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거나 말거나 - 쉼보르스카 서평집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봄날의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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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세수를 하고 부드러운 수분 크림을 한 겹으로 바른 듯 깔끔한 글. 드라마의 에피소드를 본 느낌이다. 전후맥락 하나 몰라도 그 자체의 의미로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말끔하다. , 내가 이런 느낌과 이런 문장을 좋아하는구나! 새삼 나의 취향을 깨닫는다. 노벨문학상을 탔던 작가라고는 하지만 처음 접하는 폴란드 시인의 글에 이토록 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인터넷 알라딘 서점의 서재친구 syo님의 페이퍼를 통해서였다. 춘향전을 언급한 쉼보르스카의 서평을 읽고 어찌나 후련하던지! 먼 나라 시인의 정서와 유머 코드에 공감이 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나머지 서평들은 어떨까. 호기심이 생겼다.

평소 책을 소개하는 글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번역은 반역이다와 같은 맥락의 이유에서이다. 책을 읽은 사람의 관점을 통해 원저는 한 번의 필터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읽은 책이거나 대략이라도 내용을 알고 있다면 그나마 덜하겠지만 생소한 책에 대한 서평을 먼저 접하면 편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한 사람의 의견만으로 책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무모함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서평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꿔주었다. 서평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록된 책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작은 문이랄까. “궁금해?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당신도 그럴까? 궁금하면 읽어보시던가.”라는 도발과 함께.

 

1967년부터 2002년까지 작가가 썼던 562편의 독서칼럼 중 137편을 추린 서평집이다. 본문을 읽기도 전에 두 번 놀랐다. 예상보다 두꺼워서. 두께가 주는 은근한 압박감에 살짝 주춤했다. 하지만 쉼보르스카님은 결코 나를 절망하게 만들지는 않으실 거야. 춘향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호기롭게 책표지를 넘긴 나는 후루룩 차례를 훑어보며 다시 놀란다. 차례에는 서평의 대상이 된 책과 작가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이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몇 권 정도일라나? 이것도 읽은 거, 이것도 읽은 거하며 짚고 싶었지만. 쩜쩜쩜. 나의 검지는 네버 엔딩 질주였다. 하아~ 이 많은 책들 중에 어찌?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유일하게 찾은 책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었다. 한데 이마저도 까마득한 과거에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읽다 집어던진 것 같기도 한 거다. 읽어본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아무리 비필독도서 칼럼이기로서니 이토록 도화지 같은 배경지식이라니! 과연 저자의 서평이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해져서 서둘러 첫 장을 펼쳤다.

 

내가 본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한 줄 요약이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서평을 하는 책의 주제를 명확하게 포착한다. 그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와 읽어도 별반 소용없으리라는 이유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평점 별 다섯 개짜리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책은 저자가 찾은 매력을 덩달아 찾고 싶어지고, 별 한 개로 예상되는 책은 서평대로인가 궁금해서 확인하고 싶어지니 이래저래 궁금증을 일깨워준다.

예전에는 긴 글쓰기가 어려운 줄 알았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짧은 글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는 산문보다 시가 어렵다. 짧은 글에 담긴 메시지가 가벼운 것은 아니므로. 몇 줄의 문장 안에 핵심만을 담아낸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하고 싶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보면 글이 장황해진다. 시를 쓰면서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나의 독후감은 길다. 리뷰를 올릴 때마다 매번 하는 고민이다. 좀 더 짧게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을 바꾸고 문단을 나누고 적당한 분량으로 토막을 내지만 맘에 차는 리뷰는 거의 없다. 작가의 서평을 보며 나의 글을 돌아본다. 너 댓개의 문단으로 끝나는 글들을 보며 부러웠다. 쌓는 것보다 잘라내기가 힘든 법인데. 그녀의 과감한 버리기에서 날카로운 결단력이 느껴졌다.

 

창작의 비밀이 실제로는 훨씬 단순하고 덜 감상적이라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노인과 바다>의 겉표지에서 본 문장들이 떠오른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야.’ 헤밍웨이는 한 줄로 주 내용을 요약했다. 이 작은 발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에 차곡차곡 작가의 인생관이 담기는 것이다.

시를 쓸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섬광처럼 스치는 단순한 문장 하나, 순간적으로 심장을 흔드는 느낌표 하나가 시로 이어질 때가 많다. 얄팍한 화장지로 시작한 발상이 주변의 물기를 빨아들여 흠뻑 묵직해질 때도 종종 있다. 엄청난 이야기로 화려한 변신을 할 때 최초의 소박한 모습을 아는 창작자만이 의미심장하고 멋쩍은 미소를 짓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나 감정은 공식이나 상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운 것일까.

검은 눈물이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소개된 일화가 마음에 남는다. “처음으로 아내를 배신한 건 어떤 상황에서였습니까?” 완벽한 아내를 두고 위태위태한 여인에게 끌리던 남편의 답변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완벽함과 불완전함에 대하여. 모든 이의 심장이 완벽을 향해 뛰지는 않음을. 결핍으로 향하는 시선에 대하여. 나와 내 주변의 심장에 대한 생각이 뒤엉킨다.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에서 사랑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생각한다. 위대한 사랑이란 본래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쉼보르스카의 생각에 동의한다. 모든 관계는 각기 유일한 연결선으로 존재하는 걸까. 두 영혼과의 공식으로만 흘러가기에 대상이 달라질 때마다 감정의 울림은 매번 예측을 벗어나는 건가.

 

간혹 이름을 들어보았으나 잘 몰랐던 인물, 처음 들어보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정치가, 예술가,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평에 등장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파블로 카잘스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빛이 나는 사람에는 공통적인 모습이 있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당하다는 것. 그저 그 자신일 뿐이라는 노년의 음악가에 대한 글을 보며 나의 미래를 그려본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달라지면서 간혹 위축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묘사한 문장들에 기대어 위안을 받았다.

쇼팽에 대한 새로운 일화를 접하면서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네가 뭘 하든, 그건 전부 옳고 좋은 일일 거야.’ 쇼팽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편지로 했다는 말이다. 내게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이 참 따뜻할 텐데.

쉼보르스카가 인간을 사랑하는 작가라고 평한 찰스 디킨스는 또 어떤 인물이었을까. 서평에 등장한 예술가들의 새로운 면을 접하면서 궁금해지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하나의 의미 있는 문장이나 내용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 그 문장이 행동으로 이어져 읽는 이를 들썩이게 한다면 더욱 중요한 의미가 되리라. <쉼보르스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듯했다. 그녀의 생각과 위트와 함께 하며 따뜻한 휴식 시간을 보냈다.

