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몇 명의 힘이 필요할까. 거대한 시공간을 가늠한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필요할 듯한데 간혹 한 사람만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큰불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는 경우이다. 사소해 보이는 까닭에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훗날 선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하게 되는 최초의 점 같은 존재 말이다.

한 사람이란 말을 가만가만 음미하다 보면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떠오른다.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고 나서 한동안 뭉클했던 느낌이 생생했던 동화이다. 원작에 사용되었다는 사천여 개의 단어들은 빠르게 스며들어 마음을 무장해제 시켰다. 몽환적이었지만 실화인지 판타지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초반의 의구심은 마지막에 가서는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틀어 오십 년짜리 계획을 세운다는 건 얼마나 징한 의미인가. 남은 삶을 올인한 이의 힘이란 얼마나 깊이 있는 위대함을 품고 있는가.

뜬금없이 이 짧은 동화를 떠올린 건 <침묵의 봄>을 통해 전해지던 레이첼 카슨의 마음이 동화 속 주인공과 닮아서였다. 노인이 심은 나무 한 그루에서 숲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그녀의 책 한 권으로 변화를 겪은 세상의 모습과 겹쳐져서였다.

 

이 책은 토양과 물에 뿌려진 무분별한 살충제의 남용으로 파괴되어 가는 야생생물계의 실태를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기대감은 반반이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그만큼 재미있을까 싶다가도 몸에만 좋은 약일지도 몰라서였다. 책의 내용보다 이 점이 궁금했다. 20세기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는 유명세는 어느 쪽에 속할까.

카슨은 지구 곳곳에서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자연 파괴의 실상을 제시하고 그 원인을 거슬러 추적하며 고통받는 생태계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파헤치는 과정에서는 살충제의 기본 성분부터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나열한다. 연어처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 범인을 기어이 잡아낸다. 이 모든 사태가 인간 스스로 만들고 뿌려버린, 어쩌면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뿌려지고 있을지 모를 살충제에 맞닿아있음을 증명한다. ‘살충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한 편의 시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현장감이 긴박하게 와닿는다.

저자의 위대한 점은 서술 방식의 탁월함에 있다. 싫증이 나거나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인해 대중들은 내용에 쉽게 접근하게 된다. 화학적인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위해 약간의 기초 설명을 곁들이는 친절함도 보인다. 통계의 힘과 다양한 사례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많은 이들을 설득한다. 거대한 지렛대 하나로 지구를 들어올리겠다며 당당히 외친 아르키메데스의 패기를 닮은 그녀의 도전이 감탄스럽다.

 

식물의 집단 재배는 문제 발생의 시발점이다. 똑같은 작물들이 줄지어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 바이러스가 연상된다. 단세포 생물의 장점은 무한해 보이는 증식성에 있지만, 환경이 바뀌었을 때 전멸한다는 단점은 치명적이다. 먹이사슬로 연결된 1차 소비자의 대량 증식이 시작되면서 식물의 대량 전멸을 막기 위한 살충제의 대량 살포가 시작된다. 문제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곤충들의 내성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살충제의 생산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양으로 줄이도록 노력해보자는 것이다. 그녀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천적을 이용한 현명한 대안도 더불어 제시한다. 하지만 효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비행기로 살충제를 휘리릭 뿌려대거나 강물에 흘려보내는 조급한 인간들이 내성을 지닌 곤충에 빙의하여 여전히 나타난다.

우주 안에서의 지구는 닫혀있는 동그란 상자와 같다. 중력장 안에서 모든 물질은 지구 중심을 향해 당겨진다. , 공기, 땅덩어리까지도. 음식과 식수와 공기 속의 위험 물질은 닫혀있는 지구 안에서 돌고 돈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운명 공동체로 묶이는 이유이다.

숲의 아름다움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복사해 붙인 듯이 한 종류의 나무로만 이루어진 숲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연의 작품은 아니다. 그렇게도 다양했던 생물이 스러져간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빛을 뿜어내던 생명체의 운명이 인간으로 인해 도미노처럼 차례로 흔들리며 마지막에 서 있는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길거리 바위의 줄무늬를 볼 때면 가끔 아득할 때가 있다. 그 안에 담긴 시간을 상상하면서부터이다. 퇴적암을 볼 때면 암석이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에 압도당한다. 변성암처럼 갑작스러운 열과 압력이 작용했던 것도 아니고 화성암처럼 뜨거운 마그마가 굳어진 것도 아니다. 물렁물렁한 흙이 단단한 도자기로 완성되기까지는 불가마 속 뜨거움을 통과해야 하건만. 단지 알갱이가 쌓이는 주요 과정만으로 단단한 암석이 되다니. 퇴적 이후의 후속 과정에서도 뜨거움은 찾아볼 수 없다. 퇴적암은 물밑에서 주로 만들어지니까.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이 켜켜이 담겨있을까. 라르고의 속도로 움직이며 오로지 앞으로만 진행하는 맑고도 묵직한 속성이라니. 자연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묵묵히 흘러가는 시간의 직진성 때문이리라.

되돌릴 수 없는 살충제가 느린 시간에 실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면서 쌓이고 있다. 대량으로 살포되던 살충제에 대하여 읽으면서 암 치료제를 떠올린다. 암 환자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이유는 치료과정에서 암세포만 죽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는 세포도 파괴되어서라고 한다. 생물은 제각기 고유한 특성으로 존재하지만, 생명체로서의 동일한 속성도 분명히 있다. 벌레를 죽일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하면서 사람을 포함한 다른 동식물이 멀쩡하기를 바란다는 게 오히려 무모한 억지인 거다. 그 억지스러움이 자연의 역린을 건드린 걸까. 봄바람처럼 가뿐한 문장들이었는데 깊이 쌓인 내용의 무게추가 마음을 잡아당긴다.

 

1962년에 발간된 책이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유는 책 속에서 언급된 현상들이 지금까지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난 23일에는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온수를 쓰던 주민들이 기준치 8배의 페놀에 이상 반응을 일으켜 어려움을 겪는다는 뉴스 기사가 떴다. 1991년의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을 모티브로 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란 영화도 언급되었다. 처음에 인간은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몰랐을 수도 있다. 유해성이 알려진 다음에는 멈춰야 하는 것을. 인류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무모한 행위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침묵의 봄을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침묵하지 않았다. 남들이 침묵하며 주변만 바라보고 있을 때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의 모습을 전망했다. 인간이라 하여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줄 권리가 있는가. ‘방제법에 관해 열심히 연구를 해야겠지만 이 방제법이 생물학적 관점이어야지 화학적 관점이어서는 안 된다. (중략)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된다.(p304, 브리예르 박사)’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닐지라도 우리 대다수는 스러져가는 생명을 그저 바라만 보는 방관자로 있다. 내가 그런 물질을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적어도 내가 뿌린 것은 아니니까, 당장 내 입으로 들어가지는 않으니까, 곤충이나 식물은 말이 없으니까.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면서도 진실을 외면하는 수많은 군중이 된다. 당연한 질문을 외면하며 아이로서의 순수한 눈을 감아버린 건 아닌지. 침묵하는 방관자는 암묵적으로 가해자의 편임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p21, 2번째 단락 밑에서 2번째 줄: 혼돈을 불어오기 위해 ~불러오기~

p56, 밑에서 5번째 줄: 활동이 무력화한다. ~무력화된다.

p131, 첫째 줄: 집중적인 살포가 일상화했다. ~일상화됐다.

p239, 5번째 줄: 심상치 않는 위협이 ~않은~

p244, 7번째 줄: 체세포의 수가 염색체의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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