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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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몇 명의 힘이 필요할까. 거대한 시공간을 가늠한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필요할 듯한데 간혹 한 사람만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큰불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는 경우이다. 사소해 보이는 까닭에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훗날 선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하게 되는 최초의 점 같은 존재 말이다.

한 사람이란 말을 가만가만 음미하다 보면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떠오른다.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고 나서 한동안 뭉클했던 느낌이 생생했던 동화이다. 원작에 사용되었다는 사천여 개의 단어들은 빠르게 스며들어 마음을 무장해제 시켰다. 몽환적이었지만 실화인지 판타지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초반의 의구심은 마지막에 가서는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틀어 오십 년짜리 계획을 세운다는 건 얼마나 징한 의미인가. 남은 삶을 올인한 이의 힘이란 얼마나 깊이 있는 위대함을 품고 있는가.

뜬금없이 이 짧은 동화를 떠올린 건 <침묵의 봄>을 통해 전해지던 레이첼 카슨의 마음이 동화 속 주인공과 닮아서였다. 노인이 심은 나무 한 그루에서 숲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그녀의 책 한 권으로 변화를 겪은 세상의 모습과 겹쳐져서였다.

 

이 책은 토양과 물에 뿌려진 무분별한 살충제의 남용으로 파괴되어 가는 야생생물계의 실태를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기대감은 반반이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그만큼 재미있을까 싶다가도 몸에만 좋은 약일지도 몰라서였다. 책의 내용보다 이 점이 궁금했다. 20세기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는 유명세는 어느 쪽에 속할까.

카슨은 지구 곳곳에서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자연 파괴의 실상을 제시하고 그 원인을 거슬러 추적하며 고통받는 생태계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파헤치는 과정에서는 살충제의 기본 성분부터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나열한다. 연어처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 범인을 기어이 잡아낸다. 이 모든 사태가 인간 스스로 만들고 뿌려버린, 어쩌면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뿌려지고 있을지 모를 살충제에 맞닿아있음을 증명한다. ‘살충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한 편의 시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현장감이 긴박하게 와닿는다.

저자의 위대한 점은 서술 방식의 탁월함에 있다. 싫증이 나거나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인해 대중들은 내용에 쉽게 접근하게 된다. 화학적인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위해 약간의 기초 설명을 곁들이는 친절함도 보인다. 통계의 힘과 다양한 사례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많은 이들을 설득한다. 거대한 지렛대 하나로 지구를 들어올리겠다며 당당히 외친 아르키메데스의 패기를 닮은 그녀의 도전이 감탄스럽다.

 

식물의 집단 재배는 문제 발생의 시발점이다. 똑같은 작물들이 줄지어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 바이러스가 연상된다. 단세포 생물의 장점은 무한해 보이는 증식성에 있지만, 환경이 바뀌었을 때 전멸한다는 단점은 치명적이다. 먹이사슬로 연결된 1차 소비자의 대량 증식이 시작되면서 식물의 대량 전멸을 막기 위한 살충제의 대량 살포가 시작된다. 문제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곤충들의 내성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살충제의 생산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양으로 줄이도록 노력해보자는 것이다. 그녀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천적을 이용한 현명한 대안도 더불어 제시한다. 하지만 효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비행기로 살충제를 휘리릭 뿌려대거나 강물에 흘려보내는 조급한 인간들이 내성을 지닌 곤충에 빙의하여 여전히 나타난다.

우주 안에서의 지구는 닫혀있는 동그란 상자와 같다. 중력장 안에서 모든 물질은 지구 중심을 향해 당겨진다. , 공기, 땅덩어리까지도. 음식과 식수와 공기 속의 위험 물질은 닫혀있는 지구 안에서 돌고 돈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운명 공동체로 묶이는 이유이다.

숲의 아름다움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복사해 붙인 듯이 한 종류의 나무로만 이루어진 숲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연의 작품은 아니다. 그렇게도 다양했던 생물이 스러져간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빛을 뿜어내던 생명체의 운명이 인간으로 인해 도미노처럼 차례로 흔들리며 마지막에 서 있는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길거리 바위의 줄무늬를 볼 때면 가끔 아득할 때가 있다. 그 안에 담긴 시간을 상상하면서부터이다. 퇴적암을 볼 때면 암석이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에 압도당한다. 변성암처럼 갑작스러운 열과 압력이 작용했던 것도 아니고 화성암처럼 뜨거운 마그마가 굳어진 것도 아니다. 물렁물렁한 흙이 단단한 도자기로 완성되기까지는 불가마 속 뜨거움을 통과해야 하건만. 단지 알갱이가 쌓이는 주요 과정만으로 단단한 암석이 되다니. 퇴적 이후의 후속 과정에서도 뜨거움은 찾아볼 수 없다. 퇴적암은 물밑에서 주로 만들어지니까.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이 켜켜이 담겨있을까. 라르고의 속도로 움직이며 오로지 앞으로만 진행하는 맑고도 묵직한 속성이라니. 자연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묵묵히 흘러가는 시간의 직진성 때문이리라.

되돌릴 수 없는 살충제가 느린 시간에 실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면서 쌓이고 있다. 대량으로 살포되던 살충제에 대하여 읽으면서 암 치료제를 떠올린다. 암 환자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이유는 치료과정에서 암세포만 죽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는 세포도 파괴되어서라고 한다. 생물은 제각기 고유한 특성으로 존재하지만, 생명체로서의 동일한 속성도 분명히 있다. 벌레를 죽일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하면서 사람을 포함한 다른 동식물이 멀쩡하기를 바란다는 게 오히려 무모한 억지인 거다. 그 억지스러움이 자연의 역린을 건드린 걸까. 봄바람처럼 가뿐한 문장들이었는데 깊이 쌓인 내용의 무게추가 마음을 잡아당긴다.

