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01 | 202 | 20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알라딘 중고매장 일산점 오픈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많은 유쾌한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좋은 일로 수고가 들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순수한 쾌락은 아니다. 거기에도 상당히 힘든 그 자체의 불편이 있다.
 - 몽테뉴

 * * *

(이 글에서 말하는 '오늘'은 2013. 9.18. 수요일이다. 글을 올리는 시점이 '오늘'을 따라가지 못했다.)

오늘은 난생 처음으로 '알라딘 중고서점'을 가본 날이다. 그런데 중고서점을 한번 둘러본 것만으로도 오늘은 괜히 <운수 좋은 날>처럼 느껴지는 하루였다.
현진건의 같은 제목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나도 오늘은 김첨지마냥 아침부터 거듭 일거리가 생겨 '인력거'를 끌듯 자동차를 이리저리 몰았다.

소설 속 인물인 김첨지가 아픈 아내를 위해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사먹이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인력거를 끄는 일에 매달렸던 것과는 달리 나는 한가한 아내를 조수석에 태우고 즐거운 '휴일 나들이'를 나서느라 바빴기 때문에 '운수 좋은 하루'의 결말이 소설처럼 뒤집히지는 않는다. 나는 '운수 좋은 날' 중고책 다섯 권을 무척 싸게 사 왔을 뿐 아니라 사실 돈도 한 푼 들지 않았다. 헌책 다섯 권을 결제할 때 '회원이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알라딘 적립금'으로 결제를 도와드려도 되냐고 묻는 게 아닌가. 공짜로 다섯 권의 책을 건져온 느낌이다. 저녁 또한 (추석 연휴 직전이어서 많은 음식점들이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6,000원짜리 '양평 해장국'으로 아주 맛있게 해결할 수 있었다.

다시 '오늘 아침'으로 되돌아 가자. 어쨌든 나는 최근에 개봉된 영화 <관상>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소문을 진작에 듣고 있었던 터여서 연휴 첫날인 '오늘'은 그 영화도 봐야 했고, 저녁 해가 넘어가기 전에 초가을의 하늘과 구름과 저녁 노을을 즐기기 위해 '하늘공원'에도 올라가야 했다. 기나긴 휴일이 기다린다는 핑계로 지난 새벽에 벌어졌던 맨유와 레버쿠젠이 겨루는 챔피언스리그 생방송까지 기어이 챙겨봤던 덕분에 잠이 제법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하는 휴일의 아침 밥상을 비교적 제때 날랐고,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차려낸 점심 식탁에서도 부지런히 숟갈을 거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그때 혹시라도 김첨지가 바쁜 하루를 시작하며 느꼈던 '불안' 대신 내게는 어떤 '기대'라도 끼어들 틈이 있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건 별로 찾을 겨를도 구석도 없었다.

휴일 아침 두 끼니의 식사 준비와 설겆이 등으로 아내가 조금 바빴던 터라 영화 시작 시간 10분을 남겨 두고 부리나케 집을 나섰지만, 다행히 엎드리면 코닿을 거리쯤에 있는 영화관인 백석역 메가박스에 5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고, 팝콘과 콜라까지 챙겨들고 지정된 좌석에 착석하니 1분의 오차도 없이 제시간에 제자리에 앉은 셈이 되었다. 광고 몇 편에 뒤이어 곧바로 <관상>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조선시대로 빠져들었고, 문종과 단종과 수양대군과 김종서를 만났다. 그리고 책으로만 읽었던 '호랑이 김종서가 쇠방망이를 맞고 쓰러져 죽는 광경'을 인상깊은 영상으로 처음 보았고, 사람의 운명이 '관상'에 따라 미리 정해진 것처럼 전개될 수도 있으리라는 그럴듯하고도 흥미로운 얘기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감상하고 나왔다.

영화관을 나서며 다음에 가볼 데가 갑자기 오리무중이 되었다. 극장을 나오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데다가 날씨가 늦여름 오후처럼 몹시나 무더웠기 때문에 '하늘공원'을 가볼 욕심이 냉큼 달아났기 때문이다. 몇 년전 이맘때 가봤던 하늘공원엔 코스모스가 만발했었고 하늘의 구름은 물론 저녁노을까지 무척이나 아름다웠었다. (http://blog.aladin.co.kr/oren/5096007) 그래서 느닷없이 발길을 돌려 찾아 나선 곳이 마침 새로 문을 열었다는 '알라딘 중고서점'이었다.

며칠전 우연히 알라딘 '알림창'을 통해 일산에도 중고서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알라딘 소식글(http://blog.aladin.co.kr/aladinservice/6585554)을 보자 말자 '알라딘 중고서점 일산점'의 멋진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틈이 나면 저길 꼭 가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던 데다가, 마침 그 글을 읽으면서 미리 살펴 두었던 몇 권의 중고책도 살겸, 아침에 집을 나서며 카메라 가방도 미리 챙겨 놓았던 터라 나름 중고서점을 방문할 준비는 별로 소홀한 점을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결정적으로는 그 시간에 달리 갈 데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온라인 서점 알라딘을 이용한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알라딘을 알기 전에는 책과 담을 쌓다시피 지내온 시간도 많았지만 알라딘 덕분에 적잖은 책들을 발품 팔지 않고 집이나 사무실에서 편리하게 구매해 온 것도 사실이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사들인 책의 9할 이상은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한 채 '눈으로' 구경만 하고 '온라인'으로 주문한 것들이다. 그만큼 어느새 인터넷 구매가 자연스런 일이 되었고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으나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늘 있었다. 그건 바로 '실물 확인' 없이 책을 사는 데 뒤따르는 '표현하기 힘든 불편한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책은 분명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물건이다. 각양각색의 표지와 제목과 내용들로 만들어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사들이는 것은 김빠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릇 책은 서점에 가서 직접 만져보고 펼쳐보고 고를 일이며, 책의 내용은 물론 종이의 질과 활자 모양과 책의 맵시와 냄새까지도 맡아보며 어딘가에 박힌 그 책의 가격까지 고민한 이후에 매대로 가져갈 일이고, 서점 직원에게 내가 고른 책들의 책값을 치르고 마침내 내 손에 건네받을 때가 '책을 사는 즐거움'을 진정으로 맛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알라딘 서점을 통해 온라인으로 책을 사들이는 습관은 정작 책을 사는 즐거움이 엉뚱한 데로 옮겨간 듯하다. 장바구니에서 책을 고르고 나서 '주문하기'를 클릭하는 순간이나 혹은 택배 아저씨가 가져온 종이 박스를 열어보는 순간이 비로소 책을 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시점으로 변했다. 어느덧 우리가 그런 순간들에 너무 익숙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서점'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쯤에서 나는 내 이야기를 '서점에 대한 회상' 이야기로 좀 더 확장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이럴 때 얘기하지 않으면 언제 또 '서점'을 둘러싼 내 오래된 기억을 꺼내 놓을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겠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나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점이라고는 구경조차 못했는데, 동네 분교에서 4학년을 마치고 읍내로 진학한 5학년때 마침내 처음으로 '서점'이라는 곳을 가볼 수 있었다. 물론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읍내 서점에서 책을 살 일이라고는 두툼한 '전과' 한 권이 고작이 아니었나 싶다. 읍내에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새학기마다 '비싼 참고서'만 줄곧 사들였을 뿐,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읍내 도서관에서 '대출'을 받아 읽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중학교땐 가끔식 값싼 '문고판' 책들과 (영어 공부도 할 겸) 얇은 빨간색 '영한대역문고'를 부지런히 사서 읽으며 이름난 작가와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좀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서점과의 인연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듯하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안동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스쿨서점'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소문도 들었던 것 같다. 아니다. 지금 찾아보니 2011년에 문을 닫았단다. 안타까운 소식이다.) 언제나 신학기만 시작되면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을 때가 많았는데, 나 또한 시골에서 부모님이 보내 주신 얼마간의 용돈으로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만 부지런히 사들일 줄 알았지 다른 책들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래도 가끔씩 빼곡히 꽂힌 '어른들의 책'을 훔쳐보다가 그 때 사들였던 책도 있긴 있었다. 전10권에 달하는 두툼한 <한국단편문학전집>과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 교수가 쓴 <불확실성의 시대> 등이 그런 책들이었다.

