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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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 역사 속 영웅들....그들을 알아야 미래를 엿볼 수 있다 -

 

내가 본 작품을 접했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고대 로마의 영웅들을 통해 각 인물들이

생전에 이룩한 업적을 통해 또 그들의 여러 공적의 분석을 통해 지금을 살고있는, 나와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현실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작품을 접했으나

나의 그런 바램과는 달리 작품은 개개인별 특정 분야나 그들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아닌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결혼, 출산, 육아 등 포괄적인 사항을 언급하고 있어

해당 인물을 평가하기가 난해하였고,

 

간간히 기술되어 있는 영웅들의 전투 내용과 그들이 행한 실질적인 정치 및 위민정책에 대한 \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글로만 접하려고 하다보니 당시의 역사적 지식이 일천한 사람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된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었던 안토니우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동안 막연하게마 알고 있었던 내용에 추가하여 새로운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은 다소의 위안이 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인 작품의 아쉬움을 달래기애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것은 영웅은 절대

미인을 싫어하지 않지만 반드시 그런 미녀로 인해 망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뤼쿠르고스 ]

- 스파르테(‘스파르타의 그리스어 이름이다)의 입법자로 기원전 800년경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

  되는 인물로 지금도 실존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P 17)

- 그는 헤라클레스의 11세 손으로 수년간 라케다이몬의 실질적인 왕이었다.(P 99)

- 개혁 가운데 으뜸가는 위업은 원로원 창설이다. 왕들의 통치를 완화하고 중대한 사안에 대등

  한 표결권을 가짐으로써 국가에 안정과 절제를 가져다 주었다. 28명의 원로원 의원들은 민주

  주의에 대항할 때는 왕들의 편에 섰고, 참주정치의 출현을 막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백성의

  힘을 강화해 주었다.(P 26)

- 법률을 성문화하지 않았는데, 국가의 번영과 탁월성에 기여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대한

  원칙은 시민의 습관과 태도에 뿌리내리고 있어야만 든든하고 변함이 없으며 젊은이 각자에게

  입법자 역할을 하는 교육에 의한 강요보다 더 강한 구속력이 있다고 하였다.(P 38)

- 아이들을 아버지의들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가의 공동 재산으로 보았다.(P 43)

  아이들이 7살이 되면 국가가 아이들을 맡아 규칙과 제도 아래 함께 놀고 배우게 했다.(P46)

- 중요한 일에는 언제나 권선징악의 요소를 가미해 온 도시를 훌륭한 본보기로 가득 채워 그들이

  그런 본보기와 늘 마주치고 접촉함으로써 선()을 향해 나아가는 형성기에 감화받게 하였다.

                                                                                                                   (P 62)

- 백성들이 이방에서 전염병을 옮겨오는 것을 막는 것보다 나라가 나쁜 관습에 감염되는 것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P 63)

- 그는 곡기를 끊고 굶어 죽었다, 정치가는 죽으면서도 국가에 봉사해야 하는 만큼 정치가의

  인생 종말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덕행(德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

  이었다.(P 67)

- 그의 주된 관심사는 한 도시 전체의 행복도 한 개인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탁월함과 내부화합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조치와 제도의 목적은 자신의 백성이 자유롭고 자족적이고

  절제를 지키되 가능한 한 오래 그런 상태로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P 70)

 

[솔론 ]

- 그리스 일곱 현인 중 한 명으로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되면서 양측 모두

  에게 보호자가 되고자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시민들이 신분이 아니라 재산 등급에 따라

  각종 관직에 진출하게 한 것이다.(P 73)

- 솔론은 자신의 법을 서사시 형식을 빌어 반포하려고 했다.(P 78)

- 솔론은 참주가 되기를 거절했지만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 지나치제 부드럽지도 않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고분고분하지도 않았으며 법을 제정함에 있어 자기를 뽑아준 자들의 환심을 사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설득에 따르거나 권위에 순종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항에 대해서

