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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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강하게 끌리는 날이 있다. 음 하나하나가 심장을 톡톡 건드리면 가던 걸음을 멈추듯 빠르게 흐르던 일상이 잠시 멈춘다. 공기의 진동이 귀가 아닌 심장으로 스며드는 순간 온몸이 울린다. 내게 음악이 아름다운 건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는 강인한 단조 풍의 글. 건조함 안에서 베이스 기타의 묵직한 온기가 전해졌다. 뭉클했다. 그의 전작 나의 친애하는 적과는 결이 달라진 느낌이다. 표면은 말랑해지고 내부는 단단해졌다. 이번 책은 음악처럼 다가왔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인 듯 엄청난 서사가 펼쳐지는 것도, 통통 튀는 유머로 바삭거리는 것도, 지적인 내용이 다량 방출된 것도 아닌 글에 심장이 반응했다. 심장이 평소와 다른 진폭으로 두근거렸다.

 

많은 글이 접근을 시도하면서도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 중 하나는 삶과 죽음이다. 자체의 무게감에 시작도 하기 전에 짓눌린다. 용기 내어 도전한다 해도 겉핥기로 끝나거나 어정쩡한 결론으로 마무리되기 일쑤다. 삶의 가장 경이로운 극단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임사체험이나 삶의 마지막을 마주하고 돌아온 경험도 드물다. 삶은 진행 중이므로 삶을 말하는 글에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잠시 멈춤 정도로나 마무리될까.

살고 싶다는 농담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주춤거리며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허세 부리지 않고 작가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삶을 연주하는 글에서 진심이 묻어나온다. 그 문장들이 전해주는 느낌이 나는 좋았다.

 

돌아보면 나의 10대는 가난에 주눅 들어 있었다. 20대에는 거기에 외로움이 더해졌다. 30대에는 의무와 관계의 뒤틀림과 외로움을 짊어지고 혼자 밤길을 걷는 마음을 칼날처럼 품은 채 많은 날을 보냈다. 40대에는 다소 나아졌지만, 저항력이 떨어지면 찾아오는 감기처럼 종종 울적함과 억울함과 허무함이 찾아왔다.

수시로 찾아오던 크고 작은 마음의 고통이 다 지나갔나 했는데 깊은 곳에는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었나. 고통의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한 문장을 보는 순간 눈물이 고였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p45)’ 엄마 앞에서 넘어졌다 일어난 아이가 된 듯 위안받는 느낌에 한참을 기대어있었다.

 

만약에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힘겨운 시간 속에서 허우적댈 때마다 수많은 만약에를 생각했다. ‘만약에의 도돌이표에 갇혀 한참 되새김질을 하던 순간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정말 바꿀 수 없는 건 이미 벌어진 일들(p194)’인데도.

내 삶을 대표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장면을 꼽아보라는 문장 앞에서는 잿빛 감정들이 담긴 장면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글을 쓰레기 봉지 삼아 그렇게나 많이 버렸는데 채 버리지 못한 순간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나.

불행은 우리 삶의 동기가 될 수 있는가.(p254)’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렇다!’라 답할 것이다. 삶의 어두운 순간들은 내 글의 동기로 작용했으니. 글을 쓰면서 조금씩 그 순간들로부터 거리감을 가질 수 있었다.

 

살아라.(p275)’ 마지막 문장이 한 줄기 햇살처럼 날아들었다. 추천사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작가의 문장으로만 채워진 책 역시 그의 문체만큼이나 깔끔했다. 허지웅의 문장에서는 여전히 이성적이며 지적인 매력이 묻어나왔다. 영화 속 삶을 접목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삶을 말하는 관점이 좋았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p256)’ 그가 쓰는 글의 장점 중 하나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직시한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아팠다고 구구절절 호소하지 않는다. 이런 점이 강한 신뢰감을 준다.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p274)’ 내 시간을 좀 더 잘 살아내고 싶어졌다.

