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을 위한 철학
로버트 그루딘 지음, 오숙은 옮김 / 경당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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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랬구나,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나는. “지난달에는 친정 부모님을 뵈었는데요, 영정사진을 뽑아서 액자까지 끼워놓으셨다고 좋아하시더군요. 저는요, 마음이 울컥하면서 찡하던데요.”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이 생전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스르르 풀려나온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 연세 되시면 많이들 준비하세요. 여유롭게 준비하실 수 있는 것도 행복한 거거든요. 갑자기 가시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어머니는 나이 육십에 찍으셨다가 올해 팔십 되어서 다시 찍으셔야겠다고 하셨어요. 이십년 전이라 너무 오래 되셨다고. 살아계신 분들이 찍는 사진은 장수사진이라고들 하세요.” 이십년도 넘게 렌즈 너머로 희끗희끗한 세월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그의 말이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토닥인다. 한결 편안해진다.

 

여권 사진을 찍었다. 동네를 왔다 갔다 하며 스쳐보았던, 횡단보도 건너 바로 앞 건물 2층에 있는 사진관이다. “여권 사진 찍으러 왔는데요.” “저기 거울 보시고 매만져보세요.” “필요 없어요. 그냥 찍어도 되어요.” 운전면허증 갱신도 해야 하고, 여권 만료 기일도 다가왔기에 겸사겸사 사진이 필요했다. 해외여행을 갈 생각도 갈 돈도 없지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적어도 조그만 수첩 쪼가리가 문턱으로 걸리는 황당한 상황은 없어야하니까.

이건 그냥 놔둘게요. 커다란 점이 없어지면 안 되니까.” “다른 것도 괜찮아요. 다 손질 안하셔도.” 씨익 웃는 사진사님, “달리 전문가겠어요. 티 안 나게 예뻐지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가 내 얼굴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조금씩 지우는 동안, 나는 그가 찍은 시간들을 천천히 구경했다. 독특하게도 매년 찍은 그의 가족사진이 열댓 장 걸려있다. 아기 때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귀엽고 영특해 보이는 아들이 부모님을 양쪽에 두고 맑게 웃는다. 이 녀석은 아버지의 공간에 올 때마다 참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숨표처럼 집게에 집혀 한 장 한 장 가볍게 매달려 흔들렸다. 사진사란 시간을 붙드는 직업인가.

 

짧은 시간에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자식을 키우는 교육관에 대하여, 늙음에 대하여, 부모님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나이 듦에 대하여, 미래 직업에 대하여, 독서의 중요성에 대하여, 교육 체제에 대하여. 그의 오른손은 마우스를 쥔 채 열심히 클릭 질을 하였고, 역시 숙련된 전문가라 대화는 대화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속 하실 거죠? 저 나중에 영정사진 찍으러오게요.” 굳이 내 나이를 묻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빛으로 그려온 몇 십 년의 시간들이 묻지 않아도 나이를 가늠하게 만들어준 걸까. “방금 찍으신 거로도 해드릴 수 있어요. 예쁘게.”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그가 농담을 한다. “이건 너무 영하잖아요. 더 나이 들면 올게요.” 15분 남짓 되었을까. 웃음이 구르던 시간에 많은 대화가 담기니 물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양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듯했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대학교 다니면서 처음 들었을 때, 놀라우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운동계에서 가능한 일이라니까. 사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론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아까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리적인 영역에서는 가정이 필요하다지만 심리적인 영역에서만큼은 가정을 뛰어넘어 체험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15분의 짧은 시간이 한 시간 정도의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지루한 수업 시간은 한없이 길고, 재미있는 드라마는 순식간에 후딱 끝나버리는 걸 보면 시간의 상대성은 진리라고 할만하다.