고1때 사들인 <한국문학전집>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학업을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고 나면 그 책을 읽는 재미에 객지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어느새 멀리 달아나곤 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나는 그 단편들을 몇 달 동안이나 즐겁게 읽었고 고1 여름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다 읽었던 듯하다.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내용이 다소 어려웠던 <불확실성의 시대>는 지금도 갖고 있는데 오늘 살펴보니 청조사(靑潮社)라는 출판사에서 1978년 10월 7일에 발간한 책이고 가격은 무려 2,500원이다.

 - 1978년에 사서 읽었던 『불확실성의 시대』. 출간된 지 35년이 지났지만 이 책은 아직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오래전에 이미 케네디 대통령 취임연설문을 쓰기도 했던 저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자문으로도 일했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마침내 서울로 올라와서는 학교앞 서점과 종로서적이 내가 즐겨찾는 서점이었는데, 서점의 용도는 여전히 '대학교재'를 사는 일에 머물렀다. 이 무렵부터 나는 청계천에 '헌책방'이 있다는 걸 알았고, 가끔씩 시간이 날 때마다 '중고 대학교재'라도 좀 더 싸게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청계천 골목길을 제법 찾았던 듯하다. 그리고 가끔씩은 새 책으로는 도저히 살 엄두가 나지 않는 '전집류'의 대작들을 싸게 사 볼 욕심으로 부지런히 쏘다녀 봤지만, 꼭 이빨이 빠진 전집류가 많아서 구매를 포기했고, 상태가 좋은 책들은 생각보다 책값이 너무 비싸 구매를 포기한 경우도 많았다.

결국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 대학 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고, 그러다 군대에 입대하면서 나는 마침내 '책의 사각지대'에 유폐되고 말았다. 기회는 늘 '위기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 무렵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삼성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이 우리집에 있었다는 것인데, 직장생활을 하던 형이 큰 마음을 먹고 거금을 들여 새 책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땐 주로 그 어려운 책들을 붙잡고 씨름했었는데 그래도 그 당시 힘겹게 읽은 책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 같다.(http://blog.aladin.co.kr/oren/4070322)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서점'과 점점 멀어지는 일 뿐이었다. 그나마 '독서'를 강조하고 '자기계발'을 부추기는 여러 글들에 자극받아 '구내서점'에서 '업무'와 관련된 책들도 가끔씩 사 보고, 또 '한 시대를 풍미하는' 베스트셀러들도 심심찮게 사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내 아이들이 점점 더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부터는 '아이들 그림책'을 사주기 위해 '동네 서점'을 들르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산의 주엽동에 있는 '정글북'이라는 서점에 자주 들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2003년에 알라딘 서점에 정착하고 부터는 주로 '온라인'으로만 책을 구매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난 10년 동안 오프라인 서점엘 전혀 가보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래도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는 재미는 언제나 즐거운 기억으로만 남았고 나쁜 기억을 안겨준 일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동안 광화문 교보, 강남 교보는 물론, 변두리에 있는 서점으로는 연신내 문고, 노원 문고도 가봤고, 동네 서점도 몇 군데 가서 이 책 저 책을 구경도 하고 사보기도 했지만, 딱 한 곳 '중고서점'이나 '헌책방'은 가본 일이 없었다. 그동안 알라딘 중고서점에 대한 소식도 접했고 많이들 이용한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내겐 그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면 족했고, 오프라인 서점은 가끔씩 구경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던 내가 마침내 일산의 중심부에 떡하니 문을 연 '알라딘 중고서점'을 찾기에 이르렀으니 나로서는 다소 감개무량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일산에서 이미 오래 살았고(큰 아이가 여섯 살때 서울에서 이사왔는데 그 녀석이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또 여기서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만큼 나에겐 고향 말고는 이곳이 가장 오래 살고 있는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알라딘을 기웃거린지도 10년이 되었는데, 그 익숙한 알라딘 로고를 내가 사는 동네에서 느닷없이 만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마치 오래 사귀던 친구가 갑자기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온 느낌이다.

이쯤에서 내 얘기는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본업인 '알라딘 중고서점 방문 후기'로 되돌아 가자. 우선 풍부한 사진을 곁들여서 얘기를 이어나가는 게 사리에 맞지 싶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우선 구경부터 하고 보자.


 - 지하1층에 주차한 이후 일부러 '계단'을 통해 3층까지 걸어 올라왔다.
    어떤 꼬맹이가 출입구에서 반갑게 맞아 준다. '여기'는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니 '어서 오라'는 눈치다.





 - 이동경로를 따라 '작가들'의 인물화와 작품 속 '구절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서 첫느낌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작가들이 마중을 나온 듯하기도 하고, 서점에만 들어서면 이들을 금방이라도 만날 수 있을 듯한 착각이 든다.



 


 - 어느새 꼬마가 여기까지 와서 '알라딘 중고서점 일산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 지상 3층과 4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둥근 건물형태에 맞춰 2개 층을 툭 터 놓으니 개방감이 그만이다. 





 - 서점 한 켠에 마련된 책 읽는 공간. 이 곳 벽면도 작가들의 차지이다. 





 - 알라딘 only 코너. 말 그대로 '알라딘 단독상품'인 머그컵과 연습장과 북스탠드 등을 모아 놓은 곳이다. 
 