 

요즘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캘리그래피를 배운다. 먹물을 이용해서 붓으로 글씨를 쓰고 조금씩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힌다. 서툰 가운데 재미있어 푹 빠져있다. 이 책의 제목 속 농담을 보니 자연스레 먹물의 묽고 진함이 연상되었다. ‘살고 싶다는말이 전해주는 파장이 화선지에 떨어진 한 방울의 먹물에서 그러데이션되는 농담과 닮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삶은 수시로 변하는 진동수로 흘러간다. 책에도 삶처럼 진동수가 있다는 상상을 한다. 두 진동수가 만나는 순간 절묘한 공명이 일어나면 읽는 이에게 의미 있는 책으로 자리 잡는 거라고. 코드가 맞는 책을 만난다는 건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내 삶의 진동수와 일치하는 순간에 살고 싶다는 농담을 만난 걸까.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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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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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해도 기발하다며 스스로 감탄하다 잠시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 한눈을 팔면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생각 같은 거 말이다. 다시 떠오르지 않고 우쭐했던 느낌만 생생할 때면 쩝 뒷북을 치는 입맛을 다신다. 그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자 잠을 잘 때면 핸드폰을 손닿는 곳에 두거나 외출할 때면 볼펜과 종이를 늘 챙기게 되었다. 시의 한 구절이나 기발한 문장들은 주로 자다 깨는 새벽이나 거리를 걷다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으나 반가웠다. 워낙 유명한 작가였기에 무려 <상상력 사전>이라는 제목은 많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한 권의 책으로 엮인 단상들이라 하니 무엇인지도 모르고 놓쳐버린 내 생각의 파편들이 남기고 갔던 아쉬운 마음이 떠올랐다.

 

물리적 두께감에 잠시 손가락이 주춤했지만 한 편 한 편이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읽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열네 살 때부터 써왔다는 384가지 생각의 조각들이 담겨 있는 메모 노트이다. 꽤 유용하고 놀라운 내용이 군데군데 들어있어 신선했지만, ‘상상력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맥락 없이 번호를 붙인 전체적인 구조가 체계성과는 거리가 멀어 산만했다. 굳이 체계를 찾자면 작가의 관심 분야의 흐름 정도랄까. <스치는 생각 사전> 정도면 적당했겠다. 그랬더라면 기대감을 걷어낸 상태에서 와! 기발한 상상을 많이 했구나! 라는 감탄이 쏟아졌을 텐데. 제목이 당기는 매력이 확 떨어진다는 게 딜레마이긴 하지만. 맞춤형 제목을 갖다 붙이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지 싶다.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내 성향과 동떨어져서 실제보다 작게 보이는 걸 거다. 작가 자체가 주는 기대감이 워낙 크니까. 의미가 전혀 없던 건 물론 아니라서 612쪽을 넘고 나자 방대한 저술의 기초 공사 현장을 목격하고 난 듯했다. 몇 가지 분야로 내용을 분류하니 작가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저술했던 몇몇 소설의 제목이 절로 떠올랐다.

 

생물과 수학 관련 내용이 많았다. 동물 대상 실험, 동물의 습성, 생물의 진화에 얽힌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소설<개미>의 바탕을 짐작할 만큼 곤충들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숫자가 드러내는 신비나 몇몇 게임들은 신기했다.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집단행동 연구, 의식의 흐름, 꿈에 관련된 내용도 많았다. 특히 뇌에 대한 실험이나 뇌의 구조를 분석한 내용은 과학적인 전문성이 돋보였다. 그의 작품 <><>이 궁금해졌다.

역사적인 분야에서 최초의 무엇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고대 문명의 발생을 접하며 세계사의 기초를 공부할 수 있었다. 과거의 인물, 왕들, 전쟁, 고대 부족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을 바라보며 인류의 발자취를 가늠해보았다. 언어에도 관심이 많은 그가 고대 언어, 어원, 다양한 지명의 유래를 소개할 때면 상식이 풍부해지는 듯했다.

