 지리, 경제,

   정치제도를 상술하면서 수많은 조선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P 85)

2) 전통적으로 조선은 병농일치제였으니 일본의 경우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병사가 되고, 우둔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농민이 되는 병농분리제였다.(P 86)

   --->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군사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이런

          관찰 보고서가 나왔다.

3) 국가의 근간이 백성에게 있는 이상 국가운영의 목적은 양민에 있다는 것이 조선 사대부들

    기본적 정치관이다. ‘양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사회구조는 조선 사대부의 정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었다.(P 97)

4) 토꾸가와 정권은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위장하면서 일본 전국에 막부의 권위를 과시했고

    (P100), 혈기 왕성하고 적개심 충만한 매서운 무사들을 수하로 거느린 다이묘들을 통합하고

   정권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토꾸가와막부의 과제였다.(P102)

5) 백성은 병, , , , 승이 있는데, 오직 중과 공족(귀족)에만 문자를 해독하는 자가 있고

   그 나머지는 비록 장관의 무리라도 한 글자도 알지 못했다.(P105)

6) 일본은 과거로 인재를 뽑는 법이 없고 벼슬은 대소에 상관없이 모두 세습이어서 세습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에 대해 제대로 실무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았다.(P107)

7)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종료되며 봉건제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일본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타 국가와 전쟁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세습제가 오래 유지되어

   사회에 정착한 결과 사람들이 그에 반감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P110)

 

[통 치 법]

 

1) 도꾸가와막부는 정치적인 불안요소가 두가지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히데요시 시대의 충성스런 부하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둘째는 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다.(P 127)

2) 전통적으로 조선 사대부들은 신분제가 정착한 상태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으나 자기실현의

    욕구나 분수를 넘어 기존 계층질서를 거스르려는 욕심을 가지지 않는 일본인의 심성이

    토꾸가와체제를 밑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P 125)

3) 교묘한 법술로 다이묘오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막부의 붕괴를 예상하고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닌 심복여부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서로 의구심을 품고

    상대의 동향을 엿보는 그들의 모습을 본 것이다.(P 129)

4) 일본은 보직의 세습제를 보편적인 제도로 알았지만 중요 자리인 로오주우’, ‘경도소사대’,

    대판성대등과 같은 주요 보직은 선별하여 등용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정치제도 중 조선의

    관심을 끈 것은 구임제(久任制, 직책을 오래 맡기는 제도)’였는데, 이 제도에 대한 건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P 132)

 

[사치와 번영]

 

1) 사행원들이 묘사하는 풍요로운 일본은 과장된 부분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선 사절들은

   당시의 일본을 풍조가 오염된 나라로 보았다.(P 147)

2) 막부가 각지의 번주들에게 다이묘오 야시끼(무사들의 주거지)에서 마음대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우둔하게 만들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P 149)

3) 도꾸가와 막부의 재정은 다이묘오가 세금을 거두는 곳 외에 따로 직할지에서 세금을 거두어

    풍족하게 했고(P 151), 막부는 광산지역을 직할지로 하여 관리를 파견해 직접 지배(P 152)

    했는데 비록 왜황이라도 감히 간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사를 맡은 관료들이 각기 영지를 부여받아 그 영지에서 걷는 세금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울 조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P 152)

4) 일본인들의 식사량은 적었으며 무사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평소 두끼 밖에 먹지 않았다고

    한 반면, 당시 조선인들은 하루에 먹는 식량으로 그들의 3일분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P 159)

5) 조선이 일본의 해외무역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18세기 들어서로 그 때까지 조선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거두었다. 16세기부터 일본은 해외무역을 활발히

    전개해 나가사끼를 비롯한 3개 지역의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그 이익이 감소한 반면 반대로

    일본은 풍요로운 삶을 구가했다고 한다.(P 163~169)      

[기 술]

 

1) 에도 시대에 일본을 다녀온 조선 사절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일본의 기술로서

    일본 서기를 보아도 일본 기술 가운데 상당수가 한반도에 기원을 갖고 있다.(P 175)      

    일본은 예부터 외국에서 숙련 기술자를 불러 일본 국내에 정착(P 177)시킨 반면, 조선은

    표류하면 그곳에서 배를 새로 만들어 돌려보냈는데, 여기에 도착하면 모두 부수어 그 법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P 201)

2) 일찍이 일본에서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에게 천하일(天下一)’의 칭호를 부여하면서

    기술을 장려했다고 하며, 비록 그의 기술이 자기보다 꼭 낫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신다.(P 180)

3) 사행록을 보면 일본 백성들이 사는 일반 가옥의 구조에 관심이 많았고 민가를 관찰한 경험의

    축적은 이용후생을 주장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도량형의 통일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P 187)

 

[문자 생활]

 

1) ‘문자란 한자를 말하고 초량의 통사란 쓰시마의 통역을 말하는데, 중요한 사항은 한문 필담

   으로 처리하고 사소한 일은 통역을 통했는데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15세기 경에는 사절들은 구어에 의한 소통보다는 한문에 의한 소통을 선호했다.(P 205)