 - 계단으로 올라온 통로와 반대편에 '외부 계단'을 통한 출입구가 또 하나 있어서 개방감을 더했다. 





 - 가지런히 꽂혀 있는 빼곡한 책들과 책을 살펴보는 사람들. 겉모습만 봐서는 도무지 중고서점 같지가 않다.





 - 한쪽 벽면은 둥근 유리벽면이다. 이렇게 그림이 좋은 서점은 처음 본다. 





 - 둥근 벽면을 따라 자연채광을 넉넉히 느껴 볼 수 있어서 좋다. 





 - 비싸 보이는 그림책들도 적지 않았다. 





 - 중고서점의 중앙에 들어선 책꽂이는 밝은 흰색이어서 더욱 환한 느낌을 준다.





 -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책을 팔러 온 사람들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 윗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내려다본 풍경.  





 - 보면 볼수록 개방감이 극대화된 공간이 시원스럽다. 





 - 윗층 한 켠에서 책을 읽는 어린이. 셔터를 여러번 눌렀는데도 도무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 창 밖으로는 미관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비오는 날 혹은 눈 내리는 날에 여길 와도 좋겠다 싶다. 




 

 - 윗층에는 주로 '어린이 책'들이 대부분이다. 





 - 벽면 한 쪽에 붙은 애서광 체크 리스트. '새책방보다 헌책방에 더 관심이 많은 것'도 애서광의 잣대에 포함된다.



 


 - 유독 서점에서는 '여자들'이 더 예뻐 보인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




 

 - 음반과 DVD 코너. 



 

 - 책 읽는 모습이 아름답다.  





 - '철학' 코너에 꽂혀 있는 책들. 





 - '글읽기/글쓰기' 코너에 비치된 책들. 





 - 알라딘에서 가끔씩 봐온 낯익은 책들도 눈에 띈다. 





 -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도 보인다. 그 고객은 저 문을 통해 방금 나갔을까?
 




 

 -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본 듯한 '글간판'도 보이고, 그 아래에서 책 읽는 모습도 눈에 띈다.




 

 - 이 건물은 마치 알라딘 중고서점을 위해 지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 윗층 유리벽면에서 반대편 쪽으로 바라본 모습.




 

 - 품절도서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



 - 예쁜 책 두 권이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누구 손에서 나와서 누구 손으로 건너갈지 궁금하다.





 - 3층 엘리베이터 입구. 구경을 마치고 '중고책'을 사들고 나가려다 잠시 멈췄다.





 - 그리고, 작가들의 모습과 그들이 남긴 작품 속 '구절들'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접힌 부분 펼치기 ▼

 

 -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김용택 시인 




 - 조세희 작가




 - 소설가 이문열




 - 소설가 공지영 




 - 시인 고은




 - 소설가 최인호




 - 소설가 이외수




 - 소설가 박범신




 

 - 소설가 이문구




 - 시인 기형도




 - 시인 김수영




 - 시인 신경림




 - 소설가 김승옥




 - 이해인 수녀님



 

펼친 부분 접기 ▲



 - 서점을 나와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되올라 왔다. 바깥 풍경도 빠트리면 서운하다.
    미관광장으로 통하는 횡단보도를 건너 광장 초입에서 바라본 풍경.




 

 - '알라딘 중고서점' 간판이 보이지 않아 미관광장 안쪽으로 조금 더 멀리 물러나서 찍은 사진.





 - 더욱 더 멀리 물러서서 바라본 풍경.





 - 다시 다가와 턱밑에서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 둥근 유리벽면 안쪽으로 책들이 보인다.

    알라딘 중고서점 덕분에 커피숍과 KFC가 덕 좀 봤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여기서부터는 잠시 다른 얘기를 조금 해보고 싶다.

올해 초 알라딘 서재에서도 뜨거운 화제에 올랐던 '도서정가제 논란' 덕분에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가 '출판계와 서점계의 불황 문제'였다. 그건 또 어제 오늘의 일만도 아닌 줄 익히 짐작해 왔던 일이다. 그런데 자꾸만 사라지는 '새책방'과 '헌책방'을 뒷전으로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이 나날이 번창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그리고 어느덧 '헌책방'의 대표주자로 나선 '알라딘 중고서점'에 깨끗한 새 책들이 가득 넘쳐나는 이유 역시 나는 잘 모르겠다. 일부에서는 그것이 '출판계의 눈물겨운 현실'을 일부 반영하고 있는 기형적인 유통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던데 자세한 건 업계 종사자들이나 알 일이고, 그들이 그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고 또 해결해 나갈 문제가 아닌가 싶다.

비록 알라딘 중고서점은 예외로 하더라도,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자꾸만 하나둘 사라지는 현실이 아무리 서글프더라도 이미 그 흐름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임을 모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해결불가능한 일을 앞두고 한탄만 해서는 곤란하다. 한가지 명백히 긍정적인 사실 하나로부터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새책이든 헌책이든 '책'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곁에서 계속 읽혀지고 싶은 존재로 남을 것임은 분명하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떠맡은 '헌책방' 본연의 순기능을 오래도록 제대로 발휘해 줬으면 좋겠다.

알라딘 중고서점 일산점은 내 생각으로는 위치도 좋고 내부 시설도 참 좋아 보인다. 위치로만 따지만 일산의 가장 중심부에 잘 자리잡았다고도 할 만하다. 그곳은 미관광장을 중심으로 라페스타와 웨스턴돔이 그 양쪽에 있기 때문에 평일은 물론 주말에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관광장에서 한강 쪽으로 육교 하나만 건너면 드넓은 호수공원이 곧바로 이어지기도 하고, 정발산 쪽으로 길 하나만 건너면 일산의 대표적 문화공간인 '고양 아람누리'도 있다. 알라딘 중고서점 일산점이 일산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빠르게 자리잡아주길 바라고, 또 오래도록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책방이 되길 기대해 본다.

 * * *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9-20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까운 책방 즐겁게 마실을 다니면서
아름다운 이야기 한껏 누리셔요.

책방들이 서로서로 사이좋게 어울릴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oren 2013-09-20 10:57   좋아요 0 | URL
가까운 곳에 즐거이 찾을 만한 책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모든 책방들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늘 가득했으면 좋겠다 싶어요.

