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이 즈음이다. 밤의 흔적이 다 가시기 전, 삶의 소리가 들려오기 전, 연극이 시작되기 전, 잠시 멍해지는 시간이다. 텅 빈 무대를 바라보는 배우의 심정으로 내 하루의 시작을 응시한다. 스스로의 온기로 자신을 데워야 하는 나를 바라본다.

 

물질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모양이 변하거나 상태가 변화하는 물리 변화와 처음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해버리는 화학 변화.

 

지금 나는

얼어붙어있는 고체를 말캉한 물로 바꾸려는 걸까,

찢어져버린 종이를 초라한 테이프와 풀로 애써 이어 붙이려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면 이미 새카맣게 타버린 숯 인줄도 모르고 나무로 돌려놓는답시고 안간힘을 쓰는 걸까.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 줄도 모르고.

당신을 향한 마음은 무슨 변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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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의 의학세계사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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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과서의 단 한 줄로 지나치지만, 이 한 줄에 기록될 지식을 발견하기까지 몇 십 년 혹은 일생을 바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내 말을 듣는 학생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문명과 식량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식량을 얻고자하는 인류의 지난한 노력의 역사를 접하면서 교과서의 문장들이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암모니아의 합성을 가르치면서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교과서에서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 문제였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중학교 3학년 과학, 천재교육, p90) 몇 년을 가르쳐왔어도 무심코 지나치던 부분이었다. 여기에서 주안점은 질소와 수소가 반응하여 암모니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화학 반응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하지만 암모니아를 이용한 인공 비료의 합성으로 식량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알게 된 이상 교과서의 건조한 한 줄은 더 이상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이었다. 학생들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도 그들 중 몇몇은 무언가를 위한 인류의 노력에 대하여 한 번 쯤은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리라.

 

중학교 3학년 과학 생식과 발생단원에는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물질이 한 페이지로 등장한다. 교과서에는 제시되어있지 않지만, 교사용 교과서에는 탈리도마이드에 대한 설명이 있다. 입덧을 막는 용도로 임산부들이 복용했다가 많은 기형아가 나와서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내용이다. 살짝만 언급하고 지나갔다. 그런 약이 있었다더라. 무척 위험했다더라. 그래서 금지되었다더라 하고.

이 책에서 탈리도마이드를 보니, ! 나 이거 알아! 라는 생각에 반갑고 우쭐했다. 하지만 관련 이야기를 읽고 보니 내가 결정적으로 빠뜨렸던 부분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 심사관의 반대로 미국에서는 허가가 나지 않았기에 46개국에서 1만 명의 기형아를 발생시킨 약의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임신한 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이야기의 초점은 위험한 약이 나왔다더라가 아니라 약 시판을 앞두고 임상시험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있다. 그 점을 학생들에게 얘기하지 못했던 거다. , 역시 다방면으로 많이 알아야 수업이 풍성해진다. 토론의 주제로도 얼마나 바람직한가! 나의 학생들은 무식한 교사를 만나 결정적인 생각꺼리를 놓쳐버렸구나, . 서민 교수님! 이 책이 1년만 더 일찍 나왔더라면 140명의 학생들이 제 입을 통해 이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작가가 쓴 책의 장점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글쓰기에 대한 책이건, 정치에 대한 책이건, 기생충에 대한 책이건 장르를 불문하고 일관성이 있다. 때문에 두꺼운 책을 앞에 두고도 작가가 서민이라면 망설임 없이 첫 장을 펼치게 한다. 이러한 장점은 그의 성향에서 온다고 판단된다. 유머를 즐겨하고, 지루하고 난해한 글을 못견뎌하는. 나와 코드가 맞는 부분이다. 작가의 책을 만나면 부담이 없고 편하다. 이 책은 의학의 세계사라는 방대한 지식까지 담겨있으니 나의 세계가 몇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풍성해진 느낌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하는 직업군 중 하나는 교사라 생각한다. 과학 교사라고 과학에 대한 책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인문학이나 철학, 음악, 미술, 심리학 관련 책도 어떤 식으로든 수업 시간에 언급이 된다. 이 대목을 설명하는 데 이 내용을 써먹네? 수업하다 불쑥 생각이 나서 비유할 때 스스로의 순발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그 책을 읽기 잘했다며 저자에게 고마워했다. 이 책도 두고두고 고마워하며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새삼 깨닫는다. ! 의과대학 교수님이시지! 의과대학 교수님이라 해서 무조건 의학의 역사에 해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교사라고 해서 과학의 모든 분야를 잘 안다든가 과학적인 발견과 발명의 역사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 책에서 높이 평가할만한 점은 내용의 취사선택과 서술 방식에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색한 부분이 없이 이어지는 의학의 역사는 이 분야에 문외한인 독자가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중간 중간 유머 섞인 서술은 깊이 있는 지식과 지식을 이어주는 접속사 역할을 한다.

