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만이, 그리고 그보다 좀 덜하지만 옹고집은 모든 기회에 억눌러서 나오지도 크지도 못하게 막아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그들과 함께 커 간다. 그리고 주둥이에 이런 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을 놓아 두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놀라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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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남겨 놓은 '거짓말에 관한 기막힌 진실'은 생각날 때마다 거듭 곱씹으며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거짓말'을 두고 벌이는 격렬한 싸움에는 거의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매번 똑같은 교훈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몽테뉴의 재치있는 말까지 끌어들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그 교훈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도 가짓말을 하는 당사자는 '세상 사람들이 제발 속아 주기를 바라는 헛된 욕망' 때문에 한사코 거짓말을 붙들고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 헛된 모래성을 더욱 높이 쌓아 올린다. 쌓으면 쌓을 수록 더욱 요란스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줄도 모르고. 거짓의 모래성을 쌓으면 쌓을수록 일반 사람들은 더욱 집요하게 진실에 매달린다. 정말로 '그것이 알고 싶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 만큼 우리의 심령을 자극하는 대상도 드물다.
몽테뉴는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거짓은 무수한 얼굴과 넓은 벌판을 갖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진실의 좁은 문을 외면한 채 거짓의 넓은 벌판으로 허허롭게 도망쳐 봐야 결국 헛수고일 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이름이 붙은 '혜경궁 김씨 사건'이 최근에 들어 또다시 폭발적인 관심을 끈다. 지극히 당연하다. 진실은 뻔한데, 아직도 당사자가 한사코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혜경궁 김씨라는 트위터의 계정주가 그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3의 인물이 그 트위터를 사용했다면? 이토록 혹독한 의심(?)을 받는 당사자는 진작에 자신의 핸드폰을 당당히 증거물로 내세웠을 테고, 그 계정을 사용한 제3의 인물이 따로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진작에 이실직고했을 게 아닌가. 혜경궁 김씨의 트위터를 다른 사람이 도용했다는 주장만큼 반박하기 쉬운 경우가 어디에 있을까. 그토록 쉬운 방법을 한사코 외면하면서까지 궁색한 변명을 자꾸만 내세우니 사람들은 더욱 더 '거짓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을 안쓰럽게 바라보게 된다.
작년 2월쯤에도 이와 똑같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oren/9165803) 그 때 내가 겨냥했던 대상들은 탄핵을 코 앞에 두고도 진실을 한사코 외면하고 거짓으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 막말을 일삼던 대통령 변호인단의 몇몇 변호사들, 우병우, 인명진, 김문수 등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때 쓴 글이 궁금해서 다시 읽어 봤더니, 똑같은 제목의 글을 그대로 베껴 놓아도 좋을 만큼 '오늘날의 상황'에 너무나 잘 들어 맞아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는 그때 인용했던 마키아벨리의 문장들조차 하나도 버릴 게 없을 정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하는가 보다. 그때 쓴 인용문을 고스란히 반복해서 재인용한다.(잠시나마 과거를 회상할 겸 인용문에 덧붙였던 '나의 생각' 부분까지 그대로 살렸다.)
사람이 취할 현명한 태도의 하나는, 상대에 대해 위협하는 언사를 쓰거나 모욕하는 말은 절대로 삼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다고 해서 적의 힘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협하는 말은 도리어 상대를 더 조심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고, 모욕을 하면 점점 더 분격을 돋구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을 곯려 주려고 마음 먹게 하는 결과가 된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 (중략)
이 점에 대해서 아시아에서의 유명한 예를 들기로 하겠다 …… (중략)
위의 사실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대개 군대의 명지휘관이라든가 뛰어난 정치가란, 자기네끼리나 적을 향하고 있을 때나, 시민이나 병사들이 이 같은 모욕이나 욕지거리를 내뱉는 일이 없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해 두는 법이다. 그것은, 적을 향해 이런 언사를 사용하면 지금 말한 것처럼 터무니없는 변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료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다가는 이 역시 그 결과가 더 엉뚱한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누군가 뛰어난 인물이 나서서 어떤 수단을 강구해 두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어지게 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노예로 편성된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노예군이란 로마인이 병사들의 부족으로 고민한 결과 노예에게 무기를 들려서 편성한 것이었다. 그가 취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누구를 막론하고 서로가 상대를 노예 출신이라고 헐뜯는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명령한 일이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로마인은 남을 헐뜯거나 남의 수치를 비웃는 것은 지극히 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본심을 말할 때는 물론이고 농담할 때라도,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손상시키고 화나게 만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말(타키투스, 《연대기》XV,68)에 있듯이 '야비한 농담이란 그것이 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때는 더욱 가시 돋친 뒷맛을 남기는 법'이다.(406∼408쪽)
- 마키아벨리, 『군주론/정략론』, 《정략론》 제2권, <제26장 경멸, 험구를 일삼으면 미움을 산다>
(나의 생각)
