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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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이런 기분일까. 정신없이 꿈을 꾸다 퍼뜩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는 광고 속 장면도 떠올랐다. 동화 <파랑새>의 아이들이 깨달은 사실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니 한 줄의 문장이 남았다. 그 순간의 뭉클함은 556쪽을 건너온 나의 시간에 주어진 선물이었고, 책 안에 담겨 138억년을 건너온 우주의 시간이 주는 감동이었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서 보았으나 정확히는 몰랐던 용어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생소한 내용도 많았다. 종교, 사상, 인물, 과학, 역사적인 사건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복잡한 지식은 잠시 내게 머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증발했지만, 결국 굵직한 느낌표 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제로 베이스에서 세상을 향해 출발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을 향해 첫걸음을 옮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편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얻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하는 책이었다.

 

우주와 인류를 보여주는 1장과 2장에서 다중 우주를 건너올 때는 물속에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처럼 갑자기 마음이 확 넓어지는 듯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볼 때면 각기 다른 우주들이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4차원이 사유의 한계였던 나에게 0차원과 11차원은 등장부터가 충격이었다. 존재 가능성을 떠나 누군가는 그런 세상을 상상했음이 놀라웠다.

아이들이 각기 다른 우주라는 생각이 들자 많은 행동이 이해되었다. 자신만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다른 세상일 것이니 말이다. ‘담임교사라는 시도 지었다. ‘일찌기 만나지 못한/ 스물 여섯 개의/ 각기 다른 우주를/ 마주하는 일이다/ 이전에도 접한 적 없고/ 이후에도 접할 일 없는/ 단 한 번의 우주를// 내 작은 몸짓으로/ 비눗방울 우주가 탓/ 허물어질까/ 무심코 한 행동에/ 당구공 우주가 퉁/ 튕겨져나갈까// 그러므로/ 매번 설레는 일/ 매순간 긴장되는 일/ 블랙홀같은 우주에 훅/ 빛으로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3장에서 7장까지는 베다, 도가, 불교 등의 동양 사상과 철학, 기독교 등의 서양 사상이 등장했다. 위대한 스승들은 한결같이 자아는 곧 세계라는 하나의 과녁을 가리켰다. ‘범아일여, 도덕일치, 일체유심조, 관념론, 내면의 신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방식만 달랐을 뿐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지나온 삶에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몇몇 장면들이 있다. 블랙홀 안에서 헤매듯 한 줄기 빛조차 느껴지지 않던 공간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의 중력으로 매일 당겨지던 시간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전혀 아쉬운 마음이 생길 것 같지 않던 상황들, 수분 잃은 얼굴처럼 푸석거리던 감정들. 가까스로 버티며 지나왔던 길들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탓이라 생각했다.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생길 무렵에는 내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지만 이마저도 정답은 아니었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p553)’ 닫아두고 있던 문들을 열고 깊이 들어가 보니 나의 세상을 슬픔으로 채우고 어둠으로 색칠하며 걸어온 건 나 자신이었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세워놓은 자기합리화라는 방어막이었다.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던 과거의 사진들이 앨범 속에서 깔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탁월한 통찰력으로 세상과 자아의 합일을 소개해준 작가는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 일러 주었다. 그의 친절함에 다시 한번 반했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할 것. 둘째, TV를 끄고 SNS를 닫고 나의 하루 중 버려지고 흩어진 시간을 모아 나의 시간을 만들 것. 셋째, 그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질 것. 넷째,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할 것. 다섯째,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지고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갈 것.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질 것. 여섯째, 남은 삶에 대한 거시적인 계획을 세울 것. 일곱째, 천천히 나아갈 것.

두 페이지에 걸쳐 에필로그에 나와 있는 문장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천천히 따라가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졌다. 마음을 청소하고 새로운 우주를 담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깨어있는 첫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의 문을 열어 천천히 세상을 담았다. 이미 내 안에 있으니 담는다기보다는 선택해서 드러낸다는 표현이 적합할까. 찬란한 그림이 그려진 그림을 검은색 크레파스로 덧칠하고 조금씩 칼로 긁어내는 스크래치 기법처럼. 이 사람을 보고 저 소리를 듣고 이 물건을 만지고 저 향기를 맡고 이 음식을 음미하고. 선택하고 싶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내게 선택되지 못한 대상은 다른 세상에는 존재할지 몰라도 나의 세상에는 없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풍경들은 감각 기관을 통과하는 순간 내 안의 우주에서 유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나만의 의미가 되었다.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마음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p244)’ 세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다. 날마다 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건 나의 삶을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이었다. 내가 만든 우주는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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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eongsukhahm 2020-06-30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동하고 또 감동해요 멋져요~~~ 책을 읽는 맛을 더하기(+) 해주는 리뷰는 매번 만남을 기대하게하는 설레임입니다. ♥

나비종 2020-07-19 20:35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언니^^ 그날 잠시 얼굴이라도 비추고 싶었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병원도 겨우 갔거든요. 이번에는 체한 게 생각보다 오래 갔네요. 약도 몇 주치를 먹고 위가 많이 약해졌나봐요. 몸이 깔끔하게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겨우 드문드문 책을 읽을 정도는 되어요. 중요한 시기에 아팠어서 여러 가지 일정이 꼬여버렸어요.ㅠㅠ
학교에서 하는 독서모임 책의 독후감을 방금 올렸어요. 이제 우리 책도 얼른 읽으려구요. 다음 주에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