아이스 맨 외치를 이렇게 써 먹다니! 수업 시간에 과학 뉴스로 소개하는 데 그친 이 인류가 의학의 역사를 소개하는 앵커로 등장하다니. 신선한 발상이 감탄스럽다. ‘사람들이 의학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재미있게 서술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p13) 의학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재미있게 서술된 이 책을 보니 관심이 생겼다. 나에게는 작가의 의도가 적중한 셈이다.

 

역사는 관점이다. 서술의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색깔을 띤다. 따라서 어떤 분야의 역사이든 상대적일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기자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보도되듯이. 의학적인 기술의 발달사에만 중점을 두었으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서술이 되었으리라. 이 책에는 의학의 발달사보다 더 큰 내용이 담겨있다. 그건 작가의 관점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서민'적 관점이랄까. 그 관점이 나는 가장 좋았다. 이는 책의 마지막 부분, 외치의 말에 고스란히 담기는데, 순간적으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한 방이 있다. ‘제가 만난 의사들은 말입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지 고뇌했고, 자신의 능력으론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을 미안해했어요. 시대와 지역은 달랐지만, 그 마음만은 똑같았습니다. 이 강좌를 열면서 제가 전하고 싶었던 것도 의사들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p410) 중심에 사람을 두고 서술된 의학의 역사, 이 책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이다.

 

 

p68, 밑에서 7째 줄 : ‘, , , , , 비장, 신장, , 심장의 순서를 이왕이면 맞췄어도 좋았겠다는 나만의 생각^^;

방법 1 : , , , , ....라면, 심장, 신장, , , 비장

방법 2 : 보통의 음양오행 서술 방식으로 목, , , , ....라면, , 심장, 비장, , 신장

p162, 7째 줄 : 스노우 스노

p191, 두 번째 단락 5째 줄 : 갖기 않기에 갖지 ~

p204 마지막 단락 1째 줄, p205 4번째 단락 2째 줄 : 초음파의 발명 ~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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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 2019-01-2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꼼꼼한 읽기와 오기 지적까지! 대단하십니다

나비종 2019-01-22 19:11   좋아요 0 | URL
^^; 독서 속도가 느리다보니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마태우스 2019-01-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 리뷰 감사드립니다. 오타 지적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교정을 잘 못봐서 그랬습니다. 혹시 2쇄를 찍는다면, 말씀하신 대목 반영해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꾸벅

나비종 2019-01-27 17:27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방대한 지식에 감탄하면서 내내 유쾌했구요.
오타는 시험지 원안을 매의 눈으로 검토하던 습성이 있어 그저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2쇄를 찍을 만한 책이니 기필코 반영이 되겠군요.^^;
 

지난 회 다시보기 요약본. ‘긴박한 개고생 끝에 해외여행 가는 남편에게 마음을 담은 무척 기특한 메시지를 30만원과 함께 여권이 든 에코백에 무사히 투입한 나비종은 관계 개선 미션을 클리어 한다.’

 

 

정확히 5분 뒤 미니가 도착했다. 여유 있게 점심을 차려주고 식탁 맞은 편에 앉아 농담을 주고받는데 당신이 들어온다.

짐짓 모른 척 모드, “점심 먹었어요?”

먹어야지.”

어서 와요. 방금 국 데웠어요.”

점심을 먹은 남편은 거실 현관 입구 근처에 놓은 여행 가방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최종 점검을 하겠지. 부시럭 부시럭 소리는 나는데 주방 모퉁이 사각 지대에 앉은 탓에 봉투를 보았는지 아닌지 도통 모르겠다. 궁금하다, , 심히 궁금하다!

 

여전히 식탁에서 점심을 먹는 미니 근처로 온 당신, 한 마디 던진다.

웬 돈을 그렇게 넣었어?”(의역 : 봉투 봤어.)

음성이 부드럽다. 현금만의 위력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돈은 다만 거들었을 뿐이라고.

이번에 **(시동생)300만원 부쳤어.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금에 보태라고.”(의역 : 내가 혼자 행한 일을 당신에게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밝히는 거야. 나도 여기저기 써야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아줘.)

