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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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짜 리얼리스트는 그리스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리얼리즘도 사물을 회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회상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그것을 정화시키고 이상화시키며, 특히 그 과정에서 거친 부분을 제거한다. 하지만 아무리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감각에 직접 작용할 때에는 거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로마에서 시작된, 그리고 카르타고, 마르세유 혹은 말라가에서도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지중해 예술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거친 생경함을 추구했던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말해, 감각주의는 우리가 지중해 내해의 전형적인 성향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감각 기관들을 지탱하는 몸뚱이로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맛보며, 신체적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티에의 말을 만복한다. "외부 세계는 우리만을 위해 존재한다."

 

외부 세계라! 그렇다면 바로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더 심층적인 영역에 있는 세계 역시 주체가 볼 때에는 외부 세계가 아니던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이 외부 세계일 뿐만 아니라 더욱 고도의 외부 세계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관념성이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얻어지는 데 반해 리얼리티, 즉 실재는 감각들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야수나 표범처럼 난폭하게 우리를 덮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외부의 침입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만들고, 우리 내면을 텅텅 비게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결국 사물의 무리들이 드나드는 통로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다. 감각의 지배는 이처럼 내면의 힘을 상실하게 만든다. 보는 것과 비교할 때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망막이 외부의 화살에 맞아 손상되는 순간, 우리 개개인의 내적 에너지가 그곳을 메움으로써 침입을 멈추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인상은 문명화된 질서 속에 사고의 형태로 종속되고 기록되며,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인격이라는 건축물을 형성하는 데 협조하며 들어온다.(81∼82쪽)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만일 사물이 홀로 고립되어 있는 상태 그대로의 것이라면 얼마나 하찮은 존재가 될까! 그것은 얼마나 빈약하고 쓸모없고 흐릿해질까! 각각의 사물에는 더 커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비밀스러운 잠재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힘은 다른 사물 혹은 사물들이 관게를 맺으며 들어올 때 비로소 해방되어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것들에 의해 풍요로워진다고 할 수 있고, 그것들은 마치 암수의 한 쌍처럼 서로를 갈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여 공동체, 조직, 기구, 세계에서 결합하고 하나가 되기를 열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대자연'이라 부르는 그것은 모든 물질 요소가 들어가 있는 최고의 구조물이다. 고로 자연은 사랑의 작품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사물 속에 있던 다른 사물의 번식 혹은 창조와, 다른 사물 안에서 이미 예정되고 형성되어 있으며 실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사물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험해 본 적이 있겠지만, 우리가 눈을 뜰 때 최초의 순간에는 대상들이 거칠게 우리의 시야를 통과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거품 풍선처럼 확장되고 늘어나다가 한 줄기 거친 바람에 의해 터져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씩 질서가 잡힌다. 우선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먼저 시각의 중심부에 들어오는 사물들, 조금 후에는 주변부를 차지하는 사물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렇게 윤곽이 구별되고 초첨이 잡히는 것은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다시 말해 그것들 사이에 하나의 관계망을 설정하는 우리의 관심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면 초점이 잡힐 수도 없고 규정될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계속 주목한다면 이것의 초점은 더욱 뚜렷하게 잡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이 반영되고 연계되어 있는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것은 각걱의 사물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의 '심층'이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른 사물이 암시되면서 반영된다. 반영이란 한 사물이 다른 사물 안에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가장 가시적인 형식이다. 한 사물의 '의미'는 다른 사물과 '공존(coexistence)'하는 최상의 형식이고 이것이 심층의 차원이다. 한 사물의 '물질성'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우주의 잔여물이 쏟아지고 있는 신비의 그림자가 가진 '의미'를 필요로 한다.

 

사물들의 의미에 대해 한번 자문해 보자. 다시 말해 각각의 사물을 세계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게 해 보자.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하나의 대상을 두고 우리가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그 대상이 우리에게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표현이 아닐까? 그 우주에서는 모든 실들이 우리의 삶과 세계의 직물을 잣고 있다. 아! 물론이다. 물론이고말고. 사실 이런 생각은 매우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에로스'에서 사물들 사이를 엮어 주는 힘을 보았다. 그는 말하길, 그것은 결합시키는 힘이고 종합을 향한 열망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대로라면, 사물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은 '에로스'에 의해 유도된다. 성찰은 에로틱한 활동이고 개념은 사랑의 의식이다.

 

매력적인 아가씨가 땅을 찍어 누르는 하이힐을 신고 우리 곁을 지날 때 경험하는 근육의 경련이나 끓는 혈기를 철학적 감수성과 연관시키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여성을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을 하는 것 역시 이상하고 헷갈리고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외치는 니체의 말이 어떠면 옳을지도 모른다. "모두들 위험하게 살지어다."(84∼87쪽)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념을 발명한 이유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진동처럼 울리기 시작해 이내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로 확산된 관심사는 확실하고 견고한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오니아, 아티카, 시칠리아, 그리스 등지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성찰하고 입증하고 노래하고 예언하고 꿈꿨던 문화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것, 덧없이 달아나지 않고 고정된 것, 불분명하지 않고 명확한 것이었다. 문화는 삶의 모든 국면이 아니라 확실하고 견고하며 명확한 순간을 말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의 즉흥성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확실히 하려는 도구로서 개념을 발명한 것이다.(95쪽)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 본다.