456쪽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세 단어가 떠올랐다. 유쾌! 상쾌! 통쾌! 전체적인 느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이다. ! 생각해보니 쾌변 CF로구나! 하지만 이보다 더 싱크로율이 일치하는 단어는 찾지 못하겠다. 심오한 내용의 끄트머리에 툭 내뱉는 문장에 유쾌했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상쾌했고, 이건 아니지 않냐 며 대놓고 까는 내용에 짜릿할 정도로 통쾌했으니. 자유로운 정서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용은 촌철살인의 문장 주변으로 날개를 펼쳤다. 이런 게 제대로 까는 거지. 오만함이나 무조건 깎아내리는 치졸함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감으로 근거를 대며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 멋졌다. 동시에 방대한 분야에 대한 깊은 사유가 풍겨 나와 참으로 묘한 스릴감을 주는 책이었다.

어찌나 애매모호한 언어를 구사하는지, 그 어떤 실수를 해도 대중들 앞에서 절대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꼬투리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그들의 평론은 빈틈없이 불분명하다.(p216)’ 이 통쾌한 문장은 작가의 팬을 추가하는 데 쐐기를 박았다.

 

 

p414, 밑에서 4째줄 : 자체가 당키나 → 자체가 가당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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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온다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2
알베르토 푸겟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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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땅 수분을 빼앗겨버린 얼굴인양 심장이 푸석거렸다. ‘말라 온다를 읽으며 서서히 말라 가기라도 하듯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음습한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끈적임 속에서 뿌연 구름이 들쭉날쭉 하늘을 뒤덮은 날,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아득한 시야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간다면, 걷고 또 걸어도 비는 내리지 않고 꺼끌꺼끌 목구멍의 질감만 전해진다면, 지금의 이런 느낌이 들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문장에 속이 터졌다. 책을 읽는 나를 캐리커처 한다면 둥둥 떠다니는 고구마를 배경으로 ㅈㅈ’(자체 모자이크 처리) 두 글자가 담긴 말풍선이 포도 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렸을 거다.

제목을 보고 두 번 놀랐다. 띠지에 적힌 설명을 보니말라 온다가 스페인어(mala onda)라는 거다. ‘말라비틀어지다, 다이어트로 몸이 점점 마르다와 같은 의미로 번역된 우리말인 줄 알았건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작가의 작명센스에 감탄했다. ‘불만, 불쾌감, 답답하다, 마음에 안 든다, 기분 나쁘다, 시시하다라는 뜻의 구어체라니! 제목과 내용의 싱크로율이 놀라웠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촌철살인의 제목 아닌가!

 

198093일부터 10일까지 칠레 소년 마티아스가 겪은 일주일을 그려낸 성장 소설. 나름 기대를 안고 첫 장을 펼쳤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설정에서 추리소설의 서스펜스를 기대했나보다.

94. 하루가 지났는데 당최 뭔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루했다.

95. 분위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점점 창대해지면서 나아지겠지, 설마.

96. 설마가 아니었다. 일관적인 답답함이 적립금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일주일이 끝날 때까지. 상실감, 체념, 욕망이 마약, 섹스, 록 음악에 둘러싸여 기분 나쁘게 심장을 눌렀다. 작가의 문장들이 책속에서 튀어나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이토록 답답한 기분, 오랜만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의 장면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틈만 나면 끈질긴 스팸문자처럼 튀어나오던 줄 세우기 말이다. 코카인 가루 줄 세워서 콧구멍에 빨대대고 들이마시는 장면이 잊을만하기도 전에 수시로 출몰했다. 910일까지 지났어도 대체 어느 부분을 보고 성장이라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갑툭튀한 914, 애벌레의 껍질 안에 갇혀 혼란스러워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날개를 펼쳤다. 464페이지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야 성장의 의미가 훅 다가왔다. 매미 같은 소설이었던 거다. 땅속에서 7년을 기다린 후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는 매미처럼 배경의 무게를 견뎌온 주인공은 세상으로 뛰어들려는 액션을 취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미괄식 구성에 가깝다. 끝까지 읽어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감이 온다. 18일 동안의 밤을 지나 겨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소름끼치는 어감이다. 어쩌다보니 나의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반영한 기간동안 붙들고 있었나. 중간에 책을 읽지 못할 이러저러한 사정들이 있긴 했다. 실제로 이 책을 읽은 날은 그 기간 중 8일 동안이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는 날에도 책을 펼치지 않았으니 그냥 읽기 싫었던 거다. 문장 하나하나가 깊숙이 박힌다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로 독자를 지그시 누른다. 주인공이 그의 세계에서 느꼈을 속 터지는 심정을 덩달아 느끼도록 만든다.

무엇이 그런 된장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는가. 다소 거리를 두고 책속의 세상을 바라보면 전체적인 빅 픽처가 보인다. 분위기에 익숙해 지다보면 찾지 못하게 되는 답이 간지처럼 곳곳에 등장한다. 바로 피노체트 군사정권이다. 칠레의 정치적 상황은 도화지 인양 밑바탕에 깔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다. 폭력적인 정권에 찬성표를 던지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몇몇 정치 상황을 연상케도 한다.

부모님 혹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사랑에의 갈증,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선명한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의 좌절, 공허와 무력감은 소설에서 툭 튀어나와 현실을 그대로 물들인다.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가끔은 경험해보았던 감정이다. 소통의 부재, 양키 파워를 선망하는 분위기 등은 도화지에 덧칠해져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얼핏 타락한 개인의 문제로 간주되는 방황이 반드시 그의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게 한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이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뭐 이런 그지 같은 소설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작가들이 그리는 세상을 상상하며 이 책의 내용을 곱씹어보니 내가 간과했던 사실이 보인다. 작가들은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글로 표현한다. 어떤 이는 맑은 햇살 가득한 봄을, 또 다른 이는 녹음 우거진 초록의 숲을 그릴 것이다. 허나 혹독한 겨울이나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는 세상도 현실 안에 버젓이 존재한다. 예컨대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를 바라보는 상황과 비슷하다. 쓰레기가 역겨운 거지 그걸 치우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감사해야하지 않은가. 소설 속 상황이 쓰레기 같은 거지 사진인 듯 적나라하게 상황을 묘사한 작가가 형편없지 않음이다. 얄팍한 겉모습만 보고 깊은 데 자리한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작품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내 취향과 180도 반대편에 자리하는 작품이다. 수채화 같은 세상만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칙칙한 모습을 처발처발한 글은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런 글을 쓸 자신이 없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내 관점으로 보면 작가는 대담한 인물이 된다. 그가 여인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조선시대 윤두수 자화상처럼 눈가의 주름과 군데군데 얼룩진 검버섯과 점들까지 적나라하게 그렸으리라. 완성작을 건네어주면서 한 마디 하겠지. “이게 당신의 현실입니다! 이런 모습인데 어쩔!”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칠레의 생활상에 무지하다보니 소설 속 문장들을 매끄럽게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용어 자체가 생소해서 옮긴이의 주석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읽다보니 독서속도가 느려지고 맥이 툭툭 끊어졌다.

