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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오 Rouault Georges- Henri(1871~1958)

신(神)을 찬미한 현대의 단테

 

상처를 입은 道化師

  루오의 예술은 강렬하면서도 구수한 민화적(民話的)인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상징적이면서도 설화적(說話的)인 내용이다. 그 설화 속에는 달, 구름, 도화사의 의상과 표정들이 보면 볼수록 끝이 없이 인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싶다. 앞의 두 사람은 기운없이 눈을 아래로 뜨고 있으며, 키가 작은 뒷사람은 앞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다. 상단 부분에 안면을 내보이는 인물은 누굴까? 분명 도화사는 아니다. 고달픈 인생항로(人生航路)를 말하는 듯 설화성이 있으면서도 전체가 풍기는 상징적인 효과는 또다른 별개의 예술성을 말하는 듯 하다.

 

법정에 나온 그리스도

 맑은 표정을 가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의연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남녀 각각 상기된 표정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윤곽이 다르고 인상이 다르다. 그들은 천사의 얼굴도 아니요, 사도의 얼굴도 아니다. 피고와 증인 같은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상이 험상궂게 보인다. 얼굴은 모두가 열 여섯이나 되는데, 세 사람을 빼면 열 세 사람이 남는다. 필경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태인을 그린 것일까? 혹은 빌라도 법정에 선 그리스도를 조소하는 대사제(大司祭)나 군중일지도 모르겠다.

 

나부

NU

1925년경 캔버스 유채 80X60Cm

스위스 개인 소장

 

소가족

  대작을 별로 안 그린 루오에게는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작이다. 높이만 2m가 넘는다. 원래 이것은 규도리 부인에게서 의뢰받은 다피스리를 위한 그림이다. 매우 감동적인 표현이다. 상처 입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을 두고 서로가 위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생활의 고통을 나누려는 표정은 무한한 인간의 사랑을 말해 주는 듯, 아니 보다 더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필경 루오는 이와 같은 슬픈 사연의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그것에서 인간의 참다운 행복과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聖顔(성안)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도중 한 여성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 준다. 이상하게도 그 수건에 그리스도의 상이 찍혀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면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聖顔(성안)이라고 한다. 루오는 여러 장의 성안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지극히 종교적인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뇌와 인내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해서는 중세 이래 많은 신학자들이 논해 왔다. 루오는 화가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으로 성안을 그린 것이다.

 

聖骸布(성해포)

  흑색을 주조색으로 굵은 필치, 대담한 색조 등 유니크한 작품이다. 이것은 수난의 성안(聖顔)을 그린 것으로 어느 친절한 사람(唐墨-당묵-을 선사해 준 분)에게 사례로 건네준 작품이다. 단조롭게 처리된 이 작품은 내용에서부터 풍기는 광채가 형용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신비로운 경지, 동양적인 정감, 여기에 루오의 회화성이 있으며 그 마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얼굴

  루오의 그리스도는 전능하고 영광에 찬 그리스도 상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가련한 도화사, 재판 받는 피고나 가난한 사람들과 도피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려는 고난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 상이다. 루오는 안면을 아래로 숙인 그리스도 상을 무수히 그리고 있다. 배경이 되는 넓은 공간 속에 유독 붉은 구름이 광채를 보이고 있다. 화면 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구름은 화면에서의 상징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푸른 새

  전쟁 중 연극계에서 명성을 얻은 여배우 마리아 라니가 모델이 되었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한 자세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이 미녀는 루오 자신이 화면 윗부분에 표기해 둔 바와 같이 '푸른 새'를 상징적으로 그리면서 화면을 정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새에게 노래를 시키려면 눈을 멀게 하라'는 습관이 있다. 그와 같은 속세적인 것에서 취재, 비록 새를 상징한 얼굴을 그렸지만 루오는 이를 자신의 예술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루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그의 인간상을 주제에 용해시켜 더 멀리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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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 Rouault Georges- Henri(1871~1958)

신(神)을 찬미한 현대의 단테

 

