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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오 Rouault Georges- Henri(1871~1958)

신(神)을 찬미한 현대의 단테

 

상처를 입은 道化師

  루오의 예술은 강렬하면서도 구수한 민화적(民話的)인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상징적이면서도 설화적(說話的)인 내용이다. 그 설화 속에는 달, 구름, 도화사의 의상과 표정들이 보면 볼수록 끝이 없이 인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싶다. 앞의 두 사람은 기운없이 눈을 아래로 뜨고 있으며, 키가 작은 뒷사람은 앞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다. 상단 부분에 안면을 내보이는 인물은 누굴까? 분명 도화사는 아니다. 고달픈 인생항로(人生航路)를 말하는 듯 설화성이 있으면서도 전체가 풍기는 상징적인 효과는 또다른 별개의 예술성을 말하는 듯 하다.

 

법정에 나온 그리스도

 맑은 표정을 가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의연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남녀 각각 상기된 표정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윤곽이 다르고 인상이 다르다. 그들은 천사의 얼굴도 아니요, 사도의 얼굴도 아니다. 피고와 증인 같은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상이 험상궂게 보인다. 얼굴은 모두가 열 여섯이나 되는데, 세 사람을 빼면 열 세 사람이 남는다. 필경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태인을 그린 것일까? 혹은 빌라도 법정에 선 그리스도를 조소하는 대사제(大司祭)나 군중일지도 모르겠다.

 

나부

NU

1925년경 캔버스 유채 80X60Cm

스위스 개인 소장

 

소가족

  대작을 별로 안 그린 루오에게는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작이다. 높이만 2m가 넘는다. 원래 이것은 규도리 부인에게서 의뢰받은 다피스리를 위한 그림이다. 매우 감동적인 표현이다. 상처 입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을 두고 서로가 위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생활의 고통을 나누려는 표정은 무한한 인간의 사랑을 말해 주는 듯, 아니 보다 더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필경 루오는 이와 같은 슬픈 사연의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그것에서 인간의 참다운 행복과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聖顔(성안)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도중 한 여성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 준다. 이상하게도 그 수건에 그리스도의 상이 찍혀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면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聖顔(성안)이라고 한다. 루오는 여러 장의 성안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지극히 종교적인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뇌와 인내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해서는 중세 이래 많은 신학자들이 논해 왔다. 루오는 화가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으로 성안을 그린 것이다.

 

聖骸布(성해포)

  흑색을 주조색으로 굵은 필치, 대담한 색조 등 유니크한 작품이다. 이것은 수난의 성안(聖顔)을 그린 것으로 어느 친절한 사람(唐墨-당묵-을 선사해 준 분)에게 사례로 건네준 작품이다. 단조롭게 처리된 이 작품은 내용에서부터 풍기는 광채가 형용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신비로운 경지, 동양적인 정감, 여기에 루오의 회화성이 있으며 그 마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얼굴

  루오의 그리스도는 전능하고 영광에 찬 그리스도 상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가련한 도화사, 재판 받는 피고나 가난한 사람들과 도피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려는 고난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 상이다. 루오는 안면을 아래로 숙인 그리스도 상을 무수히 그리고 있다. 배경이 되는 넓은 공간 속에 유독 붉은 구름이 광채를 보이고 있다. 화면 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구름은 화면에서의 상징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푸른 새

  전쟁 중 연극계에서 명성을 얻은 여배우 마리아 라니가 모델이 되었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한 자세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이 미녀는 루오 자신이 화면 윗부분에 표기해 둔 바와 같이 '푸른 새'를 상징적으로 그리면서 화면을 정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새에게 노래를 시키려면 눈을 멀게 하라'는 습관이 있다. 그와 같은 속세적인 것에서 취재, 비록 새를 상징한 얼굴을 그렸지만 루오는 이를 자신의 예술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루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그의 인간상을 주제에 용해시켜 더 멀리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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