문장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읽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99일에 언급된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서였다. 아직도 선명한 첫 문장을 본 순간, “심봤다!”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안토니아가 개츠비 속 여주인공 데이지를 연상시킨다는 문장에 안토니아의 캐릭터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홀든 콜필드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오마주로 이 책의 주인공 마티아스가 언급된다. 아직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보지 않았다.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니 대략 스토리의 전개는 비슷해 보인다. 칠레의 문화와 책속에 등장하는 록 음악과 인물들, 언급된 책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했더라면 이 책을 좀 더 의미 있게 수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무지함으로 이해의 폭이 좁아졌다고 생각하니 많이 아쉬웠다. 언젠가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늘 추웠던 사람과 한 번의 따스함을 경험한 사람 중 어느 쪽이 추위를 더 잘 버틸까. 한때나마 온기가 스며들었으니 후자가 나을 듯싶지만 의외로 전자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랬던 사람은 관성의 테두리 안에서 적응하며 머물지만, 온도차를 겪은 사람은 그 간격만큼 견디기가 어려워져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될지도.

브라질 리우의 화려함을 맛보고 온 주인공 마티아스가 칠레로 돌아와서 더욱 힘겨워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대로 쭉 살았으면 추웠던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리우에서의 경험이나 록 음악은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 늘 마약에 찌들어 살던 소년이 움찔하며 세상을 향해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어린 왕자에서는 길들인다는 말이 꽤 로맨틱하게 등장한다. 여우로부터 그 말의 의미를 들었을 때 어찌나 간지가 나던지. 이와 대조적으로 푸겟의 길들인다는 최악의 상황에서 언급된다. 작가가 지닌 문제의식이 독보적으로 드러난다. 낯설던 냄새에 익숙해져 길들여지면 나중에는 그로부터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며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함을 말한다.

세상은 관성의 지배를 받은 채 묵직하게 굴러간다. 때문에 변화는 작은 것조차 어렵다. 바꾸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려면 100도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올라야하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전히 물로 존재하기에 얼핏 지루해 보이는 상황 말이다. 말라 온다는 관성으로 굴러가는 빌어먹을 세상 속에 던져져 0도의 물에서 100도의 물까지를 견뎌내야 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 아닐까. 용기내기 직전의 기초 공사와 같은 의미를 담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수증기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물로만 머물 것인가, 수증기로 날아오를 것인가. 경계에서의 용기는 비로소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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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10-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소개글만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진이 빠질줄은... 마케팅에 낚인 기분이 드는군요ㅎㅎ그래도 얻어가는게 있긴 했어요~~

말씀하신 7년을 기다린 매미같은 소설이라는 말이 너무 와닿네요. 땅 밖으로 나와야만 세상을 볼 수 있죠. 본능대로 움직이는 미물과 달리 인간은 달리 보는 관점을 가져야만 전혀 다른 형태로 탈바꿈하는 듯 싶습니다. 그것을 아주 잘 보여준 책이었어요. 나름의 재미를 찾은 게 요거에요ㅎㅎ

저는 칠레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작품속 정권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도 전혀 몰랐어요. 근데 보면 볼수록 남북한 정권과 오버랩 되더라구요. 그래서 더 찜찜했던게 아닌가 합니다. 안그래도 그지같은 내용인데 배경마저 그래버리니 미운정도 안들더군요. 그래도 데미안의 문장처럼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는 노력을 하게 해준 이 작품에 뭣모를 감사함도 들었습니다ㅋㅋㅋ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길들여진다는 것은 참 심오하군요. 악조건도 익숙해지면 개선할 필요를 찾지 않게 되는 현상을 꼬집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봐주셨네요. 99도까지 올라간 물이라도 1도가 부족해서 수증기가 되지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거였네요. 역시 나비종님의 통찰력은 베리 굳입니다^^

이렇게 또하나의 산을 넘었네요. 난코스일수록 정복했을때 더 짜릿한 법 아니겠습니까ㅋㅋ재미는 없었지만 우리가 남긴 영광의 발자국은 영원할 것입니다! 한달간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은 ‘노인과 바다‘입니다. 짧으니까 편하게 읽도록 해요ㅎㅎㅎ

나비종 2019-10-26 14:13   좋아요 1 | URL
저역시 칠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인터넷 정보를 찾아서 ‘음! 나~~쁜 넘!이로군.‘정도로만 이해하고 책을 읽었었거든요. 근데 조금 아까 한 번 더 자세히 찾아보니 그냥 나~~쁜 넘이 아니라 엄~~~~~~~~청 몹쓸 넘이더군요. 군사 쿠데타로 1973년부터 17년 동안 독재 정치를 펼친 인간이었다나요. 1980년에 화려하게 휴가가신 분이 오버랩되었습니다. 91세까지 살다 워낙 원한 관계가 그물망으로 뻗쳐있다보니 무덤이라도 파헤쳐질까 화장해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내용도 있었어요.

이 책의 출간년도가 1991년이더라구요. 피노체트의 독재가 끝난 시기는 1990년이구요. 정치적인 배경이 그 정도였다면 출간 당시 핫한 반향을 일으켰으리라 짐작됩니다. 이 정도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독재정치를 씹는 문장이 많았을텐데 살짝 아쉽네요.^^;

관점이란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세상을 해석하거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특히 더요. 소설 자체의 재미는 없었지만 작가가 언급한 세상의 모습이나 사람들과의 소통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으로 판단해보면 형편없다며 까일 작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재가 끝나자마자 작품을 발표했다는 건 독재기간내내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런 문제의식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감탄했어요.