저녁놀

  루오는 1937년부터 39년까지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1920년경에 그린 <교외의 그리스도>, <성탄절 풍경> 등에 비하면 화면(색조)이 맑아졌다. 이미 그의 풍경화는 시각의 자연에서 심각(心覺)의 자연으로 변해 온 것이다. 구도나 여기 등장되는 건물, 인물들은 물론이지만 광선 처리나 화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종교인으로서의 심각적 감정에서 솟아난 새로운 차원의 세계이다. 그리스도와 2, 3명의 인물들이 노상에 서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필치, 굵은 선, 충만된 구성 등 실로 놀라운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녹색조(綠色調)의 하늘 처리 등은 격조 높은 그의 품위를 말해 주는 듯하다.

 


저녁놀 2

CREPUSCULE

1952년 캔버스 유채 32.5X40.5Cm

도꾜 개인 소장

 


예루살렘

JURUSALEM

1954년 캔버스 유채 69X54Cm

도꾜 브리지스톤 미술관 소장

 


老王

  노왕(老王)의 표정은 몹시 침통하다. 이 작품에서는 왕의 권위나 위신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왕관 그리고 화려한 의상에서도 그와 같은 허영심은 없다. 마치 <수난의 그리스도> 나 <상처입은 도화사> 상과 일맥 상통하는 인간상이다. 신비롭게 가라앉은 화면 처리는 마치 중세 시대의 '글라스 회화'를 연상시켜 준다. 사인이 없는 것을 보면 다시 가필하려는 작가의 고원(高遠)한 인간상을 물씬 느끼게 된다. 한편 이 작품은 루오 인간상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작가의 정신 내부를 잘 표현한 걸작이다.

 


受難(수난)에서(같은 밤 함께 죽어)

  그리스도 좌우로 두 사람이 그려졌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도적들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부터는 은은하게 광선이 흐르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골고다 언덕(화면 좌측) 아래로부터는 달이 떠오르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은은한 광선은 하반신을 비추고 있다. 화면 구석구석에까지 드라마틱한 처리를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화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마치 액자의 테두리) 부분의 수법은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하는 데 효력을 보고 있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여기 루오의 심원한 회화성이 있다. .

 

受難(수난)에서(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

  화면에 골고다 언덕은 가운데, 그리고 좌우로 십자가가 그려 있을 뿐 언뜻 보아 적적하고 음산하고 무섭다.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서 치솟아 있을 뿐, 모든 지상의 역사가 이미 종말을 고하는 듯한 느낌조차 든다. 우리 나라에서도 시화전이 가끔 열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열릴 것이다. 그런데 화가가 작가의 뜻을 표피적(表皮的)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라면, 루오의 작품은 인간의 예술적 영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는지 모르겠다. 그저 루오의 그림이 심원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후일 다시 보게 되면 필경 새로운 양상으로 감명을 받게 될 것이다.

 


受難(수난)에서(너희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아느냐?)

  앙드레 슈아레스의 종교 시집 '수난'(1939년)의 삽화 12매 가운데 10매를 뽑아 동판화를 새로이 유화로 제작한 것이다. 슬픈 사연에 잠긴 여인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그렸는데 박진 감에 넘쳐 흐른다. 멀리 달이 떠 있으며 엄숙한 분위기 표현에 성공한 작품이다. 루오의 작품이 모두 그러하듯이 단조롭게 보이지만, 내용에서 풍겨 나오는 이야기는 보다 깊은 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受難(수난)에서(모든 이의 惡의 지식)

  유리와 같은 투명한 배경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나상은 대화하는 형태로서 중후감이 넘쳐 흐르고 있다. 화면이 양분되기 쉬운 위태로움을 안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가 다리를 벌려 그 위태로움을 덜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반신이 상반신에 비교해서 짧게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있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 모두의 바깥쪽 다리가 상반신을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일까? 색채도 대조적인 색을 사용했음에도 품위가 한층 높아 보인다. 중량감이 넘쳐 흐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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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eaders > 루오 Rouault Georges- Henri 1871~1958 (5)

루오 Rouault Georges- Henri(1871~1958)

신(神)을 찬미한 현대의 단테

 


