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 - 교사의 내면을 세우는 수업 성찰
김태현 지음 / 좋은교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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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전문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찜찜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의사, 판사 등과 같은 전문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수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45분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45분에 나머지 시간이 우울해진다.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다. 수업 시작 전이면 매번 긴장한 상태로 교실의 앞문을 연다. 학부모님이나 학생들과의 대화 기술에만 다소 여유가 생겼을 뿐 생활 지도도, 진로지도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한데 이 책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저자와 같은 교육관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과연 전문직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류의 책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종일 요리만 하던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가수들이 사석에서는 노래하기를 꺼리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거다. 수업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도 상당한데 굳이 시간을 내서 읽는 책에서까지 수업을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책꽂이 구석에 놓고 한동안 읽기를 미루다 독서 모임 날짜의 압박감으로 첫 장을 펼쳤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 공개수업 후 오고 가는 흔한 이야기들을 예상했다.

 

힘을 빼고 펼쳐서인지 책에 실린 내용은 생각보다 큰 파장으로 나를 흔들었다. 어려운 책이 아니었는데도 책장을 빨리 넘길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기간 내내 교실에 들어서면 교사가 의도하고 있는 배움이 무엇이었는지(p41)’라는 문장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이 수업에서 어떤 배움을 의도했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당혹스러웠다.

낯선 느낌이었다. 이제야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우연히 학생의 얼굴이 눈에 띈 적은 있어도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본 기억은 없다. 나는 누구를 바라보고 수업을 해왔던 걸까.

교단에 처음 서는 신규교사처럼 당황스러웠다. ‘‘수업을 왜 하는지(Why)’.‘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What)’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How)’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p73)’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했다. ‘, 무엇을은 내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교사이니까 수업을 하고, 교과서에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거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라니! 저자의 말대로 나는 주로 어떻게에 방점을 두었던 거다. 28년 동안 학생들과 마주하며 내가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수업을 꽤 잘하는 교사라고 생각해왔다. 교생선생님이 와서 다른 과목 수업을 참관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문의해오면 언제든지 오라고 호방하게 말하곤 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그만큼 열심히 가르쳤으니까.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열심히는 가르쳤을지 몰라도 학생들에게도 그만큼의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한 번도 학생의 시선으로 가르치는 나를 바라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썰렁한 농담으로 학생들을 웃겨주고 교과 지식을 쉽게 암기하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행위를 잘 가르치는 것으로 착각했던 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험 대비용 수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지식 암기의 기술은 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배움과 입시의 공존이 가능할까. 늘 딜레마처럼 안고 있는 문제였다. ‘배움과 입시가 같이 갈 수 있고, 수업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배움이 있는 수업이다.(p80)’ 교사라면 누구나 안고 있을 고민을 이렇게 시원하게 터뜨려 주니 속이 후련했다.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시험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배움과 입시를 서로 다른 갈래 길에 세우고 있던 나는 학생들의 내신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배움 자체를 아예 수업에서 배제하고 있었던 거다. 내 수업이 기대고 있던 핑계가 허물어졌지만, 대신 저자의 문장을 통해 희망을 품게 되었다.

 

5년 전, 행성의 특징을 주제로 모둠별 공개수업을 한 적이 있다. 31명의 학급 학생보다 참관하는 교사 수가 더 많아 칠판 쪽을 제외한 교실의 세 면이 교사들로 포위된 채 진행되었던 수업이다. 심적으로 부담이 컸던 수업이라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다 끌어모아 겉에서 보기에는 찬란했던 수업이었다. 몇 번의 컨설팅 협의회로 내용도 보완해가며 몇 달 정도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모둠별 학생들은 행성별로 우주 뉴스, 가상 체험,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사전에 UCC를 쵤영하여 수업 시간에 시연하고, 과학송을 만들어서 현장에서 발표하는 모둠도 있었다. 수업 후 이어진 강평회에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를 도입했다며 반응은 꽤 좋았다.