2013-09-20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0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2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3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09-20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대구보다 훨씬 넓고 책도 엄청 많습니다.^^
한번 가보고 싶게 만드는 곳입니다.ㅎㅎ
대구도 일산점처럼 변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추석은 잘 보내셨어요?
저는 한국에서 보내는 첫 추석인데 어제 처음으로 보름달 보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즐거운 저녁 되시고 늘 건강하세요.*^^*

oren 2013-09-20 23:06   좋아요 0 | URL
후애님께서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추석을 보내셨다니 놀랍군요.
저는 50년 이상을 이 땅에서만 추석을 보냈는데 말이지요. ㅎㅎ
이번 추석은 연휴가 길어서 정말 늘어지게 잘 보내고 있답니다.
댓글 감사드리고, 후애님께서도 늘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3-09-2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헌 책과 친하지 않아요. 제가 책의 첫 주인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니 그것보다 새 책의 그 빳빳한 종이를 좋아해서
헌 책을 사 본 것은 시집 한 권밖에 없네요.
하지만 지금 여러 사진을 보니 헌 책이 아니라 새 책 같네요. 꼭 한번 구경 하고 싶게 만드는 사진들입니다.
님의 정성 덕분에 저처럼 많은 사람들이 헌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들을 확대해서 보니 참 멋집니다!!!!!!! 책의 진열은 보고 보고 또 보게 만듭니다.

이거, 추천 백 개 누르고 싶은 마음으로 댓글을 남깁니다.
(다시 봐야지...ㅋㅋ)

oren 2013-09-23 11:1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빳빳한 새 책을 좋아합니다. ㅎㅎ 그리고 저 역시 헌 책을 산 적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래도 헌 책은 또 그나름대로 독특한 매력이 있더라구요. 옛날 도서관에서 빌친 책들에서 발견되는 '책 읽은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구요. 또 가끔씩 비싼 책들을 구입하기 망설여 질 때, 그런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것보다 헌책방에서 '싼 값에' 사서(물론 잘 찾아내야 되겠지만요) 온전히 내 것으로 소유할 수도 있고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헌 책방에서 사는 책들이 거의 대부분 '새 책'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깨끗하다는 거에요. 어떤 책들은 '읽은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든 경우도 있던데, 그런 책들은 '게으르게' 책꽂이에서 낮잠을 자다가 버려길 게 아니라, 헌 책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새로운 주인도 만나고 자기 본연의 역할을 되찾는 것도 좋겠다 싶더라구요. 암튼 pek님께서도 헌 책방에서 '새 책' 같은 좋은 책들 만날 수 있길 바랄께요~

야클 2013-09-22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
서점탐방기가 거의 꼼꼼한 보고서 수준이네요.ㅋㅋ
저도 어제 연대앞 알라딘 중고점 가서 구경도 하고 DVD 몇 개 사왔지요. 예전의 헌책방 같은 느낌은 거의 없고 깔끔한 북카페 같은 느낌이었어요. 많은 손님들을 보니 알라딘 주요 매출원이 점점 중고점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던데요? ^^

oren 2013-09-23 11:25   좋아요 0 | URL
야클님도 기나긴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사진을 많이 찍어 올리다보니 거기에 대한 설명글들을 빼놓기도 어려워 '후기'가 너무 길어졌어요.

저도 이번에 중고서점을 가 보고 느낀 점인데, 중고서점의 규모도 놀랄만큼 커졌고, 책들도 많이 갖춰놓고 있을뿐 아니라, '새 책' 같은 느낌을 주는 책들이 너무 많은 데 더더욱 놀랐어요. 잘만 고른다면 새 책이나 다름없는 책들을 싸게 살 수도 있구나 싶은데, 한편으로는 그런 새 책들의 '유통경로'를 따져보지도 않고 마냥 좋아라 할 수 있는가 싶기도 하더라구요.

야클 2013-09-23 11:36   좋아요 0 | URL
출판업계나 글쓰는 분들에겐 전혀 Good news가 아니겠지요. 경제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새로운 재화의 생산이나 공급'과 무관하니까요. 책 읽는 사람들에겐 거의 새 책이나 다름 없는 책들을 약간은 싼 값에 사 볼 수 있겠으나 '초'장기적으로는 글쎄요.... ^^

oren 2013-09-23 11:4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중고책의 유통속도'가 빨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잠시 생각해 봤더니,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쓴 경제학 명저 속 내용 한 대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맨더빌 박사가 쓴 『꿀벌들의 우화』는 도덕적인 철학자였던 애덤 스미스의 책『도덕감정론』에서는 극구 부인되고 비판받았지만, 케인즈에 와서는 오히려 '극구' 두둔받았다는 점이 정말 흥미롭더라구요. 다소 긴 내용을 인용해 봅니다.

* * *

그래서 교훈은 이렇다

『꿀벌들의 우화』의 본문은 풍자적인 시 -「웅웅거리는 벌집, 일명 정직하게 된 악한들」인데, 거기에는 저축을 하기 위해 모든 주민들이 갑자기 사치스런 생활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정부는 군비를 축소할 생각을 하게 된 어떤 번영하는 사회의 놀랄만한 궁상(窮狀)이 묘사되고 있다:

이제는 어떤 고위고관(高位高官)도
쓰기 위해 빚지고 살기는 싫어
하인들 제복은 전당포에 걸리게 되고
마차도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멋진 말(馬)도 무더기로 팔아버리고
별장도 다 팔아서 빚을 갚았다.
소비(消費)는 사기(詐欺)처럼 멀리하고
외국에 파견한 군대도 철수했다.
외국인의 어떤 존경도
전승(戰勝)의 헛된 영광도 일소(一笑)에 부치며,
오직 국가만을 위해
정의와 자유가 위태로울 때 싸운다.

오만하던 클로(Choloe)는

진수성찬(珍羞盛饌)도 줄여버리고
튼튼한 옷을 사철 두고 입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 -

자아, 영광스러웠던 벌집을 상기(想起)하고,
정직(正直)과 상업(商業)이 어떻게 화합했는지를 보라.
외화(外華)는 가버리고, 나날이 여위게 되어
옛 모습 찾을 길 없다.
무릇, 떠나가 버린 것은 다만
해마다 큰 돈을 쓰던 자들만이 아니다.
그들에 기생(寄生)하던 무리들마저
날마다 [큰 돈을 쓰던 자들처럼] 떠나야 했다.
그들이 다른 업(業)을 찾아도 소용없어,
어디로 가나 재고(在庫)가 넘쳐흐르고,
토지와 집값은 떨어지고,
테베(Thebes)의 성벽과 같이
연극을 위해 세워진 성벽을 가진
황홀한 궁전에는 셋집 광고가 붙어 있다. ······
건축업은 송두리째 몰락하고,
장인(匠人)들은 일자리를 잃고 있다.
예술(藝術)로 이름난 화공(畵工)도 없고,
석공(石工)도 조각가도 이름이 없다.

그래서 「교훈」은 이렇다:

도덕(道德)만 가지고는 국가를 훌륭하게 하지 못해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재현하는 국민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직(正直)에 대해서나 도토리에 대해서나.