이러다가 체하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틈만 나면 등장했던 내용은 신화였다. 평소 관심을 갖던 사람이 읽는다면 신화 속 인물에 얽힌 이야기, 인물 이름의 유래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노다지를 발견했다며 기뻐했을 정도로 자주 나왔다. 안타깝게도 나는 우스라는 어미만 등장해도 웁스반응이 일어나는 부류라 절반에 육박하는 266쪽의 오르페우스가 등장할 때까지 네버 엔딩 스토리를 견뎌내야 했다. 책을 집어 던지고 싶던 고비를 넘어서니 그나마 나은 내용이 이어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새의 <>이 지닌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이었다. ‘알 껍데기는 밖으로부터 오는 힘에 대해서는 알을 품는 어미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안으로부터 오는 힘에 대해서는 새끼가 쉽게 깨고 나올 수 있을 만큼 약하다.(p354)’라는 내용으로부터 알끈과 공기 주머니의 역할에 대한 문장을 보며 감탄했다. 내가 이러려고 타들어 가는 신화의 사막을 건너왔구나 싶었다. 본 적도 없는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과학적인 원리도 놀라웠지만, 자아의 거듭남 내지는 심리적인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이 문장은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했다.

타성은 점차적으로 경화증을 가져온다. 때로는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과 반대가 되는 것을 해보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다.(p418)’는 문장이 담긴 <반대로 하기>에서는 직접 행동을 변화시키고 싶어졌다.

기하학적 형태를 이용한 <심리 테스트>의 해설 부분을 가리고 직접 해보고 나서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테스트 결과를 적어본다.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보고, 남들이 자신을 따뜻한 집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전반적으로 조화롭게 보고, 자신의 영적인 측면을 투명하게 보고, 가족을 반듯하게 보고, 향긋한 애정관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라는 인간이다. 다소 뻘쭘. 흐흐흐.

 

그것이 무엇이든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으리라. 다양한 분야의 기원을 찾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던 그의 문장을 따라와 보니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 또한 순식간에 사라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나를 둘러싼 우주도 그 안에 담긴 나도 물론이다. 언제 변할지 모를 존재라는 생각을 하며 이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나를 인식하니 의식이 붕 뜨는 기분이다. 숨을 쉬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사소한 행동조차 솜털의 움직임처럼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대가 이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한소의 어딘가에 새로운 우주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대 알고 있는가? 그대의 힘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를.(p280)’ 몰랑몰랑해진 세상에서 나의 상상력도 한 뼘 정도는 자라났을까.

 

 

p103, 10째 줄: 질투심의 ~

p69, 밑에서 5째 줄의 포보스(공포)와 데이모스(근심)’/ p103, 밑에서 10째 줄의 포보스(불안)과 데이모스(공포)’는 어떤 해석이 맞는지?

p240, 3번째 단락 5째 줄: 얀 반 아이크 ~ 에이크

p311, 밑에서 8째 줄: 선장을 ~

p344, 7째 줄: 이누이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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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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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많이 왔는데 거긴 괜찮아, 엄마?

우리는 집에만 있는데 뭘. 넌 출근하는데 어렵지 않았어?

지난주 금요일에 방학식 해서 오늘은 집이야.

다행이네. 요즘에도 바쁘냐?

일이 끊이지 않네. 그래도 틈틈이 책 읽으며 쉬고 있어.

지난번에 아팠던 건?

많이 나아졌어. 이제는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있어.

엊그제는 **이가 다녀갔어. 출장 왔다가 잠시 들른 거라고.

걔네도 빨리 이사해야 할 텐데. 거긴 워낙 집값이 비싸서.

둘이 살아도 화장실 하나면 불편한데 넷이서 얼마나 불편할까. 예전엔 푸세식 화장실 하나를 몇 집이서 어떻게 이용했나 몰라.

오늘처럼 비 많이 오면 넘칠 것처럼 출렁거렸잖아. ~~

부모님과 함께 지나온 가난은 예전에 보았던 영화 속 장면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머님이 자장면을 싫다고 하신 건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그래서 가난에 대한 문학 작품을 접할 때면 유난히 예민해졌다. 조금 더 기대하게 되거나 조금 더 실망하곤 했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까웠다. 가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예 의미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소설 자체로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부와 가난의 차이는 뭘까. 예전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진 지금, 소모하는 물질만을 따진다면 그리 많은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손안에 빵이 없는 건 같은데 안 사는 경우와 못 사는 경우의 차이.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 분명 다르다. 전자에는 여유가, 후자에는 박탈감이 흐른다. 생활의 많은 면에서 이런 경우의 수가 적용된다면 영혼이 잠식되어 빈곤감을 느끼게 될 소지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릴 적의 나에게는 매사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으로 나타나곤 했다. 가능성의 수의 차이. 가난과 부의 결정적인 차이에 대한 나름의 결론이었다.