나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지루해서 길게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들로 채워진 시간들로 인해서 말이다. 하루의 마침표에 행복 마크가 선명하게 찍히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매번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정에 굶주려 마음이 배고픈 시간들도 있지만, 이제는 시간을 떠먹는 숟가락을 들 만 한 힘은 생긴 것 같다. 스스로 기특해하는 중이다. 일종의 회복 탄력성이랄까.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도 하기 전에 퇴근하고 싶어진다. 직장일이 싫다기보다는 퇴근 후 커피숍에 와서 온전히 누리는 나만의 시간이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몇 시간 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이 자주 나의 몸을 이끈다. 시간과 공간과 나를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자주 벅차다. 시간에 끌려가는 삶을 살던 내가 요즘은 시간을 끌고 가는 느낌으로 지낸다. 현재의 주인이 된 기분이다.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크기가 곧 시간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크기이다.(p61~62)’ 같은 기온이라도 주변 상황에 따라 체감 온도가 다르듯이 예전에 비해 한껏 늘어난 시간을 체감한다.

 

종종 걸음을 멈추고 30대의 시간을 생각한다. 더듬어보는 것조차 몸서리치게 싫지만 이제는 덤덤하게 돌아볼 만큼 단단해졌다. 그 때,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옆 자리에 앉았던 50대의 동료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본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것 같아요. 조금만 꾸민다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울 나이인데.” 무표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36세의 나. 모든 것을 시작하기에 많이 늦어버렸다는 체념 가득한 시간이었다. ! 30대 중반에 많이 늦어버렸다는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눈부신 시기였던 지도 모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을 지나왔건만 어리석게도 그 때의 현재를 누리지 못했다.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의 진정한 문제는 시간의 성격에 있다기보다는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으며,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식에 있다.(p25)’ 당시의 나는 나이든 시선으로 젊은 시간을 바라보았고, 51세인 지금 보내는 시간보다 오히려 더 짧고 어두운 시간을 보냈던 거다. ‘현재를 기억할 만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당신 삶의 현재 시기에 무엇이 중요한지 날마다 검토하라. 그렇게 하는 사이 당신의 시간은 풍요로워질 것이다.(p49)’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심리가 시간이 풍요로워질 기회를 앗아가면서 메마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와 같은 시간을 만들어냈을까.

 

시간을 철학적으로 낱낱이 파헤친 에세이다. 공평한 듯 보이지만 이것만큼 불공평한 것도 없는, 거대한 강물처럼 묵직하게 흐르다가도 무서울 정도의 민감성을 드러내는,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한, 사람마다 다른 길이를 경험하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부피감을 드러내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관찰하게 된 시간의 속성이다.

시간이 들어갈 자리에 사랑이나 이란 말을 대신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문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행동하지 않는 것에도 똑같이 결과가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적 내용에 책임이 있는 만큼 우리의 시간적 공백에도 책임이 있다.(p120)’사랑하는 이를 향하는 마음의 공백이나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공백에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공백에 대한 책임이라... 공백은 행동에 대한 여집합이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그림이 다르게 나타나니, 그리지 않은 여백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말은 맞다.

시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따라가면서 사람들의 시간과 나의 것을 비교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질 시간을 훑어보았다. ‘시간이라는 예술품의 전신상을 감상한 듯 뿌듯했다. 나의 시간을 어떻게 디자인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글을 쓸 때마다 자주 하는 고민에 대한 명쾌한 답을 발견한다. ‘당신이 쓰는 것이 읽을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지 마라. 대신 쓸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라.(p200)’ 읽는 행위를 상상하면 다양한 독자들을 상상해야 하므로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쓰는 행위로 관점을 바꾸면 주체자인 나로부터 출발하는 생각이라 훨씬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1차적으로는 스스로 물어보고 가치가 있다면 바로 시작할 수 있으니.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로 확장된다면 기쁨이 더해질 터이다.

그런 삶을 소망하는 건 이미 그런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p65)’ 한 때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삶이다. 퇴근하면 몸이 신 김치처럼 늘어진다. 물리적인 나이가 많아진 지금은 더군다나 나날이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30대보다 덜하다. 마음으로만 원하다가 한 발자국 내딛게 되었고 자꾸 걷다보니 원하는 삶에 가깝게 걸어가고 있었다.

책을 읽고 느낌을 쓰고, 일상을 글로 표현하고, 마음을 시로 그려내는 삶이 나는 행복하다. 풍성한 글을 위해 조금씩 다양한 경험을 시도한다. 슬쩍 가보지 않은 길로 걸어가 보는 소심한 모험을 해본다. 시간을 누린다는 느낌으로 나머지 삶을 채울 수 있다면 족하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굳이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제는 나의 시간을 누려보련다.