 

명료성은 평온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우리 의식이 이미지들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포착된 대상이 우리를 피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위협 앞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 명료성은 우리에게 개념을 통해 주어진다. 이 명료성, 확실성, 이러한 소유의 충만함은 다른 유럽 작품들로부터 우리에게 잘 전해지며 스페인의 예술, 과학, 정치에는 일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다. 모든 문화적 작업은 해명과 설명 혹은 주석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가 영원한 텍스트이고, 하느님이 설교하는 길가에서 불타고 있는 금작화( 金雀花)이다. 문화는, 그것이 예술이든 과학이든 정치든 간에 하나의 해설로 삶을 자체 내애서 굴절시키며 더 윤기 흐르게 하고 질서를 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문화적 작품은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부속된 문제적 성격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 삶의 거친 격랑을 통제하기 위해 현인은 성찰하고 시인은 감동에 떨며 정치적 영웅은 자기 의지의 성문을 연다. 이 모든 노력의 결과가 우주의 문제점을 복사하는 데 그친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인간은 명료성을 추구하는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러한 사명은 신에 의해 계시된 것이 아니고 외부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부과된 것이 아니다. 그는 내부적으로 스스로 이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구성하는 뿌리다.

 

그 가슴속에서 명료성에 대한 깊은 열망이 영속적으로 일어난다. 마치 괴테가 줄지어 선 높은 인간 봉우리들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만들면서 이렇게 노래했듯이 말이다.

 

나는 엄숙하게 선언한다. 어둠에서 명료성을 열망하는

저 사람들의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초봄의 어느 한낮에 죽음을 마잤을 때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최후의 소원을 말한다. 훌륭한 늙은 궁수의 마지막 화살이었다.

 

빛을 더 많은 빛을!

 

명료성은 삶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완성이다.

 

만일 개념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삶 내부의 명료성, 사물들 위를 비추는 빛이 개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각각의 새로운 개념은 이전에는 말이 없고 보이지도 않았던 세계의 한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개방되는 새로운 기관이다. 당신에게 사상(이데아)을 주는 사람은 당신의 삶을 증진시키고 당신 주변의 실재를 확장시켜 준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본다는 플라톤의 의견은 글자 그대로 맞는 말이다.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 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98∼100쪽)

 

 

 

스페인 문학에서 진정 이보다 더 심오한 작품은 없을 것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돈키호테』는 애매모호한 작품이다. 민족주의적 감성을 통해 이 작품에 쏟아졌던 모든 찬사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르반테스의 생애에 대한 모든 현학적인 연구들 역시 애매모호한 덩어리의 조그마한 부분조차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세르반테스는 무언가를 풍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풍자하는가? 탁 트인 라만차 평원 저 멀리에 홀로 서 있는 돈키호테의 삐쩍 마른 형상은 의문 부호처럼 굽어 있다. 이것은 마치 스페인의 비밀, 스페인 문화의 애매모호함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 같다. 저 지하 감옥에서 이 가여운 세금 징수원은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가? 그리고 풍자란 무엇인가? 풍자는 곧 부정하는 행위인가?

 

삶의 보편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힘이 이토록 큰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지표나 실마리가 이토록 부족한 작품도 일찍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르반테스와 비교할 때 셰익스피어는 이념가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작품의 이해를 도와주는 일련의 미세한 개념들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대위법을 빼놓지 않고 제공한다.

 

지난 세기 독일의 위대한 극작가인 헤벨은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지적한다. "나는 내 작업에서 특정한 사상적 배경을 항상 의식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 배경으로부터 출발해 작품을 쓴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상적 배경은 경치를 보이지 않게 가로막는 산맥과 같은 것이다."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이런 점이 있다고 믿는다. 그의 영감이 서린 문장에 들어 있는 일련의 개념들은 우리가 환상적인 시의 밀림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눈을 안내해 주는 매우 섬세한 기준과 같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익스피어는 항상 자기 자신이 나서서 말한다.

 

세르반테스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누군가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지칭한다면 이는 그가 단순한 인상에 머무르거나 일반적이고 이념적인 형식을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이 점이 세르반테스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아닐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스페인 문학에서 진정 이보다 더 심오한 작품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로 하여금 『돈키호테』에 매달리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 대체 스페인은 무엇입니까?" 라는 거대한 질문이다.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하고 우주적인 냉기 속에 무한한 과거와 끝없는 미래 사이에 끼인 채 지구상의 수많은 종족 중에서 길을 잃어버린 스페인, 유럽의 영성적인 언덕이자 유럽 대륙 영혼의 뱃머리와 같은 이 스페인은 대체 무엇인가?

 

스페인의 운명을 밝혀 줄 단어, 정직한 가슴과 섬세한 정신을 만족시켜 줄 확실한 단어, 광채 나는 하나의 단어는 어디 있을까?

 

자신의 길을 재촉하느라 교차로에서 멈추지 않는 민족, 자기 내면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민족, 자신의 운명을 정당화하고 역사적 사명을 명확히 되짚어 보는 영웅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하도다!

 

개인은 자신의 민족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주 내의 행로를 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떠도는 구름 속의 빗방울처럼 민족 안에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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