受難(수난)에서(무게도 부피도 없이 그는 나간다)

  루오의 작품은 섬세한 묘사가 있다. 그 보다 더 차원 높은 경지를 그리기 위함 이리라. 초기에 그는 모로의 교실에서 배웠으며 모로는 물론 렘브란트의 영향까지 받았었다. 그래서 그의 24세 때의 작품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녀들> 등을 보게 되면 무서운 묘사력을 지녔던 루오이다. 루오는 단연 그 묘사에서 벗어나 대담한 필치와 색면(色面) 처리들을 자유롭게 표출하는데 이는 보다 더 차원 높은 경지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受難(수난)에서(풀에 샘물이 속삭이듯)

  조부모도 양친도 모두가 독실한 카톨릭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이었다. 루오의 그와 같은 가정 화경과 거기에다 예술적인 충동이 섞여, 그가 그리는 그리스도는 그의 인간 내부의 전부가 성화(聖畵)의 내용과 일치되면서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를 앞에 앉히고 영적대화(靈的對話)가 오가는 것이다. 달이 어김없이 닮은 마리아 상 위(위쪽 상단)에 떠 있으며 좌우의 균형을 이루어 주고 있다. 루오의 작품 앞에서는 그저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스도 안에 모여

INTIMITE CHRETIENNE

1945년 캔버스 유채 46X65Cm

파리 개인 소장

 


쟉 보노무

  쟉 보노무는 농민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이다. 백의와 푸른 하의, 그리고 붉은 띠를 두른 이 사나이는 뒤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상반신을 약간 숙인 채로 달이 떠 있는 밤에 어디론가 걸어 가고 있다. 모든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운명적이며 숙명적인 상(像)을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고독감이다. 멀리 지평선 위로 외딴 집이 한 채 서 있다. 집의 흰 벽면은 인물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붉은 띠와 지붕이 또한 색채적인 조화를 형성하면서 한층 화면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피난

  루오가 처음부터 시도한 시리즈 <피난>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그림이다. 루오는 그의 '독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피난하는 사람들, 그 모습들은 우리 세대의 모든 사람들의 상(像)이다. 사람들은 병마와 권태와 빈곤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리고, 겨우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재난이 닥쳐오며 급기야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아무 의욕이나 희망을 갖지 않은 피난자들은 얼굴을 숙이고 힘없이 걸어야 한다. 뒤를 돌이켜볼 여유도 없이,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행복따위는 잊은 채 거닐고 있다.' 저녁놀은 어느덧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희망의 별은 까마득하다.


우리들의 쟌느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나치스 군대가 프랑스로 진주(進駐)했었다. 남달리 프랑스를 사랑하던 루오의 심정은 국민들의 추앙받는 성녀(聖女) 쟌느 다르크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 작품을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조국의 영웅이라기 보다 수난받는 인간상으로 그렸다. 배경은 이 시기에 꾸준히 그린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풍경화와 같다. 주인공은 숨김 없이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조국애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작가란 때로는 그 시대의 증인이며 대변자가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 아름다운 조국애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이리라.

 


그리스도교적 夜景

  루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가장 우주적인 작품으로 보여진다. 구도는 아래 부분에서 윗부분으로 장대하게 울려 퍼졌고, 수 개의 원(圓)과 반원(半圓)의 포름이 화면 중심부에 위치해 루오 특유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내면 세계를 표출 시키는 그의 회화 언어가 그러하듯 이 그림에 등장한 배, 바다, 달, 섬, 집, 수목 등은 달빛을 받은 달밤의 자연 현상을 시각 체험대로 재현시킨 것이 아니고, 그 실체를 보는 루오의 내면적인 세계, 즉 심각적(心覺的) 진실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티베리야스 호(湖)에서의 그리스도와 제자(그림 아래 부분)가 모티브인데, 신비스러운 빛과 검은 그림자 및 무한히 크고 넓은 화면이 어떤 영겁의 세계, 영원한 정신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풍경(세 사람이 있는)

  루오는 만년에 이르자 화포에 바른 유채 물감을 나이프로 깎아 내고 다시 바르는 기법을 버린다. 따라서 화면은 울룩불룩하고 터치 자국이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다. 중기 작품의 특색인 문지른 듯한 색의 투명감은 없어지고 '용암(熔岩)과 같은 중후한 색채 덩어리(P. 크르테온)'가 조형의 수단으로 화한다. 색채는 선명하고 밝으며 따라서 건강하다.

