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 - 교사의 내면을 세우는 수업 성찰
김태현 지음 / 좋은교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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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전문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찜찜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의사, 판사 등과 같은 전문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수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45분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45분에 나머지 시간이 우울해진다.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다. 수업 시작 전이면 매번 긴장한 상태로 교실의 앞문을 연다. 학부모님이나 학생들과의 대화 기술에만 다소 여유가 생겼을 뿐 생활 지도도, 진로지도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한데 이 책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저자와 같은 교육관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과연 전문직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류의 책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종일 요리만 하던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가수들이 사석에서는 노래하기를 꺼리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거다. 수업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도 상당한데 굳이 시간을 내서 읽는 책에서까지 수업을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책꽂이 구석에 놓고 한동안 읽기를 미루다 독서 모임 날짜의 압박감으로 첫 장을 펼쳤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 공개수업 후 오고 가는 흔한 이야기들을 예상했다.

 

힘을 빼고 펼쳐서인지 책에 실린 내용은 생각보다 큰 파장으로 나를 흔들었다. 어려운 책이 아니었는데도 책장을 빨리 넘길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기간 내내 교실에 들어서면 교사가 의도하고 있는 배움이 무엇이었는지(p41)’라는 문장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이 수업에서 어떤 배움을 의도했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당혹스러웠다.

낯선 느낌이었다. 이제야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우연히 학생의 얼굴이 눈에 띈 적은 있어도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본 기억은 없다. 나는 누구를 바라보고 수업을 해왔던 걸까.

교단에 처음 서는 신규교사처럼 당황스러웠다. ‘‘수업을 왜 하는지(Why)’.‘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What)’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How)’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p73)’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했다. ‘, 무엇을은 내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교사이니까 수업을 하고, 교과서에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거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라니! 저자의 말대로 나는 주로 어떻게에 방점을 두었던 거다. 28년 동안 학생들과 마주하며 내가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수업을 꽤 잘하는 교사라고 생각해왔다. 교생선생님이 와서 다른 과목 수업을 참관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문의해오면 언제든지 오라고 호방하게 말하곤 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그만큼 열심히 가르쳤으니까.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열심히는 가르쳤을지 몰라도 학생들에게도 그만큼의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한 번도 학생의 시선으로 가르치는 나를 바라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썰렁한 농담으로 학생들을 웃겨주고 교과 지식을 쉽게 암기하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행위를 잘 가르치는 것으로 착각했던 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험 대비용 수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지식 암기의 기술은 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배움과 입시의 공존이 가능할까. 늘 딜레마처럼 안고 있는 문제였다. ‘배움과 입시가 같이 갈 수 있고, 수업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배움이 있는 수업이다.(p80)’ 교사라면 누구나 안고 있을 고민을 이렇게 시원하게 터뜨려 주니 속이 후련했다.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시험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배움과 입시를 서로 다른 갈래 길에 세우고 있던 나는 학생들의 내신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배움 자체를 아예 수업에서 배제하고 있었던 거다. 내 수업이 기대고 있던 핑계가 허물어졌지만, 대신 저자의 문장을 통해 희망을 품게 되었다.

 

5년 전, 행성의 특징을 주제로 모둠별 공개수업을 한 적이 있다. 31명의 학급 학생보다 참관하는 교사 수가 더 많아 칠판 쪽을 제외한 교실의 세 면이 교사들로 포위된 채 진행되었던 수업이다. 심적으로 부담이 컸던 수업이라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다 끌어모아 겉에서 보기에는 찬란했던 수업이었다. 몇 번의 컨설팅 협의회로 내용도 보완해가며 몇 달 정도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모둠별 학생들은 행성별로 우주 뉴스, 가상 체험,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사전에 UCC를 쵤영하여 수업 시간에 시연하고, 과학송을 만들어서 현장에서 발표하는 모둠도 있었다. 수업 후 이어진 강평회에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를 도입했다며 반응은 꽤 좋았다.

학생들은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서 UCC를 촬영하며 미션을 수행하려는 열정을 보였고, 졸업 후 찾아와서도 모둠별로 준비했던 기억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고 수업을 했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하면 다양한 활동 장면을 보여줄까에만 몰입을 한 나머지 학생의 입장에서 얼마나 많은 배움이 일어났는지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때의 수업에서 의미 있는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내 수업에서 부족했던 것은 경계였다. 작년까지의 수업을 되돌아보면 일부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로 인해 간혹 소란해지는 분위기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경계가 있지만 존중이 있는 수업을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p105)’ 겉으로는 학생들을 존중한다고 말하며 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포기하고 좌절하는 마음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45분 내내 열심히 수업해서 뿌듯해했던 기억도 난다. 혼자만 신나서 떠들었던 내 모습이 학생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수업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모습보다는 학생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p42)’,‘가르침과 배움은 결코 함께 가지 않는다.(p149)’는 문장 앞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학생들에게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여백을 주었던가. 가끔 던지는 질문에서도 잠시를 못 참고 내가 먼저 냉큼 답을 말해버리기 일쑤였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학생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르칠 내용을 학생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159~160)’ 촌철살인의 문장에 세수도 안한 민낯을 들킨 이처럼 당혹스러웠다. 교사라서 알 수 있는 심리, 교사라서 할 수 있는 공감이었다. 학생의 시선에서 나는 어떤 교사였을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읽기 전과 후의 나를 달라지게 하는 책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찬사를 보내도 내 행동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내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책으로 분류된다. 이런 이유로 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는 매우 좋은 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아이들의 눈동자를 좇았다. 그들의 반응과 표정을 살폈다.

좋은 수업은 무의미한 교과 지식에 이름을 붙여 의미 있는 지식으로 바꿔주는 수업이다.(p180)’,‘교과 지식은 삶 속에서 복원되어야 한다.(p185)’,‘‘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해야 한다(p72)’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며 좋은 수업을 생각했다. 좋은 수업도 좋은 책처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수업을 받은 후에 학생들의 행동이나 인지나 감성이 달라졌다면 배움이 일어났다는 증거일 테니.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당장 내일의 수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기말고사가 끝나고 내일 할 수업을 구상한 것이 있는데 전부 다 바꿔보려 한다. ‘가르침에서 배움으로 기준을 바꾸니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지금이라도 달라지고 싶다. 수업에서 를 만나고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 좋은 수업을 상상하니 오랜만에 설렌다. 코끝이 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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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2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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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0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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