학생들은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서 UCC를 촬영하며 미션을 수행하려는 열정을 보였고, 졸업 후 찾아와서도 모둠별로 준비했던 기억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고 수업을 했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하면 다양한 활동 장면을 보여줄까에만 몰입을 한 나머지 학생의 입장에서 얼마나 많은 배움이 일어났는지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때의 수업에서 의미 있는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내 수업에서 부족했던 것은 경계였다. 작년까지의 수업을 되돌아보면 일부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로 인해 간혹 소란해지는 분위기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경계가 있지만 존중이 있는 수업을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p105)’ 겉으로는 학생들을 존중한다고 말하며 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포기하고 좌절하는 마음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45분 내내 열심히 수업해서 뿌듯해했던 기억도 난다. 혼자만 신나서 떠들었던 내 모습이 학생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수업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모습보다는 학생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p42)’,‘가르침과 배움은 결코 함께 가지 않는다.(p149)’는 문장 앞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학생들에게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여백을 주었던가. 가끔 던지는 질문에서도 잠시를 못 참고 내가 먼저 냉큼 답을 말해버리기 일쑤였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학생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르칠 내용을 학생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159~160)’ 촌철살인의 문장에 세수도 안한 민낯을 들킨 이처럼 당혹스러웠다. 교사라서 알 수 있는 심리, 교사라서 할 수 있는 공감이었다. 학생의 시선에서 나는 어떤 교사였을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읽기 전과 후의 나를 달라지게 하는 책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찬사를 보내도 내 행동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내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책으로 분류된다. 이런 이유로 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는 매우 좋은 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아이들의 눈동자를 좇았다. 그들의 반응과 표정을 살폈다.

좋은 수업은 무의미한 교과 지식에 이름을 붙여 의미 있는 지식으로 바꿔주는 수업이다.(p180)’,‘교과 지식은 삶 속에서 복원되어야 한다.(p185)’,‘‘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해야 한다(p72)’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며 좋은 수업을 생각했다. 좋은 수업도 좋은 책처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수업을 받은 후에 학생들의 행동이나 인지나 감성이 달라졌다면 배움이 일어났다는 증거일 테니.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당장 내일의 수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기말고사가 끝나고 내일 할 수업을 구상한 것이 있는데 전부 다 바꿔보려 한다. ‘가르침에서 배움으로 기준을 바꾸니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지금이라도 달라지고 싶다. 수업에서 를 만나고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 좋은 수업을 상상하니 오랜만에 설렌다. 코끝이 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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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0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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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이런 기분일까. 정신없이 꿈을 꾸다 퍼뜩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는 광고 속 장면도 떠올랐다. 동화 <파랑새>의 아이들이 깨달은 사실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니 한 줄의 문장이 남았다. 그 순간의 뭉클함은 556쪽을 건너온 나의 시간에 주어진 선물이었고, 책 안에 담겨 138억년을 건너온 우주의 시간이 주는 감동이었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서 보았으나 정확히는 몰랐던 용어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생소한 내용도 많았다. 종교, 사상, 인물, 과학, 역사적인 사건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복잡한 지식은 잠시 내게 머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증발했지만, 결국 굵직한 느낌표 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제로 베이스에서 세상을 향해 출발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을 향해 첫걸음을 옮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편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얻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하는 책이었다.

 

우주와 인류를 보여주는 1장과 2장에서 다중 우주를 건너올 때는 물속에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처럼 갑자기 마음이 확 넓어지는 듯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볼 때면 각기 다른 우주들이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4차원이 사유의 한계였던 나에게 0차원과 11차원은 등장부터가 충격이었다. 존재 가능성을 떠나 누군가는 그런 세상을 상상했음이 놀라웠다.