잘했네요. 돈도 많이 들 텐데.”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하는 나. 이런 일에 대한 리액션은 타이밍이 생명이다. 조금이라도 주춤하면 일말의 서운함을 줄 수 있는 내용이다. 어차피 내 돈 들어간 것도 아니니 그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는 나는 거침이 없다.

 

점심을 먹은 미니는 졸립다며, 학교에 가서 자야겠다며 주섬주섬 NCT 롱패딩을 장착하고 학교로 돌아간다. 당신과 나, 단 둘이 남는다. 흐흠! 살짝 어색하다. 침묵을 깨야 해. 흐름이 끊기면 안 되지.

언제 나가요?”

조금 더 있다.”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줘요?”

아니! 택시 부르면 되는데 뭘.”

그럼, 같이 나가요.”

가방에 노트북과 읽을 책 등을 후다닥 챙긴 나는 그를 배웅할 준비를 한다.

 

4분 뒤, 택시 도착.

가면 카톡 되어요?”(의역 : 당신에게 맨날 맨날 연락하고야 말거에요.)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이면 되는 것이니 11전화를 마음속으로 결심한 나는 .” 이라는 당연한 답변을 예상한다.

아니. 그냥 꺼놓으려고. 대부분 교육 받는 곳에 있을 거라 제대로 받지도 못할 것 같아서.”

“헉! 로밍은요?”

그것도 안하려고.”

무소식이면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슬쩍 당신의 얼굴에 미소가 비친다. 기다리는 사이 슬쩍 팔짱을 낀다.(라고 읽고 단단히 팔을 붙든다.) 오홍? 뿌리치지 않는다.

 

커피숍에서 독후감을 쓰고 돌아온 나는 잠시 거실을 휘 둘러본다. 열흘 동안 비어있을 당신의 자리가 조금 허전하다. 휘리릭 아침부터의 시간을 피드백한다. 당신의 미소는 무슨 의미였을까? 해석 1, 뜻밖의 찬조금에 횡재한 기분? 해석 2, 나의 메모에 마음이 조금 열려서? 조금 헷갈린다.

 

봉투를 어디에 놓았느냐에 따라 다르리라는 생각에 거실 책상을 스캔한다. 없다. 책꽂이를 스캔한다. 없다. 슬금슬금 악마의 유혹이 시작된다. ‘니사랑 **은 아마 돈만 챙기고 메모는 버렸을 거야.’ 고개를 흔든다. ‘아냐, 아냐, 내용을 급하게 쓰긴 했지만, 버릴 정도의 내용은 아니었어, .’

마음은 그러면서 앞 베란다로 향하는 발. 재활용 종이쓰레기를 뒤적인다. 없어야해. 마음은 그러면서 손은 종이를 몇 개 들춰본다. 없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의심을?’ 그러면서 거실 휴지통에 슬쩍 눈길을 돌리며 귤껍질 사이를 집요하게 스캔한다. 없다.

차라리 캐리어에 넣을 걸 그랬나? 그러면 도착해서 짜잔 극적으로 개봉하면 기쁨이 배가 되지 않았을까? 불가능한 시도였을 것임을 금세 깨닫는다. , 자물쇠가 있었지.

 

가져갔을까? 나라면 어디에 놓았을까? 셜록이 된 나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추리를 한다. 책꽂이는 아이들이 볼 수도 있으니, 혹시 가방? 거실 귀퉁이에 있는 당신의 갈색 간이 가방 속에 슬쩍 손을 넣는다. 고지서도 내 명의로 된 것이 아니면 손도 안대는 내가 이 난감한 일을 해내는 구나, . 그런데, 난감한 행동에 대한 보상이 곧 주어진다.

올레! ...! 일점의 파손도 없이 고이 안착을 한 내 봉투. 크크크. 화성탐사로봇이 무사히 화성표면에 안착했다해도 이보다 기뻤을까. 조심조심 가방을 다시 닫은 내 입가가 실룩거린다. 괜스레 가방을 한 번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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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 다시보기 요약본. ‘해외여행 가는 남편에게 10만원을 줄까 말까 망설이다 말자로 결론 내렸던 나비종은 물리치료 샘의 뽐푸질에 다시 도전의지를 불태운다. 그래, 메시지도 곁들여야겠어! 찬조금만으로도 기특할 판에 메시지를 곁들이려는 아름다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메모지로 적합한 엽서를 고르고 고르다 이러다 망하겠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힐 지경에 이르고. 시시각각 남편이 떠날 시각이 다가오면서 최후에 남은 엽서 집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를 펼쳐드는데...’