  만 개혁을 추진했다.(P 96)

-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가 취한 조치는 빚 탕감이 아니라 이자 경감이었는데, 아테나이인들은

  이 온정적 조치에 만족하여 이 조치뿐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진 도량형의 확대와 통화 가치

  절상에 대해서도 짐 덜어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P 97)

- 그가 행한 여러 개혁 조치들이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당파 싸움이 벌어졌을 때 어느 편에

  도 가담하지 않은 자의 공민권을 박탈하도록 규정해 놓은 법이다. 이는 더 낫다고 정의로운

  편에 즉시 가담해 위험을 같이하며 그들을 도와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P 105)

- 또 다른 법 중 인상적인 것은 사생아들에게 아버지를 부양할 의무를 면제해 주는 법이었다.

  결혼이라는 미풍양속을 무시하는 자는 자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위해 여자

  를 데려가는 것이 분명한 만큼 그것은 당연한 응보인 것이다.(P 109)

- 솔론은 일하지 않는 자를 지원해주기보다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

  했다.(P 111) * 그 밖에 소제목 18~25까지의 솔론 개혁의 내용은 무수히 많다.

- 군주의 거울(김상근 )에도 언급되고 있는 크로이소스와의 대화는 솔론의 의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대화로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가 솔론에게 자신의 보물창고를 보여주며 자기보다 더 행복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면서 그는 바로 자신의 동료 시민인

 텔로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는 조국 위해 싸우다 영광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하자. 크로이소스는 다시 묻는다. 그러자 솔론은 다시 답을 하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바로

 형제 간의 우애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두 사람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다라고 답하면

 서 그 형제는 어머니의 평생 소원을 들어드렸으며 그 어머니는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이야기한다

솔론은 이 예화를 통해

우리의 평범한 지혜는 인생이란 흥망성쇠를 거듭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우리가 지금 잘 나간다고

해서 기고만장하거나, 아직도 바뀔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어떤 사람의 행운을 찬탄하는 것을

금하고 있소아직 살아서 위험을 무릎쓰고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인데 어떤 선수를 우승했다고 선언하며 영관을 씌워주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고 효력이

없다

크로이소스에게 일침을 가한다.

나중에 크로이소스가 퀴로스에 대패하여 화형으로 죽게 되자 크로이소스는 솔론과의 과거 대화

를 상기하면서 크게 각성하였다‘(P 118~120) 

 

[테미스토클레스 ]

- 아테나이의 정치가로서 아테나이의 해상강국을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함(P 129)

- 그는 천성적으로 명예욕, 출세욕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열정 등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사교 모임에서 조롱거리가 되자 다른 현악기의 현을 조율할 줄은 몰라도 작고

  시시한 도시를 맡아 영과스럽고 큰 도시로 만들줄 안다는식으로 상대로 제압하기도 하였고

  (P 132), 사람의 논리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을 때는 하늘의 조짐과 신탁을 활용하기도

  하였다.(P 144)

- 아이기나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해양전투력의 강화를 역설해 100척의 삼단노선을 건조해

  전쟁에 대비해 아테나이 시민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나 일부에서는 든든한 중무장 보병

  대신 선원과 바다 사공을 만들었다는 비난도 들었다.(P 135)

- 그는 정적인 아리스테이데스도편추방시키는 데 성공하나 그 자신도 도편 추방되는 불운을

  맞이하기고 한다.(P 138)

- 가장 큰 업적은 헬라스의 내전을 종식시켜 헬라스 도시가 서로 화해하고 페르시아와 전쟁 중에

  는 상호간의 적대 행위를 뒤로 미루도록 설득한 것이었다.(P 138)

- 아테나이인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타너스 취급을 한다며,

  날씨가 궂으면 가지 밑으로 피신하지만 날씨가 좋아지기만 하면 가지를 쳐 자라지 못하게 한다

  고 말하곤 했다.(P 158)

- 그는 동맹국들을 돌아다니며 돈을 강요하였고, 자신의 업적을 너무 나타내려 해 동료들의 미움

  을 사서 아테나이인들로부터 도편 추방되는데, 이는 어떤 사람의 권세가 특출하여 민주주의적

  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으레 행하던 일이었다.(P165)

- 도편 추방된 그는 전쟁 상대국가였던 페르시아로 넘어가 정치활동(P 166)을 한다.