 

거지 소녀는 주인공 로즈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10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인 소주제를 지니면서 전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가난을 무대로 다양한 상황들이 픽션과 다큐를 넘나들듯 펼쳐진다.

뒷면의 겉표지에 쏟아지는 각종 찬사의 글은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무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니! 한데 다 읽고 나니 힘이 빠졌다. 재미도 없었고 단편도 어미가 불분명한 말을 들은 듯 결말이 어정쩡했다. 장편으로 보았을 때도 도무지 어느 부분에서 감탄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났다. 남들 다 입었다고 외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달까. 나와는 맞지 않는 소설이라고 굳이 고상하게 포장한다.

가정폭력, 계모, 학교 내 성폭력, 성추행, 불륜. 분명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소가 넘치는 소재로 가득했건만.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문체 때문일까.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장마철에 사회면이 빽빽한 신문지를 씹어먹은 기분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표제작 <거지 소녀>에 등장하는 번 존스의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그림은 가난에 관한 많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가난에 잠긴 소녀는 왕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를 응시하는 걸까. 가난 밖에 있는 왕은 어느 정도까지 소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왕관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왕과 거지 소녀의 이야기.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필로그도 동화같이 그려질 수 있을까.

코페투아왕이나 소설 속 패트릭은 모두 가난 밖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뜻에 따르고 자신을 갈고닦으며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었다. 부유하기 때문에 가능했다.(p145)’,‘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p147~148)’ 그들이 가난한 그녀들 안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과는 무관한 감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난한 이는 물리량에 주눅이 든다. 물질 자체의 값어치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어디를 가나 크기가 눈에 띄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께였다. 수건과 러그, 나이프와 포크 손잡이의 두께, 그리고 침묵의 두께.(p157)’,‘장소가 사람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p157)’ 소매가 짧아진 길이의 옷이라든지 코끝 시린 방 안의 온도라든지. 그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서 종종 울컥함과 함께 떠올랐다.

정규직으로 28년을 넘게 일해온 나는 엄청난 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는 만큼은 되었다. ‘왜 자신은 항상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 같은지 의문이 들었다.(p237)’,‘떠나온 삶과의 간극(p334)’이 커서 한동안은 남의 자리에 앉은 듯 어색했다. 지금은 편안하다. 가난으로부터 떠나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판단 지표를 나는 물리량에 대한 느낌에서 찾는다. 옷을 전혀 사지 않는 지금, 15년이 지나 목이 다소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다녀도 전혀 서글프지 않다. 구멍 난 양말을 통해 드러나는 엄지발가락에서 수치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던 순간, 나는 가난으로부터 빠져나왔음을 느꼈다.

 