 

이 아름다운 봄은 내게 몇 번이나 남아 있을까?’

..이건 뭔가 시한부스러워. 패스!

 

오늘 밤은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은 밤이었으면 좋겠어.’

이건 너무 평범해. 임팩트가 없어. 다음!

 

잊지 말아야 한다. 넌 이유가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 독심술? 마지막 힘을 짜내서 고를 생각을 한다.

 

... 골랐다! 음하하!

여기서 히죽거릴 여유가 없다. 연습할 시간도 없다. 기회는 한 번 뿐. , 생각! 생각! 생각! 오타도 용납할 수 없다. 분위기 찡한데 모양 빠지면 아니 된다. 기념으로 사진도 찰칵!

엽서를 반으로 접고, 그사이에 300% 로 몸을 불린 찬조금을 하얀 봉투에 넣는다. 어차피 엽서의 멘트에 있어서 겉봉을 쓰지 않으려다가 이게 뭐지? 웬 폐지? 라며 혹시 구겨서 버려질까 겉봉도 꼼꼼히 쓴다. ‘내 사랑 **씨에게옆에 붉은 하트 스티커 착! 봉투 입구를 풀칠하려다 반짝이 하트 스티커 두 개로 뿅뿅 밀봉을 한다. 무사히 에코백에 투입시킨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린다.

 

내사랑 **!

잘 다녀와요.’ 간단한 말이라도 쓰려고 당신에게 줄 엽서를 고르는데,

처음엔 다크 블루의 색감이 좋아서

골라 놓고 보니 짧은 문구가 마음에 남아서.

좋았던 날이거나 힘들었던 날이거나 과거에 서 있지 말자.” 라는.

스스로도 힘들었고, 당신을 많이 힘들게도 했던 시간들. 이제 조금씩 그 시간들로부터 걸어 나오려 구요.

당신과 나 사이에 단절된 시간들을 생각해요. 그 안에서 사라져버린 따스한 마음들과 웃음을 되찾고 싶어서. 제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조금씩 시도해보고 있어요. 요즘 안하던 행동들의 원인이에요.

석 달 넘게 다녀도 씻은 듯 나아지지 않는 어깨 근육을 보면서, 당신과 나의 관계도 이런 모습일까 생각해요. 딱딱하게 굳어 있고 중간 중간 단절된 염증과 공백으로.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게 되요. 어쩌면, 언젠가는 하며.

어깨 운동 도와줘서 고맙고, 미니 학원 셔틀 해줘서 고맙고, 집구하고 대출하고 하는 대외적인 큰일에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라 미안하고, 환전도 못해서 해외여행 가는데 한화 들이미는 것도 초라하고.

그래도 노력하는 마음은 알아줘요. 어색해도 계속 하려고요. 건강하게 교육 잘 받고 와요. 나중에 나랑도 여행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2019.1.18. **

 

완결. 다음 회 예고 <감독판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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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인 일 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거 해줘서 고마운 마음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뇨. 좀 쑥스러워서요.”

잘 다녀오시라고 환전해서 주셨어요?”

아뇨. 환전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요. 이제껏 그런 건 남편이 다 알아서 해서요.”

봐 봐요. 그런 거 신경 안 쓰게 딱딱 처리해 오셨던 거, 고마운 거 맞잖아요.”

사실 아까 봉투에 10만원을 넣었다가 관뒀어요.”

왜요?”

한편 생각하니까 저만 두고 놀러가는 거잖아요. 생활비, 학원비, 공과금, 부모님 봉양비도 다 제가 낸다고 생각하니까 살짝 억울하기도 해서요.”

에이~ 노력하시기로 하셨잖아요. 한 번 해보세요. 보답이 올 거예요.”

아참! 저 요즘 노력 모드였죠? 그럴까요? 사실 교육받는 비용이 얼마냐고 물어보기는 했어요.”

이왕 드릴 거면 확실하게 표시 나게.”

맞아요! 주긴 줬는데 줬다고 말하기 애매하면 안주느니만 못하겠죠? 이따 오후에 간다고 했으니까 치료 끝나고 가서 줘야겠어요.”

예쁜 메모지에 멘트도 써 주시구요.”

그건 좀 어색해서... 잘 다녀오라는 말 말고는 딱히 할 말이...”