 

1962년에 발간된 책이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유는 책 속에서 언급된 현상들이 지금까지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난 23일에는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온수를 쓰던 주민들이 기준치 8배의 페놀에 이상 반응을 일으켜 어려움을 겪는다는 뉴스 기사가 떴다. 1991년의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을 모티브로 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란 영화도 언급되었다. 처음에 인간은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몰랐을 수도 있다. 유해성이 알려진 다음에는 멈춰야 하는 것을. 인류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무모한 행위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침묵의 봄을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침묵하지 않았다. 남들이 침묵하며 주변만 바라보고 있을 때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의 모습을 전망했다. 인간이라 하여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줄 권리가 있는가. ‘방제법에 관해 열심히 연구를 해야겠지만 이 방제법이 생물학적 관점이어야지 화학적 관점이어서는 안 된다. (중략)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된다.(p304, 브리예르 박사)’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닐지라도 우리 대다수는 스러져가는 생명을 그저 바라만 보는 방관자로 있다. 내가 그런 물질을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적어도 내가 뿌린 것은 아니니까, 당장 내 입으로 들어가지는 않으니까, 곤충이나 식물은 말이 없으니까.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면서도 진실을 외면하는 수많은 군중이 된다. 당연한 질문을 외면하며 아이로서의 순수한 눈을 감아버린 건 아닌지. 침묵하는 방관자는 암묵적으로 가해자의 편임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p21, 2번째 단락 밑에서 2번째 줄: 혼돈을 불어오기 위해 ~불러오기~

p56, 밑에서 5번째 줄: 활동이 무력화한다. ~무력화된다.

p131, 첫째 줄: 집중적인 살포가 일상화했다. ~일상화됐다.

p239, 5번째 줄: 심상치 않는 위협이 ~않은~

p244, 7번째 줄: 체세포의 수가 염색체의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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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5
에밀 졸라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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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여인의 뒷모습을 담은 표지. 어멋! 대놓고 짐승이래. 제목과 표지의 콜라보는 자정을 맞이한 시침과 분침인 듯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심지어 이토록 든든한 분량이라니! 으흐흐. 침을 꼴까닥 삼키며 겉장을 넘겼다.

오리너구리는 오리인가 너구리인가. 오리와 닮은 부리와 물갈퀴를 지니고 있지만 젖을 먹여 새끼를 기르는 동물. 두 종류의 특성이 섞였다는 점에서 시조새스럽다. 분류학적으로 오리너구리는 포유류에 속하니 뒷부분에 악센트가 실리리라. 오리를 닮은 너구리랄까.

이 책의 제목을 보니 오리너구리가 떠올랐다. 인간 짐승. 오리너구리 화법대로라면 인간의 형상을 한 짐승이 되나. 불어의 어법을 몰라 당당하게 외치려니 살짝 소심해지지만, 원제의 ‘humaine’과 영어의 ‘human’을 대응시켜 직역한다면 짐승 인간인데. ‘짐승을 닮은 인간이랄까. 짐승 인간이라책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보다 적절한 제목일 터이다. 한데 뭔가 어색하다. 강조를 위해 제목을 도치시킨 걸까.

어쨌든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제목을 통해 다가오는 느낌이 확 달라진다. 이토록 간결하고 깊이 있는 제목이라니! 내용을 접하기 전의 이미지가 단순한 골짜기라면 내용을 지나온 다음은 태평양 가장자리의 마리아나 해구로 다가온다. 주제가 깊은 느낌표로 선명하게 찍힌다.

 

원래 등장인물들이 피 질질 흘리고, 지지직거리는 저질 흑백 TV를 연상케 하는 배경은 딱 질색이다. 취향이 아닐뿐더러 거부감조차 있다며 부르짖곤 했던 말이 이 책을 읽으면서 무색해졌다. 631쪽을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유머스런 구석이 전혀 없는 범죄 소설에 이토록 몰입할 일인가! 책장이 정신없이 넘어갔다. 사전에 올라 있는 표현이 아니므로 국립국어원에서는 답변이 어려워 양해를 구하는 두 글자의 비속어와 우연히도 동음이의어인 작가의 이름. 대놓고 말하기에 주춤거리게 하는 어감이지만, 이보다 더 피부에 확 와닿을 수 있는 표현을 찾지 못해 조심스럽게 한 번만 언급하고자 한다. 이 소설, .. 흥미진진하다고.^^;;; 범죄 스릴러는 내용이 드러나면 김빠지는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소설의 내용은 되도록 배제하고 커다란 틀만 적으려 한다. 내가 졸라의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몇 가지를 정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

 

첫째, 뻔한 전개가 아니다.

추리 애니메이션이나 어릴 때 읽었던 범죄 소설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대개 나는 술래가 되곤 했다. 나 잡아봐라~하며 작가가 곳곳에 배치한 복선을 따라가며 갖가지 추리를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나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 그럴 줄 알았어!’ 내지는 !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었어?’라고. 이런 이유로 전체 열두 장 중 1장까지 읽은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십여 페이지 만에 대놓고 범인이 드러나는 설정이라니! 범죄 소설에서 범인이 드러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소신에게는 아직도 열한 고개와 오백이십 보가 남았사온데 나머지는 어찌 채우시려고?

 

둘째, 모든 서사 구조가 연결된 탄탄한 구성이다.

버릴 내용이 없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이름 모를 인간들의 몰살은 제외하더라도 캐릭터가 부여된 등장인물 일곱 명이 시간 차를 두고 죽는다. 죽었는데 또 이야기가 있을까 싶으면 남아있는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먹이사슬인 양 꼬리에 꼬리를 문 기차인 양. 한 명이 또 죽으면 남은 이들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네버 엔딩 스토리이다. 주인공 외에도 주변 인물들의 향방에 대한 궁금증에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사건이 마지막에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진행 중이라 끊어지지 않는 쾌변처럼 중간에 책장이 덮어지지 않는다.

 

셋째,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진다.

성선설과 성악설 중 당신은 어느 쪽인가. 나는 성악설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공간에 짐승 캐릭터 하나쯤은 품고 있다고.^^;; 이 소설만으로 판단한다면 작가는 성악설에 가까운 듯싶다. 이토록 적나라한 심리 묘사라니! 아름답기만 한 동화 속 공주 이미지의 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야수의 땀 냄새를 훅훅 뿜어낸다. 내내 감탄하면서 읽었다.

사람은 합당한 이유에서 살인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람은 피와 신경의 충동 때문에, 옛날 옛적 서로 투쟁했던 기억의 잔존 때문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강해졌다는 기쁨 때문에 살인을 하는 것이다.(p516)’ 소설 속에서는 얼핏 사이코패스가 연상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심리 묘사를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진짜 저런 인물이 있을까.