가난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을 꺼내어본다. 소설 속 상황들이 비빌 번호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내가 겪었던 갈등, 눈물, 슬픔, 좌절, 선택의 봉인이 풀린다. 그런 순간들이 지금은 감사하다. 굳은살처럼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었으니. 그 이전에는 상처가 있고 이는 아픔을 전제로 하니 굳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10여 년 이어지던 아버지의 실직,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던 어머니,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단칸방, 방문을 열면 훅 들어오던 바깥 공기, 밖과 별반 온도 차이가 없던 방에서 얼어버린 걸레, 천장에서 떨어지던 빗물을 받기 위해 놓였던 방안의 그릇,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나만의 방, 실업계 진학을 고민했던 중학교 3학년, 과외 아르바이트로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했던 대학 때의 주말들을. 그 중심에 자리한 부모님을 떠올렸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형제들에게 끈끈한 유대감을 품게 해주셨고, 물리량에 압도당하지 않는 유머 감각으로 자식들을 놓지 않으셨던 당신들로 인해 나는 웬만한 시련에는 비틀거리지 않고 가난의 비를 맞고 있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심장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는 52년간 읽어온 나의 부모님이 가난에 관한 최고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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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7-31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생각한 ‘가난‘소재의 줄거리가 아니어서 좀 실망했어요. 게다가 연작소설이라 시간과 배경이 그냥 휙휙 점프해버려서 곳곳의 구멍들이 되게 아쉽더라고요. 역시 저는 장편이 더 잘맞다는걸 또한번 느꼈습니다ㅎㅎ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 이 말에 너무 공감합니다. 하나 더 붙이면 ‘하고 싶고 할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이 저의 모습이랄까요. 뭘 선택하든 단가를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비용, 시간, 에너지, 리스크, 영양가, 이득 등등. 그러다보니 손해를 안보려고 선뜻 나서질 못해요. 포기하면서 나름의 타협을 한달까요. 어쩌면 저는 이런 내용들을 작품에 기대했었나 봅니다.

말씀하신 가난의 물리량이 참 흥미로워요. 낡은 옷만 걸쳐입어도 수치스럽지 않다는 건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때문이라 보여집니다. 어릴때 늘 유행만 쫓는 친구들을 보면서 저는 너무 한심해했었거든요. 무조건 비싼 걸 사야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여기는 부류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개성도 전혀 없고요. 어린 나이에 저도 나비종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거 같아요.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이전에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행동하니 자존감이 생기더라고요. 제 인생에서 값진 교훈 중 하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렇게 책리뷰도 쓰고 나비종님과도 알게되어서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

작품성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완성도면에서는 영 거시기했던 책이었는데 무사히 완독하셔서 축하드립니다. 다음에는 더 괜찮은 작품을 선정해볼게요! 7월도 이제 몇시간 안남았는데 마무리 잘 하시고 좀더 나은 8월을 맞이하시길 바랄게요! 고생하셨습니다^^

나비종 2020-07-31 10:45   좋아요 1 | URL
서술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같기도 해요. 제가 원한 건 하늘에서 땅까지 강하게 내리꽂는 소나기 내지는 가느다랗더라도 한 줄로 이어지는 빗줄기 같은 거였나 봅니다. 작가는 천천히 내리는 눈발처럼 하늘하늘 담담하게 글을 써내려갔는데 말이죠.
무언가를 하기까지는 한 사람의 온 에너지가 간절하게 모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고 할 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이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덜해서가 아닐까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정도로 사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자존감.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도 걸리더라구요.^^

어떤 작품을 선정하셔도 최상의 의미를 끌어내는 능력의 소유자라 작품 선정은 필꽂히시는대로 하셔도 아~~~무 상관없습니다만ㅋㅋ
물감님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맞이하시길~~^^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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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싶다가, 분명 한글인데 도무지 의미가 들어오지 않는 글자 배열에 당황하다가, 한 번에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 앞에서 몇 번이나 도돌이표를 찍는 게 나만의 문제인가 소심해지다가, 주춤주춤 생소한 용어들을 일일이 어학 사전에서 찾는 시간에는 살짝 화도 나다가, 어느 순간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던 책. 드라마틱한 독서 과정을 지나온 책이었다.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이 선호하는 목소리가 있다. 뻔하지 않은 분위기와 질감으로 뻔하지 않은 울림을 나타내는, 세상에 없던 목소리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철수나 영희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굳이 나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는 거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작가 테드 창은 독보적이었다. ‘이기에 설 수 있는 우주 좌표계에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며 오로지 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하며 현재에 머무는 나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은 표제작 <>을 포함하여 9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주제도 다르고 등장인물도 다르지만, 각각의 소설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묘하게 닮아있다. 옴니버스식 이야기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작품들에서 내가 찾은 공통점은 과거, 미래 등의 시간, 그 안에서의 인간의 선택과 기억, 그 선택을 하는 자유의지이다.