0도는 얼음과 물이, 100도는 물과 수증기가 공존하는 경계의 온도예요. 같은 액체 상태라도 0도와 100도는 차원이 다른 거죠. 책에서 길들인다는 내용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작가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뭣모를 감사, 난코스 짜릿! ㅎㅎ 격하게 공감이 되어요~ 그 어떤 밋밋한 책이 다가와도 다 무찌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나누는 대화가 좋아요. 책을 3번 읽고 글을 쓰는 느낌이 들거든요. 처음에 한 번, 물감님 리뷰를 읽고 또 한 번, 제 리뷰에 대한 물감님의 댓글을 읽고 다시 한 번. 그 때마다 곤충인양 후르르 탈피하여 지적인 성장을 도모하며 유식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나비종~!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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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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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를 구석구석 살핀다. 겨드랑이 보듯 앞뒤 책날개를 들춰본다. 앞날개에서 저자의 윤곽선을 파악하고 뒷날개에서 파생된 책들이나 연관검색어를 파악한다. 컬러풀한 속지를 조금 바라보며 책과의 연관성을 파악한다. 1페이지부터 시작! 한 권의 책을 읽는 나의 순서도이다.

뒷날개에 한 개 이상 해당된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합니다.’의 체크리스트가 8개 제시되어 있다. 미술책만 펼치면 졸음이 쏟아진다? NO! 미술관을 동물원 간 듯 구경하고 나온다? NO! 일곱 번의 NO!를 지나 마지막 문항을 체크한다. 재미없고 지루한 건 딱 질색이다? 격하게 YES! 이런 목적으로 쓴 책이라면 적어도 집어던지고 싶어지지는 않겠구나.

이 책을 보며 광활한 시야가 깊이 있게 펼쳐지는 장면을 떠올렸다. 여수에 있는 카페에서 본 장면과 겹쳐졌다.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모양의 스카이타워의 67m 전망대에 있던 카페에서였다. 들어갈 때에는 인식하지 못했다. 중앙에 두터운 유리로 된 바닥의 존재를 나올 때가 되어서야 인지했다. 순간 발바닥이 바르르 떨렸다. 발 아래로 펼쳐진 공간감이 확 몰려오면서 자이로드롭을 타고 내려올 때처럼 쭈뼛했다.

 

뭉크, 칼로, 드가, 고흐, 클림트, 실레, 고갱, 마네, 모네, 세잔, 피카소, 샤갈, 칸딘스키, 뒤샹 등 열네 명 예술가의 삶이 작품들과 함께 우르르 심장으로 쏟아졌다.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을 믿지 않는다.(p13)’던 뭉크의 말에, ‘예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과 그의 삶이며, 우리는 죽어버린 자연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p16)’는 생각으로 그려진 뭉크의 작품에, ‘색에 나의 감정을 온전히 담고 싶다(p94)던 고흐의 열망에, ‘정열은 생명의 원천이고, 더 이상 정열이 솟아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게 될 것(p163)’이라던 고갱의 붓끝에, ‘단순함도 아름다운 것(p189)’이라던 마네의 관점에, ‘오직 빛이 보여주는 세상을 솔직하게 포착해 그린(p217)’모네의 인상주의에, ‘그림 속 사물 간에 화음(p237)’으로 완벽한 조화와 균형(p237)’을 꿈꾸던 세잔의 구성에, 수백 개의 시점을 한 작품에 녹여낸 피카소의 혁명에, <나와 마을>(p274)에서 가느다란 선으로 디테일의 극치를 보여준 샤갈의 표현에,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p333)’했다는 뒤샹의 답변에 심장이 후끈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라도 한 듯 말이다.

 

적당한 온도를 지닌 죽을 떠먹듯 가뿐하게 소화시킬 줄 알았다.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을 줄 알았던 거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갑자기 다가오는 뭉클한 느낌에 당황스러웠다.

예술을 한다는 건 고독을 안고 걸어가는 걸까. 나의 심장을 뜨겁게 한 지점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내던 과정이었다. 열네 명 예술가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흐름에 얹혀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표현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 추상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분류되지 않음에 이르기까지. 책에 소개된 미술가들은 사조들의 선구자였다. 첫걸음이란 얼마나 설레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 치열하게 엎치락뒤치락하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를 창조했던 그들의 심장은 한결같은 열정으로 뜨거웠으리라. 그들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며 예술적인 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전율만큼이나 강렬했다. 삶이 이끌었든 누군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든 얼떨결에 문을 열었더라도 독특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매력적인 책이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내용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다.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들을 보면서도 신선했다. 등장하는 미술가들 역시 기존의 틀을 고집하는 보수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조원재작가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틀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리라.

재구성된 에피소드와 작품들을 좇아가다보니 아담한 미술관을 들렀다 온 듯 했다. 작가는 순간순간 지루할 틈 없게 관람객들을 이끌어가는 도슨트이자 전체적인 기획을 영리하게 해낸 큐레이터였다. 기획의도와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인다. ‘뜨겁게 가슴으로 공감하는 미술이 되기를(p7, 들어가며)’ 바란 그의 의도대로 미술가의 삶에 공감했고, 그들의 작품에 마음이 몰랑몰랑해졌다.

사람은 사람으로 큰다.(p226)’며 미술가들의 관계를 통찰했던 작가의 시각도 마음에 든다. 덕분에 감성의 키가 한 뼘쯤 자라났다. 미술이란 예술 분야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색과 형태를 넘어 폭넓은 시각으로 미술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다.

 

역사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화가의 삶과 그림에 담긴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구성된 내용이라 작품들을 감상하며 즐기면 그만이었다. 한데 미술에 대한 책을 읽었건만 글을 더 잘 쓰고 싶어진다. ‘관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합니다.(p326)’ 뒤샹이 한 이 말은 문학에도 적용되는 의미일 거다. 이 책을 문학의 관점에서 읽고 받아들였다. 동일한 작가의 책이 서로 다른 독자에 의해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와 같은 맥락이다.

문학을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예술이 되는 글이 담아야 할 필수 요건이 무엇인지 감이 온다. 유일무이한 작품을 낳은 미술가들처럼 작가도 세상에 단 한 편밖에 없는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리라. 글을 쓰는 관점에서 책속의 문장들을 바라보니 마음에 와 닿는 깊이가 달랐다.