이 글을 쓰기 전까지도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다가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강남역에서 여성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범죄 행각을 벌인 20대 남성에 대한 사건(2021. 1. 30일자)이다. 술이나 마약에 취한 상태가 아닌데도 여자만 보면 때리고 싶다는 여성 혐오적 이유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에서 소설 속 인물이 겹쳐졌다. 동물로 분류되는 인간에게 짐승의 기질은 유전자의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걸까.

 

넷째, 시공간적 배경과 사건의 어우러짐이다.

사건은 모두 기차와 연관된 공간에서 발생한다. 기차 안이거나 철로 위이거나 기찻길 주변의 집이다. 작가는 왕복하는 기차 주변의 공간을 정밀묘사로 스케치한다. 기찻길 주변의 고립된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기차를 타고 가는 인간들을 묘사한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기차 안에 앉아있는 이들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의 입장으로 보면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움직이는 그림처럼 스쳐 지나가니. 운행 시간과 계절에 따라 배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으스스하거나 평화로운 색채에 따라 사건의 긴박한 분위기는 극대화된다. 증기기관차의 운행 기작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석탄의 투입에 따라 달라지는 증기압과 속도감이 선명한 테두리가 되어 사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사건은 시간적 배경과도 어우러진다. 소설 속에서는 시간이 자주 등장하는데 등장인물들은 시계를 볼 필요가 없다. 시계 역할을 하는 물체가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간에 출발하여 역을 통과하는 기차이다. 기차 시간은 사건의 긴박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이용된다.

 

다섯째, 기차에 생명을 불어넣은 점이다.

왜 하필 기차인가. 집필이 이루어진 시대적 상황을 보면 당시 기계 문명의 극치를 보여주던 대상 중 하나가 기차였다고 한다. 작가가 기차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차는 현대적인 문명의 상징이면서도 저돌적으로 달리는 야생적인 짐승을 연상케 한다. 인간의 짐승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대상으로 보인다. 이게 기차인지 기차의 모습을 한 인간의 모습인지 구분이 애매한 장면들이 묘사된다.

기차를 먼 곳에서 바라보면 뱀이 연상된다. 직장 내에서의 사이코패스를 양복을 입은 뱀이라 일컬으니 작품 속 등장인물과도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다고 판단된다. 사건의 출발점이 된 반지부터 뱀 모양이라는 점을 깨닫는 순간에는 소름이 돋는다. 도시의 양 끝을 왕복하며 뿜어내는 하얀 증기, 시뻘건 석탄을 품고 달리는 기차는 설경 위에서 시커먼 뱀처럼 움직이며 동물의 본성을 지닌 인간과 동일시된다.

 

여섯째, 진실을 향하여 던지는 물음이다.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는 사법 체계의 비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상이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필요한 경우 그 진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은폐하기 위해서였다.(p142)’ 재판 현장에서는 진실을 말해도 거짓으로 치부되는 웃픈 현상이 나타난다. 모순투성이이고 허술한 진실과 완벽하게 짜인 퍼즐 조각 같은 거짓. 이 둘의 대비가 빚어내는 아이러니는 진실이란 명제를 향해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얼마나 현혹되고 있는가. 누가 봐도 범죄자 같은 사람과 어디를 봐도 범죄자일 리 없어 보이는 사람. 범인을 알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건의 흐름을 바라보는 독자는 작가의 경고메시지를 분명하게 읽게 된다.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겉모습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

 

일곱째, 마지막 장면이 주는 메시지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대개 방탄조끼를 입지 않은 채 총알받이가 되어도 불사신이다. 어쩌다 주인공이 죽는 작품은 잡고 있던 고무줄의 한끝이 갑자기 끊어진 듯 허탈감을 안겨준다. 한데 이 작품은 많은 인물이 죽었는데도 찜찜함이 남지 않는다. 분명 해피엔딩은 아닌데 팽팽하게 당겨지던 활시위에서 화살이 쏘아지면서 마무리되는 듯 깔끔하다. 열린 결말 포스를 풍기는데 그게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가면서도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군인들. 그들을 싣고 기관사도 없이 무한 질주하게 된 기차는 기계의 탈을 쓴 한 마리의 짐승을 연상시킨다. 누가 죽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로 후련하다.

 

한번 야만적인 짐승은 영원히 야만적인 짐승일 뿐이야. 훨씬 더 나은 기계를 발명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야만적인 짐승들은 그 밑에 어쨌든 여전히 존재할 텐데.(p68)’ 살인도 피도 잔혹한 묘사도 다 증발해버리고 처음 부분에서 읽었던 문장이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외설적인 묘사는 거들 뿐이다. 묵직한 해일로 다가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이 평소 환장하며 읽던 장면을 너무도 가볍게 덮어버린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외설적인 내용이 무로 돌아간 듯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책 표지의 그림조차 짠하게 다가온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웅크린 태아를 연상케 하는 뒷모습이 인간 본성에 던지는 민낯의 물음표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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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01-31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졸라는 졸라짱이라죠 ㅋㅋㅋ어색해하지 마세요...다들 그만한 표현이 없다고 할거에요.
오리너구리라, 괜찮은데요?ㅋㅋㅋㅋㅋ포유류냐, 조류냐 정체성혼란ㅋㅋㅋㅋㅋㅋ
정말 버릴내용과 장면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떻게 이럴수 있는지, 재미는 재미대로, 주제는 주제대로 퍼펙트하더군요. 말씀하신것처럼 네버엔딩 스토리... 와 후덜덜합니다. 작가가 마음먹고 쓰면 계속 이어갈수도 있겠던데요...이런 책은 1000페이지여도 즐겁게 읽겠어요^^

말씀하신 성악설... 저도 요즘은 이쪽으로 기울었어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사람은 선한쪽으로 변하지만, 잠깐만 풀어져도 금세 원래의 모습이 나오는 걸 자주 보고 느껴서요. 근데 작품속 고모의 딸의 행동은 100% 악일까 싶긴 해요. 동기를 알고나면 악인의 행동도 이해가 되곤 하는데, 이런 서사를 잘 다루는 작가들을 보면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연구한건지도 궁금하고요 ^^

이 책이 신기한게 미스터리, 스릴러, 심리, 사회소설의 복합장르를 전부 소화해냈다는 거였어요. 그중 하나만 성공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에요. 특히 사법 체계에 대해 고발한 점은 출간 당시에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을텐데, 정말 거침 없는 작가였네요. 작품속 법조인들도 짐승이나 마찬가지인듯. 무생물인 기차마저 짐승으로 살린 것을 보면 뭐 인간다운 인간이 세상에 있기나 한걸까요. 에밀 졸라는 정말 화두를 몇개나 던지는건지 ... ㅎㅎㅎ