2) 왜인 중에서 글에 능하다는 사람도 단지 언문을 사용할 뿐 문자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했으며 오직 승려무리만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P 207)

3) 17세기 전반에 기록된 사행록에서 사행원들의 소통은 대개 승려가 담당했는데, 이는 중국에

   다녀온 승려들이 불교 경전을 비롯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면서 활발한 문화활동을

   전개한 결과이다.(P 213)

4)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수많은 서적과 더불어 활자인쇄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가져갔으며, 조선에서 가겨간 인쇄술을 토대로 많은 책이 간행되었다.(P 217)

   이 결과 일본인들은 조선 사행원들이 남긴 시와 필담집을 한 달 이내에 출판했다.(P 219)

5) 사행원들에게 가장 곤란한 것은 시도때도 찾아와 글과 시문의 평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제술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었을 정도라고 한다.(P 221)  

6)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문사들에게는 영달의 길이 아예 차단되어 있었다.

   아무리 독서와 글쓰기에 힘써도 비참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조선통신사와의

   시문교류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P 223)

[문 풍]

 

1) 에도시대에는 승려에 한정되었던 한문능통자가 급증, 한문으로 글을 쓰고 경서를 읽고 중국

    고전에 소양을 쌓은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P 247)

    일본의 문풍을 선도한 인물이 오규오 소라이아라이 하꾸세이이다.(P 248)

2) 1711년 오류오 소라이와 그의 제자들이 조선 사행원들과 주고받은 수창시를 모아 문사기상

    (問槎畸賞)이라는 문집을 발간하는데, 소라이 제자 타나까 토오꼬오가 서문 중에

 

지리소(支離疎)의 턱은 배꼽에 묻히고 상투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애타타(哀駝它)는 추한

 얼굴로 천하를 놀라게 한다는 문구가 있는데,

지리소란 불구를 애타타는 추남을, 문사(問槎)는 조선통신사를 기상(畸賞)은 기이한 글을 감상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P 249)

---> 조선 사절의 시를 혹평하고 자기 학파 문인들의 시를 극찬하는 것이 소라이학파 문인들의

      특징이었다.(P 252) 그들은 당시 조선 선비들이 사문난적으로 폄하하는 반주자학적 풍조를

      이끌고 있었다.(P 260)

3) 조일 양국의 문인 등이 나눈 필담 자료를 보면 주자학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조선 사절과

    주자학을 비판하는 일본 문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논쟁이 도처에 기록되어 있다.(P 262)

[교 류]

  

1) 서동문(書同文)이라는 말은 조선이 중국과 문자를 공유하면서 중화의 문물을 수용했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동문이라는 말에는 중화중심주의적 함의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동문 의식이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세계관을 전제로 성립된 관념.(P 278)

2) 조선 사절이 일본에 파견된 이래 가장 활발한 문학교류가 이루어진 것이 계미통신사 때로

    사행록에 많이 언급된 네 명의 문인이 키무러 켄까도오’, ‘카메이 난메이’, ‘나와 로도오’,

    지꾸조오 다이뗀이다.(P 279)

3) 일본이 소라이 숭배자들을 향해 주자학의 정당성을 타이른 원중거(조선 사절)’를 당연시

    했듯이, 왕세정과 이반룡의 고문사학에 경도한 소라이를 해동부자로 숭배하는 일본인의

    모습은 조선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가소럽게 여겼다.(P 297)  

 

[문화와 풍속]

 

1)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불교를 믿거나 신도식 의식을 치르는 등 유교적 의례가

    하나도 없는 일본을 미개한 것으로 인식했다.(P 312)

2) 일본인의 종교생활을 묘사하는 데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신도이다.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의

    토착신앙과 연결되면서 일본인의 종교적 신앙심 위에 군림함을 확인했다.(P 317)

3)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까의 만남은 일본에 주자학이 유입되는 큰 계기가 된다.(P321)

4) 풍속 가운데 조선 사절들이 가장 혐오한 것이 동성혼(同姓婚)‘이성양자(異姓養子)‘

    제도였다.(P 329)

5) 일본을 유교화를 위해서 조선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이익이다.(P 338)

    일본은 동아시아의 유교세계에 포섭하는 것은 최선의 비왜책이었다.(P 340)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일본에 관한 재미난 상식]

1) 저팬(japan)의 어원은 치팡구(Cipangu)’.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등장한 최초의 외국어 표기다.

2) 한중일 삼국에서 일본이 통칭된 것은 8세기 초로 이전에는 달랐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이 바뀐 것이다.

   ‘라는 이름은 난쟁이’, ‘단구라는 의미로 일본인들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3)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가 일본 사절에게 일본으로 개명을 지시하여

   그 때부터 일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 사기정의(史記正義)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황제까지 로비를 통해 설득시켜 국명까지 바꾼 나라다. 독도를 자기 것으로 우기는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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