  페르시아에서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되자 저를 살려주신다면 전하께서는 탄원자를 구해주시게

  될 것이오나, 저를 죽이신다면 전하께서는 헬라신인들의 적을 죽이시게 됩니다라는 말로써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P 173)

- 그는 또 페르시아 왕에게 사람의 말이란 수놓은 양탄자와 같아 펼치면 여러 가지 문양을 드러

  내지만 말아버리면 그 문양을 감추거나 일그러뜨리는 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감언이설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P 174)

 

[페리클레스 ]

- 아테나이의 정치가로서 명문 출신으로 철저한 민주정치의 신봉자로 아테나이를 그리스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파르테논 신전 등과 같은 오늘날 전해오는

  고대 유명한 유적들을 다수 신축했다.(P 183)

- 페리클레스에게는 세 명의 스승이 등장하고 있다.

  음악 선생은 다몬‘, 철학은 제논그리고 가장 가까이 지냐며 민중선동가의 어떤 호소보다

  힘 있는 위엄을 심어주고 타고난 품위를 더 높여진 사람은 아낙사고라스였다.(P 190)

- 페리크레스는 본성상 민주주의자가 아닌데도 소수의 부자들 대신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했다.(P 193)

- 그의 생활 자세는 절제그 자체였다. 공직에 있는 동안 친척 결혼식에 참석한 것 말고는

  친구는 물론 그 누구와도 식사를 같이 한 적이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P 194)

- 페리클레스는 민중이 금세 싫증내지 않도록 민중 앞에 이따금 모습을 드러냈고 급한 사안에

  대해서만 드물게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밖의 일들은 친구들이나 다른 연설가들이 처리하도록

  했다.(P 194)   

- 타고난 재능에 덧붙여 고매한 사상과 완벽한 실천력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자연철학 덕분

  이었으며, 자신이 배운 것을 언변술에 적용함으로써 그는 다른 웅변가를 훨씬 능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올림포스의 주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P 195)

- 페리클레스는 헬라스 국가들과 비헬라스 국가들에서 비롯되는 막강한 힘, 예속된 종족들이나

  우호적인 왕들이나 동맹을 맺은 왕조들이 지켜주고 있는 통치권 등 아테나이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장악했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더 이상 민중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바람처럼 변덕스러운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P 208)

- 그는 민중의 희망과 두려움을 두 개의 키처럼 이용해 그들이 오만할 때는 제 때에 제동을 걸고

  의기소침할 때는 북돋워주고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P 209)

 

* 작품 내용이 절대 분량이 페리클레스의 전공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전쟁사나 주요 인물들과의 역학관계에 능통하지 않는 한, 작품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축약함.

 

[알렉산드로스 ]

- 아드리아 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군인이요 지도자로 세계를 무대로 정복활동

  을 편 최초의 영도자로 그리스의 언어와 제도를 동방 세계에 뿌리내리게 하여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P 243)

- 소년 시절부터 그는 자제력이 높았다. 다른 점에서는 성급하고 격정적이었지먼 육체적 쾌락에

  는 탐닉하지 않았고 그런 것들을 즐기더라도 상당한 절제를 보였다.(P 248)

- 군자금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서는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잘 나누어주었다고

  하며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자 부하가 전하는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을 남겨두시렵니까?‘라고

  묻자 그는 나는 희망을 남겨두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P 264)

  특히, 점령지 해안지대에서 보내온 진귀한 과일이나 물고기를 측근들에게 일일이 나눠주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P 279)

- 행운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투를 위해 이상적인 지형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승리는