선택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선택해야 할 상황도, 그 결과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 이야기 속 인물을 좇아가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p95, <우리가 해야 할 일>)’라는 문장은 SF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p393, <옴팔로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나를 바꾼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 기억이 있다. 한데 막상 이런 일이 현실의 내게 가능해진다면? 많이 방황할 듯하다. 나는 무엇을 바꾸고 싶을까. 그것을 바꾼다고 현재의 내가 얼마나 달라질까.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욕심을 부리며 어디에도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할 수도 있겠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슬립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우주선을 타고 가는 대신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문처럼 커다란 원형의 문을 들락거리며 과거와 미래의 자신을 만난다. 특이한 점은 시점이 다른 자아들의 공존이다. 20년 뒤의 나이 든 내가 젊은 나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게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 소설에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한 선택의 결과를 직시하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p56)’,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p58)’

 

8년 전쯤이었나. ‘5천만 년 후의 인간이라는 제목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인터넷에서 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대한 두뇌, 감각기, 생식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관은 쇠퇴하여 공상과학영화 <ET> 주인공의 응용 버전처럼 생긴 모양새였다. 자신의 뇌를 해부하여 들여다보는 해부학자, 주기적으로 교체하여 장착하는 허파가 등장하는 <>. 도무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미래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안이 밖으로 나온 인간이었다.(p73)’ 현미경으로 해부한 자신의 뇌를 들여다보는 디테일한 묘사, 기억의 원천을 탐구하려는 과학자로서의 집념이 묘사된 문장은 현실감이 넘친다.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도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 자신은 없었지만, 상상력의 극치를 보는 기분에 감탄이 나왔다.

어떻게 생명력과 공기를 접목할 생각을 했을까.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p75)’,‘생명의 실제 원천은 기압 차이이다.(p78)’ 기압 차이로 바람이 불 듯 숨을 쉴 때 우리의 몸으로 들락거리는 공기 역시 기압 차이로 움직인다. 결국, 숨을 쉬며 생명이 유지되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내용이 다소 난해하여 작가가 의도한 주제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을지 자신은 없다. 다만 신기한 점은 <>을 읽고 나서부터 숨 쉬는 패턴을 문득문득 의식하게 되었다는 거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진실과 기억에 관한 소설이다. 완벽하게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검색 툴이 등장하면서 주인공들의 혼란은 시작된다.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기억 속 이야기가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던 거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입각한 진실, 다른 편으로는 작가의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진실이 일치하는 지점은 그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될 수 없다.(p299~300)’

명절에 가족들과 모여서 과거에 겪었던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간혹 놀랄 때가 있다. 분명 같은 경험이었는데 구성원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p301)’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중심으로 각색되는 소설 속 장면은 진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1996년에 출시되어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다마고치라는 휴대용 디지털 애완동물이 있다. 휴대폰에서도 비슷한 메뉴가 등장하여 화면 속 강아지에게 밥을 주고, 재워주고, 놀아주고 했던 적도 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디지언트라 불리는 미래의 디지털 애완동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숨을 쉬는 진짜 애완동물에서 노인과 같이 놀아주는 로봇 동물의 등장까지는 우리의 현실 버전인데 소설을 읽다 보면 조만간 미래에 일어날 일인 듯 공감 가는 상황이 펼쳐진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한다. 인공지능 관련 얘기가 오갈 때도 항상 마침표는 윤리적 판단이었다. 생명 복제가 한창 이슈로 떠오를 때도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복제동물의 정체성 문제가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드러났듯 과학의 마침표는 윤리 문제로 찍혀야 옳다. 그게 곧 기계와 인간의 차별점이고 인간 존재의 이유가 될 테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처럼 반응하지만 인간을 대할 때와 같은 책임은 질 필요가 없는 존재이며(p234)’라는 문장에서는 인간의 이기적인 심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르코를 존중하고 싶다면 그를 인간처럼 대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까?(p241)’ 나는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는 후자 쪽에 마음이 간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 걸까 판단하기는 어렵다.

