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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어느 쪽이 더 공포스러울까. 100미터가 넘는 롤러코스터와 귀신의 집, 퇴근 후 매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와 한 달에 한두 번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 조스 영화에서 상어가 다가오는 장면과 창문에서 불쑥 등장하는 허연 물체. 개인차는 물론 있겠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후자에 공포를 더욱 많이 느낀다고 한다. 세 가지의 공통점은 예측할 수 없음이다. 시기를 알 수 없거나 대상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 인간의 불안은 극대화가 된다. ‘지금까지는 그저 불쾌한 사건이라고 불평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규모를 정확히 할 수 없고 원인도 규명할 수 없는 이 현상에 뭔가 위협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p26)’
비록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등교해서 마스크 쓴 채 7교시까지 쉬는 시간 없이 스트레이트로 수업을 받는 아이들. 해본 적이 없는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며 시행착오를 겪고, 등교 수업이 시작된 후에는 마스크 쓰고 수업을 하면서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어질하고 띵한 느낌으로 퇴근 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이 든 엊그제. 새벽 2시에 겨우 일어나서 4시에 원격으로 결재 올리면서 달력을 보았다. 겨우 2일 지났을 뿐인데. 6월이 다 되도록 담임교사의 제대로 된 얼굴을 전혀 알지 못하고, 목소리와 문자로 익숙해진 학생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마스크로 차단되지 않은 기분 좋은 공기를 당연한 듯 들이마시던 일상이 값진 것이었음을 자주 깨닫는 요즘이다.
1940년 대 4월 16일에서 이듬해 2월까지 페스트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리는 한 도시와 그 안의 사람들의 치열한 모습을 담은 소설 <페스트>.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 놀라울 정도의 싱크로율을 보인다. ‘딱 한 가지 의미에서 성가신 일이 될 겁니다. 이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p23)’ 감기 증상과 비슷한 코로나19가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미세한 비말로 전파된다는 점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혼란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틱한 줄거리에 입체감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계속 남아서 페스트에 걸린 이들을 돌보는 의사 리외에게는 소명을 다하려는 담백함이 있지만 밋밋하다. 취재 차 도시로 들어 왔다 페스트로 도시가 폐쇄되자 도시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 결국 남기로 한 기자 랑베르도, 도시의 풍경을 매일 수첩에 기록하던 노인 타루도, 범죄를 저지르고 도시로 들어온 코타르도, 묵묵히 자기 일에 몰두하는 그랑도. 그 외 다른 인물들도.
페스트로 고통받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스케치하듯 매일 그려낸 평범한 수기를 읽은 듯하다. 오히려 소설에서는 개개인의 캐릭터보다는 도시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전체의 심리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에 초점이 맞춰진다. 카뮈의 문장 하나하나에 공감하며 세태와 이를 꿰뚫어 보는 작가의 통찰력에 몇 번씩 감탄했다. 작가를 높이 평가한 점은 1947년에 출간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문장들이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다는 점이다. 올해가 아닌 다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이 정도로 와닿지는 않았을 듯싶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끔찍한 무력감을 증명하듯 보여주고 있었다.(p165)’ 요즘처럼 통일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던가. 계속되는 거리 두기로 지쳐가던 심정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병은!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마음으로 병을 앓게 한다니까요.(p138)’ 지난 3월까지는 하도 집에만 있다 보니 마음이 계속 가라앉았다. 4월부터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다. 5월 27일부터 아이들과 마주하면서 오랜 시간의 마스크 착용으로 종종 숨이 막혔지만 마음의 숨통은 트이는 것 같았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p194)’ 외출 시 매번 마스크를 하고, 손 씻기를 일상화하는 것이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직접적인 실천 방법이다. 유일한 방법이 성실성이라는 말이 맞다. ‘질병은 얼핏 보면 포위된 자로서 느끼는 연대 의식을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군집 관계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저마다 고독에 잠기게 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초래되었다.(p203)’ , ‘페스트가 사실은 유배와 이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p348)’ 앞의 두 문장이 페스트의 본질과 이로 인한 영향을 날카롭게 분석한 핵심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적용해도 어색함이 없는 문장들을 접하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 은하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 본성도 공통으로 존재하는 요소들이 있어 법칙화할 수 있는 걸까.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끝도 알 수 없음이다. 소설의 결말은 언제든 페스트가 다른 도시를 덮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코로나19가 언제쯤 종식이 될지 지금은 아득하지만, 올해의 언젠가 다행히도 마스크를 벗게 된다 해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리라. 500년 된 씨앗에서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잠복된 바이러스는 활성화될 환경이 갖추어지면 언제든 퍼져나갈 수 있다. 침스러운 거 질질 흘리던 외계생명체를 클리어하는 영화의 엔딩에서 카메라가 마지막 침방울이 스물스물 꿈틀거리는 장면을 한구석에 클로즈업해서 이게 끝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처럼. 투비컨티뉴드인 거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방심하면 언제든 반복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