그래도 해보세요. 노력하셔야죠. 팔운동도 도와주셨는데. 파이팅!”

사실 아침까지만 해도 줄까 말까 망설이다 말까로 잠정결론을 내리고 병원에 온 참이었다. 최종 결정은 내가 내리지만, 다른 이의 응원은 내 안에 있는 망설임을 가볍게 쫓아버리는 힘이 있다. 이쯤이면 물리치료 샘인지 상담 샘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은행을 들렀다 집에 와보니 잠시 외출 했나 캐리어와 에코백만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메모, 찬조금. 당신이 오기 전에 완료해야할 미션이다. 편지지는 너무 오버겠지? 사실 편지지도 없다. 메모지는 너무 작고, 엽서에 멘트를 써야겠어. 안방 책장으로 간 나는 이제껏 알라딘 부록으로 딸려온 각종 엽서들을 주섬주섬 꺼낸다. 책에 딸린 엽서라서 그런지 한쪽 귀퉁이에 책속의 문구들이 한 두 문장씩 곁들여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시크하면서도 부드러운 멘트여야 해.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고르는 것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만의 멘트를 또 써야하니까.

 

나는 어쩔 수 없는 관계의 열등생. 늘 틀리면서도 매번 같은 답을 적는다.’..<언제 들어도 좋은 말>

여기에 매번 같은 답은 바로 당신이야!’라 쓸까? 그런데 중간에 있는 문구에 걸린다. 늘 틀리면서도? 틀린 답이 당신이라고 해석하면 분위기 쎄할 것 같다. 이건 패스!

 

도대체 당신,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언제 들어도 좋은 말>

허걱! 당신이 나에게 이 말을 할까 두렵다. 이것도 패스!

 

날 이해할 수 있겠니? 날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곧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언제 들어도 좋은 말>

살짝 끌리기는 하지만 아직 당신에게 적용하기에는 시기상조다. 패스!

 

마트를 헤매는 언니들을 위한 코믹 발랄 초공감 맥주 가이드’..<언니는 맥주를 마신다>

이것도 아니고!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미카엘라>

! 이건 당신을 저 세상으로 보낸다는 의미?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까지는 좋았는데, .

 

내 적막한 마음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어. 한지, 네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축복이 가득하길. 망각의 축복을, 순간순간마다 존재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기를.’..<한지와 영주>

오색찬란한 기구까지는 하늘과 어울리게 깔끔해서 좋았는데. 이건 이별 내용이었지? 절대로 안 돼.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노조의 단결뿐입니다.’..<불편해도 괜찮아>

으헉! 보유하고 있는 엽서의 양이 줄어들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결국 에이 포로 가는 거 아냐?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부족한 것도 아니고 넘치는 것도 아니에요. 존재는 다만 존재일 뿐이에요.’..<법륜 스님의 행복>

절에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염화미소를 곁들여서 건넬 각이다. 이것도 패스!

 

어떤 삶을 살고 있더라도 당신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는 마세요.’..<법륜 스님의 행복>

당신은 행복해질 권리까지는 좋았는데, ‘남의 불행이란 말이 턱 걸린다. ‘을 엽서를 건네는 로 오해하면 나는 불행한데 너는 행복해라.’ 로 읽힐 위험이 있다. 패스!

 

넘어지면 넘어진 것이 나고, 성질내면 성질내는 것이 나입니다.’..<법륜 스님의 행복>

이쯤 되면 성질이 날 뻔. 이제 신에게는 꼴랑 두 권의 엽서 집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꼬불꼬불 옛이야기 넷째 고개, 뒤집힌 호랑이

하하하. 장난 하냐? 마지막 엽서 집을 집어 드는 순간 손에서 땀이 쫘르륵 배어나왔다.

 

현재 시각 12시 반. 미니가 점심 먹으러 올 시간 오후 1. 공항버스 출발 시각 250. 미니를 보고 점심 먹고 간다고 했던 당신은 아마 1시 전후로 올 가능성이 높다. 미니가 오는 순간 점심 차려주느라 왔다 갔다 하면 허무하게 시도도 못하고 보내버릴 수 있다. 5분 안에 취사선택을 완료하고, 15분 동안 연습과 탈고 과정도 없이 직접 써서 여권이 든 에코백 안에 슬쩍 투척해야 한다. 정 없으면 그나마 가장 중립적인 <뒤집힌 호랑이>에라도 써야할 판이었다. 쫓기는 듯 긴장감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마지막 엽서 집,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를 펼쳤다.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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