 

야간자습을 마치고 고3 딸내미가 들어온다. “삐까, 삐까~! 여권 사진을 찍었어.” “어디 봐봐. 이건 웬 얼룩이야?” “그건 커다란 점이라 지우면 티 나서 안 된대. 전체적으로 봐. ! 니네 엄마는 이렇게 생겼어.” “거짓말하지 마.” 1초도 망설이지 않은 리액션이다. “. 조금밖에 수정 안했단 말이야.” 3의 냉철한 눈썰미는 조금의 시간 단축도 허용하지 않지만 정말 조금밖에 수정 안했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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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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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는 분홍빛이, 살의를 띤 사람에게서는 노란빛이 보인다. 다른 이의 감정을 색채로 볼 수 있다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웹 소설이다. 공허함, 슬픔, 기쁨 같은 감정들이 보랏빛, 파란빛, 초록빛 등 각양각색의 빛을 낸다는 설정이다. 그녀는 선명하게 보이는 색채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렌즈를 끼고 다닌다. 감추려하는 감정들을 볼 수 있다니 편하고 재미있을 법도 한데 가까운 이의 감정이 보인다고 상상하면 그녀의 행동에 공감이 된다. 작가는 어떻게 감정이 보인다는 발상을 했을까.

이 책을 읽다보니 그 웹 소설이 떠오른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 줄로 연결되는 순간, 삶이 바뀐다.(p112)’ 는 문장에서 김중혁 소설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작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한 줄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소설집에 실린 8편의 소설들은 전혀 다른 색채를 띠며 독특한 개성으로 빛난다. 옴니버스 구성인 양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품고 있는 단편들이다.

 

그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감각 기관과 상응하는 자극의 개념이 파괴된다. 소리는 귀와, 빛은 눈과, 냄새는 코와, 감촉은 피부와, 맛은 혀와 연관된 자극이라는 고정상식이 연결고리를 풀고 다채로운 조합의 순서쌍으로 탄생한다. 소리에서 냄새가 나고, 빛에서 감촉이 느껴지는 듯 착각에 빠진다. 생각이 유연해진다. 세상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자극들이 새삼 신선한 맛을 낸다.

앞뒤 맥락을 떠나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p104)’ 는 문장에 공감한다.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평범한 요소들이 조합 방식에 따라 독특함으로 만들어진다. 악기와 도서관이라는 흔한 낱말이 결합되어 <악기들의 도서관>이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제목이 만들어진 것처럼. 소리와 나무가 결합되면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소리의 열매를 빚어내고(p64)’ , 음악과 연기가 결합되면 세상의 어떤 음악이 나를 관통한 다음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p35)’

 

음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깊다. 애착을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으리라 여겨지는 내용과 사유들이 내내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왜 어떤 것은 소리이고 어떤 것은 음악일까.(p31)’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무엇이 소리와 음악을 구분 짓는가. 소리에도 높낮이가 있고, 세기가 있고, 음색이 있다. 대화 소리라면 가사도 있으니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규칙적인 박자 정도 되겠다. 우리 몸에서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심장 박동과 숨소리가 있음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생명과 닮은 소리를 음악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음악이 유난히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음악이 어느 순간 확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여러 날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도 하나의 음이 마음에 느낌표를 찍기도 한다. 음악과 마주하는 순간의 마음에 따라 공감과 무감각의 낙차가 크다. 그 이유를 심장에서 찾는다. 감정에 따라 심장박동이 달라지면 음악과 공명을 일으키는 주파수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음악을 주제로 한 독특한 이야기들이 탄산수처럼 톡톡 튀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엇박자 D>이다. 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리믹스 시킨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은 곁들여진 하나의 문장과 함께 심장과 공명을 했다. ‘목소리가 겹치지만 절대 서로의 소리를 해치지 않았다.(p281)’ 라는 문장이다. 음악이 들리는 듯, 장면이 보이는 듯, 다양한 감각들이 한꺼번에 자극되며 뭉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음악이 담긴 도서관을 둘러본 기분이었다. 스릴러 넘치는 긴장감을 품고 고양이 발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 음악으로, 찡한 휴머니즘으로 따끈한 빵 냄새를 풍기는 음악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의지가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나오는 음악으로, 순수한 열정으로 선명하게 붉은 음악으로, 담백한 두부 맛이 나는 음악으로 책을 읽는 순간순간이 BGM의 바다로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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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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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제를 샀다. 은은한 라벤더 향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통을 들고 살짝 흔들어본다. 손에도 냄새가 짙게 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이거였구나! 향수병 주변에 있으면 나에게도 향기가 배는 거였어! 다시 한 번 책을 펼친다. 책 속의 문장들이 처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종교에 대한 나의 시각은 회의적이었다. ‘수행이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불교의 수행 방식이 철저한 고행을 통한 깨우침이라면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남을 위할 수 있다는 걸까.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지 않고 중생들에게서 제공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먹고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아등바등해야 하는 사람들을 수행자보다 못하다 할 수 있을까. 기도해주는 것이 진정 그들을 위하는 길일까. 기도를 해서 결국 편안해지는 것은 기도하는 이 아닌가.’ 이런 의문들로 가득한 나는 그리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종교인들을 삐딱하게 바라보곤 했다.