뜨거워진 심장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았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각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삶의 빛이 있을 뿐이죠.(p168)’ 내가 옳다고 여기는 삶의 빛은 무엇일까. 글을 쓰는 것일까. 나만의 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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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10-04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은 청각 예술, 미술은 시각 예술이라면 문학은 촉각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글이 주는 감각은 머리보다 피부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아서요^^

나비종 2019-10-05 08:48   좋아요 1 | URL
따뜻한 글을 부드러운 감촉으로 심장을 어루만지고, 슬픈 글은 따끔한 감촉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 고통을 주죠. 음.. 심장으로 스며든 글이 피부감각으로 감지가 되는 촉각 예술이 맞는 것 같습니다.^^
 
프랑켄슈타인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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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공포인가. 다리 한 짝쯤은 질질 끄며 미역 줄기인 양 늘어진 머리털에서 케첩 방울 뚝뚝 떨어뜨려 주거나 나사못 서너 개 머리에 박고 튀어나올 것 같은 눈깔을 희번덕거리는 미니 식빵 두상을 보유한 괴물이 비, 바람, 번개 3종 풀세트로 장착한 오밤중에 펄럭이는 커튼에서 갑툭튀 정도는 해줘야 으헉! 등골이 오싹하리라.

풍문으로 수없이 들어 읽기도 전에 벌써 읽어버린 느낌을 주는 <프랑켄슈타인>. 공포영화는 아예 보지 않고 TV에서 비스무레한 장면이라도 등장할라치면 배경음악의 인트로 단계에서부터 어김없이 두 손으로 덮이던 얼굴. 뒤표지를 보니 작가의 의도가 적혀있다. ‘우리 본성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일깨워 소름 돋게 만드는 이야기, 읽는 이가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피가 얼어붙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책장을 펼치기 전에 나란 인간은 마음의 준비부터 해야 했다.

후아~ 후아~ 심호흡 몇 번, 먼 산 몇 번 바라보다 겉장을 넘겼다. ! 이제 드루와~! 다행히 배경 그림은 없어. 꿈에 나올만한 선명함은 없다는 거지. 어여 드루와~ 라며 껄껄거리고 싶... 호루라기를 불기도 전에 심장이 부정 출발을 해 버렸나.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갯벌의 맛 조개 구멍처럼 쏙 들어가 저 혼자 펄떡거리는 마음이라니!

 

하도 널리고 널려서 오히려 구미호보다 이미지가 친숙한 괴물. 섬뜩함을 스멀스멀 풍기며 책 속을 낱장 낱장을 휘젓고 싸돌아다니는 내용인 줄로만 알았더랬다. 편견이란 얼마나 두터운 안대인가. ‘같은 사건이라도 경험의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체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따라서 모든 이야기에는 이면이 있음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p310, 해설)’ 무서우니즘을 체험하는 줄 잔뜩 쫄며 들어갔다가 깊이 있는 뭉클함을 안고 나오다니. 허를 찔린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동안 멍했다.

소름이 돋기는 했다. 이 모든 걸 열아홉 살에 생각했다는 작가의 천재성이 확 다가와서. 그 나이에 나는 뭐했다냐. 쩜쩜쩜. 하다못해 지금의 나이에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올려다보며 비루한 나의 글을 내려다보며 점점 쪼그라드는 자신을 붙들었다.

또 소름이 돋았다. 이제껏 프랑켄슈타인이 괴물 이름인 줄 알았던 나의 무식함에. 프랑켄슈타인이 멀쩡한 인간으로 나와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다. 뭐 과학실에서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 멀쩡하다 볼 수는 없지만. 소설의 내용을 전혀 몰랐으므로 이 인간이 나중에 윗옷 좀 가닥가닥 나풀거리면서 근육질 오빠로 변하는 줄 알았던 거다. 짐작하신 대로다. 잠시 헐크랑 헷갈렸다. 가만있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였나. 흐아! 더 이상의 무식은 이제 그만!

 

내가 꼽는 이 책의 매력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놀라운 흡인력이다. 시소처럼 번갈아 솟아오르며 감정과 행위의 당위성을 어필했던 두 캐릭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이 둘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까. 끝까지 가늠할 수 없어 빨려들 듯 이야기에 집중했다. 감탄할수록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둘째, 섬세한 심리묘사이다. 이야기의 힘도 대단했지만 내내 뭉클했던 건 이름조차 없어 괴물 혹은 악마로 지칭된 캐릭터의 감정선 이었다. 그러데이션 되는 노을빛처럼 이토록 섬세한 심리 변화를 영상으로 구현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래, 글의 힘이란 이런 거지. 문장을 통해 서서히 전달되는 마음에 동화된 나는 점점 설득되고 있었다. 점진적인 괴물의 변화에 마음이 아팠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p194)’ 이런 말을 꺼내기까지의 과정이 점층적으로 묘사되었기에 무모한 살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정당방위가 아니고서야 수긍이 가는 살인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셋째, 공간적 배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이다. 작가는 따뜻한 가족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가족은 크게 두 그룹이다. 그들로부터 말과 글과 인간세계를 배우며 괴물이 속하고 싶어 했던 가족과 프랑켄슈타인이 속해있던 가족이다. 구성원들은 모두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해주며 온기를 나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질시했던 계모로 인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17세에 유부남과의 도피를 감행한 작가. 생후 11일 만에 사망한 첫 딸, 동복언니와 남편의 전처의 자살. 19세의 감성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들이었으리라. 그런 그녀에게 위안을 준 대상 중 하나는 바로 자연의 풍광이 아니었을까.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고 품위로 가득한 자연의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삶의 덧없는 근심들을 잊게 하는 힘이 있었다.(p128)’ 알프스와 북극의 빙하와 주변 풍경들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그녀가 묘사하는 풍경들은 BGM처럼 작품에 깔리면서 설원의 냉기가 흐르도록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한 장소들을 성지순례 하듯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된다. 이에 대비되는 소설 속 캐릭터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넷째, 작가의 관점이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학자를 말하면서 작가는 농부의 삶을 언급한다. ‘인간을 먹여 살리기 위해 땅을 일구는 일이 인간의 죄악을 목도하고 가끔은 공범자가 되는 일보다는 훨씬 훌륭한 일이잖아. 그래서 부농의 삶이 명예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계속 상대해야 하는 판사보다 행복한 직업이라고(p82)’ 농부라는 직업은 직업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숭고한 영역의 일이라 생각한다. 없던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니. 농사를 짓는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부는 이를 무엇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햇살과 바람과 대지와 비와 나비와 벌과 미생물 등의 힘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해서 무엇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을 마주하는 존재, 바로 농부이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사람의 영혼이 겉모습처럼 형상화된다면 어떨까. 거리에서 마주 다가오는 낯선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영혼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스케치해볼 때가 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보이는 모습만큼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실제로 나의 미모를 드러낼 일은 없으니 마음껏 멘트를 투척한다. ! 우리 가족이나 내 얼굴을 아는 인간들만 이 글을 안 보면 된다. 보안 유지는 문제없다. 내 주변인들은 나의 공간에 별관심이 없으니. 나는 잠시 미모의 인간으로 거듭난다. 후후.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말은 번드르르 하다. 걸어가다 훈훈한 인간이 말이라도 걸어올라치면 첫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입 꼬리가 올라가는 세속적인 인간이 당당하게 꺼낼 말은 아니지만. . 몰랑해지는 마음은 재채기처럼 당최 감출 길이 없다. 취향을 저격하는 남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지 같이 후진 드라마를 얼마나 숱하게 섭렵했던가. 이 책을 보며 반성한다. 겉모습만으로 괴물을 판단하고 그의 선의를 팽개치는 인간들을 보며 시각적인 요소가 대상을 성급하게 재단하는 잣대임을 새삼 깨닫는다. 괴물로 하여금 고민 끝에 한 걸음 다가가도록 용기를 준 최초의 존재가 눈이 먼 아버지라는 점은 이런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껍데기는 가라!