- 존 메이나드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中에서

yamoo 2013-09-2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도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안가본 곳 3곳입니다. 일산점은 무슨일이 있어도 10월이 가기 전에 가볼 예정입니다. 3일 개천절날 갈까 생각중이에요. 오렌님의 사진을 보니 둘러보고 싶은 충동이 계속 되어요~~ㅜㅜ

정말 꼼곰한 후기 잘 봤어요. 사진이 정말 시원시원 한 걸요!

oren 2013-09-26 00:26   좋아요 0 | URL
yamoo님은 알라딘 중고서점 광팬이시군요. 역시 '애서광' 답습니다. ㅎㅎ
yamoo님께서 모처럼 일산점에까지 손수 왕림하시는데, (제가 하필 그날 운동 약속이 있어서) 미처 마중조차 나갈 수 없음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길 바랄께요~

transient-guest 2013-10-23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25의 글인데, 저는 이제서야 봤네요. 글을 읽으면서 간만에 한국으로 여행을 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산점은 한번 가봤는데, 사진으로 보니 또 다른 멋과 느낌이 있네요. 언젠가 조금 한가한 스케줄로 한국에 가면 일산점에 가서 책을 사고 근처의 카페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네요.ㅎ

oren 2013-10-23 11:44   좋아요 0 | URL
언제 한국을 다녀가셨길래 알라딘 중고서점 일산점까지 다녀가셨다는 말인가요? 뒤늦게라도 제 글을 보시고 한국으로 여행을 다니신 기분을 느끼셨다니 제가 다 즐겁습니다. 나중에라도 또 한국에 오실 땐 책만 사시지 말고 '한가한 시간'까지도 꼭 맛보고 가시길 바랄께요~
 

 

 
(밑줄긋기)

 

플루타르크의 저서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967쪽)


 - 나는 몽테뉴의 저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심한 본 것을 나는 몰래 빼앗아 온다."


한 공장

인간의 행동을 검토하는 자들은, 그 행동을 하나의 동일한 전체 모습으로 맞추어 보려고 할 때 가장 당혹하게 된다. 왜냐하면 행동들은 이상하게도 대개 서로 모순되어, 도무지 그것이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351쪽)



 

내 사색의 목표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 사색의 목표는 나 자신밖에 없었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살펴보고 연구해 본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일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에 적용해 보기, 또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자신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쓸모가 많지 않은 다른 학문에서와 같이, 내가 내 배움의 깊이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배운 바를 남에게 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실수하는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만큼 어려운 묘사도 없으며, 그만큼 유용한 일도 없다. 이것을 밖에 내놓으려면, 그만큼 더 맵시 있게 잘 그려서 더 질서 있게 정리해야만 한다. (399쪽)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세상 사람들은 늘 서로 상대편을 쳐다본다. 나는 내 눈을 내 속으로 돌리며, 시선을 거기에 처박고, 그 속을 부지런히 둘러본다. 모두들 자기 앞만 쳐다본다.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밖에 일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고찰하며 검토하며, 나를 맛본다. 다른 자들은 그들이 잘 생각해 본다면, 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늘 앞으로 간다.

아무도 자기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페르시우스)

나는 내 속에서 굴러다닌다. (727∼728쪽)



 

우리의 병폐

우리의 병폐는 우리 밖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우리들 속에 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병들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병을 고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일찍부터 자신을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 가서 그 많은 상처와 병폐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문에 우리는 철학이라는 대단히 감미로운 약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약들은 치료되고 난 뒤에 밖에는 유쾌한 맛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 약은 쓸 데에도 유쾌하며, 동시에 병을 고쳐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네카가 편지글에서 한 말이다. (759쪽)




우리 따위

우리의 개인 생활을 자신에게밖에 보여 줄 데가 없이 살고 있는 우리 따위는, 주로 우리들의 행동을 검열하기 위해서 우리들 속에 모범을 세우고, 그것으로 행동을 심사하며, 거기에 따라서 우리를 칭찬하기도 하고 정제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를 판결하기 위해서 내 법률과 재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데보다도 거기에 호소한다. 나는 남의 의견을 잘 따라서 내 행동을 억제한다. 그러나 내 의견에 의해서밖에는 행동을 확대시키지 않는다. 그대가 비굴한지 잔인한지, 믿음직하고 착실한지 신앙이 깊은지, 아는 것은 그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한다.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결에 매이지 마라. 그대 자신의 판결에 매여라. "그대가 자신에게 하는 판단을 그대는 사용해야 한다."(키케로) - "양심이 자신에게 해 주는 악덕과 도덕의 증명은 한층 더 막중하다.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키케로) (887∼888쪽)



 * * *

 


방귀와 똥

그런데 웬말인가? 내가 사물들을 사실보다 다르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나는 참을성 없음을 한탄한다. 무엇보다도 이 참을성 없음은 옳은 자에게서건 그릇된 자에게서건 매한가지로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형태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은 속 좁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항상 있는 어리석은 수작을 가지고 짜증내며 분개하는 것보다 더 심하고 고질적이며 괴퍅한 일도 없다. 이런 심정은 주로 우리 자신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날 철학자(헤라클레이토스를 말함)는 자기를 고찰하는 동안 눈물을 흘릴 기회가 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7현(七賢)의 하나인 뮈손은 티몬이나 데모크리토스에 지지 않는 기분으로 있었는데, 누가 왜 혼자서 웃고 있느냐고 묻자, "내가 혼자 웃고 있는 것이 우스워서"라고 대답하였다.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수작을 나는 날마다 말하고 대답하는 것인가! 그러니 남의 생각을 따라서는 얼마나 더 자주 할까! 내가 그 때문에 꿍꿍 앓고 있다면 다른 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게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그리고 뻔뻔스럽고 부끄럼이 없는 그들의 일에 놀란다.

나는 확실하지 않은 일을 누구건 비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는 아무도 비평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내 말은 우리의 판단력이 당장 문제에 오른 자를 공격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내적 비판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속의 악덕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악덕에는 그 근본이 덜 모질고 덜 악질이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없애 주려고 애쓰는 일은 자비로운 봉사이다.

그런데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그도 역시 그 결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격에 맞는 대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하여튼 알려 준 일은 진실하고 유익하다. 우리 코가 멀쩡하다면 우리 은 그것이 우리 것인 만큼 더 구려야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와 자기 아들과 다른 한 사람이 어떤 폭력이나 부정 행위로 죄를 지었을 경우, 자기가 맨 먼저 재판소에 가서 형 집행인의 손으로 자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고, 둘째는 자기 아들을 내보내고, 마지막에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 교훈은 그 어조가 매우 고매한 것으로서, 적어도 자기 양심이 하는 처벌에는 자기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다. (1029∼1031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3-09-17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병폐는 우리 밖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우리들 속에 있다."
뭘 말함인지 알 것 같아요.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이 많아요.
자신에게 돌아오는 화살이 있다면 그 원인을 남에게서 찾지 말고 자신에게서 찾으면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일이 없어서 오히려 속 편한 것 같아요.