  이와 같은 분명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조형 의지는 그의 기나긴 고난 끝에 얻어낸 예술 경지와 독실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세 인물을 그림 전면에 배치하고 파뿌리 모양의 성당을 그림 원경 중앙에 앉혀 하늘 나라와 인간 사회를 상징적으로 대조,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게 했다. 루오는 이 해에 보라르 가(家)와의 소송으로 되찾은 그림 가운데 315점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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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nake Charmer,1907,Oil on canvas,169 x 189.5 cm,Musee d'Orsay, Paris

   앙리 루소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뱀을 부리는 여인’입니다. 광고에 비교적 자주 사용되는 그림이기도 하지요. 이국적 분위기와 원시림이 등장하기 때문에 주로 환경단체나 여행사 등에서 많이 가져다 쓴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한 아파트 업체가 자사 건설 아파트가 환경 친화적 아파트임을 알리기 위해 이 그림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울창한 열대림에서 한 여인이 뱀을 목에 두른 채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때는 낮이 아니라 밝은 달이 뜬 한밤이고요. 뱀들은 여인의 목만이 아니라 나무에도 걸려 있고 풀밭 위에도 있습니다다. 여인이 불고 있는 것은 마술의 피리처럼 느껴집니다.  뱀들은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을 뿐,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고요함, 이국적 풍경과 시원으로 돌아간 것 같은 원시성, 그리고 무엇보다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몽환적 분위기 등은 고갱, 아폴리네르, 피카소 등이 이 그림에 열광했다는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피카소는 1908년 몽마르트르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 ‘세탁선’에서 앙리 루소를 위한 주연을 베풀기도 했는데요. 이 이야기는 조금 후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루소 자신의 상상력에서부터 출발해 그려진 그림은 아니라고 합니다. 친구이자 화가였던 들로네가, 루소를 도와주기 위해 마침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의 여행담을 그려달라고 부탁함으로써 탄생하게 된 것이죠. 한 번도 프랑스 땅을 벗어나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는 루소는, 주문을 받자 파리 시내의 식물원으로 달려가 열대 식물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루소는 유사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죠.

  그가 그린 상상의 열대 풍경 속에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항상 꿈틀대고 있어, 그림을 보는 이들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지대로 인도합니다. 이런 이유로 루소는 초현실주의자, 특히 앙드레 브르통으로부터 찬사를 들었는데, 자크 두세라는 수집가에게 루소의 ‘뱀을 부리는 여인’을 구입하라고 종용한 이도 앙드레 브르통이었다고 합니다.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들로네는 그림을 팔 때, 작품을 구입하는 자크 두세는 사후에 이 작품을 루브르에 기증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지요. 자크 두세는 이 조건을 수락했고 약속대로 이 작품은 그의 사후에 국가에 기증되었습니다.

 

 



The Sleeping Gypsy,
1897,Oil on canvas,51" x 6'7" (129.5 x 200.7 cm),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평온한 수면의 한가운데 있는 짚시 여인,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사자가 어슬렁거립니다. 이글거리는 사자의 눈과, 앞으로 다가올 그 무언가는 전혀 모르는 채 편안하기 그지 없는 집시의 얼굴의 극명한 대조... 어쩌면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는지...  생각해봅니다.

 


War, or Discord on Horseback
1894,Oil on canvas,114 x 195 cm,Musee d'Orsay, Paris

   1892년 파리의 그랑파레에서 르 살롱전이 개최됩니다. 루소는 이 해의 특별 전시에 초대됩니다. 루소의 초기 작품에세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유채화를 비롯한 연필 스케치와, 루소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참고로 보았다는 사진과 그림이 나란히 진열되고, 그 외에 루소에 관해서 쓴 여러 권의 책과 많은 참고 자료들이 큰 방을 꽉 메꿀 정도였습니다. 작품도 연대 별로 진열되어 루소의 발전 과정과 회화 세계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되었죠.