아이들이 각기 다른 우주라는 생각이 들자 많은 행동이 이해되었다. 자신만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다른 세상일 것이니 말이다. ‘담임교사라는 시도 지었다. ‘일찌기 만나지 못한/ 스물 여섯 개의/ 각기 다른 우주를/ 마주하는 일이다/ 이전에도 접한 적 없고/ 이후에도 접할 일 없는/ 단 한 번의 우주를// 내 작은 몸짓으로/ 비눗방울 우주가 탓/ 허물어질까/ 무심코 한 행동에/ 당구공 우주가 퉁/ 튕겨져나갈까// 그러므로/ 매번 설레는 일/ 매순간 긴장되는 일/ 블랙홀같은 우주에 훅/ 빛으로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3장에서 7장까지는 베다, 도가, 불교 등의 동양 사상과 철학, 기독교 등의 서양 사상이 등장했다. 위대한 스승들은 한결같이 자아는 곧 세계라는 하나의 과녁을 가리켰다. ‘범아일여, 도덕일치, 일체유심조, 관념론, 내면의 신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방식만 달랐을 뿐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지나온 삶에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몇몇 장면들이 있다. 블랙홀 안에서 헤매듯 한 줄기 빛조차 느껴지지 않던 공간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의 중력으로 매일 당겨지던 시간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전혀 아쉬운 마음이 생길 것 같지 않던 상황들, 수분 잃은 얼굴처럼 푸석거리던 감정들. 가까스로 버티며 지나왔던 길들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탓이라 생각했다.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생길 무렵에는 내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지만 이마저도 정답은 아니었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p553)’ 닫아두고 있던 문들을 열고 깊이 들어가 보니 나의 세상을 슬픔으로 채우고 어둠으로 색칠하며 걸어온 건 나 자신이었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세워놓은 자기합리화라는 방어막이었다.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던 과거의 사진들이 앨범 속에서 깔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탁월한 통찰력으로 세상과 자아의 합일을 소개해준 작가는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 일러 주었다. 그의 친절함에 다시 한번 반했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할 것. 둘째, TV를 끄고 SNS를 닫고 나의 하루 중 버려지고 흩어진 시간을 모아 나의 시간을 만들 것. 셋째, 그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질 것. 넷째,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할 것. 다섯째,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지고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갈 것.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질 것. 여섯째, 남은 삶에 대한 거시적인 계획을 세울 것. 일곱째, 천천히 나아갈 것.

두 페이지에 걸쳐 에필로그에 나와 있는 문장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천천히 따라가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졌다. 마음을 청소하고 새로운 우주를 담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깨어있는 첫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의 문을 열어 천천히 세상을 담았다. 이미 내 안에 있으니 담는다기보다는 선택해서 드러낸다는 표현이 적합할까. 찬란한 그림이 그려진 그림을 검은색 크레파스로 덧칠하고 조금씩 칼로 긁어내는 스크래치 기법처럼. 이 사람을 보고 저 소리를 듣고 이 물건을 만지고 저 향기를 맡고 이 음식을 음미하고. 선택하고 싶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내게 선택되지 못한 대상은 다른 세상에는 존재할지 몰라도 나의 세상에는 없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풍경들은 감각 기관을 통과하는 순간 내 안의 우주에서 유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나만의 의미가 되었다.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마음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p244)’ 세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다. 날마다 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건 나의 삶을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이었다. 내가 만든 우주는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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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황 2020-06-30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동하고 또 감동해요 멋져요~~~ 책을 읽는 맛을 더하기(+) 해주는 리뷰는 매번 만남을 기대하게하는 설레임입니다. ♥

나비종 2020-07-19 20:35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언니^^ 그날 잠시 얼굴이라도 비추고 싶었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병원도 겨우 갔거든요. 이번에는 체한 게 생각보다 오래 갔네요. 약도 몇 주치를 먹고 위가 많이 약해졌나봐요. 몸이 깔끔하게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겨우 드문드문 책을 읽을 정도는 되어요. 중요한 시기에 아팠어서 여러 가지 일정이 꼬여버렸어요.ㅠㅠ
학교에서 하는 독서모임 책의 독후감을 방금 올렸어요. 이제 우리 책도 얼른 읽으려구요. 다음 주에 봬요~^^
 
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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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매력은 세월의 묵직함을 건너야 빛을 발하는 듯하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 1파운드 살덩이의 난제를 핏방울 패러독스로 깔끔하게 해결하는 통쾌함. 동화를 읽던 10대에 접했던 <베니스의 상인>은 엄청 유명한 작가가 가볍게 던진 유쾌한 이야기 정도의 의미였다.

크로키로 묘사되었던 인물을 정밀묘사로 접한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생경하면서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양감과 질감에 제목만 같은 전혀 다른 책을 읽은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해설과 옮긴이의 말 등을 제외하면 불과 150여 쪽 되는 책이 남겨 놓은 건 혼란과 물음표였다.