오렌 님,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

oren 2013-09-18 13:42   좋아요 0 | URL
'생각의 역사'라는 책에 의하면 몽테뉴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구요. 이를테면 그는 '심리학의 원조'에 가까운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의 책 속에서 꿈틀거리고 용솟음치던 '인간심리에 관한 절묘한 생각들'이 결국 가깝게는 셰익스피어와 루소뿐 아니라 멀리로는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을 비롯해서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프루스트와 앙리 베르그송 등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은데, 오늘날 심리학에서 다루는 여러 인간심리에 관한 문제들의 '오래된 원본'을 그의 책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고, 또 후세 사람들의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듯한' 비슷한 목소리를 몽테뉴의 책에서 자주 발견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싶더라구요.

yamoo 2013-09-2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은 곳이 참으로 좋습니다! 오렌님께 항상 감사를~^^

oren 2013-09-26 00:29   좋아요 0 | URL
저도 yamoo님께 늘 감사드리고 싶어요.
제가 올려 놓은 글을 언제나 정성껏 읽어 주시고 또 댓글까지 꼬박꼬박 남겨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라.

자연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늘 속도가 일정하다. 싹은 마치 짧은 봄날이 무한히 길기라도 하듯이 서두르거나 허둥대는 일 없이 서서히 싹튼다. 자연은 무엇이든 자신이 하는 일 하나하나에 지극히 공을 들인다. 마치 유일한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과 달리 왜 인간은 극히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에 마치 영원보다 더한 어떤 무엇이라도 맡겨진 양 그다지도 서두르는 것일까? 몇 겁의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손톱 깎는 일 따위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는 해가 마지막 남은 하루를 잘 마무리하라고 당신을 재촉한다고 여겨지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라. 항상 변함없는 고르디 고른 곡조의 울음소리는 지금의 시간을 영원으로 여기라는 충고가 아니겠는가!



 * * *


 - 지는 해는 야속하게도 구름 속으로...
 

Shooting Date/Time 2013-08-30 오후 6:53:53


 - 저녁 노을을
붉게 물들일 힘도 사라지고... 

Shooting Date/Time 2013-08-30 오후 7:18:21


 - 어둠이 내린 호수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가로등 불빛

Shooting Date/Time 2013-08-30 오후 7:37:07



 - 어두워질 때까지 푸른 빛이 감도는 8월의 밤하늘
 

Shooting Date/Time 2013-08-30 오후 7:43:36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8-3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덧 일곱 시도 안 되어 해가 떨어져요.
저녁노을과 아침노을은
사진으로 찍어도 아름답고,
그예 눈으로 바라보고 또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oren 2013-09-03 17:12   좋아요 0 | URL
하루 하루가 밤낮의 길이가 다르고,
또 하루 하루 해가 뜨고 지는 모습들이 어쩌면 그리도 다를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질 무렵의 아름다운 경치를 입이 아프도록 노래했지만,
정작 현대인들은 너무 바삐 사느라 그런 풍경들을 그냥 지나치며 사는 게 웃기다는 생각도 가끔 들어요.

페크pek0501 2013-09-0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마음으로
멋진 야경을 잘 감상했습니다.^^

oren 2013-09-03 17:14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저녁만 먹고 나와도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더군요.
그럴 때마다 소로우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겨 보곤 한답니다.
이 좋은 계절에 pek님께서도 좋은 책들과 함께 좋은 시간 많이 가지시길 바랄께요.

yamoo 2013-09-0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멋진 야경 입니다. 일산 호수 공원....항상 오렌님의 사진으로 보면 왠지 낯선 풍경을 보는 듯해요. 아름다운 저녁의 일산 호수공원 입니다~

oren 2013-09-03 17:15   좋아요 0 | URL
yamoo님께서는 아직도 일산 호수공원에 와보시지 못한 건가요?
올 가을엔 꼭! 한번 다녀가시길 바래 봅니다. ㅎㅎ
 


 

 


침묵함

말함의 다른 본질적 가능성의 하나인 침묵함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말하는 가운데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말을 끝없이 하는 사람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게끔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이해가 증진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장황하게 말함은 이해된 것을 은폐하고 거짓 명료성 속으로, 다시 말해서 진부함의 몰이해로 이끈다. 그렇지만 침묵함이 벙어리로 있음은 아니다. 벙어리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벙어리는 그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을 증명할 가능성조차 없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도, 벙어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침묵하고 있고 침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주어진 [결정적] 순간에 침묵할 줄도 모른다. 오직 진정한 말함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함도 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는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풍부하게 열어밝힐 처지에 있어야 한다. 그때에 과묵함[침묵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잡담"을 눌러버린다.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존재의 이해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파악하여, 이 이해가능성에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이 생기게 한다.


애매함

누구나 다 무슨 일을 당면하고 있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구나 다 이제 일어나야 할 일이 무엇이고, 아직 당면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했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줄을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 다 처음부터 이미, 다른 사람이 무엇을 예감하고 느끼는지를 예감하고 감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흔적을 따라다니는 것, 그것도 풍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 진짜로 사실의 "흔적을" 찾은 사람은 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 애매함이 현존재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가장 위험한 방식인데, 그렇게 해서 애매함은 이미 현존재의 가능성을 무력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

공공적인 해석되어 있음의 애매함은 앞질러 얘기하는 것과 호기심으로 예감하는 것을 본래적인 사건인 것처럼 내놓고 실행과 행위는 추후의 일이며 하찮은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 그러기에 '그들' 속에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잘못 보고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밝혀져 있음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세계-내-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존재양식이 서로 함께 있음 그 자체도 철저히 지배한다. 타인은 우선 사람들이 그에 관해서 들은 것,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근거로 "거기에" 존재한다. 잡담은 우선 근원적인 서로 함께 있음 사이로 끼어든다. 누구나 먼저 우선 타인의 눈치를 살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것에 대하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본다. '그들' 속에 서로 함께 있음은 절대로 폐쇄되어 무관심하게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고, 긴장 속에 애매하게 서로를 살피며, 몰래 서로 엿들으며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다는 가면 아래 서로를 적대하는 연출을 진행하고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애매함이 위장과 왜곡을 명시적으로 의도한 데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 개별 현존재가 애매함을 비로소 야기시켜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인 그런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애매함이 공공적으로는 은폐되어 있으며, 사람들
은 이러한 해석이 '그들[자신들]'의 해석되어 있음의 존재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설명을 '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확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일 것이다.


 

* * *


8월이 어느덧 다 지나간다. 이메일함에 잔뜩 쌓이는 '쓸데없는' 편지들을 지우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가 된지 이미 오래다. 수북히 쌓인 이메일함을 열어볼 때마다 그래도 '혹시나' 놓쳐서는 안 될 이메일은 없는지 살펴보지만 늘 버려야 할 쓰레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8월의 끄트머리에 받은 편지 한 통은 열어 읽어본 보람이 없지 않다. 가만 살펴보니 올해의 시간도 이미 후다닥 꽁무니를 내빼기 시작한 모양이다. 고작 해가 짧은 몇 개월을 남겨둔 지금, 시나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청명한 가을'이 새삼 궁금하다.