   말하자면 그림 공부 안한 일반 사람들이 꼼꼼히 그려 놓은 서투른 유형의 그림을 보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잠시 후 이 서투르고 소박한 표현에 오히려 높은 기품과 신비로운 영적 세계가 화면 저류에서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 사이에 일어난 기존 가치관의 전도와 새 가치 기준, 새 질서에의 욕구 의지는 급속한 템포로 예술 분야의 변혁을 촉구했고, 특히 유럽의 정신 세계는 세기말적인 이즘의 과잉, 사상의 혼돈이란 격랑에 휘말려 들었습니다. 회화 사상 이 때처럼 변화가 심한 때는 일찌기 없었죠. 좀 심하게 표현하면, 그들은 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것, 종전에 보지 못한 양식이라면 우선 그것에 가치를 붙여 놓고 보게 된 세상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The Boat in the Storm,after 1896,Oil on canvas,54 x 65 cm,Musee de l'Orangerie, Paris

 

  물론 루소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의식을 적재하여 일부러 치졸하고 어린이스러운 독창적인 새 양식을 창출한 것은 아니겠지만, 전 회화사를 통해 루소의 그림과 같은 양식은 세상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으며 루소 이후에도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루소가 만들어 낸 포름은 형태가 극명하게 보이는 사실주의적인 그림 같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의 현존 형태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것도 특징입니다.

   우거진 나뭇잎이나 밀생하는 풀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커다란 잎사귀 몇 개를 그려 우거진 나무로 표현하였고 풀의 모양에 있어서도 실제의 형태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그렸습니다. 열대의 밀림에 신비롭게 된 꽃도 루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며, 거기에 배치되는 하나하나의 장면도 루소의 꿈 속 같은 공상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요.  어느 미술 사학자가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에게 루소가 그린 열대 식물의 진부 감정을 위촉해 본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실존하는 식물과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회답이 돌아왔습니다. 루소는 파리 식물원에 가끔 들려 낙엽 등을 스크랩하였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자신 나름의 열대림을 창작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동부아프리카 케냐에서  코끼리, 기린, 사자, 표범, 원숭이, 들소, 얼룩말, 사슴 종류 등은 대부분이 건조한 초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반하여, 정글 지대에는 파충류와 곤충, 조류의 일부만이 살고 있죠. 그러나, 루소가 그린 밀림 지대에는 사자가 살고 있고 미녀가 숲속에서 나체로 드러누워 있는 등(dream), 밀림의 생태적인 현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머리에 떠오른 상상 속의 열대를 창착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소의 원시림은 파리 근교를 그린 풍경화처럼 잘 다듬어지고 평화로운 분위기만은 아닙니다. 수목들의 잎이나 가지는 그 형태가 아주 분명하고 질서있게, 그리고 또렷또렷하게 그려졌으나, 복잡하게 얽힌 나뭇잎들의 곡선은 그의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는 섬세하고 다양한 내면 세계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순진무구한 정신으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조형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어, 현대 원시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하나의 전형을 엿볼 수 있습니다.  


Portrait of a Woman
c. 1895-97, Oil on canvas, 198 x 115 cm, Musee d'Orsay, Paris

   루소는 1886년 이래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오면서도 전혀 주목을 끌지 못합니다. 그런 루소를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이 발굴해 냅니다. 1908년 피카소는 당시 젊은 화가들이 모여 살던 유명한 바드라 아파트에서 "루소의 밤"을 개최합니다. 그의 인간됨과 예술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멸시와 모멸을 받던 루소가 일약 파리 화단의 기린아로 알려지는 계기로 발전합니다.

  피카소가 "루소의 밤"을 열게 된 경위는 퍽 재미있습니다. 어느 날 피카소는 그가 잘 다니는 골동품 가게에서 루소가 그린 <부인상>을 5프랑에 삽니다. 피카소는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그의 화실에서 조촐한 자축 파티를 마련했습니다. 초대된 사람은 우선 세탁선 옆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피카소의 화실로 갔습니다.