꽤 분량이 많았는데 이틀만에 읽었다니요, 대단한 독서력이십니다. 전 죽어도 그렇게 못하거든요. 이번달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하셨네요 ^^ 제가 너무 바쁜 사람 붙들고 모임을 강요하는게 아닌건지 ㅋㅋㅋ 1월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2월은 얇은 책이니까 파이팅하세요 ㅋㅋ

나비종 2021-01-31 15:58   좋아요 1 | URL
ㅋㅋㅋ그렇죠? 졸라~~ 다만 졸라를 졸라쓰는 인간들을 저지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대놓고 쓰기엔 쫌 그랬습니다. ^^; 수년 간 갈고 닦은 네이티브 억양을 소유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염~ㅎㅎ
오리너구리를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 스스로도 오리페이스가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정체성 혼란ㅋㅋㅋ 여기서 이리도 적절한 문구를 끄집어내시다니, 역시 물감님이십니다.ㅎㅎ

예. 저도 성악설 쪽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험악한 뉴스들을 보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원래 저런건가 싶어서요.
음, 고모 딸에 대한 저의 해석은 조금 다릅니다. 한마디로 ‘질투는 나의 힘?‘ㅎㅎ 억울하게 희생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오랫동안 건널목에서 일하면서 그림처럼 지나치는 풍경들에 무감각해진 것이 아닐까요.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이니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폭설 속에서 라리종이 널브러졌을 때 그제서야 집으로 찾아온 몇몇 사람들의 실재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에 대한 연구. 맞아요. 저도 얼마나 깊어져야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으로 연결될까 대륙붕 수준의 글을 쓰면서도 매번 고민이 되더라구요.^^; 그런 면에서 졸라의 졸라 대단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ㅎㅎ

동감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요소들을 건드리면서도 어찌 그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방대한 깊이로 묵직한지. 처음 부분을 읽을 때만해도 잘은 몰랐거든요. 갈수록 창대해지는 문장의 힘에 반해버렸습니다.
작품속 법조인들은 교활하면서도 잇속을 챙기며 꾀를 부리려는 여우 정도였을까요.
기차의 짐승화에 감탄했어요. 처음에는 방울뱀 정도의 스케일로 인식되다가 그 장면 있잖아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거대한 지네스러운 묘사요. 모든 구간에 걸쳐 발을 뻗고 누워있는 거대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순간 빅뱅 수준으로 스케일이 확 커지더라구요.ㅎㅎ
투척하는 화두마다 물에 띄운 꽃차처럼 생명력을 지니게 하는 힘. 저는 그게 탄탄한 구성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빅픽처를 먼저 그리고 세부적인 그물로 짜고 들어갔던거죠.

이틀의 비결 알려드릴까요? 오랜 시간 단련된 벼락치기 근육의 힘이랍니다.ㅋㅋㅋ 닥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장을 펼치게 하는 놀라운 원동력이죠.^^; 사실 졸업식이 있었던 20일까지는 업무와 생기부 마무리 작업으로 정말 바빴습니다. 숨돌리고 21일부터 원래 하던 독서모임 책 먼저 읽고 하루 근무하고 작은 슬럼프 겪고 나니 오늘까지 나흘 남더군요. 분 단위로 쪼개가면서 하루 죙일 집에 틀어박혀서 밥 먹고 책만 읽었습니다. 졸라의 작품이 아니었더라면 어림도 없었던 일이죠.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이리 정곡을 찌르시니ㅋㅋㅋ 바쁘지만 책 읽을 시간을 버릴 정도로 바쁘고 싶지는 않습니다. 2월은 벼락치기 탈출해보겠습니다!!ㅋㅋ
 
총 균 쇠 (양장)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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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구입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워낙 명성이 자자한 책이라 지적 허영심을 드러내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읽으려는 시도를 몇 번 하기는 했다. 번번이 겉장도 넘기지 못하고 두께에 압도당해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이번의 시도는 독서 모임의 강제성이 아니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일이었다. 제목만 보고 내용이 총, , 쇠 등 세 분야로 나뉘어있으리라 지레짐작했다. 비장하게 모임 도서를 정하고 753쪽을 한 달 안에 소화하기에는 급격한 멘붕이 오리라 예상되는바, 두 달에 걸쳐 읽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첫 달에는 어디까지? 총까지 읽자, 균까지 읽고 나머지는 다음 달에 읽자 말들이 오갔다. 목차를 검색해보고야 우리의 의논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3종이 묶여있는 세트였던 거다. 4부로 구성되어 있으니 첫 달 모임에서는 2부까지만 읽기로 했다. 지난 10월 말의 일이다.

11, 심호흡을 하고 드디어 ··의 본문을 영접하였다. 한데, 그리 어렵게만 보이던 태산도 한 걸음씩 걸으니 가속이 붙었나 2부를 지나도 걸음을 딱 멈출 수가 없었다. 드라마도 아닌 것이 투 비 컨티뉴드가 이토록 궁금할 일이더냐! 언제부터 인류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사회나 역사 분야라면 질색을 하던 내가 인물과 지명과 고대에 사용되던 석기와 도구들을 검색하며 보고 있는 거다. 후반부에 가서는 아예 책장 구석을 뒤져 먼지를 먹으며 연명하던 사회과부도를 찾아냈다. 본격적으로 아프리카·동남아시아·유럽·오스트레일리아·남북아메리카 지도를 펼치면서 도시와 섬 사이를 손가락으로 누벼댔다. 있는지도 몰랐던 도시와 나라들이 손끝에 닿는 점자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책은 인류의 발전이 각 대륙에서 다른 속도로 진행된 이유를 과학적으로 밝힌 책이다. 결론이 도출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4부에 걸쳐 체계적으로 증명이 되어있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큰 건가. 우수한 문명이고 나발이고 원초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궁극적인 원인은 식량 생산이다. 문명과 식량(루스 디프리스, 눌와, 2018.2.)의 확장 디테일 버전인 듯 자세한 근거가 제시되어있다.