 

금 상자, 은 상자, 납 상자. 극의 흐름상 금도끼와 은도끼 등 쌍도끼를 들고 나타난 산신령의 이야기처럼 정답이 이리라는 건 쉽게 예상되었다.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허울 좋은 가치. 이를 대변하는 금 상자를 마주한 등장인물의 어리석음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은 상자였다. 몇 번을 읽어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당시 화폐로 이용되었다던 은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내왕하는 창백한 천역의 물건이여(p84)’라 묘사한 문장이 있다. 이게 연관이 있을까. 선택할 때 너무 심사숙고하기에 낭패를 본다고도 했다. ‘그림자에 입 맞추는 자들은 / 그림자의 축복만을 받는다.(p68)’는 문장도 있다. ‘얻기에 합당한 만큼의 것이라. 이 문구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거기 잠깐 머물러 공평무사한 손으로 그대의 값어치를 달아보아라.(p59)’라는 문장도 있는데, 한 사람의 값어치를 정확하게 매기기는 어렵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은 상자는 작가의 정답이 아니었던 걸까.

모든 것을 내놓고 모험을 해야 선택할 수 있다는 납 상자. 여기까지는 수긍이 가지만 무엇을 기약해주기보다는 위협하는 듯하지만, 그대의 소박함은 웅변 이상으로 나를 감동시킨다.(p84)’라는 선택의 이유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3종 세트를 끼워 맞추기 위한 선택지였다는 느낌이랄까.

나라면 납이 너무나 정답 스멜이 뻔해서 은과 납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 같다. 나는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직도 갈등하는 햄릿 버전이다. 쩜쩜쩜.

 

사소하게 지나칠 뻔했던 문장 몇 개가 마음에 남는다. ‘달빛이 밝을 때는 저 촛불이 보이지 않았어요.(p141)’,‘무엇이나 환경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덜 좋기도 하는 거야.(p141)’ 너의 눈을 믿지 말라며 색상 대비가 펼쳐진 장면이 떠오른다. 두 눈 부릅뜨고 바라봐도 여전히 다른 색상으로 보이는데 같은 색상이라는 날도둑 같은 현상은 배경의 중요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세상만사는 적당한 때와 장소가 조화를 이룰 때 행해져야 비로소 정당한 칭찬을 받으며 완벽을 기할 수 있는 것이다.(p141)’ 문학에 있어 적당한 때와 장소라는 건 시대상을 반영한 이슈가 녹아 들어있을 때일 터이다. 샤일록은 욕심 많은 악인이기만 한가? 앤토니오는 모든 면에서 선인이기만 한가? 기독교인과 유대인 간의 대립을 차치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두 인물 다 100% 의 양극에 세우지는 못하겠다. 사회적인 배경은 행위의 동기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요인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적대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작가의 과감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게 바로 납 상자를 선택한 바싸니오의 모험 정신일까.

 

작가는 마지막까지 값어치에 대한 질문의 끈을 놓지 않는다. 친구 앤토니오의 목숨을 살려준 판사가 바싸니오에게 요구했던 반지는 사랑하는 포오셔가 준 것이다. 결국 바싸니오는 사랑의 증표와 우정 사이에서 망설이다 반지를 건넨다. 에피소드 느낌의 이 장면은 독자에게 가치 선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물건과 사람 가운데 선택지는 당연히 사람이어야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는 이로 인해 연인이 결별하는 일도 충분히 생길 만하다.

가치와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 10대 이후로 몇십 년을 건너와 읽은 <베니스의 상인>은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금방 값지던 것이 또 금방 값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p11)’ 가치에는 정답이 없으니 우리는 난감한 상황에 수시로 놓인다. 기준점이 흔들리니 상황에 적절한 포인트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명백한 진리라든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배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닷속에 던져져 어정쩡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삶에 더해지는 가치를 부레처럼 매달고 공기를 뺐다 불어 넣으며 시시각각으로 떴다 가라앉는 물고기로 삶을 유영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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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6-14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분량이 짧아서 그런가, 금방 읽고 글 올리셨네요. 페스트에 비하면 아주 읽기 쉬웠던 책이었어요 ㅎㅎㅎ 나비종님은 ‘가치‘에 포커스를 잡으셨군요. 안토니오가 보증을 선 것도, 제시커가 아버지를 버리고 로렌조를 택한 것도, 란슬럿트가 바싸니오의 하인을 자청한 것도, 포오셔가 이제 막 사랑하게된 남자의 친구를 위해 빚을 갚아주려는 것도 다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움직인 거겠죠. 다만 유대인이 선택한 가치는 좀 성격이 다르더라구요. 자신에게 유익하든지 무익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복수하기만을 원했으니까요. 이런건 전혀 신념도 없고 정의도 없는 자살특공대와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럼에도 납득이 가는 그의 분노가 참 짠하고 그랬어요 ^^;

어렸을때 이 책을 읽었다면 참 어머니를 가리는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였을 거 같아요. 제 꾀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자의 최후가 이렇구나~ 하고요. 지금의 제 감상이 훗날에는 또 새롭게 느껴지겠죠? 아무튼 짧아서 좋네요. 월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책 얘기를 할 수 있어서요ㅎㅎㅎ 남은 6월 파이팅하세요!