  그런 행운보다는 그가 갖춘 장군으로서의 자질 덕분이었다.(P 273)

- 알렉산드로스는 적에게 이기는 것보다 자신에게 이기는 것이 더 제왕답다고 여겼는지 절대

  여인을 건드리지 않았으며 그는 여인들의 신체 아름다움에 자신의 절제와 극기의 아름다움을

  대비시키며 마치 생명 없는 입상들인 양 여인들을 대했다고 한다.(P 276)

- 자신의 군대가 수많은 전리품들로 방해받아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먼저 자신과 측근

  들의 짐수레를 불사르더

 

* 페리클레스 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작품 내용이 절대 분량이 알레산드로스의 전공과 관련된

  여러 전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전쟁사나 주요 인물들과의 역학관계에 능통하지

  않는 한, 작품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실정으로 축약은 여기까지

 

[마르쿠스 카토 ]

- 검소한 생활, 꾸준한 체력단련, 불굴의 정신력, 엄격한 도덕성, 적극적인 정치활동 등으로

  재정관, 집정관 등 주요 보직을 엄정하게 수행하였고, 감찰관에 임명되어 활동할 당시에는

  엄격한 법집행으로 감찰관 카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함.(P 359)

- 특히, 로마인들은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을 신인(新人)‘이라고 불렀는데

  그들도 카토를 그렇게 불렀다.(P 360)

- 쾌락은 악의 가장 큰 미끼인 만큼 피해야 하며, 혼의 가장 큰 장애물은 몸인데 혼은 자신의

  이성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몸의 감각들을 멀리할 때에만 자유롭고 정결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었다.(P 364)

- 카토는 자기는 나쁜 짓을 하고도 벌 받지 않기보다는 옳은 일을 하고도 보답받지 못하고

  싶으며,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되 자신의 잘못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P373)

- 선량한 시민이라면 자기가 칭찬을 받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칭찬을 받을 만해도

  칭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P 391)

- 카토는 재산보다는 집안을 보고 아내를 골랐는데, 그것은 부유한 여자들이나 집안이 좋은

  여자들이나 다 같이 위엄과 자긍심이 있지만, 가문이 좋은 여자들은 원래 수치스러운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모든 일에서 남편의 뜻을 더 잘 따르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P 392)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傳]

- 두 번이나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감찰관까지 지낸 인물로, 로마의 특권층이면서 가난한 시민들

  에게도 제국의 부와 성과를 공평하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의 소유자였음

- 농지개혁 등과 같은 혁신적인 개혁을 단기간에 추진하려는 과정에서 기존 세력과 부딪혀 목숨

  을 잃게 되는데, 그의 죽음으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P 407)

- 부자들은 가짜로 꾸며낸 소작인들의 명의를 이용해 소작지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고,

  결국에는 대부분의 땅을 공공연히 자신들의 명의로 소유했으며 자신들의 땅에서 자유민들을

  쫒아내고 외국노예들을 시켜 경작하게 하였다.(P 416)

- 기득권층을 대상으로 토지개혁에 임해서는 민중의 요구가 정당하고 또 민중은 나라를 지키려

  고 큰 위험과 고통을 겪고도 사소한 대가를 돌려받는 만큼 그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자고 기득권층에 호소하여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의견이 수용된다.(P 423)

* 기타의 내용은 티메리우스의 토지개혁과 관련된 회의와 관련된 내용과 죽음의 순간에 관한

  내용으로 더 이상의 공적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임

 

[가이유스 그락쿠스 ]

- 위에서 언급한 티베리우스의 동생으로, 티베리우스의 토지개혁이 실패하자 정치에 뛰어듬

  형이 추진하던 농지 분배법을 부활시켰으나, 그가 추진하려던 시민법이 외면당하고 로마민중이

  외면하자 자살하고 만다.(P 437)

 

[카이사르 ]

