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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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모험담은 억압적이고 견고한 현실을 유리처럼 깨 버린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것이다. 각각의 모험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유일무이한 과정이다. 그러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우리는 삶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의 경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가능성들이 운신할 수 있는 경계의 폭을 깨닫는 데에는 아무리 늦어도 30년이면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 실재를 평가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발에 매여 있는 줄의 길이가 몇 미터인지 재 보는 것과 같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쳇바퀴인 거야?" 바로 여기에 모든 사람에 대한 위험한 시간이 도사린다.

 

이 대목에서 가바르니의 재미있는 그림이 생각난다. 그것은 조그만 구멍을 통해 세계를 보여 주는 만화경 옆에 서 있는 교활한 늙은이를 그린 것이다. 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겐 이미지를 보여 줘야 해. 실재는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거든." 가바르니는 미학적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파리의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살았다. 그는 모험담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실제로 약한 인종들이 상상력이라는 강력한 약을 우리가 존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도망치도록 해 주는 악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145∼146쪽)

 

 

 

실재가 시에 침투하여 모험을 더 높은 미학적 잠재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변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초월하거나 포기한 덕분에 시적인 것을 논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 실재'란 말은 곧 '시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여기까지가 바로 시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최대한 확장한 경계였다.

 

여관과 산초와 마부와 불한당 마에세 페드로가 어떻게 시적일 수 있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시적이지 않다. 인형극 무대와 대조적으로, 그들은 시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도발을 의미한다. 세르벤테스는 모든 모험을 부인하는 산초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막상 산초가 모험을 통과해야 할 때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산초의 역할이다. 이렇게 우리는 시의 분야를 실재하는 것 위로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지 보지 못한다. 상상적인 것이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이라면 실재는 그 자체로 시적인 것과 대립한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 봐라(Hic Rhodos, hic salta)". 실재야말로 미학이 자신의 시각을 예리하게 다듬어야 하는 장소이다. 순진하고 현학적인 연구자들이 상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당화하고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더 많아진 것이 바로 실재적 경향이다. 그것은 바로 미학의 초석이 된다.

 

실제로 돈키호테의 위대한 행위가 우리를 인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돈키호테를 과연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저쪽에 혹은 이쪽에? 둘 중 어느 한 곳만 지정한다면 잘못된 일이 될 것이다. 돈키호테는 두 세계가 만나 경사각을 이루는 교차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돈키호테가 온전히 실재에 속한다고 말하면 우리가 반대할 일은 없다. 우리는 다만 돈키호테와 함께 그의 길들이지 않은 의지가 실재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하나의 목표를 관념처럼 지향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험이다. 실재의 돈키호테는 진정으로 모험을 희구한다.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법사들이 나의 행운을 빼앗아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용기와 정신만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도 쉽게 관객의 자리에서 무대 속으로 뛰어든다. 플라톤의 말대로 인간의 본성이 대개 그렇듯, 그는 두 세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조금 전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실재가 시에 침투하여 모험을 더 높은 미학적 잠재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 사실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실재가 상상의 대륙을 품기 위해 문을 열고 그것을 떠받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달빛 아래의 여관은 찌는 듯이 무더운 라만차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 척의 배가 되고 그 안에는 샤를마뉴 대제와 용맹한 그의 열두 기사들, 산수에냐의 마르실리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멜리센드라가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사도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은 돈키호테의 환상 속에서 실재가 되고 이를 통해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존재감을 즐기고 있다. 그러므로 리얼리즘 소설이 황당무계한 기사도 소설에 반대하여 태어났다고 하지만 사실 내적으로는 봉인된 모험을 품고 있는 것이다.(151∼153쪽)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

 

한여름 라만차 지방에는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열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대지는 종종 신기루 현상을 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물은 진짜 물이 아니지만, 그 근원을 생각해 보면 뭔가 진짜 같은 것도 있다. 그 척박한 근원, 즉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이다.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두 가지 방향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것이다. 즉 태양이 만들어 내는 물은 진짜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반어법적이고 비스듬한 시선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기루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생생한 물의 모습을 통해, 그런 척 위장하고 있는 대지의 건조함을 본다. 모험 소설, 모험담, 서사시 등은 상상적이고 의미심장한 사물을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반면에 리얼리즘 소설은 두 번째 방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 번째 방법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기 위해 신기루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기사도 이야기에 반대해서 쓰인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도 기사도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말이다. 문학 장르로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그런 현태의 영양 흡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설명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현재적인 실재가 어떻게 시적 실체로 변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본다면, 그것은 결코 스스로 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신화적 영역의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어법적으로 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재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며 정적이고 말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력을 가지면서 관념적 수정체 같은 세계를 상대로 도발을 감행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변모한다. 이 수정체의 환상이 일단 깨지면 그것은 무지개 빛깔의 가루가 되었다가 점점 색깔이 바래면서 마침내 거무스름한 흙더미가 된다. 우리는 모든 소설에서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는 시적이지 않고 예술 작품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단지 관념적인 것을 다시 흠수하는 몸짓이나 운동일 뿐이다.(155∼157쪽)

 

 

 

풍차

 

몬티엘 평원은 이제 우리에게 열기로 가득하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물이 마치 하나의 견본처럼 늘어서 있다. 돈키호테, 산초와 함께 이 평원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사물들에 두 개의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사물들의 '의미', 즉 그것들을 해석할 때 드러나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들의 '물질성', 즉 모든 해석에 앞서서 그리고 그것을 초월해서 사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실체이다.