나비종 2020-06-14 19:58   좋아요 1 | URL
읽은 건 금방 읽었는데 어떤 식으로 리뷰를 써야할지 난감하더군요.^^; 읽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선택한 최고의 가치가 복수였다면 그의 관점에서는 유익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우리의 관점에서는 쓰잘 데 없는 것처럼 비춰지지만요.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등장인물들의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물감님 말씀대로 신념도 없고 정의도 없고 막무가내인 요소인데 말이죠. 거기에 가치를 두려면 얼만큼의 분노게이지가 상승되어 눈이 뒤집히는 걸까요?ㅎㅎ

비유가 딱 이네요. 그 정도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막상 읽고 보니 다른 것들이 크게 보여 당황했거든요.
같은 책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장면이 들어온다는 점이 제가 느끼는 독서의 매력이예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빨간 우체통이 자꾸 눈에 들어와요. 손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언뜻언뜻 하곤 해요. 아파트 우체통에 고지서나 전단지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 꽂혀있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요. 성격은 급한데 감성은 점점 아날로그화되어가는 것 같아요.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써볼까 하다가도, 하지만 누구에게?에서 막힌답니다.^^;
월말에 또 필이 꽂혀서 물감님께 6월의 편지를 쓰게 된다면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오겠죠?ㅎㅎ 잘 지내세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 현실 편 : 철학 / 과학 / 예술 / 종교 / 신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2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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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줄 알았다. 나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나. 움직이는 생명체를 제외하면 아무리 둘러봐도 고정되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대상들이 다르게 인식이 된다니. 하긴 나무를 바라보더라도 어떤 이는 줄기를, 다른 이는 꽃을, 가지 끝을, 밑둥의 생채기를, 한들거리는 잎을, 탐스러운 열매를 바라보며 각기 다른 생각에 잠길 수가 있으니 맞는 말인 듯싶다.

사람마다 다른 관심사를 2차원적인 뇌 안에 그려 넣은 뇌 구조 그림이 기억난다. 감각이든, 사고이든 무언가를 인지하는 것은 뇌이므로 뇌에서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요소가 다르다면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고 느끼는 나의 세상에는 오롯이 나 혼자만 존재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나를 기준점으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p364)’ 그렇다. 세상에 펼쳐진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다.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도 있고, 어느 쪽을 어떤 감정일 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날마다 마음속으로 스스로 취사 선택한 세상을 들여놓는 것이다.

 

채사장의 책을 읽어갈수록 다른 세상이 가느다란 펜으로 그려진 정밀묘사처럼 다가와 신기했다.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등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다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서 현실 너머의 세계를 다룬 책이다.

각각의 영역을 크게 세 가지의 태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오로지 한 가지만 존재한다는 절대주의,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상대주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회의주의이다. 복잡다단한 세상의 영역들이 빛의 삼원색처럼 단순히 세 가지로만 분류되지는 않겠지만, 채도와 명도를 아우르는 커다란 아우트라인으로 묶어서 이해하니 대략적인 체계가 잡히는 느낌이다.

다섯 가지 영역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분야는 신비이다. 삶과 죽음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감 가는 문장들이 특히 많았다. ‘나의 주관적 세계로서의 의식을 이해하는 순간, 세계는 나에게 상식적이지 않은 신비로서 다가온다.(p364)’ 이런 이유로 각자의 삶은 매 순간 신비로운 경험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인 이유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국민 윤리 시간에 흘려들었던 철학 사조와 관련 철학자들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다.

다른 이의 관점에서 본 과학의 역사도 신선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로 설명되는 현대의 양자역학은 대학 다닐 때 배우면서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아 아쉬웠다. 과학이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여러 요인 중 하나이다.

예술 분야는 미술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수록된 그림이 컬러풀하여 미술관을 둘러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잠시 휴식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엎치락뒤치락하며 새로운 표현 방식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도전이 흥미롭고도 감동적이었다. 음악 분야도 서술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에 매력을 느끼고 그 분야에 몸담고 싶은 나로서는 작가가 문학을 예술로 구분한 점이 새삼스럽게 좋았다.