   일행은 브라크, 마리로랑상, 아폴리네르, 막스 자곱, 가도루드, 스타인 등 젊은 예술가 외에 뉴욕, 함부르크,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3명의 수집가인데, 이들은 피카소의 화실에 도착하자 긴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물론 벽에는 피카소가 입수한 <부인상>이 걸려 있었겠지요. 피카소는 루소를 위한 옥좌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잠시 후 모자를 쓰고 왼손에 스텍 단장, 오른손에 바이올린을 든 루소가 들어와 앉고 자리가 무르익자 루소는 아이들용과 같은 바이올린으로 자작곡을 연주합니다.


Scout Attacked by a Tiger (Eclaireur attaque par un tigre),1904,Oil on canvas,47 3/8 x 63 3/4 in. (120.5 x 162 cm),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La Tour Eiffel (The Eiffel Tower),c. 1898,Oil on canvas,20 5/8 x 30 3/8 in.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춤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자작곡 (클레망스=죽은 첫 부인의 이름)을 연주했으며, 아폴리네르가 루소를 위한 즉흥시를 지어 바쳤는데, 장내는 그야말로 루소의 찬가로 가득찼습니다. 아마 이 밤은 가난하고 경멸받던 삼류화가 루소가 생애를 통해 받아 보는 최초의 축복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전설적인 모임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루소의 평소의 인성과 그의 재능의 우월함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자료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The Flamingoes,1907,Oil on canvas,114 x 163.3 cm,Private collection

 


Liberty Inviting Artists to Take Part in the 22nd Exhibition of the Societe des Artistes Independants, 1905-6, Oil on canvas, 175 x 118 cm,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Tokyo

 

  오늘날 루소를 환상적인 천재로, 또는 입체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기록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상과 전설, 그리고 단순화된 형태와 기하학적인 구성에 연유한 것입니다. 루소는 전위적인 젊은 화가들, 또는 시인들에게 주목을 받은데 반해 당시 화상이나 수집가들은 그의 작품에 대하여 멸시에 가까운 냉대를 보였고, 만년에 이르러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 관심을 받습니다.

  화상 보오가르, 앳데겐이 루소에게 접근한 화상이며, 뷜헤룸 우데가 1909년 루소의 개인전을 개최하여 주었는데 이 개인전은 루소가 생전 처음으로 연 개인전이고 그가 죽기 1년전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어떠한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1880년경, 이미 동화적인 정취가 풍기는 꽃이나 나무의 화면에서 그의 독자적인 세계, 즉 꿈에서 볼 수 잇는 환상과 전설과 원시성이 서식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The Representatives of Foreign Powers Coming to Greet the Republic as a Sign of Peace , 1907, Oil on canvas, 130 x 161 cm, Musee Picasso, Paris

 

   루소는 1886년에야 비로소 앙데팡당전에 <사육제의 밤>등을 출품, 처음으로 화가로서의 공식 활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루소의 회화 언어는 그 시대의 시대 감각의 과녁을 맞춘 위대한 환상의 화살이고, 그의 발언은 고향을 찾는 실향민들의 전설적인 외침이며, 그의 표현 양식은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처럼 이미지의 밀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사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Surprise! 1891,Oil on canvas,51 1/8 x 63 3/4 in. (130 x 162 cm),National Gallery, London

 

   만년에 이르러 루소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54세된 과부에게 열렬한 구애를 하였으나 매정하게 거절당합니다. 이 순정파 화가는, 그럼에도 그 매정한 여인을 잊지 못하고 비오는 날 역으로 마중나갔다가 비를 맞은 게 화근이 되어 병상에 눕게 되고 급성 폐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눈을 감습니다. 1910년 9월20일, 향년 66세였습니다. 유체는 파유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후 고향인 라바르로 옮겨졌는데,  그의 묘비에는 생전에 그를 아끼던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인 아폴리네르의 백묵으로 쓴 시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아드위가는 평화롭게 잠자며

아름다운 꿈을 즐긴다.

한사람의 친절한  뱀마술사가

갈대피리 부는 소리를 들으면서....