8월 Han's Letter -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이다

내 직업은 대부분 말로 이루어진다. 강의하고, 자문하고, 코칭하고, 인터뷰하는 게 일이다. 모두 말이 매개체다. 말 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물론, 글 쓸 때는 떠들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내가 말이 많을 걸로 오해한다. 무척 사교적인 사람으로 착각한다. 기회만 되면 얘기를 늘어놓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직업이 그렇기 때문에 그 외의 시간은 조용히 지내려 애를 쓴다. 의도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그 시간을 즐긴다. 떠드는 시간만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애를 쓴다. 어떨 때는 밥도 혼자 먹고 영화도 혼자 보고 산책도 혼자 한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밥을 혼자 먹느냐고 의아해한다. 자신은 혼자 밥 먹는 게 싫어 아예 굶는다는 사람도 있다.

혼자 밥 먹지 말라는 책까지 나왔다. 그럴 수 있다. 근데 그런 사람들은 혼자 밥 먹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같이 밥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혼자 밥 먹는 즐거움도 있다. 혼자 밥을 먹으면 세상이 편하다.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억지로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밥 먹는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내 마음대로 신문을 봐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혼자 있으면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영혼이 맑아지고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시상도 떠오르고 반성도 하게 된다. 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 말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 전 국가적으로 정전훈련을 실시했다. 정전을 가상한 훈련이다. 그걸 보면서 정전훈련 대신 침묵 훈련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혼자 했다. 간단하다. 시간을 정해 그 시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거다. 절대 얘기하면 안 된다. 개인 뿐 아니라 모든 관공서와 회사에서도 일체 얘기를 하면 안 된다. 회의도 안 되고, 연설도 안 된다. 이유 불문하고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한다. 전화도 안 된다.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도 중지한다. SNS도 하지 않는다. 어떤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를 몇 분 하는 게 아니라 중동사람들의 라마단 기간 금식처럼 일주일쯤 한다면 어떨까?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이 올 것이다.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정말 고요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우리 회사는 너무 말이 많아요.”란 말을 가끔 듣는다. 쓸데없는 말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다. 말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따지고 비방하고 험담하는 말, 쓸데없는 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 거짓말 등등.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말이다. 들을 필요도 알 필요도 없는 말이다. 그렇게 많이 떠드는 것이 무슨 효용이 있을까?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너무 넘치면 문제가 된다. 특히, 말은 그렇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 있듯이 침묵이 있어야 말이 귀하고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침묵해야 한다.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이다. 어떨 때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낫다. 강의를 할 때도 그렇다. 강의를 할 때 나는 침묵으로 시작한다. 앞에 서서 그냥 있는다. 가만히 청중을 바라본다. 조금 지나면 시끄럽던 강의장이 조용해진다. 청중이 나를 보기 시작한다. 그때 입을 열면 된다. 효과적으로 강의를 시작할 수 있다.

중국 명나라 문인 진계유가 쓴 “뒤에야” 란 시를 보면 침묵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평상시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 씀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여러분들은 어떤가? 말이 많은가, 아니면 말이 없는 편인가? 가끔 침묵의 시간을 갖는가? 아니면 침묵의 시간을 못 견뎌하는가? 혹시 등산 중에도, 사우나 할 때도 라디오 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가?

번잡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뭔가를 떠들고 주장하는 사람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하는 사람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다 정신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믿을 게 못 된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이다. 인간은 침묵을 통해 성장한다. 침묵 속에서 깊이 생각할 수 있고 내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언어를 갖고 자기 말에 책임을 느낀다. 처칠은 시간만 나면 방음장치가 된 자기 방에 홀로 있기를 좋아했다. 드골도 집무실에 들어가면 전화기가 울리지 못하도록 했다. 수도자들은 주기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피정의 시간을 갖는다. 입을 다물어야 귀가 열린다. 침묵을 거쳐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다.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13-08-3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계유의 시, 참 좋네요. 전문인지 모르겠지만...
맨 위의 '침묵함'에 음영표시한 글귀도 좋구요. 살 책이 한 권 더 늘었네요. ^^

oren 2013-08-31 00:05   좋아요 0 | URL
'한 오백 년' 전쯤 살았던 인물인 진계유(1558 ~ 1639)의 연후(然後)라는 시인데 인용한 게 전문이네요.

* * *

진계유는 장쑤성[江蘇省] 화팅[華亭] 출생이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커서 동기창(董其昌)과 함께 명성을 떨쳐 《금병매》를 지은 왕세정(王世貞)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29세 때 유자(儒者)의 의관을 태워 버리고 관도(官途)의 뜻을 포기한 뒤, 쿤산[崑山] 남쪽에서 은거하였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의 고헌성(顧憲成)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82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풍류와 자유로운 문필생활로 일생을 보냈다. 그의 박식을 드러낸 저서에 《보안당비급(寶顔堂秘笈)》 《미공전집(眉公全集)》이 있다.

페크pek0501 2013-09-01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을 다물어야 귀가 열린다. 침묵을 거쳐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다.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이다." - 그런 것 같아요.
좋은 글이 많군요. 님 덕분에 공부합니다.

oren 2013-09-03 17:18   좋아요 0 | URL
저도 '8월의 편지' 받아보고 나서 '좀 더 침묵해야 겠구나' 싶은 생각을 가졌답니다.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다른 책에서 읽은 구절까지 굳이 덧보태게 되네요. ㅎㅎ

yamoo 2013-09-02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오렌님께서 올려주시는 인용글은 정말 좋습니다. 야클님께서 보신 글과 페크님께서 보신글에 저두 당연히 눈이 같네요~ 하이데거의 글을 보니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해서...에서의 내용과 어찌 그리도 흡사한지 놀라네요. 인용해주신 부분 정말 감사합니다!

oren 2013-09-03 17:24   좋아요 0 | URL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 소개글을 보니 하이데거의 책 내용과 너무나 흡사한 데가 많네요.
언제 기회가 되면 저도 한번 피카르트의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yamoo님의 댓글 덕분에 새로운 책과 저자를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북 캘린더를 보니 오늘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태어난 날이다. 나는 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 봤으나 그의 작품은 여태껏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단 한 권의 책도 보관함에조차 넣은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느 초여름날 저녁에 서울 시내에서《막돼먹은 영애씨》라는 제법 웃기는 뮤지컬을 보고 난 뒤, 밤늦게 다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산으로 귀가를 재촉하던 길에 '1FM 라디오'를 통해 들은 얘기는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그 음악프로의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코너에서 마침 보르헤스를 소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스위스에서 머물던 시절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했다. 만일 나에게 한 명의 철학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할 것이다. 만일 우주의 수수께끼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언어가 그의 책 속에 쓰여져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책을 독일어로 읽었고 나중에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도 읽고 또 읽었다. ······