어설프게 알고 있던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지만, 종교를 설명하는 부분은 성경을 몰라 식물백과사전을 보는 듯해 쏟아지는 용어를 감당하기에 다소 벅찼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할까. 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결정은 책임을 동반하므로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이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니. ‘어떤 삶을 선택해도 괜찮다. (중략) 결정은 당신이 하면 된다.(p57)’ 멈추고 싶은데 계속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야만 하는 삶.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삶. 그게 자유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결국 스스로 내 안으로 끌어들여 느끼는 감정인 거다. 내가 마음을 꽃밭으로 만들고, 지옥으로 만들고, 깊은 바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공간이 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산다.(p372)’

나는 침해받지 않는 온전한 하나의 우주를 소유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자다.(p378)’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하는 나만의 마음, 우주까지 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상상하니 갑자기 영혼이 확 넓어지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고독하면서도 벅차서 유리창 밖 세상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p138, 마지막 줄 : 대에 대해

p189, 2번째 단락 첫 줄 : 고양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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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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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더 공포스러울까. 100미터가 넘는 롤러코스터와 귀신의 집, 퇴근 후 매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와 한 달에 한두 번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 조스 영화에서 상어가 다가오는 장면과 창문에서 불쑥 등장하는 허연 물체. 개인차는 물론 있겠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후자에 공포를 더욱 많이 느낀다고 한다. 세 가지의 공통점은 예측할 수 없음이다. 시기를 알 수 없거나 대상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 인간의 불안은 극대화가 된다. ‘지금까지는 그저 불쾌한 사건이라고 불평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규모를 정확히 할 수 없고 원인도 규명할 수 없는 이 현상에 뭔가 위협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p26)’

 

비록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등교해서 마스크 쓴 채 7교시까지 쉬는 시간 없이 스트레이트로 수업을 받는 아이들. 해본 적이 없는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며 시행착오를 겪고, 등교 수업이 시작된 후에는 마스크 쓰고 수업을 하면서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어질하고 띵한 느낌으로 퇴근 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이 든 엊그제. 새벽 2시에 겨우 일어나서 4시에 원격으로 결재 올리면서 달력을 보았다. 겨우 2일 지났을 뿐인데. 6월이 다 되도록 담임교사의 제대로 된 얼굴을 전혀 알지 못하고, 목소리와 문자로 익숙해진 학생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마스크로 차단되지 않은 기분 좋은 공기를 당연한 듯 들이마시던 일상이 값진 것이었음을 자주 깨닫는 요즘이다.

1940년 대 416일에서 이듬해 2월까지 페스트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리는 한 도시와 그 안의 사람들의 치열한 모습을 담은 소설 <페스트>.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 놀라울 정도의 싱크로율을 보인다. ‘딱 한 가지 의미에서 성가신 일이 될 겁니다. 이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p23)’ 감기 증상과 비슷한 코로나19가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미세한 비말로 전파된다는 점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혼란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틱한 줄거리에 입체감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계속 남아서 페스트에 걸린 이들을 돌보는 의사 리외에게는 소명을 다하려는 담백함이 있지만 밋밋하다. 취재 차 도시로 들어 왔다 페스트로 도시가 폐쇄되자 도시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 결국 남기로 한 기자 랑베르도, 도시의 풍경을 매일 수첩에 기록하던 노인 타루도, 범죄를 저지르고 도시로 들어온 코타르도, 묵묵히 자기 일에 몰두하는 그랑도. 그 외 다른 인물들도.