- ’줄리어스 시저라는 영어식 이르으로 더 잘 알려진 율리우스 카이사르‘, ’귀족파의 우두머리인

  술라가 죽은 뒤, 민중파였던 그는 로마로 돌아와 출세가도를 달린다. 카이사르는 군사들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 호감을 사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그런 능력이 그의 강력한 집권과

  영토 확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P 461)

* 그와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은 역사와 관련된 사항으로 여기서는 제외

- 카이사르는 수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힘들게 성취한 것들을 즐기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그러한 성공들은 미래의 성취에 대한 자극제가 되어 그의 마음속에 더 위대한 업적에

  대한 계획과 새로운 영광을 향한 열망을 심어 주었다(P 536)

- 카이사르의 통치는 카이사르 자신의 처신에 관한 한 독재와는 전혀 무관해 보였으나 측근들

  때문에 인기를 잃었다. 측근들 중에서도 안토니우스가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며 가장 심하게

  탈선했던 만큼 가장 비난 살 짓을 했다.(P 567)

 

[안토니우스 ]

- 카이사르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파르살르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도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데 공을 세운다. 카이사르의 생질로 입양된 옥타비아누스와 경쟁 구도를 펼치다 다시

  화해하고 레피투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이끈다.

  그후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캇시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세계를 양분하지만 곧바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허송 세월을 보내다 옥타비아누스와 벌인 악티움 해전에서

  대패하고 끝내는 자결로 세상을 마감한다.(P 557)

- 그는 역경 속에서도 최선의 자질을 드러내는 특징이 있었다. 방탕스러운 생활을 해 오면서도

  부하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섞은 물을 마시고 야샹과일의 뿌리를 먹는 등 병사들 앞에서 솔선

  수범하는 등 선심을 잘 쓰며 친구들과 군사들에게 아낌없이 호의를 베풀었다는데, 이것은 그가

  권력을 잡는데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고 한다.(P 579, 563) 하지만 그의 전반적 생활 태도 때문에

  올곧고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P 569)

- 안토니우스는 일단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카이사르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며 군대에서 카이사르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P 568)

-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의 낭비벽과 어리석은 생각을 대부분 뿌리 뽑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그의 과오를 알아차리고 나서부터이다.(P 571)

- 클로디오스의 미망인인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와 재혼했을 당시 그녀는 통치자(안토니우스)

  통치하고 지휘관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났을 때 안토니우스는

  여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지고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기 용이했다고 한다.

(P 571)

   안토니우스의 성격이 단순하고 사태 파악이 느린 편이다 보니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은

   그에게 결정적인 재앙으로 다가왔다.(P 589)

- 카이사르를 제거하기로 브루투스와 캇시우스 일파와 모의하는 과정에서 주고 받은 정보를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끝까지 알리지 않았으며(P 575)

  거사에 성공한 후,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문건에 자기 사람들의 이름을 삽입하여 많은

  사람들을 관리나 원로원으로 임명하는 등 정권을 좌지우지 했다.(P 576)

- 2차 삼두정치의 주역이었던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의 소개로 카이사르의 친구가 되면서

  톡톡히 덕을 보았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에 우호적이었다.(P 580)

-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키케로를,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외삼촌인 루키우스 카이사르

  를 내주고, 레피두스는 자신의 아우인 파울루스를 내주며(살해하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P 582)

- 소 패러그래프 53부분은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안토니우스의 부인)와의 치열한 관계와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어떤 방시으로 홀렸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P 625~6)

- 안토니우스는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꼭두각시가 되어 보병이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훨씬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 대패하고 만다.(P 638)

  특히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배가 전쟁 중에 도망치는 것을 보고 모든 일을 잊어 버리고

  자신을 위해 싸우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배신하고 달아났다.(P 644)

- 안토니우스가 패전 뒤 자살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녀는 자기 자식들이 자신의 왕권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요청한다.(P 659)

- 클레오파트라는 39세에 코브라에 의도적으로 물려 죽었다고 한다.(P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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