 

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한 책. 두 번째로 책을 읽으며 종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글자들이 마음의 표피만을 두드렸다면, 두 번째에는 그 아래 진피까지 스며들어온 느낌이다. 처음과는 다른 의미들이 눈 녹듯이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스님의 존재 의미를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본다. 향수병처럼 그 곁에 있으면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나아가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스님의 가르침은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의미라고. ‘나도 했어. 너도 될 거야. 해 봐.’ 라며 용기를 주는.

책속에서 종교적인 내용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이란 말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돕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비우고, 욕심을 버리는 행동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목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본다. 처음에는 <설전>이라고 해서 논쟁의 의미를 지녔다고 여겼다. 두 스님이 종교적인 견해를 열띠게 주고받으면서 진리를 파헤치는, 대략 이런 내용이리라 짐작했다. 자세히 바라보니 '눈 설'자를 쓰는 전쟁이다. 새삼 한자 사전을 찾아본다. ‘雪’이란 한자가 더러움을 씻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세상의 번뇌가 일으키는 더러운 욕심을 씻기 위한 대화의 치열함을 의미하는 걸까. 눈이 내리는 것처럼 고요하고 냉철하게 이루어지는 전쟁을 상상하니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다 싶다.

 

눈을 배경으로 수록된 사진들도 참 좋았다.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진에 담겨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뜻이니. 현실에서도 수행을 한다면 충분히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158페이지와 159페이지에 펼쳐진 사진은 보는 순간 헉! 감탄사가 나왔다. 마음이 저절로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새하얀 눈과 맑은 물에 비친 푸르른 하늘, 그 경계에 고요한 생명체인 나무가 존재하는 장면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명경이란 말이 이런 느낌 비슷하지 않을까.

 

적게 드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이에게 빚지는 기분, 한 때는 모두 생명이었던 음식을 섭취할 수밖에 없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불문율은 이런 맥락으로 보면 남기지 않는것이 아니라 남길 수 없는것이었다.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 주변을 향기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적게 자고, 적게 말하고, 적게 먹고, 지식에 안주하지 말고, 제자리를 지키라는 가르침(p190)’을 내비게이션인 듯 따라가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희미한 들꽃 향기라도 나지 않을까 해서. 존재 자체가 향기가 된다는 것, 정말 의미 있는 삶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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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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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기운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으스스함. ‘죽음이란 글자는 매번 이런 분위기로 찜찜함을 전해주는 말이었다. 막연함이 불러오는 공포와 존재의 마침표라는 느낌이 주는 허무함이 뒤섞여 실체를 알 수 없는 가상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죽음에서 풍기는 강렬한 두려움은 아침이 쏟아내는 환한 햇살을 가려 개기일식이라도 된 양 어둠을 건네었다.