 

과학자로서의 책무와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 ‘새로운 종이 생겨나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를 축복하리라.(p66)’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학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희열이 느껴지는 일일 터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절대 신의 위치에 선 듯 우쭐했을 것이다.

영화 <쥐라기 공원>이 떠오른다. 알에서 깨어난 공룡이 맨 처음 인간을 보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해를 끼질 수 없도록 한다. 또한 한 가지 성만 지닌 공룡을 탄생시키면서 생명체의 본성을 관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과학은 본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멸종으로 치 닫을 만한 극한 상황에서 일부 공룡이 성전환을 한다. 자체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통로를 찾아낸 것이다. 두 작품 속 모두 인간의 오만이 겹쳐진다.

복제인간에 대하여 수업 시간에 언급한 적이 있다. “과학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할 거다. 하지만 생명에 관한한 이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나사나 타이어 같은 부속품을 교체하는 개념이라면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병에 걸린 이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대환영할 일 일거다. 하지만 쌤은 완전체로서의 정체성이 존재하는 영역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해야한다고.”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고백하듯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열정적인 광기로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나는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으니, 내 능력이 닿는 한 행복과 복지를 보장했어야 합니다.(p294)’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의 잔상이 남아서일까. 이어서 읽은 이 책 곳곳에서 동양의 연기설과 무소유의 개념을 발견하며 새삼 놀란다.

훗날 내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그 격정의 탄생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마치 산을 따라 흐르는 냇물처럼 미미하고 거의 잊힌 원천에서 솟아나는 걸 알게 된다.(p46)’ 이 문장을 본 순간 연기설이 떠올랐다. 단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반드시 원인이 있고 원인이 달라지면 결과가 변하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없다는 개념 말이다.

작가의 남편이 쓴 시 안에는 <반야심경>의 무(無)의 개념도 등장한다. ‘인간의 어제는 결코 내일과 같지 않으리니,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상뿐!(p129, 퍼시 비시 셸리)’

싸늘할 때 몸을 따뜻하게 덥혀줄 불도 있고, 배가 고플 때 먹을 맛있는 음식도 있는데. 훌륭한 옷을 입고 있고, 서로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날마다 애정과 친절로 가득한 표정을 서로 나누지 않는가. 그들의 눈물은 무슨 뜻일까? 정말로 고통을 표현하는 걸까?(p147)’ 최소한의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무소유의 개념이다. 이런 관점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았던 괴물의 순수를 어떻게 생김새만으로 괴물로 바라본단 말인가.

 

선과 악이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다.(p300)’ 괴물의 존재로 공포를 유발하려는 의도였다면 작가의 화살은 적어도 내게는 빗나갔다. 괴물과 인간의 심리전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본성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이란 존재의 실체는 백지 상태의 괴물과 대비되며 도드라졌다. 이 책을 읽다보면 과연 어떠한 존재를 괴물로 지칭해야 할까 기준이 모호해진다. ‘!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중략)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p129)’ 무엇이 공포인가. 누가 괴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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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9-2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서운 걸 안좋아하시는 줄도 모르고 제 맘대로 선정했네요. 다행히 공포스런 내용은 아니었지만요. 나비종님도 작가의 천재성을 주목하셨군요. 천재 작가들이 세상에 수두록한데 왜 메리 셸리는 유독 특별한 느낌을 주는 걸까요. 단지 19세에 이 책을 써냈기 때문만은 아닌데 말이죠 ㅎㅎ

집어주신 네 가지의 매력에서 1~2번은 저도 너무 공감했고, 3~4번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 몇가지 코멘트를 답니다. 말 그대로 두 가정이 나오는데 둘다 말로는 좋지 않았죠. 그것이 작가의 평탄치 않았던 가정사가 반영된 거라 볼 수 있겠군요. 그런 작가에게 위로가 되준건 자연의 풍광이라 하셨는데요, 제가 계속 눈에 밟히던 것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스토리나 메시지와 관련도 없는 자연 풍광의 설명이 왜 이리 자주 나오는 것인가. 이것때문에 별5개에서 1개 깎았더랬죠. 근데 제가 캐치못한 부분을 설명해주시니 작가의 의도가 납득이 갑니다. 또한 과학자와 농부의 이야기도 생각을 못했어요. 알아주지 않는 농부의 위대함은 과학자의 위대함과 같다는 메시지도 이제서야 신선하게 와닿습니다.