페스트로 고통받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스케치하듯 매일 그려낸 평범한 수기를 읽은 듯하다. 오히려 소설에서는 개개인의 캐릭터보다는 도시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전체의 심리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에 초점이 맞춰진다. 카뮈의 문장 하나하나에 공감하며 세태와 이를 꿰뚫어 보는 작가의 통찰력에 몇 번씩 감탄했다. 작가를 높이 평가한 점은 1947년에 출간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문장들이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다는 점이다. 올해가 아닌 다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이 정도로 와닿지는 않았을 듯싶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끔찍한 무력감을 증명하듯 보여주고 있었다.(p165)’ 요즘처럼 통일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던가. 계속되는 거리 두기로 지쳐가던 심정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병은!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마음으로 병을 앓게 한다니까요.(p138)’ 지난 3월까지는 하도 집에만 있다 보니 마음이 계속 가라앉았다. 4월부터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다. 527일부터 아이들과 마주하면서 오랜 시간의 마스크 착용으로 종종 숨이 막혔지만 마음의 숨통은 트이는 것 같았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p194)’ 외출 시 매번 마스크를 하고, 손 씻기를 일상화하는 것이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직접적인 실천 방법이다. 유일한 방법이 성실성이라는 말이 맞다. ‘질병은 얼핏 보면 포위된 자로서 느끼는 연대 의식을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군집 관계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저마다 고독에 잠기게 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초래되었다.(p203)’ , ‘페스트가 사실은 유배와 이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p348)’ 앞의 두 문장이 페스트의 본질과 이로 인한 영향을 날카롭게 분석한 핵심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적용해도 어색함이 없는 문장들을 접하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 은하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 본성도 공통으로 존재하는 요소들이 있어 법칙화할 수 있는 걸까.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끝도 알 수 없음이다. 소설의 결말은 언제든 페스트가 다른 도시를 덮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코로나19가 언제쯤 종식이 될지 지금은 아득하지만, 올해의 언젠가 다행히도 마스크를 벗게 된다 해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리라. 500년 된 씨앗에서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잠복된 바이러스는 활성화될 환경이 갖추어지면 언제든 퍼져나갈 수 있다. 침스러운 거 질질 흘리던 외계생명체를 클리어하는 영화의 엔딩에서 카메라가 마지막 침방울이 스물스물 꿈틀거리는 장면을 한구석에 클로즈업해서 이게 끝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처럼. 투비컨티뉴드인 거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방심하면 언제든 반복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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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5-31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포함해 모든 문학이 독자마다 느끼는 바가 다른데, 이 작품은 느낌도 감상도 다 비슷비슷 한거 같더라구요. 아니면 지금 시기가 한 몫 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말씀하신대로 현실과 싱크로율이 100%이다보니 전 스토리에는 집중하지 않았어요. 작가도 리외를 통해 담담하게 풀어나갔다지만 단지 그걸 말하려는게 아니었을테니까요. 보통의 재난/디스토피아 책들과 다르게 이 책은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아서 오히려 더 처참하고도 리얼했어요. 저는 오만한 인간들이 실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교훈을 좋아하거든요. 물론 인간의 위대함이나 존엄을 상기시키는 작품들도 좋지만 그런 작품만 읽으면 금방또 오만해져버리는 게 인간인지라...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p194)‘ 저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문장인데, 지금보니 이게 정답이네요. 다 틀렸다며 모든 걸 내려놓거나, 힘들다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거나 해서는 안되겠지요. 혹독한 겨울을 버텨내고 봄을 맞이한 나무에게 나이테가 하나 더 생기면서 튼튼해지듯이 우리도 묵묵히 또 성실히 버티고 이겨내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여러모로 바쁘고 힘드실 나비종님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래서 이번 모임은 6월까지 연장하자고 할까 했는데, 이렇게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하네요^^ 5월도 수고 많이하셨구요, 6월은 잠깐 쉬어가실까요? 나비종님 상황이나 여건이 좀 나아지실때 알려주시면 다시 모임 진행해도 괜찮아요!

나비종 2020-05-31 15:25   좋아요 1 | URL
다수의 문학이 시대를 반영하기 마련인데 과거에 나온 작품을 현재 적용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는 점에 신기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시대를 거슬러도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있는가 하구요. 그걸 매의 눈으로 찾아낸 작가의 통찰력이 놀라웠습니다.
희망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생생한 다큐의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공감합니다. 실은 위태위태한 위상으로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잔인함을 지니기도 하는 인간의 오만함에.

저만 바쁜 건 아니었겠지만, 힘들다고 푸념하는 건 다같이 어려운 시기에서 사치였겠지만, 퇴근 이후의 시간까지 할애를 해도 끊이지 않는 일에 점점 지치더라구요. 그래도 이 모임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토나올 것 같은 일들을 후딱 해치우고 빨리 책을 읽고 싶다, 어서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5월을 견디게 했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감님! 그냥 해요, 우리.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라 조금 더 치밀하게 틈새 시간을 확보하려구요. 제가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유일한 일을 다른 일들에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ㅎㅎ 다음 달에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