냇물위에, 나무 잎새위에

은색의 달빛이 빛난다,

사나운 뱀들은 밝고

황홀한 가락에 귀를 기울인다.

-아폴리네르-

 

출처] http://www.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7844&section=section4&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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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6-2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3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최대의 찬사를 받았을텐데요.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들이 참 많지요??

panda78 2004-06-2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시 제일 안스러운 사람은 고흐지요..

반딧불,, 2004-06-2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져요.마져..
고흐...볼수록 좋지요??

 

 


Portrait of Joseph Brummer ,
1909, Oil on canvas, 116 x 88.5 cm (45 5/8 x 34 3/4 in.)Private collection

  루소는 1844년 프랑스 마옌주 라발에서 가난한 양철공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리마르 중학에서 데상과 성악으로 상을 받은 일 이외에는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학생으로 졸업했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앙제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했으며,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했습니다.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 연대 음악대에서 복무했는데 후일 멕시코 종군 시절이 꿈에서까지 자주 보인다고 술회한 것은 이 때의 기억 때문입니다. (떠도는 이야기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습니다.

  "51연대 생환"이란 작품을 그려 양데팡당 전에 출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루소가 실제로 멕시코에 출전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루소가 입대한 해는 멕시코에 파병한 지 1년이 지난 후이고, 따라서 루소는 멕시코에 갔다 돌아온 병사들로부터 멕시코에 관한 이야기만을 듣고 "51연대 생환"을 그렸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루소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나돌고 있지만 하나 하나 따져나가면 확실한 사실로 남아있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더우기 루소의 전반 생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으며, 루소 자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Combat of a Tiger and a Buffalo, 1909, Oil on canvas, 18 1/8 x 21 5/8 in. (46 x 55 cm), Hermitage, St. Petersburg


   그는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의 사망으로 제대한 후, 모친 곁에 있으면서 파리의 어느 집달리 서기로 있다가 , 71년 첫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연고지에서 파리시 입시세관직원이 됩니다. <세리 루소>라는 통칭은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25년이란 긴 세월을 근속, 49세가 되던 해에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마침내 세관을 그만 둡니다. 루소는 매달 받는 연금 50프랑만으로는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어, 공예 학교에 나가 소묘도 가르치고 그의 화실에서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는데요. 그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Myself, Portrait-Landscape
1890, Oil on canvas, 56 1/4 x 43 1/4 in. (143 x 110 cm), National Gallery, Prague

 

  루소는 ‘자신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클레망스와의 결혼생활에서 일곱 자녀를 두었으나 다섯 명이 유아사망하는 비운을 겪었으며, 그녀마저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장성한 유일한 아들인 아나톨도 18세의 나이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혈육이라고는 딸 줄리아 하나만을 남긴 10년간의 홀아비 생활을 조세핀이라는 어느 미망인을 만나 청산하게 되었지만, 그 조세핀마저 4년 뒤에 사망하고 맙니다.

  그는 1890년 그린 ‘나 자신의 초상’이라는 자화상의 팔레트 뒷면에 크레망스와 조세핀의 이름을 써넣어 두 반려자를 순간에서 영원으로 기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더 이상의 비극과 비운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았음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어쩐 일인지 그런 운명에 대한 저주나 원한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화면은 밝고 명랑하다 못해 풍자적이면서도, 희화적으로 표현된 만화나 그래픽 디자인처럼 장식적이기도 합니다.

  아마추어가 그린 듯한 치졸하고 단순한 형태,실제성을 완전히 무시한 원근감,이질적인 색상의 대비,꿈 속에서 본듯한 몽환감 등이 어울린 그의 ‘원시림’ 계열의 작품은, 요즘 어린아이들의 레고 장난감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동심의 세상 같기도 합니다. 그 원시 밀림의 세계에서 레고에서 정형화된 사자,들소,뱀,원숭이,호랑이,붉은 태양,나부,집시여인 등이 여태 서양미술사가 시각화시킨 적이 없던 아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otic Landscap, 1908, Oil on canvas, 116 x 89 cm,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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