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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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매력은 세월의 묵직함을 건너야 빛을 발하는 듯하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 1파운드 살덩이의 난제를 핏방울 패러독스로 깔끔하게 해결하는 통쾌함. 동화를 읽던 10대에 접했던 <베니스의 상인>은 엄청 유명한 작가가 가볍게 던진 유쾌한 이야기 정도의 의미였다.

크로키로 묘사되었던 인물을 정밀묘사로 접한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생경하면서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양감과 질감에 제목만 같은 전혀 다른 책을 읽은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해설과 옮긴이의 말 등을 제외하면 불과 150여 쪽 되는 책이 남겨 놓은 건 혼란과 물음표였다.

 

금 상자, 은 상자, 납 상자. 극의 흐름상 금도끼와 은도끼 등 쌍도끼를 들고 나타난 산신령의 이야기처럼 정답이 이리라는 건 쉽게 예상되었다.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허울 좋은 가치. 이를 대변하는 금 상자를 마주한 등장인물의 어리석음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은 상자였다. 몇 번을 읽어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당시 화폐로 이용되었다던 은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내왕하는 창백한 천역의 물건이여(p84)’라 묘사한 문장이 있다. 이게 연관이 있을까. 선택할 때 너무 심사숙고하기에 낭패를 본다고도 했다. ‘그림자에 입 맞추는 자들은 / 그림자의 축복만을 받는다.(p68)’는 문장도 있다. ‘얻기에 합당한 만큼의 것이라. 이 문구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거기 잠깐 머물러 공평무사한 손으로 그대의 값어치를 달아보아라.(p59)’라는 문장도 있는데, 한 사람의 값어치를 정확하게 매기기는 어렵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은 상자는 작가의 정답이 아니었던 걸까.

모든 것을 내놓고 모험을 해야 선택할 수 있다는 납 상자. 여기까지는 수긍이 가지만 무엇을 기약해주기보다는 위협하는 듯하지만, 그대의 소박함은 웅변 이상으로 나를 감동시킨다.(p84)’라는 선택의 이유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3종 세트를 끼워 맞추기 위한 선택지였다는 느낌이랄까.

나라면 납이 너무나 정답 스멜이 뻔해서 은과 납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 같다. 나는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직도 갈등하는 햄릿 버전이다. 쩜쩜쩜.

 

사소하게 지나칠 뻔했던 문장 몇 개가 마음에 남는다. ‘달빛이 밝을 때는 저 촛불이 보이지 않았어요.(p141)’,‘무엇이나 환경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덜 좋기도 하는 거야.(p141)’ 너의 눈을 믿지 말라며 색상 대비가 펼쳐진 장면이 떠오른다. 두 눈 부릅뜨고 바라봐도 여전히 다른 색상으로 보이는데 같은 색상이라는 날도둑 같은 현상은 배경의 중요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세상만사는 적당한 때와 장소가 조화를 이룰 때 행해져야 비로소 정당한 칭찬을 받으며 완벽을 기할 수 있는 것이다.(p141)’ 문학에 있어 적당한 때와 장소라는 건 시대상을 반영한 이슈가 녹아 들어있을 때일 터이다. 샤일록은 욕심 많은 악인이기만 한가? 앤토니오는 모든 면에서 선인이기만 한가? 기독교인과 유대인 간의 대립을 차치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두 인물 다 100% 의 양극에 세우지는 못하겠다. 사회적인 배경은 행위의 동기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요인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적대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작가의 과감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게 바로 납 상자를 선택한 바싸니오의 모험 정신일까.

 

작가는 마지막까지 값어치에 대한 질문의 끈을 놓지 않는다. 친구 앤토니오의 목숨을 살려준 판사가 바싸니오에게 요구했던 반지는 사랑하는 포오셔가 준 것이다. 결국 바싸니오는 사랑의 증표와 우정 사이에서 망설이다 반지를 건넨다. 에피소드 느낌의 이 장면은 독자에게 가치 선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물건과 사람 가운데 선택지는 당연히 사람이어야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는 이로 인해 연인이 결별하는 일도 충분히 생길 만하다.

가치와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 10대 이후로 몇십 년을 건너와 읽은 <베니스의 상인>은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금방 값지던 것이 또 금방 값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p11)’ 가치에는 정답이 없으니 우리는 난감한 상황에 수시로 놓인다. 기준점이 흔들리니 상황에 적절한 포인트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명백한 진리라든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배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닷속에 던져져 어정쩡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삶에 더해지는 가치를 부레처럼 매달고 공기를 뺐다 불어 넣으며 시시각각으로 떴다 가라앉는 물고기로 삶을 유영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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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6-14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분량이 짧아서 그런가, 금방 읽고 글 올리셨네요. 페스트에 비하면 아주 읽기 쉬웠던 책이었어요 ㅎㅎㅎ 나비종님은 ‘가치‘에 포커스를 잡으셨군요. 안토니오가 보증을 선 것도, 제시커가 아버지를 버리고 로렌조를 택한 것도, 란슬럿트가 바싸니오의 하인을 자청한 것도, 포오셔가 이제 막 사랑하게된 남자의 친구를 위해 빚을 갚아주려는 것도 다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움직인 거겠죠. 다만 유대인이 선택한 가치는 좀 성격이 다르더라구요. 자신에게 유익하든지 무익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복수하기만을 원했으니까요. 이런건 전혀 신념도 없고 정의도 없는 자살특공대와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럼에도 납득이 가는 그의 분노가 참 짠하고 그랬어요 ^^;

어렸을때 이 책을 읽었다면 참 어머니를 가리는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였을 거 같아요. 제 꾀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자의 최후가 이렇구나~ 하고요. 지금의 제 감상이 훗날에는 또 새롭게 느껴지겠죠? 아무튼 짧아서 좋네요. 월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책 얘기를 할 수 있어서요ㅎㅎㅎ 남은 6월 파이팅하세요!

나비종 2020-06-14 19:58   좋아요 1 | URL
읽은 건 금방 읽었는데 어떤 식으로 리뷰를 써야할지 난감하더군요.^^; 읽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선택한 최고의 가치가 복수였다면 그의 관점에서는 유익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우리의 관점에서는 쓰잘 데 없는 것처럼 비춰지지만요.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등장인물들의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물감님 말씀대로 신념도 없고 정의도 없고 막무가내인 요소인데 말이죠. 거기에 가치를 두려면 얼만큼의 분노게이지가 상승되어 눈이 뒤집히는 걸까요?ㅎㅎ

비유가 딱 이네요. 그 정도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막상 읽고 보니 다른 것들이 크게 보여 당황했거든요.
같은 책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장면이 들어온다는 점이 제가 느끼는 독서의 매력이예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빨간 우체통이 자꾸 눈에 들어와요. 손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언뜻언뜻 하곤 해요. 아파트 우체통에 고지서나 전단지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 꽂혀있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요. 성격은 급한데 감성은 점점 아날로그화되어가는 것 같아요.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써볼까 하다가도, 하지만 누구에게?에서 막힌답니다.^^;
월말에 또 필이 꽂혀서 물감님께 6월의 편지를 쓰게 된다면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오겠죠?ㅎㅎ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