식량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문명의 발달이나 존속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이를 둘러싼 다양한 수단들이 등장한다.

첫째, 식량 생산을 도와줄 가축이다. 원래부터 그곳에 살았던 가축에 따라,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 집단의 운명이 갈린다.

둘째, 식량을 생산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총, , , 문자 등이다.

셋째, 이제는 식량 생산을 위한 정보력과 기술력의 싸움이다. 자체 보유력도 중요하지만, 사방팔방에서 흡수하는 외부의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시점에서 다양한 유형·무형의 것의 전파속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지리적 환경이 등장한다. 유라시아는 대륙 축의 방향이 동서 방향으로 길고,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는 남북 방향으로 길다. 남북 방향의 대륙은 위도를 넘나들어야 하므로 적도에 사는 인간들이 극지방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모양새가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거다.

넷째, 식량의 다양성도 중요하다. 야생 먹거리가 작물화로 되기까지의 과정 역시 기후, 지형 등 환경적 요인이 크다. 수렵 채집민과 식량 생산민의 경쟁력의 차이도, 정치 체계도 마찬가지다.

 

먼저 시작했다고 더 발달하는 건 아니다. 인류의 기원지로 알려진 아프리카의 상황처럼. , 백인이냐 인디언이냐에 따라 개척자와 침략자로서 자리매김된다.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세계사를 보면서 100% 객관적인 시각은 존재하지 않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중립에 선 듯하다. 과학적 데이터로 증명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글은 명쾌하다.

인구 밀도에 따라 대륙별로 인간이 그려진 그림을 본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호주는 2명 정도가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땐 막연하게 거긴 넓어서 참 살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했던 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몇 배나 되는 땅덩어리에 적은 수의 인간이 거주할 때는 그에 합당하는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사실 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척박한 환경과 인구 몰빵 지역 사이의 차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우면서 이제껏 참 많은 것을 모르고 지내왔구나 싶었다.

가축화 및 작물화된 야생동식물의 종류와 수의 차이, 기술혁신과 정치제도의 확산과 이동속도의 차이, 대륙 면적과 인구의 차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결론은 단순하다.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생태적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 원래 그리 태어난 게 아니라 우연히 주어진 환경들이 인류의 문명에 대한 운명적인 큰 그림을 그려냈던 거다.

 

백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푸른 눈에 하얀 피부 고급진 옷을 입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흑인을 연상할 때면 칙칙하고 축축한 할렘가의 악취가 어둠과 함께 떠올려졌다. 타고난 유전자의 차이인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편견이다.

사람의 유전은 연구하기가 까다로운 분야이다. 개체 수가 많지 않고 한 세대가 길며 형질이 복잡할 뿐 아니라 마음대로 교배하기도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간접적인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중 하나가 쌍둥이 연구이다. 일란성 쌍둥이는 타고난 유전적인 특징이 똑같으니 이들 사이에 차이가 나는 형질이 있다면 환경 탓이라고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유전과 환경의 차이를 연구할 때 유용한 방법이다.

백인은 잘났고 흑인은 못났다는 편협된 생각이 언제부터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걸까.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은 가지고 있는 지도 몰랐던 잘못된 생각을 일깨우며 나를 부끄럽게 했다.

우연의 산물로 얻어진 것치고는 선택된 이들이 걸어온 길이 너무 불공평하고 냉정하지 않은가. 환경으로 인해 각기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다양한 대륙의 인간들. 때로는 억울하고 심지어는 억울한 줄도 모른 채 일생을 마쳤던 수많은 영혼의 무게가 책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하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 꽤나 가까이했던 교과서류는 사회과부도였다. 세계 지도를 펼치고 나라 이름 찾기, 수도 이름 맞추기를 하며 놀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과부도를 뒤적거리며 위치를 찾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여행에 지도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두 가지 정도를 준비하면 훨씬 알차게 읽을 수 있겠다. 사회과부도와 핸드폰이다. 전자는 나라, 도시, 섬 등의 위치 찾기용이고, 후자는 용어, 인물 등의 검색용이다. 처음에는 핸드폰을 옆에 두면서 수많은 나라와 도시의 위치를 수시로 검색했는데 직접 해보니 위치 찾기에는 차라리 사회과부도가 편했다. 검색하려는 나라 하나만 나오는 게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배치도 덩달아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에도 관심이 생겼다. 한글이 언급될 때에는 반가웠고 덩달아 한글의 우수성에 자부심도 느끼게 되었다. 언어라는 게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라는 사실을 새삼 음미했다. 언어의 존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동아시아와 태평양 민족이 사용하던 수많은 언어의 생성과 전파와 파생과 소멸의 과정을 집요하리만큼 파헤친 작가의 집중력이 놀라웠다. 언어를 통해서도 문화 전파의 방향을 짐작하다니! 인류의 문명 정도의 메가톤급 주제를 다루려면 얼마나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연결되어야 하는 걸까.

 

가독성이 좋아서,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벌써부터 좋았다. 한 달도 안되어 완독하게 되었다. 외국인의 저서라는 생소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정신없이 따라갔다. 마지막 참고 문헌의 기술 방식까지 흥미로웠다. 참고 문헌의 도서명과 인용된 영문은 읽지 않았지만, 문헌이나 발췌 문장을 소개하는 방식까지도 허술함이 없었다.

이런 장르의 책에 매력을 느낄 줄 몰랐다. 그만의 특이점은 과학적으로 역사를 분석했다는 점이다. 생태지리학, 생태학, 유전학, 병리학, 문화인류학, 언어학 등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냉철함과 통찰력에 속이 후련했다.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5년의 연구 결과라는 말에는 경외감까지 들었다.

20206, 서울 시장과의 코로나 관련 대담을 실은 뉴스 기사도 찾아보게 되었다. 1937년생이면 80대의 우리 부모님 정도의 연세이신데. 책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이 맑아서 총명함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이 책을 뉴기니인 친구와 스승들에게 바친다며 그들을 혹독한 환경에 대한 전문가로 여긴 서두의 문구에서는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가 엿보여서 이 또한 좋았다.

 

한 권의 책에 담겨있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하루가 담겨있는가 하면 이 책에서처럼 인류 전체의 시간이 담기기도 한다. 역사가 담긴 책을 만날 때면 책장을 넘길 때마다 호흡이 느려지고 길어진다. 13천 년이라니! 빅뱅 이후 흘러온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시간이지만 하루를 24시간으로 살아가는 우리로서 이 시간은 아득하기만 하다.