 

나와 똑같은 내가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평행자아에 관한 이야기이다.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다수의 자아들은 프리즘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던 결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거울 보듯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다. 히틀러의 집권을 저지하려면 어린 히틀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수태되기 한 달 전으로 돌아가 산소 분자 하나만 교란시키면 된다고. 그러면 수정되는 생식 세포 자체가 달라질테니 전혀 다른 생명체가 태어날 터이다. 나비 효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작은 변화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선택을 주제로 예전에 나왔던 예능 프로그램도 생각난다. 오른쪽을 선택했을 때 펼쳐질 결과와 왼쪽을 선택했을 때 펼쳐질 결과를 각각 보여주는 방식이다. 힘겨운 일에 부닥칠 때면 가끔 생각했다. 내가 다른 선택을 내렸더라면 나의 삶이 달라졌을까. 소설 속에는 무엇을 선택했든 삶이 별반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려면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면 된다고. ‘선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의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하니까요.(p476)’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며 살아왔던 걸까.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와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생경함이 있다. 오늘 산 이불을 덮고 자는 기분이랄까. 피부에 맞닿는 낯선 감촉, 다른 세상의 냄새로 인해 처음 몇 분간은 겉도는 김치찌개를 떠먹는 듯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나의 체온과 이불의 온도가 같아질 만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 세상은 이불을 품으며 그 부피만큼 확장이 된다.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던 책이 천천히 읽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익숙한 온도가 되었나. 그만큼 상상의 폭도 넓어진 기분이다.

과거에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을 돌아보며 나를 중심으로 재배치되던 기억의 이기심을 반성하고 미래에 내가 할 많은 선택을 상상했다. 나무보다는 숲을 보게 만들어준 책이다. 책 속에서 무더기로 방출된 과학 지식의 빅뱅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빠르게 확장되어가는 시간의 흐름에 내 삶을 실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내 삶은 나의 자유의지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고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은 지식의 책이 아니라 지혜의 책이었다. 

 

 

p106, 밑에서 6째줄: 에니매이터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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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 - 교사의 내면을 세우는 수업 성찰
김태현 지음 / 좋은교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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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전문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찜찜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의사, 판사 등과 같은 전문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수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45분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45분에 나머지 시간이 우울해진다.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다. 수업 시작 전이면 매번 긴장한 상태로 교실의 앞문을 연다. 학부모님이나 학생들과의 대화 기술에만 다소 여유가 생겼을 뿐 생활 지도도, 진로지도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한데 이 책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저자와 같은 교육관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과연 전문직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류의 책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종일 요리만 하던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가수들이 사석에서는 노래하기를 꺼리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거다. 수업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도 상당한데 굳이 시간을 내서 읽는 책에서까지 수업을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책꽂이 구석에 놓고 한동안 읽기를 미루다 독서 모임 날짜의 압박감으로 첫 장을 펼쳤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 공개수업 후 오고 가는 흔한 이야기들을 예상했다.

 

힘을 빼고 펼쳐서인지 책에 실린 내용은 생각보다 큰 파장으로 나를 흔들었다. 어려운 책이 아니었는데도 책장을 빨리 넘길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기간 내내 교실에 들어서면 교사가 의도하고 있는 배움이 무엇이었는지(p41)’라는 문장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이 수업에서 어떤 배움을 의도했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당혹스러웠다.

낯선 느낌이었다. 이제야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우연히 학생의 얼굴이 눈에 띈 적은 있어도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본 기억은 없다. 나는 누구를 바라보고 수업을 해왔던 걸까.

교단에 처음 서는 신규교사처럼 당황스러웠다. ‘‘수업을 왜 하는지(Why)’.‘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What)’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How)’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p73)’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했다. ‘, 무엇을은 내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교사이니까 수업을 하고, 교과서에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거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라니! 저자의 말대로 나는 주로 어떻게에 방점을 두었던 거다. 28년 동안 학생들과 마주하며 내가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수업을 꽤 잘하는 교사라고 생각해왔다. 교생선생님이 와서 다른 과목 수업을 참관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문의해오면 언제든지 오라고 호방하게 말하곤 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그만큼 열심히 가르쳤으니까.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열심히는 가르쳤을지 몰라도 학생들에게도 그만큼의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한 번도 학생의 시선으로 가르치는 나를 바라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썰렁한 농담으로 학생들을 웃겨주고 교과 지식을 쉽게 암기하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행위를 잘 가르치는 것으로 착각했던 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험 대비용 수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지식 암기의 기술은 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배움과 입시의 공존이 가능할까. 늘 딜레마처럼 안고 있는 문제였다. ‘배움과 입시가 같이 갈 수 있고, 수업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배움이 있는 수업이다.(p80)’ 교사라면 누구나 안고 있을 고민을 이렇게 시원하게 터뜨려 주니 속이 후련했다.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시험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배움과 입시를 서로 다른 갈래 길에 세우고 있던 나는 학생들의 내신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배움 자체를 아예 수업에서 배제하고 있었던 거다. 내 수업이 기대고 있던 핑계가 허물어졌지만, 대신 저자의 문장을 통해 희망을 품게 되었다.