그리고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하는 실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네요. 저도 그 점에 대해 생각이 많았습니다. 정치인들이 자주 써먹는 프레임 씌우기가 생각나네요. 흡연자들은 이렇다, 페미니스트는 저렇다 등등 전체를 싸잡아 결론내려버리니 해당 안되는 사람들은 억울할 뿐이죠. 괴물도 그랬을 거 같아요. 괴물이 처음 사람들에게 다가갔을때 먼저 비명지른 사람을 따라 옆사람들도 겁먹고 줄행랑쳤겠지만, 정작 괴물은 아무런 액션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이처럼 선입견이란게 건강치 못한 사회를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깝더라구요. 개인적으로도 반성되고요^^;

쥐라기 공원을 이 책과 접목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ㅋㅋ 인간의 오만함으로 파멸에 이른 여러 작품에서, 과학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을 건드려 재앙을 초래했다는 공통점이 아주 딱이네요! 인간은 인간을 낳고, 괴물은 괴물을 낳는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괴물을 만든 인간 또한 괴물이라 불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우리는 인간의 추악함을 알만큼 아니깐요. 오늘도 내안의 헐크를 깨우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의 마음 수련을 하며 삽니다 ㅎㅎㅎ

9월 한 달도 수고 많으셨어요. 다음 책도 좋은 리뷰 부탁드립니다 ^^

나비종 2019-09-29 00:54   좋아요 1 | URL
이것은 댓글인가 리뷰인가 댓글의 탈을 쓴 리뷰인가! 서로의 공간에 거의 리뷰 수준의 댓글을 쓰고 있군요.ㅋㅋ

무서운 걸 안좋아한다기보다 무서운 게 무서울 뿐입니다.^^; 또, 점점 크면서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워지게 되네요.
메리 셸리가 천재라 느껴지는 이유는 그 나이의 감성 이상의 깊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IQ의 수치를 계산하는 식 중에 나이가 포함된다고 들었어요. 평균의 나이대보다 뭔가를 더 많이 할 수 있을 때 천재라는 말을 붙이잖아요. 미적분을 한다는 사실보다 미적분을 10세에 한다면 감탄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책 맨 뒷부분에 나오는 메리 셸리 연보를 보면 <프랑켄슈타인>을 쓰기 시작한 이듬해에 호수와 빙하와 유럽 나라들을 여행한 기록이 출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프랑켄슈타인>은 그 다음 해에 출간되었구요. 빙하나 풍경에 대한 여행 기억이 생생해서 그것이 이 책에 유달리 많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생명의 탄생은 그게 뭐든 생각할수록 너무 경이로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생각을 하며 농부를 바라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답니다.

맞아요! 겉모습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더욱 크더군요. 오해와 편견의 주범입니다. 사람을 볼 때마다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며 내면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구요.^^;

이 책에서 생물학적인 특성을 기준으로 인간과 괴물을 구분하여 지칭한다면, 독자들은 내면의 특성을 종합하여 인간인지 괴물인지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가 의도한 점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음 수련ㅎㅎ 책읽고 글쓰고 토론하는 과정이야말로 매우 좋은 방법이겠죠? 다음 책을 향해서 또 부지런히 걸어가야겠습니다.^^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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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이었던 것 같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반야심경>의 무려 260개의 글자를 외우도록 끌어당기던 막강한 힘은. 아이에게 사탕은 돌멩이계의 다이아몬드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나. 몇 살 때인지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워낙 달달 외웠던 탓에 아직도 익숙한 유행가 후렴구처럼 툭 치면 '고득아뇩다라~'가 바로 튀어나올 정도이다. 어머니께서 공양주로 일하시던 동네 절에서는 주말마다 어린이 법회를 열었다. 언니, 동생들과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고 밥을 먹고 스님의 말씀도 종종 들었던 기억이 난다. 딱히 작정하고 불교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계신 거기, 절이 있었고 학교 가듯 친숙한 장소였던 까닭이다.

코를 막고 양파를 먹으면 달짝지근하고 사각거리는 그것이 양파인지 사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는 냄새와 함께 맛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코를 틀어쥔 손을 떼어내는 순간 매콤한 냄새가 훅 스치며 이런! !!” 임을 깨닫는다. 반가웠다. 이제 양파 맛이 나는 양파가 양파임을 알게 될 거라서. 단지 글자의 배열에 지나지 않던 글귀의 뜻을 알려줄 책이라는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단순한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의 이름을 불러 꽃으로 피어나기 직전의 두근거림이랄까.

 

후아! 그래서 대체 반야바라밀다심경이 무슨 뜻이냐고요! 제목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광활했다. 불교의 4법인, 연기, 동양 문명의 테마, 3, 팔정도, 사성제, 계정혜, 슐로카, 3, 금강경, 선불교, 대승불교, 삼승, 비구, 아라한, 6바라밀, 오온, 육불, 이런 십..! 영화 <알라딘>에 나올 법한 양탄자를 타고 마음은 슝 날아갈 준비를 마쳤건만 푸르르 고장 나서 불시착한 채로 비포장도로를 꿀렁거리며 지나온 기분이다. 멀미, 멀미, 이건 멀미였다. 거침없이 밀려드는 불교 지식의 쓰나미를 감당하지 못한 나는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유혹을 언젠간 가겠지, 이 또한 지나갈 거야이제껏 없던 불심으로 뿌리쳤다. 여러 스님들과 싯달타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만 해도 제법 여유가 있었단 말이다. 145쪽에 와서야 반야가 지혜 혜(慧)의 음역임을 알았다. 숨이 찼다.

TV 속에서 클립 영상으로 보던 저자는 거침없는 인물의 표상이었다. 그의 책은 처음 접한다. 강연 투로 서술된 책속의 문장들은 거침이 없었지만 혼자만 거침없고 장황하다는 느낌이다. 종교와 철학과 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보유하신 분이라는 것은 잘 알겠는데 그 서술방식이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기를 원하는데 저자는 한달음에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서 설명하고 다시 불쑥 올라가는 방식이다. 다소 어수선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저자의 걸음을 따라가다 지쳐버린다.

 

기다리던 부분은 4<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가 시작되는 201쪽부터 등장하였다. 하아! 이 스무 장을 보기위해 200쪽의 걸음을 동동거리며 기어왔던가. 막상 해설은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그것도 배경지식이라고 꾸역꾸역 종이에 메모하면서 공부한 효과가 마지막 장에 와서 효과를 발휘했다. 이러려고 그렇게나 열심히 불교의 흐름과 용어를 펼쳐놓으셨던가. 머쓱해졌다.