노래가 2~3분의 시간에 임팩트 있는 이야기로 쉽표처럼 짧은 휴식을 준다면 이 책은 봄, 여름, 가을 동안 식량 생산을 모두 마치고 나서 겨울철에 화롯가에 앉아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로 노곤한 몸을 천천히 풀어주는 휴식에 어울린다. 크로키와 정밀묘사의 차이처럼.

13천 년 모든 대륙의 역사를 700여 쪽으로 압축한 책. 캐나다의 버제스 셰일이 쪼개지면 조각조각에 숨겨져 있던 화석이 나타나듯 내가 넘어온 책장의 낱장 낱장에 화석이 담겨있는 듯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화석이랄까. 인류의 거대한 역사가 켜켜이 종이에 담겨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입체 카드처럼 펼쳐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을 읽고 나서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넓어진 시야만큼 마음이 확 넓어진 듯했다. 13천 년의 역사가 이 한 권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니 더이상 책이 두껍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적은 분량 안에 13천 년이 담겨있다며 놀라는 것이 더욱 적절한 반응인지 몰랐다.

 

 

p55 밑에서 2째줄, p483 마지막 줄: 디프로토돈트 → 디프로토돈

p131 밑에서 5째줄: 탄소14가 붕괴되어 탄소12로 바뀌기 ~붕괴되어 질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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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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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배운 지가 삼십 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후렴구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백제 여인의 마음을 노래했다는 <정읍사>. 정작 본문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런 뜻도 없다는 이 문구가 10대 후반의 나에게 꽤 인상 깊었나 보다.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문장들을 가만가만 발음하다 보면 여인의 마음이 어땠을지 막연하나마 알 것 같았달까.

가끔 이런 구절을 만날 때가 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데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은 문장 말이다. 이 책의 많은 문장이 그랬다.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주술 관계도 안 맞고 당최 문맥도 이상한 문장들을 읽는 과정이 왜 그리 먹먹했는지. 주인공들이 방백을 하듯 마침표도 없이 이어진 문장들이, 혼잣말인 듯 노랫말인 듯 중얼거리는 문장들이 질척한 밀가루 풀처럼 마음에 들러붙었던 시간이었다.

 

노예제에 희생된 흑인들과 얽힌 남북전쟁 전후, ‘육천만 명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람들의 이야기. 1/n의 이야기이지만 n 전체를 대변하듯 묵직하다. 그 안에 담긴 심리 묘사와 서정성의 무게이리라. 인물의 내면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현실과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로 종횡무진하는 데 비하면 서사 구조는 단순하다. 여주인공 세서와 딸 덴버가 사는 124번지에 20여 년 전 노예 농장 스위트홈에서 함께 일하던 남자 폴 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빌러비드란 이름을 지닌 미스터리 아가씨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밀당 이야기이다.

18년 전, 도망친 여자 노예 세서는 노예 사냥꾼에게 딸 아이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아이의 목을 톱니로 긋는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사건 전후로 펼쳐지는 등장인물 내면의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펼쳐진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Beloved'는 어머니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이의 묘비에 새겨넣은 글자로 사랑받는 이라는 의미이다. 소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캐서린의 망령처럼 빌러비드라는 비현실적인 인물은 그 어머니를 찾아간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인물의 심리 묘사는 소름이 끼치도록 생생하다. 죽은 딸 빌러비드와 살아남은 딸 덴버는 어머니를 중심축으로 사랑의 쟁탈전이라도 벌이듯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에도 빛깔이 있다면 이들 사이의 감정은 무슨 색으로 구현이 될까? 자식들이 부모를 바라보는 감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예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자식을 죽일 정도의 사랑은 어느 정도의 무게였을까. 몸을 주는 대가로 죽은 아이의 묘비에 새길 이름 4글자를 얻고자 했던 모성은 어느 정도의 깊이였을까. 짙다. 너무 짙다. 그 빛깔을 표현할 만한 세상의 언어가 너무 옅다.

 

단순히 흑인과 백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자행한 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을 동물처럼 여기던, 인간이라는 탈을 쓴 동물의 잔혹성 그 너머로 드러나지 않았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일까 싶은 의구심에 한이 어린 느낌표를 찍어주는 이야기이다.

작가의 필체는 과감하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기억하고 싶지 않음에도 선명하게 각인된 내면의 이야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 기개가 힘차서 당황스럽다. 알 듯 말 듯 몽글몽글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추임새인 듯 거드는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배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대조적으로 투명수채화를 보는 듯 한들한들하다. 이 모든 분위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다 읽고 나면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느낌표처럼 짙은 무게추 하나가 심장 끝에 매달려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

 

읽고 나서 잠시 밖을 나오니 나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느낌이 달랐다. 마스크를 살짝 벗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공기가 새로웠고,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걸음이 달 표면을 걷는 우주인인 양 가벼웠다. 두 팔을 휘휘 저어보았다. 나의 몸을 나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온전한 자유가 새삼스러웠다. 당연한 듯 누리는 이 행위가, 자유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일상적인 몸짓이 과거의 어떤 이들에게는 절실한 바람이었음을 생각하니 문득 시큰해졌다.

잊기 위해 기억하는 심연의 아픔을 지닌 이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은 감히 하지 못하겠다. 내일로 한 발 걸어가기 위해 고통스런 어제를 응시해야 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겸허히 기억하겠다 말할 뿐. ~ 나의 언어가 너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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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12-10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먹먹한 문장도 많았어요. 그보다 어지러운 문맥이 많아서 그렇지만요ㅋㅋ아 진짜 남들 다 잘만 읽었다는데 전 왜이리 힘들었을까 싶네요ㅜㅜ
흑인문학이 대체로 어두워요. 정말 어둡기만 해서 별로거든요. 작품성과 상관없이요. 근데 이 책은 어둡기만 한 건 아니더군요. 제목에도 들어있듯이 사랑을 강조하는, 사랑에 의한 작품이었어요. 모양과 색깔도 너무 다양하더라고요. 볼 게 많았던 작품이었어요^^

노예들의 삶을 일일이 나열할 마음은 없지만,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내용은 얘기안할 수가 없네요. 대체 흑인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대우를 받아야만 했는지 계속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건지...