내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또 읽을 때 받았던 느낌이 꼭 그랬었다. 그리고 용감하거나 혹은 무모하거나 간에 일단 그의 책을 '필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흥미롭고도 고된 작업은 내가 생각하기로도 꽤나 끈덕지게 이어졌지만 결국 나중엔 '그 시간에 다른 책이라도 좀 읽어 볼 요량으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는 또다른 목소리에 눌려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오늘 다시 그 '무모한 작업'을 들춰보니 726쪽 '제3권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39. 숭고한 아름다움>'에서 멈춰져 있다. 책 뒷부분에 별다른 색인조차 없는 이 책이 무려 1,023쪽에 이르는 걸 생각해 보면, 중단된 '막노동'이 재개되더라도 가야 할 길이 제법 먼데 언제 저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책)


라디오 방송을 들은 다음날 아침에 인터넷으로 '보르헤스와 쇼펜하우어'를 검색해 봤더니, 오래 전에 연재되었던 [불교와 지성] 시리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교와 서구의 대표적 지성들과의 교감을 깊이 있게 조망한 글이어서 쭈욱 한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 시리즈의 '1번 타자'로 나선 인물이 쇼펜하우어였고, 보르헤스는 15번째로 소개되었다.

보르헤스가 태어난 날,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고도 뭔가를 주절거린다는 게 좀 웃기는 일이고 작가한테도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러다보면 언젠가는 또 보르헤스와 만나 즐겁게 떠드는 날도 있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 * *

http://www.beopbo.com/news/index.html?section=93&category=171&item=193&page=3

[불교와 지성] 1. 쇼펜하우어 - 김진 울산대 교수
[불교와 지성] 2. 막스 뮐러 - 김용표 동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3. 특별기고 - 박이문 포항공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4. 프리드리히 니체 - 김정현 원광대 교수
[불교와 지성] 5. 화이트 헤드 -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불교와 지성] 6. 윌리엄 제임스 - 김종욱 동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7. 후설 -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
[불교와 지성] 8. 휘트먼 - 최희섭 전주대 교수
[불교와 지성] 9. T.S. 엘리엇 - 박경일 경희대 교수
[불교와 지성] 10. 아인슈타인 -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11. 소쉬르 - 이도흠 한양대 교수
[불교와 지성] 12. 예이츠 - 서혜숙 건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13. 베르그송 - 민희식 전 한양대 교수
[불교와 지성] 14. 하이데거 - 권순홍 군산대 교수
[불교와 지성] 15. 보르헤스 - 김홍근 성천문화재단 부원장
[불교와 지성] 16. 자크 라캉 - 김석 건국대 교수
[불교와 지성] 17. 닐스 보어 - 양형진 고려대 교수
[불교와 지성] 18. 조르쥬 바따이유 -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19. 헤르만 헤세 - 이인웅 한국외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20. 칼 야스퍼스 - 신옥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불교와 지성] 21. 비트겐슈타인 - 홍성기 아주대 교수
[불교와 지성] 22. 카알 구스타프 융 - 김성관 원광대 교수
[불교와 지성] 23. 하인리히 짐머 - 심재관 금강대 HK연구교수
[불교와 지성] 24. 호세 바스꼰셀로스 - 강태진 대구가톨릭대 교수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3-08-2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글쓰기를 하셨군요.
나중에 차근차근 옮겨적기를 이으시리라 생각해요.
한결 깊이 삶과 넋과 빛을
마음속으로 담으셨겠어요.

oren 2013-08-2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라기 보다는 베껴쓰기였지만, 읽는 데서 그치고 마는 것보다는 '한결 마음속에 담은 느낌'이 좋았어요. 함께살기님께서 힘을 북돋아 주신 것처럼 나중에 마저 옮겨 적을 수 있기를 저도 함께 바래봅니다.

yamoo 2013-08-2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필사까지...사진을 보니 정말 열심히 읽으신 티가 팍팍나네요...근데, 저거 동서문화사판 아닌가요? 동서문화사 판은 번역이 별로던데. 김미영 역자의 쇼펜하워 번역본은 확실히 필사할 맘이 생기는 거 같아요. <충족이유율에 대한 네 겹의 뿌리>사서 필사해 보아야 겠어요.

불교와 지성이라는 연재도 있었군요!

그나저나 전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가 그렇게도 명문이라서 필사를 하려고 보니, 번역이 그리 좋지만은 않더라구요~ 오히려 이상하게 번역된 문장만 찾게 되더라구요..ㅜㅜ

oren 2013-08-29 17:38   좋아요 0 | URL
저는 '번역'에는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서 '동서문화사판'에 대해서도 '전혀' 읽는 데 불편이 없었어요. 가끔씩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더욱 어려워진 문장들을 만나면 몇 번씩 다시 읽으며 '원문의 뜻'을 미뤄 알아내느라 힘이 들 때도 있긴 하지만요.

김미영 역자의 번역본은 좀 더 쉽게 읽히는 듯한 느낌은 받았어요.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박사 논문'이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딱딱한 논문체의 글이어서(고지식한 논문 심사위원들한테 제대로 된 '형식미'를 갖춰야 한다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필사'하기에는 별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창조적 진화>도 '프랑스어 원문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번역'이 분명 아쉽게 느껴지는 책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책은 베르그송의 '생각' 자체가 워낙 매혹적이어서 그런 단점들은 사소해 보인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yamoo 2013-09-02 12:14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저는 베르그송의 그 대단한 내용을 얼마나 유려하게 문체로 담아냈길래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할까하고...기대에 기대를 하고 봐서 그런거 같습니다. 쭉쭉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 3-4회독 하도다보면 이상하게 번역을 해 놓아서 의미가 바로바로 파악이 안 돼는 거였습니다...ㅜㅜ
사실 저는 창조적 진화를 읽어나가면서 첨 읽었을 적에는 못느꼈지만 2-3회독 할수록 역자가 저자의 명저를 졸작으로 탈바꿈해 놓은 거 같아 매우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그런데 번역의 완성도가 끝내준다는 얘기는 도대체 누가 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부분은 완독하는 대로 페이퍼에 올려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조악한 번역인지...아무래도 저자가 제자에게 대신 번역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는 거 같습니다. 번역의 질이 확연히 다르다고 할까요.

만약 제가 필사를 했다면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때려쳤을 거 같다는....저는 매혹적인 내용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 정말 많은 안간힘을 쓰고 있답니다. ㅜㅜ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01 | 202 | 20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