자주 가는 독립서점의 주인장이 포스트잇에 메모해놓은 추천사가 없었더라면 손길조차 닿지 않을 책이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그의 안목을 믿어보기로 했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 읽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과 사람들이 좋다 말하는 책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나의 판단기준은 하나다. 생각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나아가 몸을 들썩이게 만드느냐는 거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 ‘좋은이란 극히 주관적인 말이니. 사상의학에서 체질에 따라 어울리는 음식의 궁합이 존재하듯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도 독자와의 궁합이 분명 존재하리라. ‘좋은 책이라는 말 앞에는 두 글자가 생략되어있다고 여긴다. (내게) 좋은 책이라는.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들썩였다. ‘우리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좀 더 다르게 살게 되겠지. 그래, 근심을 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p6)’ 지금까지와 조금은 다르게 살고 싶어졌다.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관점이다.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p39-42)에서는 설거지를 담당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촌철살인의 문장에 통쾌했다. 독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책이라는 걸 읽는 행위 자체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잖아요.(p317-318)’ 글을 통해 전하는 소리 없는 말을 소리 없이 들어주는 독자를 상상하니 숙연함조차 느껴졌다.

둘째, 기발한 비유이다. ‘이 달걀은 암탉이 될 운명이었을까, 수탉이 될 운명이었을까.(p339)’ 몇 십 년 동안 달걀을 보고, 먹고, 사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하지 못했던 생각을 누군가는 세상 어딘가에서 하는 거다. 세상은 넓고 창의적인 인간들은 그보다 더 많구나. 겸허해져야겠다. ‘황사처럼 닥칠 식후의 피로(p339)’라든지, ‘복날 쉬는 삼계탕집처럼(p341)’이라든지, ‘임플란트를 거부하는 코끼리처럼(p341)’, ‘네덜란드를 떠난 풍차처럼 촌스러워서(p341)’, ‘목도리도마뱀이 목도리를 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p342)’등의 표현이 쓰나미처럼 몰아닥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발한 비유다 싶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난 아직도 멀었구나. 고수의 세계를 접하며 그동안 너무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셋째, 표현 방식이다. ‘저는 글에 리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p307)’라 말한 대로 그의 글은 리드미컬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있었다. 유머가 섞인 글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마음이든 지식이든 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언가를 전달하는 거라면,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웃음은 심장을 몰랑몰랑하게 만든다. 쉽게 마음을 열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가 권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도 읽고 싶어졌다. 나와 비슷한 코드를 지닌 사람이 추천하는 책이니 결코 실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기대하지 않고 펼쳤던 책이라 즐거움은 더욱 컸다. 웃음이 곁들여있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음이 좋았다.

 

커피숍에서 글을 쓰다 보니 처음 듣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머! 참 좋다! 기타 전주가 너무 좋아 노래를 검색해본다. Car Seat Headrest ‘High To Death’이란다. 우연일까. 자세한 가사는 당연히 모르지만, ‘죽음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노래도 이런 느낌일 수 있구나 싶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정념으로부터 다소나마 풀려날 것이다.(p5)’ 이전보다 담담하게 죽음이란 삶의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든 언젠가는 죽는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p125)’ 오래 머무르게 되는 문장이다. 어찌할 수 없는 소멸 여부를 두고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어떤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간다면,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밋밋하게 사드라드는 불씨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다른 이들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며 활활 타는 모닥불이거나 환하게 부스러져 밤하늘 같은 이들의 눈동자에 순간적이나마 작은 기쁨이라도 담아줄 수 있다면 그런 삶도 괜찮겠다.

 

 

p136, 1째줄: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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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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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볼 때가 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나이와 표정이 짐작될 때가 많다. 뒷모습의 무엇이 그를 그런 모습이게 하는 걸까. 읽기도 전에 며칠 동안은 책표지만 바라보았다. 오도카니 앉아있는 뒷모습이 많은 말들을 담고 있었다. 제목과 잘 어우러지는 그림이구나 싶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죠? 그걸 증명하려고 마구 걸어갔던 인간이 마젤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시선 끝을 쭉 연장하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자신의 뒤통수도 볼 수 있겠네요? 지구가 둥근 이유를 설명하며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이다.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웃었다.

 

언제 슬프더라. ‘슬픔이란 글자를 바라보며 나의 슬픔을 더듬는다. 슬픔과 가깝다고 여기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럭저럭 순간적인 즐거움으로 찢어진 마음을 기워내며 걸어왔다.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콕 집어서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내 안 깊숙이 존재감을 나타내는 감정이 따끔거렸다. 그것은 종종 표면으로 떠올라 온몸을 감싸는 피부처럼 영혼을 감쌌다. 삶의 바닥에 머무르며 중력이라도 되는 양 즐거운 순간들을 끌어당겼다. 단편적인 서운함이나 쓸쓸함 같은 거 말고, 가슴 깊은 곳에서 느리게 흐르는 묵직한 감정. 차마 떨치지 못하고 지그시 내리누르는 느낌을 그러안은 채 그렁그렁 서성이는 발자국 같은 것. 이 감정의 정체를, 슬픔이려니 했다.