그러고보니 지금 우리도 코로나로 인해서 자유를 잃었군요. 1년을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덧 그게 또 자연스러운 것이 돼버렸어요. 노예들도 차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까 싶어져요. 여튼 11월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넘 바쁘고 정신없는 한달이었어요. 댓글도 이제야 다네요ㅜㅜ 남은 한 달도 잘 지내시고 건강 또 건강하세요ㅎㅎ

나비종 2020-12-01 19:08   좋아요 1 | URL
어지러운 문맥ㅎㅎ 딱 적절한 표현이시네요. 저도 힘들긴 했어요. 다만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에 집중하고 난해한 문맥들은 그냥 흘러가게 놔두었을 뿐이죠.
흑인문학이 그렇군요. 어두운 것은 딱 질색인데..^^; 저는 가볍지 않은 깊이가 좋더라구요. 칙칙하지 않고 함부로 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더라구요.ㅎㅎ

인간의 잔혹성을 그려낸 작품들을 접할 때마다 성선설과 성약설을 생각해보곤 해요. 개인적으로는 성악설에 가까운 편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중이구요.

코로나로 인한 자유의 상실.. 맞아요! 마스크 끼고 수업 시간에 중얼거리려면 어떨 땐 환장하겠거든요.ㅠㅠ 이게 수업인지 방백인지 구분이 안갈 때도 많구요, 안쓰럽기도 하고, 갑갑할 때가 많아요. 이제는 마스크를 벗고 있을 때 허전한 느낌까지 드는 걸 보면 적응의 존재가 맞기는 한가 봐요.

12월의 첫 날에 쓰는 글이네요.ㅎㅎ 이번 달도 열심히 분주하게 보내겠지만 책 읽고 글쓰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려고 해요. 잘 지내세요~^^*
 
아버지와 아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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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주는 선입견이란. 러시아어는 도통 모르니 책 표지에서 이반 투르게네프로 짐작되는 이름 옆의 제목이 거의 직역인 줄 알았다.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도 한몫했다. 어디서 이런 그림을 적절하게 찾아왔는지. 딱 봐도 아버지와 아들의 대치 상황 아닌가. 표지를 넘기기 전에 했던 상상은 어쩌면 당연했다. !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하는 소설이겠구나.

결론적으로 대립은 맞으나 대상이 살짝 어긋난다. 소설의 중심 무대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은 주인공의 큰아버지와 친구이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라떼를 부르짖는 큰아버지와 아아를 연상시키는 친구는 결코 서로에게 섞여 들어가지 않는 중심인물이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아들이 언제 대립하나 하염없이 기다리다 드라마가 끝나버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두 명씩이라 제목의 <아버지와 아들>이 어느 팀인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아들의 친구가 급부상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비중도 만만치 않아지는 게 아닌가. 뒷부분의 해설을 보니 비로소 이해되었다.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이들>로 주인공을 복수의 인물로 설정했던 거다. 서브로 여겼던 아아도 주인공이었다는 것.

 

러시아 이름은 이름(예브게니), 부칭(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애칭으로 비스므레한 발음도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다.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그냥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계도를 그려가면서 읽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를 바실리치였다가 바실리예프였다가 성만 불렀다 이름만 불렀다 부칭을 불렀다. 이런, 된장! 적으면서 짜증났지만 인물들의 관계도는 파악이 되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대략 ,,,등의 어미로 끝난다. 리뷰에서 그들의 풀네임을 적다 보면 스팸처럼 도배될 것이므로 아버지 1, 2와 아들 1, 2로 적기로 한다.

아들 1과 아들 2 중 앞에서 언급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아들 2로 명명하려고 한다. 그는 니힐리스트이다. 비중으로만 보면 원톱 주인공이다. 아들 1의 친구인 그는 대사량도 많고 액션도 화려하고 사건도 파란만장하다. 순간적이지만 조연급의 여인 1, 2에게 찝쩍대는가 하면 권총으로 결투도 하게 된다. 발진티푸스에 걸린 환자의 시체를 해부하다 손가락을 베이는 바람에 감염이 되어 죽는다는 급작스런 설정은 이건 뭥미? 이다. 허무주의자가 허무하게 죽는다. 복잡하게 여기저기 다 얽히는 인물을 만들어놓고 끝내 감당이 안 되니까 제거해버린 느낌이랄까. 어쨌든 주인공이 죽는 법은 거의 없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은 아들 1을 주인공 1으로 여기기로 한다.

 

소설 속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라떼를 고집하는 구세대와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신세대 아아의 갈등과 대립 상황이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과 맞물리며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가정으로 끌어와서 구현하고 있다. 둘째,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사랑 방식이다. 사랑에 빠져드는 심리의 그러데이션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의 관점이든 이념의 관점이든 한 가지 관점으로 소설을 음미해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나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작가의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러브러브한 분위기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작위적인 어투도 사건 전개도 도통 못마땅한 데다 재미도 없어서 집어던지고 싶은 책의 필수 조건을 골고루 겸비한 책이었다.

 

큰아버지와 아들 2의 대립이 선명하게 부각되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색채로 배경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더욱 시선이 갔다.

첫째, 아들 1이다. 친구인 아들 2를 존경하다시피 하며 그를 추종하는 인물이다. 얼마간은 주체성 없이 아들 2에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극단적인 아들 2에 비해 이 인물의 내면에는 낭만적인 면모가 자리하고 있다. 소설을 통틀어 가장 많이 갈등하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스스로 일어서서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모습이 가늘고 길게 걸어가는 인간 승리를 연상케 한다.

둘째, 아버지 1이다. 근본적으로 지닌 이념은 아들 1의 큰아버지인 형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훨씬 따뜻하고 사랑이 충만한 인물이며 당신의 이념을 아들 1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많이 속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선한 사람의 결이 보여서 마음이 짠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착한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아버지 2와 어머니 2이다. 소설 속의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일찍 죽어서 존재감 제로인데 유일하게 등장하는 어머니이다. 물론 아버지 1의 어린 부인도 아들 1의 어머니 급이지만, 그녀는 어머니로서보다 한 남자의 여인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 되므로 제외한다. 집을 버스 정류장으로 아는 아들 2의 들락거림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묵묵히 맞이하고 기다리고 아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슴 졸이는 인물들이다. 헌신적인 그들의 사랑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모습과 아들의 무덤을 찾는 모습에서 극치를 이룬다. 불효막심한 아들이 뭐라고! 이념, 그게 뭣이 중헌디!