 

마치 창공의 혈관 하나가 칼에 찔린 듯 핏빛으로 물든 석양의 지평선 위에 크립타나의 제분소 풍차가 우뚝 서서 일몰을 더욱 장엄하게 만든다. 이 풍차들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의미'로서, 그것들은 거인들이다.돈키호테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비정상적인 것은 모든 인류에게 지금까지 정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거인들이 실제로는 거인이 아니라고 치자.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어떤가? 다시 말해 일반적인 거인들은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사람은 거인이라는 존재를 어디에서 끄집어낸 것일까? 그것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의 현실에서도 없는데 말이다. 그것이 언제 존재했든 간에 인간이 처음으로 거인들을 생각했던 계기는 세르반테스의 작품에 나오는 장면과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거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관념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거인이 되곤 했던 것이다. 풍차를 돌리는 날개에는 브리아레오스의 팔들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우리가 만약 그러한 연상 작용의 충동에 빠져 풍차의 날개가 그리는 회전 운동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거인을 만날 것이다.

 

정신의 다른 모든 표현과 마찬가지로 정의와 진리 역시 물질적으로 발생하는 신기루이다. 사물의 관념적 측면인 문화는 우리의 마음을 전이시킬 수 있는 별도의 자족적 세계로 자리 잡으려 한다. 이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그리고 단지 환상으로 간주되고, 대지 위의 신기루로 간주될 때만 문화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158∼159쪽)

 

 

 

문화는 기억과 언약이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며 꿈꾸는 미래이다.

 

간단히 말해, 문화 그리고 고귀하고 명료하며 고상한 모든 것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시적 리얼리즘의 의미이다. 세르반테스는 이 모든 것이 문화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픽션이다. 마치 여관이 인형극 무대를 둘러싸고 있듯이 야만적이고 거칠고 소리 없고 무의미한 사물의 실재가 문화를 둘러싸고 있다. 실재가 그런 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고 거기에 있다. 즉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자기 충족적이다. 그것의 힘과 유일한 의미는 단순한 현존에 뿌리박고 있다. 문화는 기억과 언약이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며 꿈꾸는 미래이다.

 

그러나 실재는 단순하고도 냉정하게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이고 퇴적물이며 무기력이다. 그것은 질료이다.(162∼163쪽)

 

 

 

영웅

 

우리는 지금까지 희극성의 진정한 면모를 제법 일관되게 바라보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신기루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고 쓰고 있을 때, 희극(comedia)이라는 단어는 마치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펜 끝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우리는 다 타버리고 그루터기만 남은 공터에 서린 신기루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희극 사이에 뭔지는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음을 느낀다.

 

이야기는 이제 우리를 이 주제로 이끌어 간다. 우리는 여관방과 마에세 페드로의 인형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놓고 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돈키호테의 의지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주인공으로부터 행운을 빼앗아 갈 수는 있겠지만, 그의 노력과 용기를 빼앗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의 모험은 뒤죽박죽 끓어오르는 두뇌에서 나온 수증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모험을 향한 주인공의 의지는 실재하는 것이고 진실한 것이다. 모험은 물질적 질서가 흐트러진 것으로, 다소 비현실적이다. 모험을 향한 의지에서, 그 노력과 용기에서 우리는 기이한 두 개의 본성을 만나게 된다. 그 두 요소는 상반된 세계에 속해 있다. 즉 의지는 실재하지만, 의지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사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자신이 꿈꾸는 욕망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 반면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인간은 현실을 개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러한 현실의 일부분이 아닌가? 그는 현실 덕에 살고 있고, 그 결과물이 아닌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모험으로 투사만 된 것이 어떻게 척박한 현실을 지배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주변이 조금 색다르게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즉 그들은 관습이나 전통, 한마디로 말해 생물학적 본능이 강요하는 행동 방식을 반복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다수 가운데 유일한 사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을 거부하고, 상황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틀에 박힌 행위를 거부한다면, 우리 행위의 원인을 우리 안에서, 오로지 우리 안에서만 찾게 된다. 영웅의 의지는 조상의 것도 아니고 사회의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가리켜 영웅성이라 한다.

 

나는 실질적이거나 적극적인 영웅의 이러한 고유성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의 삶은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다. 그가 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은 먼저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식의 행위를 발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삶은 영원한 고통이며, 관습에 굴복하고 질료의 포로가 되어 있는 자신의 일부를 끊임없이 잘라 내는 것이다.(167∼169쪽)

 

 

한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그 시대의 인간 감성이 남겨 놓은 총체적인 고백이다

 

나는 이 짧은 글을 시작할 때 제시했던 것을 계속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시와 예술이 궁극적으로 인간, 오로지 인간적인 것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시의 주제가 과거냐 현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풍경은 항상 인간의 배경으로만 그려진다. 그렇게 보면, 모든 예술 형식은 결국 인간에 의해 인간의 해석이 바뀌는 데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느끼는 인간관에 대해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예술을 추구하는지 말해 줄 수 있다.

 

모든 문학 장르가,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이렇게 인간을 해석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를 열어 주는 물길이라고 할 때 특정 시대가 특정 장르를 선호하는 현상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그 시대의 인간 감성이 남겨 놓은 총체적인 고백이다.

 

그렇다면 영웅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영웅이 때에 따라 직선적으로 혹은 기울어져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선적으로 보일 때 우리의 시선은 영웅을 비극적이라 할 수 있는 미학적 대상으로 변모시켰다. 반면 기울어져 보일 때 영웅은 희극적이라 불리는 미학적 대상으로 변모한다.

 

유머와 희극에 푹 빠져서 도저히 비극적 감수성을 갖기 힘든 시대가 있었다. 특히 부르주아의 시대이자 민주주의 그리고 실증주의 시대였던 19세기는 너무 심하게 희극에 기울어 있었다.

 

서사시와 소설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 관계는 우리 시대에 비극과 희극의 관계로 반복되고 있다.(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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