왜 슬펐던 걸까. 책의 말미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길어 올린다.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p407)’ 글자들이 나의 시선을 타고 올라와 심장에 담기는 순간, 몇 주 동안 어떤 글도 써내려갈 수 없었다. 내 슬픔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흐르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흐릿하던 슬픔의 실체가 선명해졌다. 많은 장면들 속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 무의미였구나, 무의미였어. 꽤 오랜 시간, 삶의 목표로 생각해왔던 사랑이 무너져 내렸다는 생각에 나는, 이미 깨어져버린 파편들을 꼭 쥐고 그 허무함에 아팠던 것일까.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p27)’ 이 문장을 보며 생각한다. 인간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의 슬픔이라고.

 

저자가 여러 매체에 연재했던 85편의 글들을 슬픔, 소설, 사회, , 문화등의 내용으로 분류하여 실은 산문집이다. 문체나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은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다. 진지한 글들을 읽다보니 건조해진 피부처럼 마음이 푸석하게 당겨졌다. 문장의 대구를 이루기 위해 작위적으로 삽입한 듯 느껴지는 문장 앞에서는 거부감이 일기도 했다. 나에게 재미있는 글은 아니었다. 마음을 훅 당기는 매력적인 유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문장들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단지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옷이었을 뿐, 충분히 높은 수준과 깊은 사유와 내공이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5>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에 나온 세 가지 내용에 특히 공감했다.

첫째,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중략)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p331)’ 이토록 정확한 정의가 있을까. 내게로 다가오는 마음에 기대고 싶은 생각이 들 경우, 상대가 누구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나를 향하는 상대의 마음으로 나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니 이런 종류의 갈망은 욕망에 가깝다. 한참을 거슬러 나의 결여와 그의 결여가 만나던 순간도 떠오른다. 과거형이지만 무의미 이전의 한 순간이나마 사랑이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뜨거워진다.

둘째, 휴대폰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다. ‘원래 당신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중략) 전화가 발명된 이후에 당신은 하나의 음성이 되었다. (중략) 휴대폰 덕분에 당신은 마침내 글자가 되었다.(p351~352)’ 언젠가부터 가까운 지인들과 주로 카카오 톡으로 대화하고 안부를 주고받게 되었다.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대부분 꽤 오래전의 것이다. 휴대폰을 열어 대화창의 글자들을 휘리릭 되짚어본다. 글자가 되었다는 말이 손끝으로 와 닿는다. 차가운 액정 아래 존재하는 친구들이라니!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셋째, 글을 쓰는 의미에 대한 내용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극도로 천천히 말한다는 것이다.(p385)’ 슬픔이 담긴 책을 읽으며 나의 슬픔에 한 걸음 다가갔다. 먹먹한 마음에 이번 달은 거의 글을 쓸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새벽에 일어나 떠오른 생각을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했다. 퇴근 후 커피숍에 와서 천천히 문장을 다듬었다. 아주 오랜만에 시 한 편을 썼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며칠 째 붙들고 있던 이 리뷰도 오늘은 마무리하려 한다. 천천히 글을 적어 내려 가다보니 천천히 내딛는 산책처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노트북 옆에 놓인 책표지에 다시 눈길이 머문다. 뒷모습이 전해주는 느낌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김 서린 유리창 너머로 투영되는 조명을 바라보는 순간처럼 그림 속 인물의 삶이 번져 보인다. 인간의 삶은 그의 몸집보다 묵직하고 커다란가.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p55)’ 말도 안 되는, 그 말도 안 될 상상이 이 문장을 본 순간 떠오른다. 내 시선의 끝이 투명하고 가느다란 화살표로 뻗어나가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뒷모습에 닿게 되는 상상이. 궁금해졌다. 나의 뒷모습은 어떤 삶을 담고 있을까. 세상을 향해 무슨 말을 건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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