 

라떼의 고지식함과 허세도 밥맛이지만 아아의 극단적인 이념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빠진 것을 자각하면서도 이념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떠나버리는 아들 2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사랑은 이념보다 상위 개념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배반했던 걸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마부를 텁석부리라며 무시하는 모습에 인성 쓰레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말만 번드르르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건 과연 무엇일까. 커다란 나무로만 보였던 나의 부모님들은 어느덧 자그마한 관목이 되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옳은 줄로만 알았다.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부모님 세대의 모순적인 면과 약간은 권위적인 면과 고집이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가 되어버린 나도 가끔은 라떼를 찾게 되니 자식들이 지금 나를 바라보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리라. 나의 아이들이 자라면 또 다음 세대들이 아마도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 세대 간의 간극은 어쩌면 반복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부부가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한결같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대, 이념 따위는 다 날아가 버린다. 작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이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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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11-01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시아 문학은 이게 처음이었는데요, 어려운 이름과 지명을 보면서 일본소설을 처음 읽던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입에도 붙지 않는 이름들을 메모해가며 읽다가,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것이 바로 인물을 이니셜로 외우는 거에요. 그래서 아르카디는 A군, 바자로프는 B군으로 리뷰에 적었어요 ㅋㅋㅋㅋ 적응되면 생각보다 편합니다. 암튼 저는 올드보이와 영보이로 나누었는데, 나비종님은 라떼와 아메로 나누셨군요! 재밌는 표현입니다 ㅎㅎㅎ

일단 양쪽의 입장이 확고하고 어떻게 다른지는 초반부터 잘 나왔지만, 타협의 기미가 안보이니 이 대결구도가 끝까지 가는 것 같아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더라구요. 그래서 작가가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방향을 튼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으면 뭐 별 내용없이 끝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으로 살아도 문제없는 세상인데, 모 아니면 도를 외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웃긴 건 본인들도 힘들고 피곤한 성격인 걸 알더군요. 근데 이렇게 쭉 살아와서 고칠수 없다는 거죠.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요. 그게 다 쓸데 없는걸 형님처럼 총까지 맞아봐야 아는건지 ^^;; B군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신봉하던 니힐리즘도 죽음에 이르고 보니 중요한 게 아님을 알게 되다니요.

작가는 바자로프를 인성 쓰레기로 만들기로 작정한듯 싶어요 ㅋㅋㅋ 사랑도 저버리고, 친구도 잡지 않고, 노인공경도 없고, 귀족도 아니면서 아랫사람들을 막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그런데 적어놓고 보니 ‘요즘애들‘이 딱 바자로프를 빼닮았네요. 그리고 아메였던 저는 어느새 라떼가 되어버렸구요 ㅎㅎㅎㅎ 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마음을 알게 되듯이, 아메는 라떼를 이해 못하니까 라떼들이 이해해줘야 할거 같아요^^

이번에도 책보다 서로의 리뷰와 감상이 훨씬 재미있는 시간이었네요 ㅋㅋㅋ 이번 리뷰는 언제쯤 올라올까 계속 기다렸는데, 아슬아슬하게 성공하셨네요 ㅋㅋㅋㅋ 댓글 적다가 어느새 11월이 되었네요. 10월도 고생하셨어요. 점점 연말이 다가와서 여러모로 바쁠텐데 컨디션 조절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나비종 2020-11-01 07:59   좋아요 1 | URL
페테르부르크란 도시를 검색해서 찾아보고 그곳이 레닌그라드인 줄 이번에 알았습니다.^^; 일본소설은 자주 접하지 않은 장르인데요, 매력이 있나요? 오호! A군, B군. 좋은 방법이네요. 예전에 비슷한 문장들을 겹치지 않게 쓸 때 번호를 붙여서 순서쌍으로 돌린 적이 있었거든요. 1,2 7,8 2,5 이런 식으로요. 다음번에 복잡한 이름이 나오면 써먹어보겠습니다. 도통 이름이 헷갈려서 말이죠.ㅎㅎ 올드보이와 영보이도 정체성이 확 드러나서 좋은 표현 방법이네요.^^ 저는 큰아버지 캐릭터를 보고 라떼는 말야~ 를 자꾸 외치시길래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지성을 지닌 친구를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비유를 했거든요.

맞아요. 갑자기 중간부터 사랑이 툭 튀어나온 느낌이 강하더라구요. 오딘초바의 캐릭터가 그렇게 끝까지 갈 줄 몰랐거든요. 책 뒤에 나오는 작가 연보에 나오는 비아르도라는 여인을 많이 반영한 걸까요. 평생에 걸친 사랑이라는 여인이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벨린스키와의 추억에 바친다고 나오잖아요. 바자로프의 캐릭터에 그렇게 공을 들였던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요. 벨린스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걸 보면요.
그나저나 뜬금없이 결투 장면이 나와서 이건 뭐야 했었는데 작가 연보를 보고 푸시킨이 결투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톨스토이와 결투까지 갈 정도로 언쟁도 벌였다는 걸 보면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중 하나였더군요.
이런 요소들을 보면서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글이란 작가의 삶을 많이 반영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나 B군이나 다 쓰잘데기 없는 객기로 보여지더라구요. 신념을 굽히지 않던 박새로이는 멋있기라도 했지ㅋㅋㅋ 아! 이태원클라스의 그분이요~ㅎ 저는 드라매니아^^;

작가 현실의 삶에서도 A군의 모태로 추정되는 작가와 B군과 O양의 삼각구도가 있었던 걸까 잠시 근거없는 상상을 해보았어요.^^;
맞습니다. 저 역시 아메였는데 라떼가 되어버리고 이게 투비컨티뉴드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 같기도 해요.ㅎㅎ

물감님의 리뷰와 댓글로 독서 레벨이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ㅋㅋ 책보다 리뷰가 더 흥미있고 댓글도 만만치 않게 작은 리뷰 수준이니 그나마 이 재미로 고전의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ㅎㅎ
아슬아슬^^;;; 네. 이번 달에는 좀 더 분발해볼게요. 11월의 첫 날, 눈 비비고 일어나 대댓글부터 쓰는 이 미친 정성의 클라쓰! ㅎㅎ 물감님도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