 

5년 전, 행성의 특징을 주제로 모둠별 공개수업을 한 적이 있다. 31명의 학급 학생보다 참관하는 교사 수가 더 많아 칠판 쪽을 제외한 교실의 세 면이 교사들로 포위된 채 진행되었던 수업이다. 심적으로 부담이 컸던 수업이라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다 끌어모아 겉에서 보기에는 찬란했던 수업이었다. 몇 번의 컨설팅 협의회로 내용도 보완해가며 몇 달 정도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모둠별 학생들은 행성별로 우주 뉴스, 가상 체험,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사전에 UCC를 쵤영하여 수업 시간에 시연하고, 과학송을 만들어서 현장에서 발표하는 모둠도 있었다. 수업 후 이어진 강평회에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를 도입했다며 반응은 꽤 좋았다.

학생들은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서 UCC를 촬영하며 미션을 수행하려는 열정을 보였고, 졸업 후 찾아와서도 모둠별로 준비했던 기억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고 수업을 했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하면 다양한 활동 장면을 보여줄까에만 몰입을 한 나머지 학생의 입장에서 얼마나 많은 배움이 일어났는지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때의 수업에서 의미 있는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내 수업에서 부족했던 것은 경계였다. 작년까지의 수업을 되돌아보면 일부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로 인해 간혹 소란해지는 분위기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경계가 있지만 존중이 있는 수업을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p105)’ 겉으로는 학생들을 존중한다고 말하며 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포기하고 좌절하는 마음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45분 내내 열심히 수업해서 뿌듯해했던 기억도 난다. 혼자만 신나서 떠들었던 내 모습이 학생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수업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모습보다는 학생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p42)’,‘가르침과 배움은 결코 함께 가지 않는다.(p149)’는 문장 앞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학생들에게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여백을 주었던가. 가끔 던지는 질문에서도 잠시를 못 참고 내가 먼저 냉큼 답을 말해버리기 일쑤였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학생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르칠 내용을 학생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159~160)’ 촌철살인의 문장에 세수도 안한 민낯을 들킨 이처럼 당혹스러웠다. 교사라서 알 수 있는 심리, 교사라서 할 수 있는 공감이었다. 학생의 시선에서 나는 어떤 교사였을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읽기 전과 후의 나를 달라지게 하는 책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찬사를 보내도 내 행동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내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책으로 분류된다. 이런 이유로 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는 매우 좋은 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아이들의 눈동자를 좇았다. 그들의 반응과 표정을 살폈다.

좋은 수업은 무의미한 교과 지식에 이름을 붙여 의미 있는 지식으로 바꿔주는 수업이다.(p180)’,‘교과 지식은 삶 속에서 복원되어야 한다.(p185)’,‘‘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해야 한다(p72)’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며 좋은 수업을 생각했다. 좋은 수업도 좋은 책처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수업을 받은 후에 학생들의 행동이나 인지나 감성이 달라졌다면 배움이 일어났다는 증거일 테니.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당장 내일의 수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기말고사가 끝나고 내일 할 수업을 구상한 것이 있는데 전부 다 바꿔보려 한다. ‘가르침에서 배움으로 기준을 바꾸니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지금이라도 달라지고 싶다. 수업에서 를 만나고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 좋은 수업을 상상하니 오랜만에 설렌다. 코끝이 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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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2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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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0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