<반야바라밀다심경>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의 핵심을 260개의 문자로 요약한 단행본이다. ‘심경은 핵심을 요약한 경전이란 뜻이다. 이 책에 나온 것은 삼장법사 현장이 저술한 것이다. ‘반야지혜를 의미하는 음역이며, ‘바라밀다극치, 완성을 의미한다. 합치면 지혜의 완성이다. 반야경은 대승불교의 출발이다. ‘대승큰 수레로 대중을 향해 열려있는 불교이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보살보리살타의 줄임말이다. 지혜와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리와 본질, 실체를 의미하는 살타가 합쳐진 말로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이다. 이는 수행자에 국한된 소승불교가 대중에게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당신도 보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반야심경>의 지향점은 무(無)이다.

 

책속에 언급된 일화와 이론들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일상에 바로 적용하여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팁을 몇 가지 얻었다.

첫째, 경허 스님의 이야기를 통한 방하착(放下着)’이다. 정작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넌 스님은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이를 지켜본 사미승은 그 생각을 계속 내려놓지 못하며 생각으로 여인을 업고 가는 셈이 되었다는 메시지이다.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종일 실험 평가를 하느라 5분도 쉬어보지 못했다. 화학 실험이라 안전사고가 일어날까 예민했고 빈 시간이면 다음 반 실험을 위한 준비에 분주했다. 피곤의 극치는 마지막 반에서 터졌다. 평소 수업 태도가 그지 같아서 들어가기 전에 몇 번 릴렉스를 한 다음 들어가는 반이다. 역시나 나머지 반들에게서는 일어나지 않던 일이 발생한다. 지금 생각하면 사고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단지 내말대로 실험하지 않은 것뿐인데. 순회하는 내 눈에 띤 장면은 지시약을 1방울 넣으라는 나의 주의사항을 깔끔하게 저버리고 뚝뚝 떨어지는 방울들과 보란 듯이 보라색과 진청색으로 그득 채워진 홈판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희미한 파스텔 톤으로 눈물 몇 방울 정도의 양이 들어있어야 할 그곳이, 보여서는 안 되는 색깔을 띤 단청 색 찰랑거리는 오줌단지가 되어버린 거다. 이거 누가 그랬어! 늘 그렇듯 결과는 있으나 원인 제공자는 밝혀지지 않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누가 그랬다고 말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조원 전체를 태도에서 감점을 한다고 버럭 하니 몇 마디씩 변명이 쏟아진다. 심증 가던 그 아이는 바로 옆의 조였다. 아이의 문장 하나가 마음에 꽂힌다. 아이들이 방해된다고 만져보지 못하게 해서 떨어뜨려보고 싶어서 한 방울 넣어본 거예요. 족히 10방울은 넘어 보이는 색깔을 현미경 수준으로 축소한 아이의 마음이 순간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깔 확인은 다 한 거야? . 얼른 뒷정리 해.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아까의 버럭이가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경허 스님의 내려놓음이 생각났다. 그 순간까지 버럭이를 놓지 못하고 업고 왔구나. 뭐 좋은 거라고 붙들고 있나, 얼른 내려놓아야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둘째,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싯달타 깨달음의 핵심이다. ‘어떠한 사물도 그것 자체로 단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변화가 오면 결과는 반드시 변하게 마련입니다.(p123)’ 사랑이나 사람이 변하는 것도 연기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던 거다.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없는 것이었던 거다. 의식하지 못한 원인들이 계속 쌓이고 쌓인 것이 갑작스럽다고 느껴지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조금 더 세심하게 잘 바라봐야함을 깨달았다. 분명 최초의 한 방울이 있었을 거다. 그걸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셋째,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나는 좆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비하와는 전혀 다른 의미일 터이다. 나를 바라보며 겸손해지고 욕심을 버리라는 의미라 해석한다.

 

<반야심경> 해설을 음미해보니 나의 생활 패턴에 대한 학문적인 지지 기반이라도 얻은 듯 뿌듯하다. 어렴풋이 해답을 얻었다. 비행기를 타고 뿌연 구름 속을 지나며 여기로 가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시야가 탁 트이며 맑아진 공간으로 들어와 버린 느낌이랄까.

260개의 문자 중 자주 등장하는 한자는 공(空)과 무(無)이다. 몇 번이나 나올까 헤아려본다. 공은 7, 무는 21번이다. 흥미로운 점은 초반에는 공이 계속 등장하다 무가 나타나면서 릴레이 바턴을 이어받은 듯 공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무소유와도 연결이 되는 없을 無. 글자의 의미와 느낌이 참 좋다.

어느 순간부터 갖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심장 언저리를 맴도는 생각이다. 물건을 볼 때면 이것도 결국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무소유를 지향하기로 했어. 나를 위한 물건을 사는 일이 줄었다. 지금 가진 옷, 구멍 날 때까지 입을 거야. 주변인들에게 웃으며 말하는 나. 옷을 사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나마 소비하는 분야가 책인데 지금 책장에 꽂힌 책이라도 다 읽자 하니 현저하게 구입량이 줄었다. 허무함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홀가분하다는 느낌이 섞여 점점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사물에도 기가 있어 색으로 표현된다면 어떨까. 손길이 닿은 횟수만큼 다른 색으로 진화하는 거다. 손이 많이 닿은 물건일수록 찬란하고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전혀 닿지 않는 것은 흑백으로 음영 처리되어 콕콕 집어내어 버릴 수 있도록. 무소유의 관점에서 집안을 바라보니 버릴 것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몇 년 간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을 찾으면 되는 거다. 서른 한 가지도 넘게 골라내는 재미가 붙는 중이다. 버리니까 공간이 생기고 공간이 생기니까 숨통이 트인다. 물건 대신 공간을 얻는다. 새로운 공간이 신선한 공기로 채워져 덩달아 가벼워진다.

삶은 수학이 아니다. 3-3=0 이라는 수식의 수학적 결론은 0이지만 삶에서는 + 가 제로로 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는 까닭이다. (無)로 돌아가는 과정이란 이런 걸까. 매순간 변화하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더하거나 덜어내면서 0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 말이다. 감당하기에 버거운 물건들을 소유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은 물건을 덜어낼 시기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버릴 생각이다. 감정이 될 수도 있고 관계이거나 사물이 될 수도 있는 무언가를 향한 치열한 영점 조절을 해볼 작정이다.

 

 

p112, 8째줄 : 못했다는데 못했다는 데

p130, 밑에서 3째줄 : 영예 명예

p169, 2째줄 : 있어났는데 일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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