역사를 살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토록 닮았을까' 싶은 대목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마키아벨리가 쓴 책이라고 다르지 않다. 『정략론』제1권 제7장에 나오는 <탄핵권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또다른 대목에서는 '우병우'를 떠올리게 만들고, 어떤 대목에서는 '인명진' 혹은 '김문수'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있다. 다음 대목이 무려 500년 전에 마키아벨리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숱한 사람 사이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
"정계에만 들어가면 재야 때의 뜻은 어디로 가 버리는지."(274쪽)
제2권 제26장의 내용을 인용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대통령 대리인단을 떠맡은 일부 변호사의 '막말'이 생각나서이다. 그들은 그게 자신들한테 얼마나 불리한지조차도 모르는 듯하다. 하기야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장본인 또한 '일찌감치 접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아직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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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향해 업신여기는 말을 자꾸 하다 보면 완전히 이긴 듯한 기분이 들거나 헛된 승리의 환상에 도취해 버린다. 그래서 우쭐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수가 흔히 있다. 이렇듯 헛된 승리의 환영에 도취하면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환영이 사람의 마음속에 깃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분수를 벗어나게 만들어 버리므로 어쩐지 미지의 훨씬 더 좋은 것이 잡힐 듯한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하다가 모처럼의 확실한 성과조차 놓치게 되어 결국은 이것도 저것도 다 놓치고 마는 결과가 흔히 있다. 이런 환영에 들뜬 사람들은 자기의 국가마저 해치는 일이 매우 많은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고금의 실례에 비추어서 상세히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론만으로는 명확하게 이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네에서 로마 군을 격파한 한니발은 카르타고로 사절을 파견해서 승리를 보고하고 지원을 구하게 했다. 이에 대한 방침이 카르타고 원로원에서 심의되었다. 개중에서도 나이 많고 현명한 시민인 한논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이번 승리를 잘 이용해서 로마와 화평을 맺도록 합시다. 싸움에 이겼다는 것을 뒷받침으로 한다면 조건이 좋으므로 화평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이 쫓다가 지고 나서 화평을 맺으려 하면 그때는 이미 늦어 버리니까요. 왜냐하면 카르타고가 로마를 충분히 격파할 임이 있다는 것을 로마에 깨닫게만 해주면 그것만으로도 카르타고인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승리를 장악한 이 마당에서는 너무 많이 바라다가 결국에 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티투스 리비우스, 《로마사》XXⅢ,11∼13) 그런데 실제로는 이 제안이 채택되지 않았다. 이렇듯 화평을 맺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카르타고의 원로원은 한논의 제안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 오리엔트를 정복했을 때 …… (중략)
1512년의 일인데, 에스파냐 군은 피렌체에 미디치 가를 복귀시킨 다음 …… (중략)
자기보다 월등하게 강력한 군대에 공격당하는 군주가 저지르는 실수 중 가장 큰 실패는 화목을 거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상대방 쪽에서 신청이 있었을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제시된 내용이 아무리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받아들이는 쪽이 유익한 조건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리자의 몸의 일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니발은 영광과 함께 16년간을 지낸 이탈리아를 뒤로 하고, 카르타고인의 요구에 따라 조국 구제를 위해 귀국해 보니, 눈에 비친 것은 하스드루발과 시파쿠스의 패전이고 누미디아 왕국의 상실이었다. 그리고 카르타고인은 그 성벽 속에 갇혀 꼼짝도 못하고, 겨우 구제의 길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은 한니발 자신과 그 군대밖에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의 조국이 최후의 막다른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덮어 놓고 모든 것을 결전에 거는 것을 피하고 다른 수단을 써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조국을 구제할 길은 화평에 있지 전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자 순순히 평화를 구했다. 그런데 그의 화평 신청이 로마인에게 거부되자, 패전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전쟁을 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또 진다 하더라도 적어도 명예로운 패배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니발같이 기력이 충실하고, 또 무패의 군대를 이끈 명장이라도 패전을 당하면 자기 조국이 노예의 처지로 떨어지고 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쟁보다도 우선 화평 공작을 구했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한니발 정도의 기력도 없고 그의 경험의 발꿈치에도 못 따라가는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사람이란 자기의 희망을 어느 선에다 멈추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실패해 버리는 법이다. 그리고 제 실력을 냉정하게 측량해 보려고도 하지 않고 한없는 희망에 기대를 걸다가 결국은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408∼411쪽)
- 마키아벨리, 『군주론/정략론』, 《정략론》 제2권, <제27장 너무 과하게 바라다가는 본전도 못 찾게 된다>
(나의 생각)
마키아벨리가 달아놓은 제목만 봐도 너무 웃긴다. "너무 과하게 바라다가는 본전도 못 찾게 된다"니. 하기야 지금이라도 너무 늦지는 않지 않을까, 이리저리 재면서 뒤늦게 '본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뭐? 아직도 아니라고?
(나의 생각_추가)
한니발의 사례를 날카롭게 통찰한 이 대목은 이재명 지사에게는 특히 뼈아프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판단하거나, 또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도지사직을 유지하거나, 최악의 경우라도 핍박받는 정치인으로서 훗날 재기를 도모할 수 있다'는 오판으로부터 비롯된 듯한 '지금까지의 대응'이 얼마나 한심스럽고 어리석은 짓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마키아벨리의 말대로, 한니발 정도의 기력도 없고 그의 경험의 발꿈치에도 못 따라가는 '혜경궁 김씨네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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