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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배운 지가 삼십 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후렴구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백제 여인의 마음을 노래했다는 <정읍사>. 정작 본문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런 뜻도 없다는 이 문구가 10대 후반의 나에게 꽤 인상 깊었나 보다.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문장들을 가만가만 발음하다 보면 여인의 마음이 어땠을지 막연하나마 알 것 같았달까.
가끔 이런 구절을 만날 때가 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데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은 문장 말이다. 이 책의 많은 문장이 그랬다.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주술 관계도 안 맞고 당최 문맥도 이상한 문장들을 읽는 과정이 왜 그리 먹먹했는지. 주인공들이 방백을 하듯 마침표도 없이 이어진 문장들이, 혼잣말인 듯 노랫말인 듯 중얼거리는 문장들이 질척한 밀가루 풀처럼 마음에 들러붙었던 시간이었다.
노예제에 희생된 흑인들과 얽힌 남북전쟁 전후, ‘육천만 명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람들의 이야기. 1/n의 이야기이지만 n 전체를 대변하듯 묵직하다. 그 안에 담긴 심리 묘사와 서정성의 무게이리라. 인물의 내면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현실과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로 종횡무진하는 데 비하면 서사 구조는 단순하다. 여주인공 세서와 딸 덴버가 사는 124번지에 20여 년 전 노예 농장 ‘스위트홈’에서 함께 일하던 남자 폴 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빌러비드’란 이름을 지닌 미스터리 아가씨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밀당 이야기이다.
18년 전, 도망친 여자 노예 세서는 노예 사냥꾼에게 딸 아이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아이의 목을 톱니로 긋는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사건 전후로 펼쳐지는 등장인물 내면의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펼쳐진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Beloved'는 어머니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이의 묘비에 새겨넣은 글자로 ‘사랑받는 이’라는 의미이다. 소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캐서린의 망령처럼 ‘빌러비드’라는 비현실적인 인물은 그 어머니를 찾아간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인물의 심리 묘사는 소름이 끼치도록 생생하다. 죽은 딸 ‘빌러비드’와 살아남은 딸 ‘덴버’는 어머니를 중심축으로 사랑의 쟁탈전이라도 벌이듯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에도 빛깔이 있다면 이들 사이의 감정은 무슨 색으로 구현이 될까? 자식들이 부모를 바라보는 감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예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자식을 죽일 정도의 사랑은 어느 정도의 무게였을까. 몸을 주는 대가로 죽은 아이의 묘비에 새길 이름 4글자를 얻고자 했던 모성은 어느 정도의 깊이였을까. 짙다. 너무 짙다. 그 빛깔을 표현할 만한 세상의 언어가 너무 옅다.
단순히 흑인과 백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자행한 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을 동물처럼 여기던, 인간이라는 탈을 쓴 동물의 잔혹성 그 너머로 드러나지 않았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일까 싶은 의구심에 한이 어린 느낌표를 찍어주는 이야기이다.
작가의 필체는 과감하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기억하고 싶지 않음에도 선명하게 각인된 내면의 이야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 기개가 힘차서 당황스럽다. 알 듯 말 듯 몽글몽글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추임새인 듯 거드는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배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대조적으로 투명수채화를 보는 듯 한들한들하다. 이 모든 분위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다 읽고 나면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느낌표처럼 짙은 무게추 하나가 심장 끝에 매달려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
읽고 나서 잠시 밖을 나오니 나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느낌이 달랐다. 마스크를 살짝 벗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공기가 새로웠고,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걸음이 달 표면을 걷는 우주인인 양 가벼웠다. 두 팔을 휘휘 저어보았다. 나의 몸을 나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온전한 자유가 새삼스러웠다. 당연한 듯 누리는 이 행위가, 자유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일상적인 몸짓이 과거의 어떤 이들에게는 절실한 바람이었음을 생각하니 문득 시큰해졌다.
잊기 위해 기억하는 심연의 아픔을 지닌 이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은 감히 하지 못하겠다. 내일로 한 발 걸어가기 위해 고통스런 어제를 응시해야 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겸허히 기억하겠다 말할 뿐. 후~ 나의 언어가 너무 가볍다.